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4/02/12 00:33:57
Name 고흐의해바라기
Subject [일반] 설날을 맞아 써보는 나의 남편 이야기
1.
남편은 무르다.
내가 뭘 먹자 하면 싫다고 하는 법이 좀처럼 없다.
내가 뭘 사고 싶다고 하면 말리는 법이 없다.
입히지도 않을 로아 아바타가 몇 개인지 셀 수 없지만
그럼에도 매번 로얄크리 충전하고 싶다 하면 얼른 사라고 한다.
아묻따 사주는 대로 입고 신는다. 그래도 가만히 지켜보면 마음에 드는 건 저러다 닳겠다 싶을 때까지 주구장창 입고 신는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투정하는 법이 없지만, 입거나 신지는 않아 관찰 끝에 물어보면 그제사 이유를 말해준다.
순한 건지 내가 어려워서 말을 못하는 건지 종종 헷갈릴 때도 있지만
나랑 싸울 때를 생각해보면 후자는 아닌 것 같아 다행이다 싶다.

2.
남편은 단호하다.
어쩌다 한번 친정엄마를 보러 가는 괴롭고 먼 길을
무릎뼈가 부러져도 다리가 저려와도 어떻게든 운전을 해 준다.
내가 지보다 면허를 2년은 먼저 따고 연수도 내가 시켜줬는데...
위아래가 없어졌는지 운전은 잘하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천오백킬로를 혼자서 운전한다.
꼬우면 힘센 사람이 운전대 잡으면 된다는데, 단호한데 얍삽하기까지 한다.
마음이 힘든 사람이 쉬어야 한다지만 매번 고맙고 미안하다.
이 다음의 귀경길은 내 마음이 좀더 편해지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3.
남편은 게임을 좋아한다.
게임을 못하게 하는 여자를 만날 거면 결혼을 하지 않았을 거라 한다.
때로는 게임한테 지는 마음이 들어 서운할 때도 있지만
잘못된 말은 아니라서 반박할 수가 없다.
그렇게 게임이 좋으면 현질도 좀 해가면서 하라 해도 맨날 인게임 골드를 모아 전설아바타만 산다.
요즘은 자꾸 날 검은사막으로 꼬셔서 못이기는 척 하고 있는데 재미없어 하는 걸 오늘 들켰다.

4.
남편은 당뇨 환자다.
사실 몇 년 전부터 증세가 있었는데 본인이 인정하기 싫었다고 한다.
결국 몇 달 사이 바짝 말라버린 몸으로 간 건강검진에서
어마어마한 당화혈색소와 공복혈당수치에 의사가 놀라 바로 전화해서 입원을 권유했고
입원은 하지 않았지만, 퇴사하고 입원한 것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다행히 한 달 만에 빠르게 차도가 올라오고 있다.
그렇게 방탕한 식생활을 오랜 시간 했음에도 간과 신장은 건강하다길래 인간 드루이드 답다 했다.
식이, 운동만큼 스트레스관리가 혈당조절에 중요하다고 큰 소리 치더니
설날을 맞아 간 시댁에서 어머님의 앞뒤가 다른 잔소리에 욱해버린 며느리와
그 모습을 보고 기가 막힌 어머님 사이에서 새색시마냥 곱게 말하는 남편이 대견하기도 하고
많이 힘들었겠지 싶어 보답하고자 어제보다 검은사막을 열심히 하는 나.
남편이 즐거워하는 모습이 좋으니까 난 오늘도 졸면서 미스틱을 키우고
각성 자이언트가 얼마나 재미있어 보이는 지 같이 알아 봐준다.
하지만 내일은 로아 주간리셋 전날이니, 상노탑은 돌자고 조용히 꼬셔야겠다.

5.
남편은 대문자F다.
T의 연애 유튜브를 보며 맞장구치는 나를 공감하지 못하는 남편과
그런 남편에게 넌 왜 모든 것에 공감을 못하냐며 F의 연애를 보여주자 조용히 지켜본다.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만남을 이어온 걸까.
첫 만남에 둘이 같은 카페모카를 시켜서 인연인가 했지만
남편은 휘핑크림을 빼달라 하고, 난 그 휘핑을 내 꺼에 같이 얹어 달라 했을 때
취향과 성향이 이렇게도 다를 수 있음을 눈치 챘어야 하는데
팍팍하게 살던 나에게 상상 그 이상의 다정함을 보여준 게 잘못이다.
이젠 너무 멀리 와버렸다.
여전히 같이 즐길 영화가 없어 연례행사처럼 극장을 가고
게임만 했다 하면 하루가 멀다 하고 피터지게 싸우고
운전을 했다 하면 서로에게 제발 자라고 한다.
그래도 둘 다 각자의 종교에 적만 뒀지 안가는 거 똑같고 헌금 아까워 하고
같이 술 한 잔 기울이며 욕하는 정치인도 같아서
mbti고 나발이고 서로 할 말 다 하며 살아도 가정의 평화가 유지되는 것 같다.

6.
남편의 유튜브 알고리즘이 변했다.
무한도전, 박병진용사, 각종 게임유튜브로 점철됐던 그의 알고리즘에
당뇨 관리, 좋은 마음을 갖는 법 이런 썸네일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보다 짜게 먹고 달게 먹고 많이 먹고 몰아서 먹던 못된 습관을 가졌던 남편은
나의 식습관을 감히 코칭하고, 그 좋아하던 저녁 반주를 끊었다.
어제보다 조금 더 건강하고 덜 울고 더 웃으면 되지. 
이런 말을 수십 수백 번 반복하는 꼰대같은 내 말을
운이 좋으면 살아갈 시간이 살아온 만큼 정도만 남은, 인생의 물리적, 의학적 변곡점을 돌면서
어찌됐건 저찌됐건 이제사 조금씩 들어주기 시작한 남편에게 고마움을 남기며 글을 맺는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변명의 가격
24/02/12 00:43
수정 아이콘
남편분이 세월의 일격을 부드럽게 튕겨내는 중이시네요.
고흐의해바라기
24/02/12 08:50
수정 아이콘
나름 잘 하고 있는 것 같아유
이민들레
24/02/12 00:50
수정 아이콘
무르지만 단호하고, F이지만 공감못하는 남편이시군요.
고흐의해바라기
24/02/12 08:50
수정 아이콘
정확합니다
한 여름의 봄
24/02/12 02:51
수정 아이콘
부부가 아주 귀엽군요...
고흐의해바라기
24/02/12 08:50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찡긋 (다리턱 벅벅 긁으며)
서귀포스포츠클럽
24/02/12 03:46
수정 아이콘
퇴사하셨군요! 부럽다!!
고흐의해바라기
24/02/12 08:50
수정 아이콘
진짜 부럽습니다 흑흑크크크
24/02/12 06:14
수정 아이콘
에.. 1500km면 어디인가요.. 왕복이어도 상당한 거리인데.. (물론 T입니다)
고흐의해바라기
24/02/12 08:51
수정 아이콘
경남 구석탱이 왕복에 중간에 어디어디 들르면 대충 그 정도 찍더라구요
24/02/12 07:32
수정 아이콘
오히려 달라서 끌리신겁니다 서로의 다름이 존재하니까 똑같으면 오히려 덜끌릴 가능성이 좀 높긴해요 크크
고흐의해바라기
24/02/12 08:52
수정 아이콘
머리론 이해하는데 가끔씩은 이리 달라도 되나! 할 때가 있습니다
스스즈
24/02/12 08:27
수정 아이콘
선생님은 행운아...
고흐의해바라기
24/02/12 08:52
수정 아이콘
동의합니다
소이밀크러버
24/02/12 09:05
수정 아이콘
재밌게 봤어요!
The Normal One
24/02/12 09:27
수정 아이콘
따뜻한 글 감사합니다. 글 중간에 조금 슬픈 내용이 있어 별거아니지만 제가 제일 효과 봤다고 생각하는 식단 추천해드립니다.
1. 견과류(저는 아몬드, 호두, 땅콩을 한줌씩 넣습니다.)
2. 크림치즈 한 숟가락
3. 전자렌지 1분
4. 블루베리 한줌을 넣고 녹은 크림치즈를 견과류와 함께 섞어줌
5. 샐러드 야채
6. 브로콜리(5~6개)
7. 방울토마토(5~6개)

이렇게 담은 뒤 번호의 역순으로(7번부터 1번으로) 먹는다는 느낌으로 드시면 됩니다.
저는 거의 무탄수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걸로 효과보고 매일 아침은 무조건 저것만 먹습니다.
사람마다 효과가 다 다르겠지만 저도 관리를 해보니 결국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을 실험해가며 찾아야 하더라고요..
화이팅입니다.
록타이트
24/02/12 16:40
수정 아이콘
오오 저도 지방간 판정받고 식단할 떄 거의 이거랑 똑같이했습니다. 여기에 그릭요거트, 아보카도만 추가했어요.
그리고 저는 무탄수보다는 저탄수로 갔어서 퀵오트밀도 많이 먹었습니다.
고흐의해바라기
24/02/13 00:41
수정 아이콘
식단 소개 감사합니다
24/02/12 10:57
수정 아이콘
좋은 결혼바이럴이네요 훈훈합니당
고흐의해바라기
24/02/13 00:41
수정 아이콘
아 근데 꼭 결혼은 필수가 아닙니다 흐
Asterios
24/02/12 11:12
수정 아이콘
두 분 건강하고 행복하셨으면 좋겠네요 흐흐
고흐의해바라기
24/02/13 00:41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Karmotrine
24/02/12 13:31
수정 아이콘
재미있는걸 같이 공유하시니까 더 재미있는 생활이 되겠네요 취미공유 1그램도 안되고 비용소모로 서로 고나리질만 하는 경우도 보고 하니 크크
고흐의해바라기
24/02/13 00:42
수정 아이콘
공유는 좋은데 가끔씩 혼자이고 싶을 때도 있네요 흐흐
스타나라
24/02/12 15:34
수정 아이콘
행복하세요~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고흐의해바라기
24/02/13 00:42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24/02/12 20:25
수정 아이콘
혐오가 만연한 시대에 귀한 글입니다. 앞으로도 행복하시길 빌겠습니다.
고흐의해바라기
24/02/13 00:42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24/02/13 09:25
수정 아이콘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잘 살고 있다는 글을 잘 안 쓰고, 그나마 쓰더라도 사람들이 잘 안 읽죠.
요즘 보기 힘든 훈훈한 글 잘 읽었습니다~
고흐의해바라기
24/02/13 12:54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흐흐
24/02/13 09:50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고흐의해바라기
24/02/13 12:55
수정 아이콘
저도 감사합니다
24/02/13 11:03
수정 아이콘
좋은 글입니다. 이 글을 읽으며 아내한테 좀 잘해야겟다고 생각하게 되네요.
고흐의해바라기
24/02/13 12:54
수정 아이콘
이미 잘 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노둣돌
24/02/13 11:51
수정 아이콘
우리집하고 비슷한 듯 다르네요.
얼마되지도 않는 유산받은 공동명의 땅을 경작하는 문제로 촉발된 동서간의 다툼을 계기로 아예 시댁 출입을 끊어버린 마눌.
다툼과정에서 자기편을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까지 배척.
본인이 풀어야 될 문제라고 무관심으로 일관하자 극단적 선택을 암시.
최악의 상황은 피하자는 생각으로 억지로 내 잘못을 만들어 사과를 해서 다소 회복은 됐어도, 둘이 산책이라도 나갈 때면 내내 시댁비난을 들어야 하는 고역을 인내하기란 여간 힘든게 아니더군요.
고흐의해바라기
24/02/13 12:55
수정 아이콘
결혼은 집안대집안의 결합이라는 거 해보니까 실감납니다 힘드시겠어요 지혜로이 잘 해결되시길 바랍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0893 [일반] [역사] 고등학교 때 배운 화학은 틀렸다?! / 화학의 역사② 원소는 어떻게 결합할까? [8] Fig.17183 24/02/13 7183 14
100891 [일반] 상장 재시동 건 더본코리아 [56] Croove14646 24/02/13 14646 2
100890 [일반] 상가 투자는 신중하게 해야 되는 이유 [96] Leeka12638 24/02/13 12638 4
100887 [일반] 시흥의 열두 딸들 - 아낌없이 주는 시흥의 역사 (1) 시흥의 첫째 딸, 영등포 [49] 계층방정29942 24/02/12 29942 3
100886 [일반] 설날을 맞아 써보는 나의 남편 이야기 [36] 고흐의해바라기11641 24/02/12 11641 68
100884 [일반] 무거운폰 사용시 그립톡과 스트랩. S24 울트라 후기 [33] 코로나시즌12179 24/02/10 12179 4
100882 [일반] 최근에 읽은 책 정리(만화편)(2) [30] Kaestro9359 24/02/09 9359 8
100881 [일반] 우리는 올바로 인지하고 믿을 수 있을까 [17] 짬뽕순두부8859 24/02/09 8859 11
100879 [일반] 어쩌다보니 쓰는 집 문제 -조합은 왜그래? [40] 네?!8606 24/02/09 8606 5
100876 [일반] 최근에 읽은 책 정리(만화편)(1) [20] Kaestro8281 24/02/09 8281 6
100875 [일반] 제66회 그래미 어워드 수상자 [2] 김치찌개7521 24/02/09 7521 1
100873 [일반] 진료기록부 발급 대해 면허 반납을 들고 나온 수의사업계 [42] 맥스훼인11389 24/02/08 11389 11
100872 [일반] 열매의 구조 - 겉열매껍질, 가운데열매껍질, 안쪽열매껍질 (그리고 복숭아 씨앗은 일반쓰레기인 이유) [21] 계층방정7777 24/02/08 7777 13
100871 [일반] 향린이를 위한 향수 기초 가이드 [74] 잉차잉차12163 24/02/08 12163 30
100870 [일반] 누가 금연을 방해하는가? [42] 지그제프9137 24/02/08 9137 4
100869 [일반] 회사에서 설사를 지렸습니다 [145] 앗흥13914 24/02/08 13914 203
100868 [일반] 전 평범한 의사입니다. [43] Grundia13590 24/02/08 13590 74
100865 [일반] 레드벨벳의 '칠 킬' 커버 댄스를 촬영해 보았습니다. :) [10] 메존일각6578 24/02/07 6578 4
100864 [일반] 집에 SBS 세상에 이런일이 팀 촬영 온 썰+잡다한 근황 [19] SAS Tony Parker 12146 24/02/07 12146 11
100861 [일반] 원자단위까지 접근했다는 반도체 발전방향 [53] 어강됴리13252 24/02/06 13252 4
100860 [일반] [역사] 물질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 화학의 역사① [26] Fig.17344 24/02/06 7344 13
100857 [일반] 찰스 3세 국왕, 암 발견으로 공식 일정 중단 [57] 닭강정13774 24/02/06 13774 0
100856 [일반] 구축 다세대 주택이 터진 사례 [74] 네?!15779 24/02/05 15779 6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