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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2/01 21:12:54
Name 靑龍
Link #1 http://cafe.naver.com/sam10/318918
Subject [일반] 후한말 사대부 사회의 성격과 조조시기의 부화 (부제 : 공융의 부화사건)
후한말 사대부 사회의 성격과 조조시기의 부화 

조위시기 부화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연구자 중 이의춘은 조위 시기의 부화 사건을 모두 5회로 규정하였다. 그 중 조조시기에 일어났던 부화사건은 모두 세 건으로, 공융*위풍*조위曹偉가 각기 그 부화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우선 가장 첫번째 사건이었던 공융의 사건을 살펴보자. 


1) 공융의 부화사건

공융은 명성이 높았고 청재淸才를 가지고 있어 세간의 많은 이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태조는 여론의 비판이 있을 것을 두려워하여 명령을 내려 말했다. 

"태중태부 공융이 이미 그 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세인들은 그 허명만을 좇고, 소수의 사람만이 그 실질을 중시한다. 공융은 부염浮艶하고 괴이한 것을 만들기를 좋아하며 허황한 사기로 사람들을 현혹시켰으니 다시는 그러한 난속亂俗을 살피지 않게 한것이다...."

이글은 건안 13년(208), 공융이 처벌당한 이유를 적고 있다. 당시 부염하고 풍속을 어지럽혔다는 죄명을 받은 공융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이자 명사의 한 사람이었다. 노국 출신인 그는 공자의 20대 후손으로 학문으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고, 사대부들 안에서 명망을 얻었다. 헌제시기 장작대장과 소부를 관장하는 등 구경의 반열에 올랐으나 조조와의 갈등으로 처형당하였다. 
공융의 처형 원인을 살펴보면 전적으로 그 원인이 공융와 조조와의 갈등에서 비롯됨을 알수 있다. 실제로 공융이 처형될때까지의 상황을 살펴보면 둘은 첨예한 갈등 상태였다. 예를 들어 후한서에 기재되어있는 유표 토벌에 대해 헌제에게 올린 간언에는 당시 공융이 유표가 아닌 조조를 한조정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암암리에 드러나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유표와 같은 지방 할거 세력을 이용하여 조조를 압박하고자 하는 것을 알수 있다. 그래서 공융과 조조와의 관계를 다룬 많은 연구들은 대부분 공융과 조조의 관계를 처음부터 적대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흔히 공융이 한조정의 수호자로, 그를 숙청한 조조는 한왕조를 탈취한 간웅으로 묘사되는 것도 이와 관련있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공융과 조조의 관계를 처음부터 적대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듯하다. 양자를 적대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 당시 숙청 사대부와 조조와의 갈등을 한조의 수호와 새 왕조 개창의 갈등으로만 국한시킬수 있기 때문이다. 알려진 것과 같이 이미 후한말 곽태와 같이 전국적으로 여론몰이를 하고 있던 이들은 공공연하게 한왕조의 명운이 다 되었음을 말하고 다녔고 각 군벌의 막부에서는 새 왕조 개창의 계획들이 수립되었다. 전 사회적으로 한왕조가 부정되었고, 새로운 왕조에 대한 기대들이 생겨났다. 따라서 당시의 갈등을 왕조의 유지와 새 왕조 개창의 문제로만 국한시키는 것은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의 폭을 좁히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필자는 이 문제를 당고를 계기로 자율성을 획득한 사대부들과 새로운 개창 왕조의 황제권력이 새 국가 안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확대하려는 세력 투쟁의 한 모습으로 보고자 한다. 이렇게 볼 때만이 공융을 비롯하여 후술할 최염*모개의 숙청도 무리없이 해석할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공융과 조조의 관계를 처음부터 적대적으로 보는 입장에 대해 생각해보자. 공융이 장작대장을 거쳐 구경의 하나인 소부를 담당하게 되었던 시기는 헌제가 조조의 의해 허도로 옮겨졌던 때로 모든 정치적 권한이 조조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즉 이 시기 공융 선발에 대한 최종 결정권자는 조조라고 할 수 있다. 흔히 공융과 한왕실과의 친밀성이 거론되고 있는데, 정작 그를 중앙 정계로 발탁한 자는 조조였다. 그렇다면 조조는 왜 시종 자신에게 비판적이었던 공융을 발탁했을까? 
<공융이 조정에 들어온후 비로소 조조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일찍이 그가 북해의 상相으로 있을 당시 그의 부속좌승部屬左丞이 최대 군벌이었던 원소*조조와 관계를 맺으라고 한 것에 대해 이 두 사람이 모두 한실에 장차 위해를 끼칠 것이라고 여겨 관계맺지 않았다.>

공문거는 명성이 뛰어난 자로 장군께서 만일 이 사람과 원한을 맺으면 천하의 사인들이 떠날 것입니다. 세勢를 따라 그를 예우하여 천하에 널리 보이는 것만 못합니다. 

이 글은 당시 사대부들 안에서의 공융의 영향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조가 '여론의 비판이 있을 것을 두려워하'였다는 앞의 기사에서도 알수 있는 것처럼 공융에 대한 사대부들의 지지는 광범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공융이 당시 전국적으로 지역에 존재하고 있던 여러 사대부 모임 중에서도 북해 집단의 수장이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조조가 공자의 후예이며 박학다식하고, 사대부들에게 영향력마저 가지고 있는 공융을 자신의 막부에 초빙하고 싶어 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즉 조조는 공융의 영향 하에 있던 사대부 집단의 지지를 얻기 위해 공융을 발탁하고 등용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최염의 사례를 통해서도 추측할수 있다. 공융이 북해 집단의 수장이었던 것처럼, 최염은 기주 집단의 수장이었다. 조조는 원소의 세력권이었던 기주를 점령한후 원소의 수하였던 최염을 별가종사로 벽소한다. 최염을 통해 당해 지역 사대부들의 지지를 얻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조조는 자신의 막부에 초빙하고 싶어했던 공융을 살해해야만 했을까? 공융이 살해된 것에 대해서 와타나베 요시히로는 공융이 가지고 있던 한왕실과의 친밀성이 끝내 조조 자신의 권력찬탈에 방해가 되었고, 공융의 교우 집단 역시 위험 요소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필자는 이 두가지 이유 중에서도 공융의 교우 집단에 주목하고자 한다. 
조조의 권력장악과 관력하여 담서찬譚緖纘은 조조가 애초에 황제를 칭하지 못하고 패자覇者를 칭한 것은 한파漢派 사족들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 한의 부흥을 목적으로 하는 한파 사족들은 조조의 칭제를 막기 위해 언설이나 풍자, 혹은 폭력마저도 사용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한파로 분리된 자들은 순욱*공융*최염*모개*동승*경기*위풍 등이다. 이들은 모두 조조에 의해 건안 12년부터 17년, 21년, 22년에 걸쳐 처형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중 다수가 일군의 사대부들을 통솔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공융과 최염이 각각 북해 집단과 기주 집단을 이끌었던 것과 같이, 순욱이 영천 집단을 이끌고 있었던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공융은 당시 등용문으로 여겨지던 이응을 통해 당시 당인들과 광범위한 교류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북해에 있을때 이미 '큰 뜻을 품고 군현群賢들과 더불어 공을 세우고자'했던 점과 그가 특별히 임용한 자들이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그의 세력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이런 세력 집단이 조조에게는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혼란한 시기 군벌, 혹은 막주들은 서로 명사들을 초치하여 우대했다. 이것은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세력 기반을 다질수 있는 방안으로 여겨졌다. 당시 지역적 차이로 인해 상이한 정세 분석 능력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평가받던 명사들이 단순히 막부의 권위를 높이는 차원을 넘어서 세력 확장에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명사라는 이들이 후한말의 당인들과 연결된 이들이기에 그들은 국가권력을 근원으로 하지 않는 사대부들만의 자율적 질서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후한말 많은 막부에 투신하게 된 것은 자신들의 힘으로 유교국가를 재건설하고자 한 것으로 볼수 있을 것인데, 각자 최종적인 목표는 상이했을수도 있다. 예를 들어 혹자의 경우 제건하는 유교국가가 한왕실을 부흥시키는 것이었으며(공융), 혹자의 경우는 한왕실이 아니어도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왕조라면 상관없었을지도 모른다(순욱). 하지만 당시 명사들이란 후한말 당인들의 자율적 질서를 계승한 이들로 자신들의 자율성을 유지시킬수 있는 분권적인 유교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공통적인 목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명사들의 이상이라는 것은 독점적인 지위와 권력 행사를 이상으로 하는 군주 권력과 대립할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공융이 조조에게 숙청당하기 전의 기사를 확인하는 것으로 공융이 조조에게 어떤 부담을 주고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 해에 기근이 들고 전란이 발생하여 조조는 표를 올려 술을 빚고 마시는 것을 금하게 하고자 하였다. 공융은 여러차례 글로 조조와 다투었는데 업신여기고 오만한 언사가 많았다. 공융은 조조가 영웅을 칭하면서도 교활하고 간사함이 날이 갈수록 현저해지는 것을 보고 수차례 참지 못하고 말을 하였는데 정도가 지나쳐 대다수가 조조의 뜻에 저촉되었다...... 조조는 그가 건의하는 바가 점차 확대됨을 의심하여 더욱 그를 꺼리게 되었다....... 산양 치려가 뜻을 받들고 돌아가는 형세를 관찰하여 은밀히 법을 사용하여 공융을 면직시킬 것을 상주하였다. 이로 인하여 두 사람은 확실히 원수지간이 되었는데 조조가 짐짓 공융에게 서신을 보내 자극하며 말하였다. 
".................나는 신하가 되어 나아가서는 능히 해내를 교화시키지 못하고, 물러나서는 능히 덕을 세우고 사람들을 화합하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전사를 어루만져 키우고, 살신하여 국가를 위하고 부화교회浮華交會의 무리를 깨뜨리는 계책은 많이 가지고 있다."

위의 기사는 조조가 치려를 통해 공융을 탄핵하여 면직시킬때의 일을 적고 있다. 조조는 자신의 능력을 말하는 마지막 대목에서 부화의 무리를 파괴하는 것을 자신의 능력의 하나로 거론하고 있는데, 그는 공융을 부화의 무리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부화란 무엇인가? 일반적인 견해와 같이 현학으로 이해할수 있을까? 공자의 후예로 경학에 상당한 성취를 보이고 있었던 공융에 대해 경학에 힘쓰지 않았다고 할수 있을까? 공융이 기시당할때 그 죄명을 나열하는 기사를 살펴보면 어렴풋하게나마 부화의 내용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주奏를 올려 공융을 무고하여 말하였다. "소부 공융은 옛날 북해군에 있을때, 왕실이 평안하고 조용하지 못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무리를 규합하여 법도에 어긋나는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제일 처음으로 거론되는 죄는 '초합도중招合徒衆'이라고 하여 무리를 불러 모은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조조가 거론한 부화가 공융의 '무리를 이루는 것'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부화라는 것은 특정한 사상적 경향이라고 하기보다는 무리를 이루어 당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이러한 사대부들의 결합은 초기에는 조조에게 지지 세력의 획득이라는 현실적 필요에 부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하고자 했던 조조와 이들의 자율적인 질서는 결국 마찰할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잠시 최염의 사례를 살펴보자. 기주 사대부의 수장인 최염이 별가종사를 거쳐 담당하게 된 업무는 승상부의 서조연이었고 잠시 후 동조연을 거쳐, 위의 건국 후에는 상서를 담당하게 된다. 
<사료안에 나와있는 최염의 관직에 대한 서술은 다소 엇갈린다. 삼국지 위서 최염전에는 최염이 동서조연이었다고 하여 그가 동*서조연 모두를 역임했음만이 서술되어 그 순서는 알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자치통감에는 건안 13년 9월에 서조연이 먼저 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삼국지 위서 병원전에는 최염이 동조연으로 나와있다. 한편 삼국직관표를 통해서는 서조에 먼저 있었음을 확인할수 있었으나 서조연은 아니고 서조속으로 나오고, 건안 연간에는 징사를 담당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노필은 최염이 서조연→동조연→징사→상서→중위의 순으로 관직을 담당했다고 보았다.>
후한서 백관지를 보면 동*서조는 각각 '부사서용府史署用'과 '이천석장리의 승진과 제명 및 군리를 주관'한다 하여 당시 선거를 담당하였음을 알수 있다. 그는 장기간 모개와 더불어 선거를 장악했었다. 이것은 조조가 최염을 발탁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가늠하는데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된다. 바로 조조는 최염에게 선거를 담당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세력권내로 최염의 사대부 집단을 흡수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염은 조조의 세력이 확대되고, 구체적으로 왕조 개창의 계획이 수립되면서 조조와 갈등하게 되었다. 
최염의 인재 발탁 기준은 "비록 당시 세간에 이름을 날리고 있다해서 본本이 아닌 것을 행한다면 결코 등용되지 못하였다"고 나와있다. 이것은 '재능만 있으면 형수를 훔치고 뇌물을 받는 무리'라도 등용하겠다는 조조의 방침과는 대립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최염은 동조연을 담당하던 시기 당시 승상징사였던 병원과 의랑 장범 등과 평장評狀을 지어 개인적인 인물 품평을 하였다. 최염이 사대부들 안에서 자율적으로 행해진 인물 품평에 의해 관리를 선발했음은 자명하다. 이렇듯 공융과 마찬가지로 최염과 조조의 갈등은 다름아닌 최염의 존재 근거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호삼성이 말한 것처럼 최염의 발탁 이유가 최염의 숙청 이유가 된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공융과 최염 모두가 조조와의 갈등 수준을 넘어 조조의 권력과 대치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조의 "부화의 무리를 깨뜨리는 계책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공융의 집은 여전히 '빈객들로 날마다 문전성시를 이룬' 상태였고, 이로 인해 공융은 "자리에 빈객이 가득 차 있고, 술잔에 술이 비지 않았으니 내게는 아무 근심이 없다"고 감탄했다. 또한 조조의 공벌에 대해 칭송한 양훈의 표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제시한 후 노에로 처벌받아 복역하던 최염의 집 역시 "빈객이 왕래하여 그 문이 마치 장사하는 이의 집과 같았다"는 일화는 공융*최염 양자가 체제 밖에 존재하는 사대부 사회에 의탁하여 중앙 정부의 권력과 대치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공융 숙청의 이유가 최염전에 실려 있는 것도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구체적으로는 누가 공융의 집단인가를 확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는 다만 태사자와의 관계를 예로 들어 공융의 교류를 짐작해보려고 한다. 공융이 북해의 상으로 있을 당시 태사자는 동래군의 주조사로 있었다. 조정에 보내는 통장通章이 늦어진 문제로 요동에 피신해있던 태사자의 명성을 들은 공융은 여러차례 태사자의 고향에 사람을 보내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고 예물을 보냈다. 요동에서 돌아온 태사자에게 그의 어머니는 공융을 도울 것을 요구했고, 이후 태사자는 위기 상황에서 공융을 돕기 위해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러 가게 된다. 유비를 만난 태사자는 자신과 공융과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저는 동래군 사람으로 공융과는 친척도 아니며 동향도 아닙니다. 오직 명성과 지조로 서로 좋아하여 재앙을 나누고 근심을 함께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명성과 지조로 서로 연결된 것이 당시 공융 집단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공융만의 교류방법은 아니고 당시 사대부의 일반적인 교류 방법이었을 것이다. 태사자의 경우처럼 공융과 함께 하지 않고 손씨에게 중용된 경우도 있으나 위의 사례는 단적으로 공융의 교류를 보여준다고 할수 있다. 때문에 사대부 사회에 공융을 지지하거나 태사자와 같이 공융이 보여준 '은혜로써 돌봐준 의'에 보답해야 할 이들이 많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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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를 통해 제일 먼저 확인할수 있는 부화는 후한서 장제기에 등장한 것으로, 은둔자의 생활과 대비되는 세속적인 것 모두를 의미한다. 그러나 후한말이 되면 이 부화라는 개념은 좀더 분화되어 복잡해진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연구들은 후한말*조위초의 부화를 
① 당을 결성하여 교유하는 행위, 
② 경학에 힘쓰지 않는 행위, 
③ 허언虛言에 힘쓰며 세무世務에 무능한 것, 
④ 권위를 부정하는 참월과 방탕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후한말 부화의 의미라기보다는 부화가 뜻할수 있는 모든 내용이 다 열거된 것이라고 할수 있다. 
부화 자체가 실질을 잃은 것을 의미하는 만큼 사대부 본연의 자세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부화라고 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상의 내용은 특정 시기 부화의 내용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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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와 중국 고대 사회, 혜안, 홍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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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2/01 21:13
수정 아이콘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이라 퍼왔습니다.
문제가 되면 삭제하겠습니다.
닉네임을바꾸다
14/12/01 21:39
수정 아이콘
순간 조조서기로 본...나는.....뭐지...본적도 없는데....
14/12/02 00:16
수정 아이콘
후한-삼국시대의 관직구조를 좀 알고 싶어서 여러가지 문헌과 자료를 찾아봤었는데 이 글을 볼 때 도움이 되는군요.
최염의 경우 승상부 서조연, 동조연이면 둘 다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직책, 장사면 승상장사일테고 승상부의 조들을 관리하는 직책이니 승진한 셈,
상서가 되면서 더 이상 속관이 아니게 되었고 중위면 위국의 병권을 관리하는 직책이니 뜻이 안 맞으면 처리했어야 했네요.
더군다나 기주지역 사대부의 수장이면 위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대부라고 할 수 있으니...
14/12/02 00:30
수정 아이콘
후에 저 최씨는 당나라 황성인 이씨보다도 문벌이 높습니다.
리비레스
14/12/02 05:10
수정 아이콘
제가 요새 하도 공룡이라는 단어를 많이 접해서 그런가 순간 (부제 : 공룡의 부화 사건) 라고 읽었네요 =_=
더미짱
14/12/02 09:53
수정 아이콘
얼마전 수업 강독때 공융이 튀어나와서(조선사 전공인데...) 후한서 좀 뒤졌던 기억이 나네요..

개인적으로 공융을 위시한 그룹(예형, 양수..)이 연의에선 너무 기인처럼만 묘사가 되어 있는게 안타까운데 오히려 학문적으로는 당대 최고 엘리트 계층이었죠. 조조의 영역안에서 저정도 강도 높게 정면에서 깔 수 있다는것도 그 그룹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고요... 이 부분까지 자세히 살피진 못했지만 조조가 예형을 유표쪽에 보낸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고요..

재밌게 봤습니다
14/12/02 11:16
수정 아이콘
공융/예형으로 대표되는 한나라 사족의 파워를 유표를 통해 예형을 제거하고 자신도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속셈이 있지않나 싶어요.
예형 입장에선 유표나 조조나 똑같은 놈이라 생각했었고 또한 평상시에도 그걸 숨기지않았던 것으로 생각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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