2019년 LEC 스프링 스플릿에서 로그는 2승 16패로 최하위를 기록합니다. 당시의 주전 로스터는, 프로핏 - 키키스 - 센컥스 - 히큐 - 와디드 였습니다. 처음 짜여질 때부터 경쟁력이 부족한 로스터이기도 했고, 까보니 더 별로였습니다. 팀의 축인 미드 원딜이 많은 비판을 받았고, 그렇다고 다른 포지션 선수들이 잘했다기도 어렵고. 당시의 로그는 4대 메이저 지역을 통틀어 가장 약한 팀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무려 진에어, 100도둑, VG와 비교해서도 당당하게 '우리가 더 막장인데?' 주장할 수 있는 팀이었으니..
최악의 스프링 스플릿을 보낸 후 로그는 강도높은 리빌딩을 준비합니다. 키키스, 센컥스, 와디드를 떠나보냈고, 코칭스태프를 정비했습니다. 그리고 2군 팀의 선수들을 전원 1군으로 승격시키며 완전히 새로운 팀으로 거듭납니다. (단, 서머 스플릿에도 프로핏이 당분간은 계속 주전 탑 라이너로 출장했기에 핀은 2군 스케줄을 계속 소화했습니다)
로그 1군 팀이 LEC 무대에서 두들겨 맞는 동안, 2군 팀은 폴란드 울트라리가에서 절대적인 강팀으로 군림하고 우승도 차지했습니다. 물론 수준은 낮은 리그입니다만, 때로는 게임의 수준보다는 승리의 경험 자체가 더 소중할 때도 있죠.
마스터즈에서는 조별리그에서 프나틱 2군팀과 미스핏츠 2군팀을 만나 성과를 내지 못하고 탈락합니다만, 결과와 무관하게 선수단에 어리고 재능있는 솔랭전사들이 포진해 있었기에 잠재력만큼은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탑라이너 핀. 99년생. 'Blomster Finn' 이라는 아이디로 서유럽 솔랭 최상위권에서 이름을 떨쳤습니다. 클레드 장인으로도 이름이 높았고, 어지간한 칼챔들은 다 기막히게 잘 소화하는 선수. 시즌 개막 전에도 영건 3인방 중 팬들의 기대치가 가장 높았던 선수이기도 합니다.
정글러 인스파이어드. 02년생. 어린 나이 그 자체가 최고의 강점입니다. 이미 솔랭에서 1~2년 전부터 한국식으로 말하면 '미친 중딩'으로 소문은 파다했다고 합니다. 출전이 가능한 나이인 만 17세가 되자 마자 바로 콜업되었습니다.
미드라이너 라르센. 00년생. 학업을 마치기 위해 1군팀 합류를 조금 미뤘다가 서머 스플릿 콜업되었습니다. 2군 팀 경기 챙겨본다는 유럽 롤 팬들 사이에서는 차세대 미드 유망주로 진작부터 주목받았다고 합니다.
위의 멤버에 유럽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봇듀오 울라이트-밴더를 더한 것이 스프링 스플릿 로그의 2군팀이었고, 이 로스터가 그대로 서머 스플릿의 주력으로 활약했습니다.
상체의 3명은 리그 경험이 거의 없는 초짜들이었고, 바텀에서는 특히 울라이트가 기량 미달의 원딜로 굉장히 박한 평가를 받던 선수여서 기대치가 높지는 않았습니다. 어쨌든 시즌 중반까지 로그는 4승 8패를 기록하며 선전했습니다. 여기에서 프로핏이 벤치로 내려가고 핀이 주전으로 올라오면서 '본격적으로' 로그의 (구) 2군 팀 로스터가 풀 가동되기 시작한 이후, 로그는 3승 3패를 추가로 수확하며 7승 11패로 플레이오프 막차 탑승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바로 지난 주말 LEC의 확고한 3위팀으로 여겨지던 스플라이스를 상대로 압도적인 게임을 펼치며 아무도 예상치 못한 3:0 업셋에 성공, 4강 플레이오프 무대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포스트 퍽즈' 라르센
포스트 캡스로 불리는 리더(미스핏츠)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라르센은 CS 수급이나 라인전에서의 안정감 등 기본기 면에서 더 극찬받는 선수입니다. 그런 점에서 퍽즈에 비견되는 재능이기도 합니다. 선수 본인이 퍽즈를 우상이라고 밝힌 적도 있고.
프로스커린이 이번 플레이오프 해설 중에도 라르센의 CS 수급 능력, 라인전 차이를 벌리는 능력에 대해서 '과거의 이지훈을 떠올리게 한다'라고 코멘트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한국에서조차 화려하고 개인기 좋은 미드라이너들이 뜨는 추세이지, '이지훈 스타일' 의 미드 유망주는 오히려 찾아보기 힘든 점을 감안하면... 유럽에서 그런 스타일의 유망주가 등장한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감정기복이 적고 게임 안에서나 밖에서나 상당히 침착한 면모가 있음을 감안하면 그것도 비슷한 것 같기도..
지표상으로도 라인전 지표가 상당히 좋은 선수입니다. gol.gg 기준 15분 CS 앞선 경기 비율 77.8%, CS차이 +11.2, 골드차이 +130, 경험치 차이 +125. 로그의 바텀과, (프로핏이 뛴 기간의) 탑은 주도권을 쥐었던 경기가 거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 와중에 홀로 이 정도의 라인전 지표를 유지한 것은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칼리 류의 날랜 챔피언을 못 다루냐 하면 또 그런 것도 아닙니다. 기본 메카닉도 좋고, 텔레포트 각을 보거나 교전시 포지셔닝 등 운영에서의 센스도 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면 챔프폭이나 플레이 스타일 면에서 매우 유연하고 올라운더로서의 면모가 있습니다. 데뷔 시즌의 퍽즈가 아지르를 잘 다루는 만큼 르블랑도 기가 막히게 플레이했던 것처럼요. 프로겐 이야기도 나오는 선수인데, 이런 점에서는 프로겐보다 퍽즈에 더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스플라이스전에서 정규시즌 '유럽 2위 미드'까지도 거론되던 휴머노이드를 코르키와 아칼리로 번갈아 박살내버리며 1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시리즈 MVP를 수상했습니다. (여담으로 휴머노이드도 라르센과 똑같이 00년생의 선수입니다. 이번에는 삐끗했지만 오히려 지금까지는 라르센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줬다고 볼 수도..) 이번 서머의 루키 오브 더 스플릿 수상은 인스파이어드와의 팀 내 경쟁이 될 텐데, 라르센 쪽의 수상이 유력합니다.
인스파이어드와 핀
인스파이어드와 핀은 개인적으로는 솔랭전사들이라는 편견이 있어서인지 메카닉 위주의 선수들일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보니 손가락으로 씹어먹는 유형의 선수들이라고 하기보다는 똑똑하고 중반 이후의 플레이에서 더 빛이 나는 선수들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스파이어드는 개인적으로 기대가 아주 컸던 선수이고 나이를 감안하면 상당히 괜찮은 첫 스플릿을 보냈습니다. 다만 나이를 감안하지 않고 보면 그냥 평범한 스플릿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글러 입장에서 로그가 풀기 쉬운 팀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개인의 성장과 라인 개입 사이에서 확실한 갈피를 잡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폴란드 리그에서 인스파이어드가 미드의 라르센만 엄청 케어하고 봐 줬다는 말도 있긴 하던데, 아무튼 팀의 사이드라인이 약했던 만큼이나 인스파이어드 본인도 꼬이는 라인을 풀어내는 역량을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냥 라인에서 안 터지고 무난하게 가는 경기에서는, 특별히 흠 잡을데 없이 똑똑하게 게임을 푸는 선수이기도 합니다. 나잇대가 비슷해서 그런지 저는 캐니언 선수와 자주 비교하면서 보게 되었는데, 캐니언의 지난 스프링 스플릿과 비교하면 어느정도 유사점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포텐도 보이고 괜찮은 장면들도 나오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특별한 색깔 없이 무난한 정도? 스프링때 셀프메이드가 보여준 파괴력을 기대한다면 분명 그와는 좀 다른 스타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다만 캐니언이 이번 서머에서 그랬듯, 프로 적응을 거치면 터질 수 있을거라는 조짐이 분명 보이기는 합니다. 일단 나이가 깡패니까요.
핀은 라인전에서 프로핏에 비해 가지는 강점은 개인적으로 특별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라인전을 못하는 선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라인에서 우위 잡고 팰 수 있는 실력까지는 현재는 아닙니다. 인스파이어드가 신경써서 탑 봐주는 게임이 적기도 하고. 그렇지만 초반이 지나간 후에 교전과 한타에서 보이는 번뜩이는 센스, 포지셔닝, 과감함, 기막힌 스킬샷은 전혀 신인답지 않고 아주 뛰어납니다.
표본이 적지만, 좀 오바해서 말하자면, 한타는 LEC 탑솔들 중에 제일 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싸움에서 보이는 역량이 일품입니다. 솔랭 최상위권 출신 답게 핫한 챔피언들을 두루 잘 다루면서도, 클레드라는 무기도 있고.
그래서 라인전에서 힘만 좀 붙으면, 혹은 케어만 좀 더 들어가면(밴픽이든 인게임이든), 장래 유체탑 후보에 도전할 만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재능이 아닌가 싶습니다. 라르센이 어느 미드와 붙어서도 항상 라인전을 이길수는 없는거고, 팀 차원에서도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라인이 하나는 더 필요하니까요. 그럴 만한 손가락은 되는 선수기도 하고.
바텀 듀오
서머 스플릿 초에 로그와 미스핏츠의 게임이 있었고, 당시 울라이트-밴더가 한스사마-고릴라에게 끔찍할 정도로 탈탈 털렸습니다. 그 경기를 보면서 역시 바텀때문에 올해는 이 팀이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고, 저도 그랬지만,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서 울라이트는 버스 탈 정도의 원딜까지는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본래 클래스가 있던 선수인 밴더는 LEC 서폿 3대장(미키, 힐리생, 이그나)의 바로 뒤에 둘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을 되찾았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도 기본 라인전에서부터 경쟁력은 떨어집니다. 다만 최근의 모습만 놓고 보면, 작년 G2의 야난-와디드 봇듀오에 비해서는 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상대적인 실력이 좀 떨어질 뿐 현 메타가 요구하는 기본적인 챔프, 조합들을 얼추 다 소화할 수는 있으니까요.
울라이트는 선수 경력에 비해 성과가 초라한 선수지만, 밴더는 산전수전 다 겪은 선수이고 한때는 유럽을 대표하는 서포터 중 한 명이기도 했습니다. 서머 중반 이후 로그의 운영은 상당한 칭찬을 받고 있는데 그 운영에 밴더가 큰 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냥 보이는 부분만 봐도 이니시에이터 역할을 맡을 때나 로밍 상황에서의 플레이들을 보면 진짜 깔끔하게 망설임 없이 잘 합니다. 슈퍼플레이도 여럿 보여줬고요. 젊은 재능들의 중심을 잡아주는 베테랑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샌박의 조커와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밴더는 조커와 비교하면 프로 커리어가 훨씬 압도적이기도 하고.
묘한게 팀 분위기가 좋아지고 기세가 오르다 보니 그렇게 못한다고 욕먹고 구멍 취급받던 울라이트도 밥값 해주는 경기가 갈수록 늘긴 하더군요. 이런거 보면 좋은 팀에서 좋은 선수들과 함께할 수 있는 행운은 정말 복이다 싶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으며 그냥 커리어 끝났어도 이상하지 않았던 선수인데..
다음 샬케전이 중요한 검증의 장이 될 것 같습니다. 업셋-이그나를 상대로 라인전에서 안 터지고 버티면서 중반 이후에 제몫까지 해준다고 하면 그때는 평가를 달리 해야겠죠.
물론 장기적으로 보면 더 좋은 원딜과 함께한다면 훨씬 높이 올라갈 수 있는 팀인 것은 변함 없습니다. 비슷한 처지인 담원의 뉴클리어도 계속해서 비판에 시달리는 처지인데, 울라이트는 뉴클리어랑 비교해도 처진다고 보는게 맞는 선수라. 지금보다 원딜 비중이 더 커지는 메타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그런 점에서 지금의 로그는 메타의 수혜자이기도 하다고 봅니다)
이번주 토요일 새벽 1시로 예정되어 있는 로그와 샬케의 플레이오프 대진은, 무엇보다도 롤드컵 선발전 문제가 걸려 있어 더욱 중요한 경기입니다. 승자는 롤드컵 선발전 2라운드 진출, 패자는 아예 진출 실패. 만약 로그가 샬케까지 도장깨기에 성공한다면, 롤드컵에서 유럽의 미래를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됩니다.
서머 스플릿 동안 한국 용병 선수들은 대체로 부진을 겪었습니다. 아예 LEC 최악의 팀을 뽑을때 미드에 피레안, 정글에 모글리는 고정으로 들어갈 수준이었으니까. 피레안은 이미 시즌 중 제낙스로 교체되었고, 모글리의 자리는 다음 시즌 유망주인 스킨즈로 교체되는 것이 유력합니다. 마스터즈와 솔랭에서 검증받은 루키들이 치고올라오는 유럽의 세대교체 흐름에서는 한국 용병들의 자리도 자유롭지 않고, 다음 시즌 그 입지는 더욱 줄어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고 유럽이 중국, 북미처럼 큰 돈 써서 쿠로나 코어장전같은 한국의 특급 선수들을 들여올 수 있는 지역은 아니니까요.
그런 흐름에서 홀로 자유로웠으며, 놀라운 활약으로 샬케를 4강 무대로 이끄는 데에 최고 공헌을 한 선수들이 트릭과 이그나입니다. 이 베테랑들이 로그의 신예들을 무릎꿇리며 '아직은 너희들의 시대가 아니다'로 결론이 날지, 혹은 이 경기가 본격적인 LEC 세대교체의 신호탄이 될지, 걸린 것이 많은 만큼 매우 흥미로운 경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