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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3/10 11:56:27
Name meson
Subject [일반] [역사] 연개소문 최후의 전쟁, 최대의 승첩: 2. 당나라의 ‘수군혁명’ (수정됨)
이전 편: #1

당나라의 해양력

백제가 서해에서 나타난 13만 명의 당군에 의해 멸망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13만 명의 수군 이야기를 자주 들어서 익숙할 뿐, 사실 7세기에 13만+a 명을 한꺼번에 바다에 띄워서 적국의 수도를 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요. 규모 면에서 예를 들면, 1571년 레판토 해전 당시 신성동맹은 약 68,500명을 동원했고 오스만 제국은 약 77,000명을 동원했습니다.[2-1] 둘을 합쳐야만 삼국통일전쟁 당시 당나라 수군의 규모와 대략 비슷할 것입니다.

[2-1] 김응종, 「지중해문명의 종언 : 레판토해전을 중심으로」, 『군사』 88, 2013, 172-173쪽.


645년의 경우: 대함대의 전사(前史)

이러한 당나라의 해양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시작점은 1차 고당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큰 배를 한 척 건조하려면 인건비로만 2,236필의 비단이 소모되었다고 하는데,[2-2] 그럼에도 당나라는 이미 상당수의 수군을 운용하고 있었습니다. 644년에 편성된 당나라 수군의 전함은 500척이었고, 병력은 4만 3천 명이었습니다.[2-3] 이것으로 보자면 전함 한 척에는 평균적으로 약 86명이 탑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2] 『資治通鑑』 卷199, 貞觀 22年(648) 9月 壬寅, “大船一艘, 庸絹二千二百三十六匹.”
[2-3] 『册府元龜』 卷117 帝王部117 親征2 貞觀 18年 11月 조.


다만 문제는 645년에 고구려에서 철수하는 당 수군의 규모는 7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2-4] 여기에 더해 군량선도 644년에는 400척[2-5]이었다가 645년에 600척으로 증가[2-6]되어 나타납니다. 이 때문에 수군 인원이 최종적으로는 7만으로 늘어난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요.[2-7] 언제나 그렇듯 기록상의 혼란은 해석의 어려움을 야기합니다.

[2-4] 『册府元龜』 卷117 帝王部117 親征2 貞觀 19年 10月 조.
[2-5] 『資治通鑑』 卷197, 唐紀13, 太宗 貞觀 18年 7月 辛卯, “敕將作大監閻立德等詣洪・饒・江三州, 造船四百艘以載軍糧.”
[2-6] 『資治通鑑』 卷197, 唐紀13, 太宗 貞觀 19年 正月, “韋挺坐不先行視漕渠, 運米六百餘艘至盧思台側, 淺塞不能進, 械送洛陽 丁酉, 除名, 以將作少監李道裕代之.”
[2-7] 이민수, 「백제 멸망기 당의 신라 침공 계획」, 『한국고대사탐구』 33, 2019, 391쪽.


그런데 위 기록에 나타나는 군량선들이 반드시 수군 소속인 것은 아닙니다. 643년부터 645년 1월까지 600척의 군량선을 제작 및 운용한 사람은 위정(韋挺)이었는데, 그가 맡은 임무는 내륙 각지에서 유주로 운반된 미곡을 요수(遼水)로 수송하는 것이었습니다.[2-8] 이 임무가 지체되자, (아직 출병하기 전이었던) 당태종은 진노하여 위정을 파직하고 이도유(李道裕)를 대신 파견했죠.[2-9]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이 군량선들은 산동반도의 래주에 집결해 있던[2-10] 수군과는 별개로, 향후 요동으로 진군할 당태종 휘하 육군의 보급을 위해 운용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2-11]

[2-8] 서영교, 「唐太宗의 고구려 침공과 水軍」, 『동양학』 90, 2023, 5-6쪽.
[2-9] 『舊唐書』 卷77, 列傳27 韋挺傳.
[2-10] 서영교, 「唐太宗의 고구려 침공과 水軍」, 『동양학』 90, 2023, 10쪽.
[2-11] 서영교, 「唐太宗의 고구려 침공과 水軍」, 『동양학』 90, 2023, 9쪽.


물론 위와 같은 임무가 종료된 뒤에 600척의 군량선이 당 수군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습니다. 당시 장량(張亮) 휘하의 수군은 상륙전뿐 아니라 육군에 대한 보급까지 담당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2-12] 따라서 수군의 구성을 크게 보급선과 전함으로 구분했을 때, 644년에 비해 645년에 수군이 2만 7천여 명 증가된 것은 이러한 보급선의 증가 때문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죠. 그래서 최근에는 총 7만의 수군 중 전투병이 4만 3천이었던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2-13] 그렇다면 당시 전함의 수가 500여 척이었던 것은 인정할 수 있겠지요. 물론 군량선을 합하면 총 1,100여 척이었다고도 할 수 있고요.

[2-12] 문영철, 「645년 고구려-당 전쟁 당시 당의 水軍 운용 및 전략」, 『고구려발해연구』 77, 2023, 93쪽.
[2-13] 문영철, 「645년 고구려-당 전쟁 당시 당의 水軍 운용 및 전략」, 『고구려발해연구』 77, 2023, 95쪽.


당태종의 건함: 밑이 빠진 독

645년에 위와 같았던 당나라 수군은 15년 후인 660년 백제 멸망전 당시에는 1,900척의 함대와 13만 대군이 됩니다.[2-14] 표면적으로 보면 이와 같은 변화는 약 800척의 함선이 새로 추가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박의 사용 연한도 고려해야 합니다. 예컨대, 삼국지 오나라 멸망의 주역으로 유명한 왕준(王濬)은 건조한 지 7년이 되자 군선이 날로 파손되어 간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2-15] 또한 명나라 시기의 규정에 따르면, 소나무로 만든 선박은 5년마다 교체해야 하고 녹나무로 만든 선박은 7년마다 교체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2-16] 그렇다면 당나라 수군이 660년에 운용했던 1,900척의 배는 대부분 655년 이후에, 아무리 빨라도 653년에 새로 건조된 선박들일 것입니다.

[2-14] 서영교, 「당의 해양력과 고구려 - 당의 2차 침공(647년) 이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문화』 8, 2023, 306쪽.
[2-15] 『晉書』 卷42 王濬傳.
[2-16] 김석우, 「魏晉時期 水軍활동과 자연재해 -造船과 環境관계를 중심으로-」, 『중국고중세사연구』 24, 2010, 156-157쪽.


그런데 실제의 당태종은 이미 648년 6월부터 전면적인 고구려 침공을 결정하고 있었습니다.[2-17] 그래서 648년 7월부터 검남(사천)에서 배를 건조하기 시작했죠.[2-18] 그중 큰 것[大者]은 길이가 약 100척(尺)이었고, 너비는 그 절반이었다고 합니다.[2-19] 당나라 시기의 1척은 약 31.1cm이므로[2-20] 이때 만들어진 큰 배의 길이는 31.1m, 너비는 15.55m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대략 조선시대 판옥선 정도의 규모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

[2-17] 서영교, 「당의 해양력과 고구려 - 당의 2차 침공(647년) 이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문화』 8, 2023, 298쪽.
[2-18] 『資治通鑑』 卷199, 貞觀 22年(648) 6月-7月 조.
[2-19] 『資治通鑑』 卷199, 貞觀 22年(648) 7月 조.
[2-20] 김재효, 강연석, 고호경, 「전통적인 길이 척도 환산에 대한 역사ㆍ문화적 재고」, 『한국의사학회지』 23(2), 2010, 17쪽.


물론 시대상을 고려하면 전체 함대가 이런 대형 선박으로만 구성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2-21] 다만 수나라의 기록에서 함종 중 오아(五牙)가 800명을 태우고 황룡(黃龍)이 100명을 태운다고 되어 있는 점[2-22]은 단서가 됩니다. 이중 황룡선의 규모가 위에서 살펴본 1차 고당전쟁 당시 전함의 탑승인원과 유사하기도 하죠. 그러므로 당시 제작된 주력 함선은 100명가량이 탑승할 수 있는 크기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2-23]

[2-21] 김석우, 「魏晉時期 水軍활동과 자연재해 -造船과 環境관계를 중심으로-」, 『중국고중세사연구』 24, 2010, 151쪽.
[2-22] 『隋書』 卷48 楊素傳.
[2-23]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71쪽.

image
(수나라 시기 大艦으로 불렸던 함선 五牙의 상상도. 참고용 그림입니다.)

위와 같은 급격한 건함은 막대한 비용 지출과 인부들의 희생을 야기했습니다. 현지의 이민족[獠]들이 부역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죠.[2-24] 게다가 천부지국(天府之國)으로 일컬어지는 검남이었음에도 백성들이 집과 땅, 자식을 팔아야 할 만큼 경제적 타격이 심했다고 합니다.[2-25] 사실 정관정요에 수록된 충용(充容) 서씨(신당서 후비전에 따르면 이름은 서혜徐惠)의 상소를 보면 648년 당시 당나라는 전쟁, 궁전 건축, 조세, 요역, 군역 등 다양한 부담이 극심하여 민생이 피폐해진 상태였지요.[2-26]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당태종은 2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검남의 반란을 진압한 다음 계속해서 함선 건조를 추진했습니다.[2-27]

[2-24] 『新唐書』 卷220, 列傳145 東夷 高麗.
[2-25] 나동욱, 「640년대 후반 高句麗·唐 전쟁에 대한 검토」, 『군사』 72, 2009, 50쪽.
[2-26] 최진열, 「648년 唐太宗의 高句麗 정복 준비와 그 실상」, 『군사연구』 156, 2023, 148쪽.
[2-27]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71쪽.


당태종은 또한 648년 8월에 월주도독부(越州都督府), 무주(婺州), 홍주(洪州) 등에도 명을 내려 해선과 쌍방선 1,100척을 건조하도록 했습니다.[2-28] 이중 쌍방선은 화물선으로 추정됩니다.[2-29] 이때 무주는 월주도독부에 속한 10주 중에 포함되고 홍주도독부에는 8주가 소속되어 있으므로 18개 주가 여기에 동원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1,100척을 건조하는 만큼 18주의 노동력으로도 버거운 과업이었을 것입니다.[2-30] 그런데도 당태종은 648년 9월에 추가로 강남 12주에 명을 내려 해선 350척을 만들도록 했습니다.[2-31] 여기에는 강남 12주에서 징수되는 세액의 약 23%가 소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요.[2-32] 이렇게 해서 당태종이 건조한 선박을 합하면 1,450척 이상이 되며, 이는 한 척당 100명을 태울 경우 14만 5천 명을 실어 나를 수 있는 규모입니다.

[2-28] 『資治通鑑』 卷199, 貞觀 22年(648) 8月 丁酉(23일) 조.
[2-29] 서영교, 「당의 해양력과 고구려 - 당의 2차 침공(647년) 이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문화』 8, 2023, 299쪽.
[2-30] 최진열, 「648년 唐太宗의 高句麗 정복 준비와 그 실상」, 『군사연구』 156, 2023, 157-158쪽.
[2-31] 『冊府元龜』 卷985, 外臣部·征討4 貞觀 22년(648) 9월 조.
[2-32] 최진열, 「647-648년 唐의 ⾼句麗 침공과 인력ㆍ물자 동원」, 『비교중국연구』 4(2), 2023, 24쪽.


문제는 이러한 막대한 숫자의 함선이 실제 전쟁에 투입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당태종은 649년 5월 29일부로 사망했고, 수군 증강은 일단 중지되었습니다.[2-33] 그가 대대적으로 제작한 함선들은 648년으로부터 5~7년이 지난 뒤에는 대부분 폐기되었겠지요. 이로 인해 무의미하게 소모된 물자와 인력은 당나라의 국력에도 악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손실도 고구려를 정복하려는 당나라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2-33] 『資治通鑑』 卷199, 貞觀 23年(649) 5月 壬申(29일) 조.


당고종의 수군: 대상륙전이라는 혁명

649년 즉위한 당고종은 금세 선박 건조를 재개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때의 함선 제작은 심지어 더욱 규모가 확대되어 36주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2-34] 공교롭게도 송나라 시기에 선박을 건조한 관영 선장(船場)도 36곳이었는데, 995~997년에는 매년 3,337척을 생산했고 998~1021년에는 매년 2,916척을 생산했다고 합니다.[2-35] 물론 당고종 시기의 생산량이 반드시 이 정도였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규모였음은 틀림없죠.

[2-34]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73쪽.
[2-35] 김석우, 「魏晉時期 水軍활동과 자연재해 -造船과 環境관계를 중심으로-」, 『중국고중세사연구』 24, 2010, 157쪽.


당나라의 이 같은 어마어마한 건함 정책은 마침내 백제 멸망전에서 그 성과를 드러냈습니다. 당시 소정방의 당군은 산동반도의 래주에서 출발하여, 단 3일 만에 경기만에 위치한 덕물도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지요.[2-36] 1,900척의 대선단이 움직인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신속한 기동이었다고 할 만합니다. 이 함대에는 유인궤(劉仁軌)가 지휘한 보급선도 포함되어 있었는데,[2-37] 당군이 통상 총 병력의 3할을 치중병으로 운용했음을 고려하면[2-38] 약 570척이 보급선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때 나머지 1,330척이 전함으로 13만 명에 달하는 병력이 여기에 승선했다고 보면, 1척당 약 98명이 탑승한 셈이죠. 이것은 앞서 진행한 추정과 대체로 부합하는 규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2-36] 남정호, 「660년 당군과 신라군의 연합 작전에서의 몇 가지 문제」, 『역사와 담론』 87, 2018, 82쪽.
[2-37] 『資治通鑑』 卷200, 唐紀16 顯慶 5年.
[2-38] 이상훈, 「백제 멸망기 신라 수군의 성격과 역할」, 『한국고대사탐구』 27, 2017, 235쪽.


물론 백제에도 함대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650년 왜국에서 건조된 백제박(百濟舶)은 백제의 조선 기술을 반영한 선박으로 여겨지며, 약 120명의 인원을 중국까지 수송할 수 있었습니다.[2-39] 또한 태안반도의 당진포에는 백제의 수군 기지가 있었을 공산이 큽니다.[2-40] 그러나 이 수군 기지는 당군의 공격으로 인하여 파괴된 것으로 추정되며,[2-41] 백제 수군은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당진, 보령, 기벌포 등에서 패배한 것으로 보입니다.[2-42]

[2-39] 이재준, 「백제의 해양 환경과 수군 운용」, 『한국고대사탐구』 38, 2021, 53쪽.
[2-40] 이상훈, 「나당연합군의 군사전략과 백제 멸망」, 『역사와실학』 59, 2016, 63-65쪽.
[2-41] 이상훈, 「나당연합군의 군사전략과 백제 멸망」, 『역사와실학』 59, 2016, 67쪽.
[2-42] 이재준, 「백제의 해양 환경과 수군 운용」, 『한국고대사탐구』 38, 2021, 77쪽.


이러한 과정을 거쳐 당군 주력이 점차 남하한 다음 금강을 타고 올라오자, 당진을 위시한 서북방에 병력을 분산한 상태였던[2-43] 백제군은 끝없이 몰려오는 적군의 물결에 기함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2-43] 이상훈, 「나당연합군의 군사전략과 백제 멸망」, 『역사와실학』 59, 2016, 59쪽.


예컨대 구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소정방이 [금]강 동쪽 언덕으로 올라가 산 위에 진을 치고 크게 싸우는데, (그 와중에도) 돛을 올린 배들이 바다를 뒤덮었고, 연이어 이르렀다. 적군(백제군)이 패하여, 죽은 자가 수천이었고, 나머지는 스스로 흩어져 달아났다.
定方升東岸, 乘山而陣, 與之大戰, 揚帆蓋海, 相續而至. 賊師敗績, 死者數千人, 自餘奔散.
- 『구당서』 권83 소정방전 -
가히 ‘수군혁명’이라고 칭해도 될 법한 이러한 전술은 왜군이 백제부흥운동에 개입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2-44] 한반도가 평정되면 왜국도 당나라의 상륙작전이 가능한 사정거리에 놓이게 되는 까닭이죠. 왜국이 이후 서일본 일대에 대대적인 방위시설을 건설한 사실 역시 이러한 침공 우려와 직결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2-45]

[2-44] 서영교, 「당의 해양력과 고구려 - 당의 2차 침공(647년) 이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문화』 8, 2023, 307쪽.
[2-45] 송완범, 「'白村江싸움'과 倭 : 東아시아세계의 재편과 관련하여」, 『한국고대사연구』 45, 2007, 83쪽.


물론 당나라 함대에 수군으로 맞선 왜국의 시도는 백강 전투에서 400여 척의 배가 불타는 대패로 귀결되었습니다.[2-46] 당시 왜군은 수전에 있어서 당군보다 크게 미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2-47] 이처럼 백제 및 왜국의 사례로 미루어 볼 때, 660년대 동아시아에서 당나라 수군은 적수를 찾기 어려운 존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함대를 건설하는 데 들어간 물력을 고려한다면 그렇게 되지 않기도 꽤 어려웠겠지요.

[2-46] 『資治通鑑』 卷201, 龍朔 3年(663) 9月 戊午(8일) 조.
[2-47] 이재석, 「백촌강 전투의 史的 의의」, 『한국민족문화』 57, 2015, 162-163쪽.


661년의 고구려가 목전에서 상대해야 했던 군대는 바로 이러한 존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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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12:03
수정 아이콘
와... 이렇게 서술한 걸 보니까 대국의 위엄이긴 하네요. 그리고 새삼 고구려가 우리나라 역사적으로 군사적으로 최강을 상징할 수 밖에 없었다 싶습니다.
중국왕조가 바뀌도록 이렇게 오랜기간 승리하면서 버틴 나라였네요. 글 앞으로 계속 재밌게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4/03/10 12:10
수정 아이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하루에 하나씩 올려볼까 합니다.
24/03/10 13:08
수정 아이콘
저렇게 잘 싸운 나라도 결국 체급에 밀리니까 무너졌다는게, 앞으로도 중국을 상대하려면 잊지 말아야할 교훈(?)인거 같습니다.
닉네임을바꾸다
24/03/10 12:10
수정 아이콘
그야말로 저 당시엔 통일 중원왕조외엔 시도조차 못할짓이군요...크크
완전연소
24/03/10 12:43
수정 아이콘
자게에서 논문을 보는 느낌이네요. 흐흐
일단 추천하고 정독해보겠습니다.
24/03/10 13:08
수정 아이콘
잘 배우고 갑니다.
14년째도피중
24/03/10 16:30
수정 아이콘
흥미롭네요.
솔직히 아래 글만 봤을 때는 얼마나 품어둔 자료가 아까우면 저렇게 간을 보시는 걸까 생각도 했는데, 잘못했습니다. 크크크 충분히 그러실만 했네요. 이런 곳(?)에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덕택에 이 시기에 대한 몇 가지 의문이 풀렸습니다. 이렇게 편하게 받아먹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요. 특히 일본은 왜 저렇게 오버(?)를 떨었나, 건너간 백제인들이 과장을 섞어서 난리를 피운게 아닐까 했는데 충분히 겁먹을 만 했다는 구체적인 근거를 알게 되어 즐겁습니다. 현대로 치환하면 7,8년 단위로 재생산되는 미국의 태평양 함대라니 워우.
국수말은나라
24/03/11 00:54
수정 아이콘
수군의 규모를 논할때 1번이 여몽의 일본침공이고 2번이 정화의 대원정을 뽑는데 당군은 의외네요? 주유의 후손들인가 주로 강남에서 지어졌다고 하니 더더욱...
24/03/11 12:55
수정 아이콘
잘봤습니다 다음편도 기대됩니다
솔로몬의악몽
24/03/12 13:24
수정 아이콘
그야말로 옛날 버전의 천조국이로군요. 덜덜덜덜
클라이밍고양이
24/03/14 23:22
수정 아이콘
역사전공자로 즐겁게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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