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편지를 썼어
작사 : 고경오
작곡 : 건반
노래 : 건반
네가 잠든 사이에
네 손을 살짝 잡았어.
느꼈니.
네 온기를 훔치고 싶어서.
사람들이 그러더라.
사랑이 끝나 버려도
잘 안 버리는 건 받은 손편지뿐이래.
그래서 한 달 전부터
하루종일 편지를 썼어.
편지지랑 편지 봉투 잔뜩 사다가.
편지 맨 앞엔 항상 사랑한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
열 번씩 썼어.
내 마음은 얼음 같아서 상처받잖아.
정말 미안해.
편지 바로 찢진 마, 응?
네가 잠든 사이에
네 볼에 입을 맞췄어.
느꼈니.
미안해. 나 이제 떠날게.
(간주)
음, 마지막으로 껴안고 싶은데
넌 깰 거고 난 펑펑 울 거고
가지 못할 거고
그래서 그냥 가.
사랑한다는 말이랑 사랑받았단 말 못 해서
숨을 쉴 수조차 없는 그런 지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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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소원 중 하나를 이뤄서 자랑(...)과 기록 보존을 위해서 게시물을 작성합니다.
저는 소설로 데뷔해 게임 시나리오, 게임 기획, 보드게임, TRPG 창작, 애니메이션 대본 등 글로 된 일은 대부분 다 하다가 요새는 소설 연재와 웹툰 연재를 종료하고 새로 웹툰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일테면 소설가 겸 스토리 작가죠.
직업이 확실히 보여주듯 저는 사실 어렸을 때부터 꿈이 많았고 그 긴 꿈 리스트를 커서도 비교적 착실히, 포기 없이 해 온 축에 속합니다. 뭉뚱그려 보면 제가 현재까지 못 이룬 꿈은 딱 하나뿐인 것 같습니다. [창작으로 부자 되기.]
하지만 아무래도 꿈 리스트 중 상위였던 “멋진 노래에 가사 붙이기”, 즉 내 노래 갖기는 쉽게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곡을 하나 만든 지금에서는 좀 덜하지만 3분 안에 사람의 감정을 흔들 수 있는 노래에 대한 동경 내지 질투는 날이 갈수록 커지더라고요. 그래서 작품 안에 노래를 녹여도 보고, 가상의 애니메이션 노래도 설정해 보고, 동물이 랩 배틀을 하는 장면도 써봤지만 아무래도 갈증이 쉽게 가시지는 않았어요. 책에 활자만 적힌 것이 노래는 아니니까요.
그러나 노래 만들기는 잘 안 되더라고요. 안 되는 이유는 몇 가지 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주위에 작곡하는 분이 없다는 부분이 가장 컸어요. 억지로 억지로 인맥을 쥐어짜면 소개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창작자들끼리의 만남은 연애용 소개팅과 비슷한 점이 있는 듯하면서도 또 꽤 다릅니다. 연애도 타이밍이듯 마침 소개받을 그 당시의 작곡가 분도 저를 원해야 하고, 저도 그분의 작품이 좋아야 하고, 그러면서 취향도 비슷해야 하고, 말도 통해야 하고, 일을 하면서 업무분장을 얼마나 할 것인지도 일정 이상 동의해야 성사가 됩니다.
한편 그게 일시적인 착각이라도 함께하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교감이 있어야 사귀는 연애와 달리, 교감이 전혀 없어도 함께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크다 싶으면, 다시 말해 직업적인 관계이므로 친한 구석 전혀 없이 돈이 될 것 같으면 일단 모이는 경우도 있죠. 그러다 무언가 돈이 안 벌릴 것 같은 문제가 조금만 생기면 거의 순식간에 파트너십 관계가 부서집니다. 붙일 여지가 없어요. 차갑고 냉정합니다. 연애처럼 주위에서 말릴 지인도 없습니다. 당장 당사자들도 서로 잘 모르는데 지인들은 무슨 상관인가요.
그러면 아무래도 기분도 안 좋고, 사기도 떨어지죠. 연애만큼은 아니지만 자책도 따르고요. 물론 차후의 결실을 위한 경험이 쌓였다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다만 체력만큼이나 정신력도 중요한 이쪽에서는 매번 “창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하고 살아가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런 기준을 다 제하면 꿈의 실현, 창작에 따른 기쁨 정도가 남는데 이런 가치야말로 개인마다 천차만별이라서 정말 일치시키기 어려운 일이죠. 저는 원한다고 해도 상대가 시간 낭비로 생각하고 원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하여간 위에 거론한 해당 사항이 전부 조율되기란 미드에서 얼핏 들은 식으로 말하자면 로켓 발사 급의 미세조정이 필요하죠. 그래서 내심 포기하고 있었는데…….
2015년 11월 초쯤의 일이었습니다.
낮에 글 쓰느라 커피를 잔뜩 먹고 잠이 안 와서 새벽에 모 사이트 자유게시판을 돌아다녔어요. 그러다 우연찮게 어떤 분이 올린 글을 보게 되었죠. 그분은 자신이 취미로 작곡을 하는데 작사가 잘 안 되고, 작사가 잘 안 되니 곡 콘셉트나 방향성도 흐릿하다는 거예요. 그 부분이 해결되었음 좋겠는데 누구 없느냐는 글이었어요.
노래를 들어보니 무척 좋아요. 서정성이 가득하고 목소리도 엄청 괜찮습니다. 이분의 노래에 내 가사가 붙으면 행복할 것 같았어요. 방향성 제시, 즉 일종의 프로듀싱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괜찮았어요. 당연히 여타의 연주곡과 클래식 작품이 증명하듯 가사 없이도 곡은 혼자 설 수 있죠. 그럼에도 곡의 전개 방법에 작사가의 참여를 인정한다는 발언은 제 입장에서 꽤나 긍정적이었습니다.
해서 바로 두근두근하면서 지원. 성공하면 평생소원이 한 방에 이뤄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혀 노력하지 않고, 어슬렁 어슬렁거리면서 평소처럼 남들 어떻게 사는지, 그 사이트 활동도 않고 그저 잡담만 엿보다가 말이죠. 그런데 될 때는 뭘 해도 된다고 다행히 감사하게도 바로 같이 하자고 하시더라고요. 제 경력이 마음에 드신다고, 잘될 것 같다고 그러셨어요. 믿어지지 않게도요. 과연 꿈이 이뤄지려고 그러는 걸까요? 2016년에는 내가 작사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만한 노래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까요?
단 건반 님이 그 말씀은 확실히 하시더군요. 자신은 일단 취미로 힘 빼면서 천천히 하는 것이니 상업적인 기대를 하거나 즉시로 작품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저는 그런 말씀을 해 주셔서 오히려 좋았습니다. 앞서 거론했듯 자신의 노력과 감정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기쁨, 무언가를 만드는 즐거움만 누리고 그 외 다른 것은 생각 안 하기가 때로는 작업을 함께 오래 할 수 있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이렇게 작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일단 허밍 버전으로 가이드가 된 노래를 받았어요. 작곡자 건반 님이 자신이 가르치던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지은 노래라고 하셨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왠지 저한테 엄청 잘해 주신,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떠올랐습니다. 따뜻하고 잔잔했어요. 그래서 노래에 겨울용 따뜻한 가사를 붙이자고 마음먹었어요. 일단 다른 노래처럼 흔하게 사랑 이야기를 다룰 순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요새처럼 어떤 분야든 창작자들이 상향평준화가 된 상황에서 뭔가 그래도 좀 다른 성과나 결과를 얻으려면 튀어야 된다는 계산이었죠. 해서 윤종신의 <팥빙수>나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 엔딩>처럼 특수한 순간이나 특수한 대상을 그려서 겨울의 정취를 떠올릴 때마다 듣고 싶은 가사를 붙여보자고 결심했습니다. 일종의 특화죠.
지금이야 글 쓰면서 정돈하니까 정상적인 전략 수립처럼 보이지만 당시에는 이렇게 천박하게 말한 것 같습니다.
고 : “벚꽃 연금이 벚꽃 철에 매번 흘러나오는 것처럼 저희도 겨울만 오면, 아님 군밤이나 군고구마를 먹을 때마다 생각이 난다면 대박 나는 거죠! 팥빙수 송처럼요! 혹시라도 대박 나면 평생 인생 편해지잖아요!”
건 : “그, 그렇긴 하죠. ^^;;;;;;”
……그러나 계획은 계획이고, 거창한 말만큼 실전에서는 잘 안 되더라고요. 영감을 떠올릴 만한 강렬한 장면이나 상황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노래의 클라이막스로 지정할 만한 부분도 없고요.
결국 제대로 된 가사를 만들지 못하고, 헤매며 한 3주를 끙끙 앓았던 기억이 납니다. 레진에서 연재하던 장편 소설 마무리 지으면서, 무려 신작을 로맨스+좀비물로 준비하면서 작사를 하려니 에너지가 고갈된 부분도 분명 있었을 겁니다. 일하러 나가기 전 아침, 일 마치고 들어온 밤에 허밍으로 된 노래를 들으면서 이 멜로디에 어울리는 가사를 영영 못 쓰는 게 아닌가 두려움이 생기더라고요.
결국 저는 소설 창작 시에는 하지 말라는, 그러나 시 창작 쪽에서는 고대 중국 시인 두보 때부터 유구한 전통이 있는 특단의 조치를 쓰기로 마음먹습니다. 바로 음주 후 작사하기를요.
시와 작사는 비슷한 구석이 많고, 작사는 잘은 모르지만 좋아하는 가수 이승철은 음주 후 녹음도 많이 한다니까 이 방법이 통하지 싶었습니다.
과연 통했습니다.
맥주 세 캔째에 통하긴 통해서 가사를 죽죽 써내려갔는데 단번에 완성하고 나니 앞서 결심한 것과 무색하게 연애, 그것도 그 흔한 실연 이야기가 완성된 거예요. 경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다시 고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게 느껴지더라고요. 특히 좋은 점은 이게 제 경험을 쓴 게 아님에도 실제처럼 느껴진다는 부분이었어요. 픽션 그대로가 현실감을 가졌다는 소리는 꽤 잘 만들어져서 내적인 힘이 실렸다는 이야기거든요.
노래 속 연인은 아마 함께 사나 봐요. 그러다 여자는 자꾸 남자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도 상처를 입는 일에 지친 모양입니다. 한 달 전부터 이별을 생각하면서 쓴 편지를 숨겨놓았다가 한밤에 머리맡에 놓고, 방범등이 길을 밝히는 어두운 골목길 속으로 들어가죠.
감동은 오래갔습니다. 완성 후 카톡으로 가사를 보내놓고 왠지 설레서 아침에도 잠에 들지 못했어요. 그러면서 슬슬 다른 생각이 들더군요. 밤엔 감정적이라서 뭐든지 명작처럼 보이잖아요. 오케스트라인 줄 알았는데 가라오케면 어떡해요. 저만 일방적으로 좋아 보이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이 들더라고요. 비몽사몽간에 멍하니 있는데 아침 10시쯤 건반 님의 카톡이 왔습니다. 정말 좋다고, 이렇게 좋은 가사에 맞게 곡 매만지고 싶어서 퇴근 얼른 하고 싶다고.
그 말씀이 얼마나 기쁘던지요. 드디어 진짜 다행이다, 잘됐다. 싶어서 졸리더라고요. 상처럼 잠이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수정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수많은 샘플이 오갔어요. 여러 가지 시험 때문이었죠. 주로 적극적으로 슬픔을 내보이느냐, 아님 건조하게 숨겨서 좀 더 가사에 집중하게 만드는 게 좋냐 이른바 얼음과 불 버전을 시험하면서 함께 파생된 다른 버전들을 들으면서 상의를 했습니다.
건반 님이 샘플을 계속 건네주시는 것은 기꺼운 일이었습니다. 자극이 되었고, 무언가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확실히 느껴졌거든요. 그러면서 음악은 최소 3개월은 걸리는 소설에 비해 3분 내 모든 걸 보여줄 수 있어서 좀 쉬운 거 아냐?라고 평소에 품었던 생각이 확실히 사라졌어요. 세부사항을 하나하나 되새기면서 고치거나 바꾸거나 평가해야 할 일들이 엄청 엄청 많더라고요. 특히 녹음하는 건반 님은 본인의 목 상태를 세심히 관리해야 했습니다.
목표 중 하나는 연말에 내기였어요. 그땐 사람들이 또다시 한 해가 갔고, 또 한 살 나이를 먹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분이 울적할 가능성이 있잖아요. (...) 헤어진 옛 사랑 생각도 날 수 있고요. 그런데 아무래도 너무 서두르면 노래 품질이 떨어질 수 있어서 아쉽지만 그 목표는 포기했습니다.
그러기를 두 달째 슬슬 비 전문가인 제가 의견을 낼 수 없는 단계가 오더군요. 말해도 좋다, 괜찮다는 평만 연발하게 되고요. 거의 완성에 가깝기 때문이었죠. 이때부터는 건반 님에게 일임하고 저는 완성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결국 완성! 오늘은 이런 기록을 올리네요.
노래는 3월에 나오는 제 차기작 웹툰에 OST처럼 쓰려고 해요. 그래야 웹툰에도 도움이 되고, 노래의 생명력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긴 잡담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차기작도 여건 되면 공개할게요. 다음 노래는 무려 가사에 “쉐킷 쉐킷”이 들어가는 신나는 노동요(...)가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