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4/03/04 17:56:33
Name 무화
Link #1 https://blog.naver.com/seo_bg6170
Subject [일반] [전역] 다시 원점에서
읽기에 앞서

1. 본인의 군 경험은 전군을 통틀어 보았을 때 극히 일부에 불과하므로, 섣부른 일반화를 하지 않도록 주의를 당부드립니다.
2. 특히 해군의 문화와 시스템(편제/편성, 인사관리 등)은 육군의 그것과 상당히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3. 이 글은 군에 대한 비판이 아닌,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시점에서 본인의 소회를 푸는 글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

나는 2019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 해군장교로 임관하여 5년간 군 복무를 했으며, 2024년 2월 5년차 전역 선발 심의를 통과하여 군문을 나섰다.

사관학교 출신 장교는  해당 군 조직의 엘리트 계층으로서 장차 군을 이끌 인재로 인식된다. 사관생도 1명을 해군장교로 양성하는데 수 억원이 투입된다고 한다. 이들은 임관과 동시에 장기복무자로 분류, 의무복무기간으로 통상 10년이 주어지며 5년차에 전역을 신청할 기회를 부여받는다. 이때 해본 및 국방부의 심의를 거처 선발된(?) 자만이 전역할 수 있다. 의무복무기간이 남았음에도 전역을 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에 규정상 TO가 어느정도 정해져 있다. 따라서 5년차 전역은 신청한다고 해서 전역을 100%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비함정병과 장교로서 함정근무를 하지 않는 소위 [드라이 해군]이었다. 나는 병과임무의 특성상 많은 병사를 지휘해야하는 부대에서 근무해야하는 일이 많았다. 중위/대위 시절 중대장 임무를 수행하며 직접 부대를 지휘하고 관리하는데 있어 다양한 개인적/조직적 한계를 마주하고나서 많은 회의감을 느꼈다.

갈수록 복무부적응에 따른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장병의 비율은 늘어났고, 수적으로 절대 부족한 간부들(해군은 함정우선주의를 표방하기 때문에, 편제/편성 단계에서부터 해군 육상부대는 빈약한 편성을 가져갈 수밖에 없다)을 가지고 신상특이자를 관리하는 것에 우선적으로 시간과 자원을 쏟을 수밖에 없다보니, 나머지 대원에 대한 신상관리와 본연의 임무수행에 전념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렇게 임무수행을 뒤로하고 부대관리에 휘둘리는 동안 군인으로서의 보람과 자부심을 많이 잃었다. 업무보고보다 장병 사건사고를 정리한 보고서를 더 많이 작성하고, 전술토의보다 징계위원회를 더 많이 열어야하는 현실 속에서 '왜 이렇게 부대관리가 안되냐'라는 지휘관의 맹목적인 질책은 군생활에 대한 환멸감마저 느끼게 만들었다.

나는 병사를 군인으로서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금쪽이' 미성년자를 대하듯 어르고 달래며 임무수행하는 척 해야하고, 사건사고예방을 명목으로 다 큰 성인 병사를 간부가 일일이 인솔해야하고, 병사에게 처방된 향정약물을 간부가 가져다 관리해야하고, 병사 간 개인 채무관계를 신경써야 하고, 끊임없이 발생하는 병영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한 닳고 닳은 '특단의 대책'을 강요받고, 병사의 잘못이 고스란히 나의 잘못이 되는 현실 속에서 내가 장교인지 담임선생님인지 모르겠다며 자조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큰 자괴감을 느꼈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실무에서 바라본 군대는 내가 생각한 군대와는 전혀 다른 조직이었다. 작금의 군은 싸우는 법을 고민하고 싸우는 연습을 하는 곳이 아니라, 'OO의 날 행사', 필수 교육 이수, 필수 온라인 평가, 각종 행사, 민원 대응, 병사를 대상으로 한 양과실심의위원회와 징계위원회, 기타 사건사고 수습, 온갖 분야에서 치고 들어오는 상급부대의 검열/점검/평가 준비 등에 매몰되어 본분을 잊어버린 조직임을 느꼈다. 그러다보니 내가 군인으로서, 장교로서 조국수호의 신성한 임무를 수행한다는 보람과 명예심을 전혀 느낄 수 없었고, 이윽고 국가와 군을 위해 나를 헌신하고 싶다는 마음마저 사라졌다.

과거 코로나19 국면에서 군이 방역이라는 명목으로 장병들에게 강요한 각종 비인권적인 통제와 비효율적인 행정업무를 일선에서 직접 수행하며 느낀 실망감도 컸고, 잦은 당직근무와 장교로서 인원, 병기탄약, 예산, 보안 책임을 병행해서 짊어져야 하는 부담감 또한 컸다. 해군장교이다보니 1년~ 1년 6개월마다 터전을 옮겨야하고, 상시 부여받는 태세(공식적인 태세도 있지만, 지휘관으로서 언제든지 부대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하는 비공식적인 태세도 있었다) 부분도 삶에 있어 많은 제약과 스트레스를 가했다.

갈수록 간부의 사기는 떨어지고 있고, 간부/병을 막론하고 병역자원 부족이 이미 예견된 상황 속에서 나는 군이 위기감을 갖고 이에 대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경우 결국 희생되는 계층은 중간관리자 계층(대위 ~ 소령)임을, 그리고 그것이 내가 곧 감당하게 될 미래임을 당시 피부로 느꼈다.

선/후배 장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정신적으로 무너지고, 보람과 사명감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며 혹여 그것이 나의 말로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심적으로 괴로웠던 적이 많았다. 본인의 모든 삶을 헌신하고도 진급의 미래를 보장받지 못하는 선배장교들을 바라보며 내가 지금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최소한의 버팀목조차 얻지 못했다.

군은 그 조직원에게 모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나는 '희생'과 '헌신'이라는 가치가 이제는 무섭게 느껴진다. 이제 더이상 국가와 군에 헌신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요즘 윗세대에게 그렇게 욕을 먹는 MZ세대의 나약한 속마음에 불과한 것일까. 대한민국 어느 업계나 직장이나 다 힘들다. 내가 많은 것을 내려놓고 군을 떠난 이유는 '자괴감' 때문이다. 오로지 명예와 자부심으로 먹고 산다는 군인에게 자괴감이란 얼마나 치명적인가. [내 군생활은 담임선생님이라는 이상한 옷을 입고 대원들을 데려다 임무수행하는 척 하며 문제없다, 이상없다 외치는 하나의 연기에 불과했다]는 결론을 내 스스로 말하는 지금도 가슴 한 구석이 저리고 안타깝다.

나는 더이상 일에 맹목적으로 에너지를 쏟으려 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에너지를 쏟을 가치가 있는 것들을 탐색하는 노력이 여태 부족했던 것 같다. 조금 더 차분하게 마음을 먹고 내 인생에 쓸데없는 것들을 떼어낸 후에 새로운 길을 찾아보고 싶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스타나라
24/03/04 18:18
수정 아이콘
전역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새로운 길 탐색을 성공적으로 끝마치시길 기원합니다 : )
24/03/04 18:45
수정 아이콘
오랫동안 나라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건승하시길
24/03/04 18:46
수정 아이콘
Thank you for your service
분쇄기
24/03/04 20:31
수정 아이콘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Mini Maggit
24/03/04 20:36
수정 아이콘
수고많으셨습니다!
서린언니
24/03/04 21:37
수정 아이콘
고생 많으셨습니다!
SNOW_FFFF
24/03/04 21:44
수정 아이콘
전역 축하드립니다!!
헉 직업군이이셨군요
감사합니다. 이 말 하고 싶었습니다.
24/03/04 22:14
수정 아이콘
님같은 분이 군에 남아야하는데 안타깝네요. 앞으로도 건승하세요
지니팅커벨여행
24/03/05 21:44
수정 아이콘
고생많으셨네요.
이런 분위기가 점점 심해지면 갈려 나가는 건 초급간부들이겠죠.
피지알에서도 언젠가부터 군생활에 대해 농담을 못하게 되면서(ex. 예비군 더 빡세게 굴려야 됩니다. 제가 예비군 끝나서 그러는 건 아닙니다만.. 같은), 그리고 병사 월급 인상에 대해, 당연히 돈을 더 올려 줘야 되네, 최저시급도 안 받고 봉사했네 하는 표현들을 자주 보면서 제가 군생활 시절 가졌던 일말의 사명감 마저 무시당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번 학군장교 임관 인원 수가 48년만에 최저라는 기사를 얼마 전 봤는데, 초급장교들이 무너지고 이탈하면 국가 안보와 국방력에 적지 않은 타격를 줄 거라 앞으로가 걱정되기도 합니다.
이미 나오셨으니 사회에 잘 적응하시고 다른 의미있는 일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1071 [일반] 타오바오...좋아하세요? [60] RKSEL13682 24/03/04 13682 35
101070 [정치] 세계 각국의 의사 파업 현황과 한국의 의료 현실 [183] 티라노15898 24/03/04 15898 0
101069 [정치] 북한의 김씨왕조 세습이 이제 끝이 보이는거 같은 이유 [61] 보리야밥먹자15272 24/03/04 15272 0
101068 [정치] 여의도 의사집회 구경 소감: 의사집단도 좌경화되는 것일까요? [56] 홍철12213 24/03/04 12213 0
101067 [일반] [전역] 다시 원점에서 [9] 무화6334 24/03/04 6334 17
101066 [일반] 모아보는 개신교 소식 [8] SAS Tony Parker 7417 24/03/04 7417 4
101065 [정치] 정부 “이탈 전공의 7000명 면허정지 절차 돌입…처분 불가역적” [356] 카루오스24023 24/03/04 24023 0
101064 [일반] 왜 청소년기에는 보통 사진 찍는것을 많이 거부할까요? [57] lexial11364 24/03/04 11364 0
101063 [일반] 식기세척기 예찬 [77] 사람되고싶다12305 24/03/04 12305 6
101062 [일반] [뇌피셜주의] 빌린돈은 갚지마라 [135] 안군시대17570 24/03/03 17570 48
101061 [정치] 22대 총선 변경 선거구 분석 - 도편 - [25] DownTeamisDown10783 24/03/03 10783 0
101060 [정치] 하얼빈에서 시작된 3•1운동 [42] 체크카드11055 24/03/02 11055 0
101059 [일반] 좋아하는 JPOP 아티스트 셋 [19] 데갠8224 24/03/02 8224 1
101058 [일반] 환승연애 시즌2 과몰입 후에 적는 리뷰 [29] 하우스12440 24/03/01 12440 4
101057 [정치] 22대 총선 변경 선거구 분석 - 광역시편 - [24] DownTeamisDown12530 24/03/01 12530 0
101056 [일반] 우리는 악당들을 처벌할 수 있어야 한다 [42] 칭찬합시다.15120 24/02/29 15120 49
101055 [정치] 한국 기술 수준, 처음으로 중국에 추월 [160] 크레토스19603 24/02/29 19603 0
101054 [일반] <듄: 파트 2> -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영화적 경험.(노스포) [76] aDayInTheLife10876 24/02/29 10876 14
101053 [일반] 댓글을 정성스럽게 달면 안되네요. [36] 카랑카14909 24/02/28 14909 3
101052 [일반] 비트코인 전고점 돌파 [97] Endless Rain11401 24/02/28 11401 1
101051 [일반] 강남 20대 유명 DJ 만취 음주운전 치사사고 보완수사 결과 [19] Croove13575 24/02/28 13575 0
101050 [정치] 출산율 0.7 일때 나타나는 대한민국 인구구조의 변화.. ( feat. 통계청 ) [93] 마르키아르15408 24/02/28 15408 0
101049 [정치] 친문이 반발하는 것을 보니 임종석 컷오프는 아주 잘한 것 같습니다. [231] 홍철21430 24/02/28 21430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