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알 후세이니를 지도자로 선택한 값을 비싸게 치르긴 했으나 그들은 덤으로 이자까지 쳐야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전쟁에서 패하며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이 그들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나 쿠데타를 통해 이집트의 권력을 장악한 나세르는 대놓고 이들을 이용했습니다. 1차 중동전쟁 이후 나세르는 친소 노선을 걸으면서 이집트와 시리아는 소련의 지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지원받은 무기 중 일부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나눠줍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지는 무기와 탄약은 항상 부족했습니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그들에게 총과 탄약, 폭탄 정도만 주고 전차나 장갑차 같은 중장비를 주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상처를 주고 거슬리는 존재만 되라는 것이었죠. 그들에게 중장비와 큰 돈을 주게 된다면,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규합해 국가를 만들려 할 것이고 바로 그곳은 현재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가자지구와 요르단이 가졌던 웨스트뱅크 지역이 될 것은 분명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게릴라, 테러리스트로만 남길 원했던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아랍 형제들이라던 이집트, 시리아였습니다.
요르단에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상황이 더더욱 나빴습니다. 어찌되었던 목표했던 동예루살렘과 웨스트뱅크를 차지한 요르단과 압둘라 1세는 이 지역을 차지하자마자 태도를 바꿔버립니다. 요르단 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요르단 시민권을 발급받으라는 것이었죠. 여기에 49년에 압둘라 1세는 서예루살렘을 관리하던 모세 다얀 장군을 비롯한 이스라엘과 비밀 평화협상을 하다가 들켜 비난을 받고, 웨스트뱅크 병합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평화 회담을 결렬시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했던 것은 요르단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닌 독립적인 팔레스타인 국가를 원했기 때문이었죠. 실제로 이들은 이미 1차 중동전쟁 전부터 트랜스요르단이라는 압둘라 1세 치하에서 통치를 받다가 "알 나크바"를 맛봤기 때문에 압둘라 1세를 불신했습니다. 1951년 7월 20일 압둘라 1세는 손자인 후세인 빈 탈랄과 예루살렘의 알 아크사 모스크에 금요예배를 드리기 위해 참석합니다. 이 와중 21살의 팔레스타인 출신 재단사 견습생인 무스타파 아슈가 압둘라 1세에게 총격을 가합니다. 결국 압둘라 1세는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무스타파 아슈는 압둘라 1세의 손자인 후세인에게도 총격을 가하지만 후세인이 소지하고 있던 메달이 총알을 막아주면서 후세인은 목숨을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암살자인 무스타파 아슈는 그 자리에서 경호원들에게 사살당합니다.
요르단의 조사관들은 이 암살에 도살업자인 자카리야 우카가 암살을 직접 지시했고 이 위에는 카이로에 거주중인 엘텔 중령이 있으며, 여기에 아민 알 후세이니와 그 정치세력이 연관되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요르단 법정은 이들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하지만 요르단은 국내에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탄압하지는 않습니다. 당시 요르단의 국민구성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다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알 후세이니가 압둘라 1세 암살에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그가 주변국들에게는 팔레스타인 건에 있어서는 위험인물로 이미 찍혀있다는 것은 확실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제3차 중동전쟁, 즉 6일 전쟁은 주변 아랍 국가들의 대 이스라엘 적대감을 폭발하게 만듭니다. 같잖은 시오니즘 떨거지들에 2차 중동전 당시 군사적으로는 대패했지만 정치적으로 승리했던 아랍이었던 만큼 6일, 아니 단 3일만에 본진을 탈탈 털리고 시나이와 골란 고원을 빼앗긴 것은 자존심만 빼고 아무것도 없었던 아랍 연맹의 자존심마저 땅바닥에 패대기치고 짓이겨버린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랍 연맹은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을 건드리기는 곤란하니 또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이용하기로 합니다. 이미 1964년 아랍연맹 정상회담에서(사실상 나세르의 의지였겠을테고) 팔레스타인 해방과 독립(해줄생각은 단 1도 없지만 이스라엘을 공격할 소모품으로 쓸 명분은 있어야 하니까)을 위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창설합니다. 당연히 이들은 말이 팔레스타인 국가의 무장단체이긴 헀습니다만, 나세르는 그들에게 국가를 만들어 줄 생각은 단 1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꼭두각시로 이용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69년 야세르 아라파트가 PLO 의장이 된 이후로도 계속 이용만 당하고 아라파트는 이스라엘보다 "형제"라던 아랍 국가들에게 목숨을 더 위협받았습니다. 차라리 테러리스트 리더라는 평가는 그를 고평가 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그는 "깡패 두목" 소리를 들었습니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이미 1차 중동전쟁 이전부터 유대 민병대와 싸웠었고 1차 중동전쟁에 참전하려다가 교전지역 진입을 이집트군에게 거부당했고, 2차 중동전에서는 이집트 육군에서 소위 복무를 했던 전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런 깡패 두목 취급을 받았던 이유는 당시 아랍 세속주의 군부정권과 왕정이 가장 경계했던 무슬림 형제단에 소속되었었기 때문이었죠. 따라서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향력 확보 이외에도 아랍 정권들 입장에서는 그를 죽여야할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여기에 창설 초기 주변 국가에게 이용가치를 높이고 더 많은 지원을 받기 위해서 학교 통학버스에 폭탄을 던지고 자살폭탄 테러를 하는 등 되려 매우 강경한 투쟁 방식을 선택합니다.
여기에 PLO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요르단을 적으로 돌려버리는 실책을 저지르게 됩니다. 당시 요르단은 웨스트뱅크를 차지하면서 국내에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요르단 시민권을 줬는데, 요르단 국내의 기존 요르단 선주민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인구 구성에서 밀려버리는 현상이 발생해버립니다. 팔레스타인 인이 인구의 60%, 40% 미만의 선주민인 베두인, 2%가 체르케스와 체첸인이었습니다. 여기에 요르단 왕가인 하심 가문은 이 아라비아 반도 출신인 것도 요르단의 정세를 불안하게 문들었죠. 이러다보니 당시 왕인 후세인 1세는 이 상황을 "살기 아니면 죽기"라고 말할 정도였죠. PLO는 이집트에게는 무기지원을, 사우디에게 자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지원도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는 것보단 이스라엘에 들어가 테러 두어번 저지를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6일 전쟁 이후 아랍 연맹 국가들의 배후조종을 받았던 PLO의 테러에 진절머리가 난 이스라엘은 요르단 국경을 넘어 카마라 마을을 공격합니다. 정작 이러한 상황에서 피해를 입은 것은 PLO가 아닌 요르단 국민들이었고 PLO는 요르단 국내 깊숙히 도피했습니다. 이런 PLO의 행태는 결국 계속 요르단 국민과 요르단 군의 피해만 가중시키게 됩니다.
아라파트와 그 당파인 파타는 이런 활동으로 PLO의 주도권을 쥐게 되고 비슷한 시기에 창설된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 역시 시리아의 지원을 받아 항공기 하이재킹을 주로 일으키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입지를 테러리스트로 깎아내리고 있었습니다. 후세인 국왕은 이런식이라면 더이상 PLO의 국내 체류를 인정할 수 없다며 공격 금지를 명령했지만 당연하게 무시당합니다. 여기에 일부 요르단 장교들은 은근히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의 이스라엘 기습을 조장하고 눈감아주기도 했죠. 여기에 요르단 내 팔레스타인 난민캠프는 아예 요르단 치안조직과 군 조직의 영향력이 닿지않는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 되면서 PLO가 이 캠프를 장악합니다. 여기에 캠프에 검문소를 설치한뒤 요르단 시민들에게서 통행세를 갈취하거나 요르단 도시내에서 무장한채 지나다니면서 요르단 시민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68년 11월 견디다 못한 후세인 1세와 PLO사이에 이런 행위를 제어하는 합의안을 만들었지만 당연히 무시당합니다. 여기에 조직폭력단이 되서 차량을 탈취하고 돈과 물품을 강탈하며 요르단 군과 팔레스타인 민병대간 충돌이 심해지는 데다가 민병대가 요르단 군인을 죽인뒤에 그 시신의 목을 자른 뒤 그걸로 축구하는 일이 벌어지는 사건도 생깁니다. 그리고 요르단 왕가의 심기를 완전히 건드리는 일이 생기는데, 팔레스타인 민병대가 공공연하게 요르단 왕가의 권위를 부정하는 행동이나 집회를 주도하며 요르단을 전복시키려는 행동을 계속 조장합니다. 결국 70년 2월, 리처드 닉슨과 나세르와 회담하고 온 직후, 후세인 1세는 팔레스타인 민병대의 활동 제한 칙령을 내렸고 이에 반발한 팔레스타인 민병대는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요르단 군과 시가전을 벌여 이 시가전으로 3백명이 죽습니다.
결국 화가 난 후세인 1세는 이들을 전부 요르단에서 몰아내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6일 전쟁이 끝난 뒤에 67년 11월 22일 채택된 유엔 안보리 242호 결의안, 즉 이스라엘이 6일 전쟁으로 차지한 모든 영토의 반환과 수에즈 운하 통행 자유 보장을 내용으로 한 결의안이 통과되자 PLO와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요르단 경내에서 밀어내버리기 시작합니다. PLO는 PLO대로 요르단과 끝장 보겠다며 강대강으로 충돌했고 여기에 나세르가 이들을 중재하려 했지만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중재자도 사라지며 충돌은 극에 달합니다. 여기에 PLO는 후세인 1세를 암살시도를 계속 이어나갔고 70년 9월에는 극강경론자인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 PFLP는 9월 6일에 각 지역에서 뉴욕으로 가던 민항기 4 대를 납치해 요르단 지르카 근교 사막에 있는 PLO의 세력권인 구 영국 도슨 공군기지 활주로 터에 끌고 간 다음에 PFLP의 구금된 조직원들을 인질과 교환하고,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인질과 항공기를 같이 폭파하겠다는 협박을 합니다. 결국 9월 12일 협상이 타결되며 인질 전원이 석방되었지만 PFLP는 이스라엘과 국제사회에 대한 항의라며 카이로로 가서 이미 폭파된 팬암93편을 제외한 3대를 폭파시켜버립니다.
완전히 열받은 후세인 1세는 결국 9월 15일 전국 계엄령을 선포하고, 요르단군은 전차를 끌고가 암만의 PLO 본부를 급습하는 동시에 요르단 내의 PLO 기지도 공격해 PLO를 전부 레바논과 시리아로 몰아내버립니다.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은 요르단이 형제들을 배신했고 우리는 이 배신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정작 본인들의 깽판짓거리로 요르단에서 쫓겨난 것을 "검은 9월"이라며 적반하장 태도로 나섭니다. 그리고 PFLP의 초과격분자들은 자신들을 검은 9월단이라고 말하면서 지속적으로 후세인 1세를 암살하려 하다 실패하자 71년 11월에 와스피탈 요르단 총리대신을 카이로에서 암살해버립니다. 당시 이스라엘 총리로 재임하던 골다 메이어는 나중에 이탈리아의 언론인인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이렇게 비꼽니다.
"압둘라 1세는 수년간 우리 이스라엘에 PLO를 몰아낼 힘이 없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정작 요르단은 왕궁이 위험해지자 PLO를 몰아내는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PLO가 넘어간 레바논이 PLO를 단속하라는 말을 그럴 힘이 없어서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무시한다면 우리가 직접 레바논으로 들어가 PLO를 직접 때려잡아주겠다. 그리고 아랍 국가들은 자기네 국가 안의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을 제어하지 못한다는 말에 1의 신뢰도 줄 수 없다."
그리고 피로 피를 씻어내는 일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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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는 최근 주수출품이 난민이라고 할정도로 내전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
이집트는 안그래도 내부 경제난이 심한데 여기에 코로나+러우전으로 식량난
요르단은 여기도 주변보다 쬐에끔 정치적 안정은 있으나 코로나로 박살난 관광산업
레바논은 내전만 안터졌다 뿐이지 거의 시리아급 지옥도...
이라크도 사실상 수니 시아 분쟁에 이란이 간접적으로 끼어들며 이라크 내전 시즌 2 찍기 직전...
(수정됨) 정말 개판의 시작이군요.. 얼마전 유튜브에서 이집트 국적을 가진 한국말 잘하던 분이 팔레스타인을 진심으로 걱정하기때문에 절대 이집트에 받을수 없다고 하던데..만주로 넘어간 조선인들을 비유하면서 국민은 영토에 남아서 국가를 지켜야한다고..그걸 왜 이집트인이 얘기하는지 바로 이해가 안가서 뭔소리인가 했습니다.
역사로 비추어 알았던 것 같네요. 받으면 정말 큰일 난다는 걸. 그리고 지금의 팔레스타인을 만드는데 일조하기도 했네요.
논외라 빼긴 했는데 요르단에 자리잡은 하심 왕가의 경우 기존 선주민들과 관계가 그리 깊지 않아서 통치할 국민으로 선택한게 국가라는 조직을 가져본적이 없는 가나안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가나안-팔레스타인 인들이 PLO를 조직하면서 이들의 정체성에 난입이 된겁니다. 사실 요르단은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고 소련의 지원을 받던 주변 아랍국가들과는 다르게 미영의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요르단 국왕인 후세인 1세와 압둘라 2세부자는 샌드허스트 출신)그리고 요르단은 군사규모는 작을지 몰라도 군사적 능력만큼은 이스라엘이 인정하는 만큼 강력했기 때문에 이런 양면 노선을 탔어도 주변국들이 무시하진 못했죠.
문제는 팔레스타인 인들이 들어간 데마다 최소 치안이 무너지는 행동을 해댄통에 각 국가 정부와 민중들어게 찍혔죠. 그나마 지금 이슬람권이 팔레스타인에 우호적인건 그 매운맛을 잊어버린 것도 일정부분 존재합니다.
잘봤습니다. 결국 한 나라를 만들어서 같이 잘살자는 그냥 안되는 일이고
땅을 나눠서 함께 살아라는 시도가 없진 않았지만 모두가 거부한 일이니까 답은 전쟁밖에 없네요.
전쟁하다가 지면 항복해야하는데 그것도 아니고.. 팔레스타인이 없어지는 것 말고는 현실적인 답이 없으려나요.
결국 주변 아랍국들이 팔레스타인에 대해 원하는건 게토화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 적당히 이스라엘 괴롭히면서 자국민들 불만의 배출구 역할이나 좀 해주다가 자연소멸(?)하는거죠. 결국 두 지구의 게토화는 이스라엘뿐만이 아니라 주변국들도 모두 원하는 바라 봐야겠죠...그 지구의 거주민들이 밖으로 나오면 어떻게 되는지를 본문의 요르단과 다음글의 레바논을 통해 똑똑히 본 이상, 국민들은 몰라도 통치자들은 철저히 이들을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