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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6/03 22:42:28
Name 王天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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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스포] 로미오와 쥴리엣, 맥베스 보고 왔습니다




둘 다 원작을 읽은 지도 오래됐고 기억도 잘 안납니다. 셰잌스피어의 원작을 모르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 <로미오와 쥴리엣>을 이야기할 때 늘 올리비아 핫세의 미모를 이야기합니다. 이 영화에서 올리비아 핫세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어요. 그런데 영화에서 존재감을 보이는 건 다른 이야기입니다. 올리비아 핫세의 쥴리엣이 영화에서 정말 제 몫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미모"만을 이야기하는 게 어떤 반증이 아닌가 싶군요. 심지어 초반에는 연기가 뻣뻣해서 거슬리기도 합니다. 이 영화를 끌어가는 건 오히려 로미오입니다.

- 영화는 굉장히 격정적입니다. 결투 장면으로 시작한 영화는 내내 요동치고 시끄럽습니다. 로미오와 쥴리엣은 사춘기 소녀소년이고 이들의 풋사랑은 가문의 벽 너머로 미친 듯이 타오르죠. 꽤 오래된 영화인데도 이글거리는 열기가 그대로 담겨져있습니다. 인물들은 툭 하면 충동에 휩쌓입니다. 사랑에 빠지고, 분노에 휘말리고, 슬픔에서 허우적댈때도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죠. 이들은 감정의 격류에 자신을 그대로 던져버립니다. 특히 로미오와 티볼트가 싸우는 장면에서는 이 두 사람이 미쳐 날뛰죠. 그들의 일행도 성난 벌처럼 주위를 둘러싸고 뛰어다닙니다. 로미오와 티볼트는 단순히 명분과 분노에 몸을 맡기는 게 아니라 죽음의 공포까지도 끌어안고 같이 뒹굽니다. 의외로 처절했어요.

- 고전으로 남아있지만 전 이 영화가 모든 연령을 노린 보편적 작품은 아닌 것 같습니다. 10대, 20대의 청년들을 자극할만한 하이틴 로맨스에 보다 초점이 맞춰져있는 것 같아요. 안되는 것을 되게 하고, 될 일이 안 될 때 사이의 감정들이 널뛰기를 합니다. 호흡이 짧고 사건들은 금새 지나갑니다. 생각해보니 현대의 수많은 하이틴 로맨스물들이 <로미오와 쥴리엣>에 겹쳐지는군요.

- 생각보다 과감해서 놀랐습니다. 68 문화혁명의 영향으로 그런 노출이 가능했다고 하더군요. 캐릭터 연령대로 배우들을 섭외한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 제일 재미있는 건 티볼트였습니다. 생긴 것도 그렇고 딱 명망 좋은 가문의 폭군처럼 으시대더군요. 그가 죽으면서는 영화의 전체적인 에너지가 좀 시들해졌습니다. 더 이상 긴장할 일이 없이 영화는 예정된 죽음으로 차분하게 흘러가니까요.

- 감정이 유기적으로 흐르는 것 같진 않아요. 생각해보면 로미오의 사랑타령부터가 이미 말이 안되죠. 셰잌스피어의 작품은 늘 논리보다는 캐릭터, 캐릭터보다는 소네트의 형식을 띈 대사 자체가 이야기의 주를 차지하는데 이를 하나의 내러티브로 이어붙이다보니 좀 황당하긴 하더군요. 이유가 중요하진 않습니다. 그 상태를 어떻게 느끼고 이것이 언어로 어떻게 표현되는지가 더 중요하죠. 그런 점에서 올리비아 핫세의 쥴리엣보다는 레너드 위팅의 로미오가 극을 더 잘 살립니다.

- 마지막 장면만큼은 고전의 아련한 기품이 있더군요.

- 이상용 평론가는 이번에도 좀 싱거웠습니다. GV를 들을 때마다 수박껍질을 열심히 채써는 느낌이 들어요. 자꾸 실망하다보니 오히려 다른 영화의 GV는 얼마나 다를지 한번 봐주겠다는 의욕마저 생깁니다.


-<맥베스>는 그래도 영화 전에 한글판으로 바삐 읽었습니다. 이게 극의 내용을 따라가는데 좀 도움이 되긴 했는데, 반대로 대사로만 와닿던 기백과 공포가 막상 화면에서 실체화되니까 좀 김이 빠지는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 감독이 로만 폴란스키라 이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장진 감독의 GV도 흥미가 있었지만... 제가 제일 궁금한 건 오슨 웰즈의 맥베스지만 그건 개봉할 일이 없겠죠. 마이클 패스벤더가 주연한 <맥베스>를 보기 전에 이런 굵직한 고전들은 좀 미리 보고 싶습니다.

- 영화는 굉장히 황량합니다. 쓸쓸한 느낌이 아니라 공허에 가까운 느낌이에요. 그리고 섬뜩할 정도의 폭력들이 화면 정가운데를 채웁니다. 철퇴로 내리찍고, 반란군의 수장을 목매다는 장면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신경이 곤두서있습니다. 덩컨 왕을 죽이는 장면도 묘하게 폭력적인 느낌이 도드라집니다. 마녀의 예언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는 피와 살덩이를 화면에 던져놓습니다. 정신적 고통을 육신의 고통으로 체화한다고 할까요.

- 영화 속 맥베스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민이 많고 우유부단하게 그려지더군요. 한글번역판 희곡에서는 장대한 기골의 남성이 연상되었는데 존 핀치의 맥베스는 충동보다 번민이 더 가득차있는 인물입니다. 울적하고 속을 알 수가 없는 인물이죠. 그는 질질 끌려다니는 느낌이 더 강합니다. 내내 비틀거려요.

- 레이디 맥베스도 제 생각과는 조금 다른 이미지였습니다. 훨씬 더 침착하고 기회주의적인 인물로 보이더군요. 대사로만 보면 선악과를 따먹게 부추기는 사탄이 생각나는데 영화 속의 레이디 맥베스는 죄악감에 무감각한 인물입니다. 금기를 뛰어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금기를 별로 신경쓰지 않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

- 이들의 실수는 운명적이라기보다는 어리석은 실수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그만큼 인간적인 면모가 더 많이 그려지죠. 딱 한순간의 욕망 때문에 내내 보통 인간이었던 이들이 스스로의 연옥에서 계속 해맵니다. 후반으로 치달을 수록 이들의 히스테리는 점점 심해지는데, 이 묘사도 제 예상과는 조금 다르더군요. 이들의 노이로제는 신경질적이라기보다는 피로가 계속 축적되는 식입니다. 오히려 미치지 않은 채로 복수에 불타는 맥더프가 훨씬 더 위험해보였습니다.

- 피날레 씬의 결투는 제가 기대하는 맥베스의 모습을 모두 다 보여줍니다. 그는 어리석은 인간입니다. 이미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죠. 심지어 모든 예언이 맞아떨어지며 자신의 죽음을 직감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가 택한 길이 잘못된 것이라 할 지라도 그는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도덕 앞에서 회개하고 자신의 모든 행적을 무효화시키지 않습니다. 그는 타고난 대로, 쌓아올린 과거대로 마지막까지 운명에 저항합니다. 이것은 자포자기의 심정이 아닙니다. 변명 대신 최후까지 싸우려는 투지죠. 번역서 앞에 인간의 죄와 반성 운운하고 있지만 전 그런 해석에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파멸을 자초했다면 그 파멸까지도 책임지려 하는 인간의 고집이고, 어리석은 만큼 맥베스는 숭고해지는거죠.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이 맥베스의 핵심입니다. 운명을 실현시키려 했고, 그 운명이 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싸우려 합니다. 맥베스가 여봐란 듯이 적의 졸개들을 죽이고 맥더프를 제압할 때는 짜릿하기까지 합니다. 여자의 배를 가르고 나왔다는 선언을 듣자마자 생기가 허무로 산화해버리는 것 역시 결말에 어울리는 추락입니다.

- 내내 운명과 죄에 끌려다니다가 최후의 괴력을 내뿜지만 결국 효시되고 마는 맥베스를 보면, 감독은 이 모든 이야기를 "섬뜩함"이라는 공포 로 귀결지으려 한 것 같습니다. 돌아오는 왕자가 마녀들을 만나는 엔딩 역시도 그런 맥락을 완성하죠. 그도 결국 어떤 예언에 휘말릴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얼마나 위대한 인간이건, 결국 모든 인간은 자신의 어리석음, 타인의 욕망에 의해 피투성이 시체가 되고 맙니다. 로만 폴란스키의 <맥베스>는 결국 텅 빈 세상과 보잘것 없는 권좌, 그에 대한 집착, 그리고 훼손된 채 나뒹구는 시체덩어리의 세계입니다. ( 감독 자신의 비극적 개인사와도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는 것 같군요)

- 장진 감독의 GV는 재미있었습니다. GV가 재미있는 건 진행자들의 유려한 말솜씨나 정보의 전달이 다가 아닐 겁니다. 작품과 비즈니스를 향한 억누를 수 없는 애정과 헌신이 튀어나오는 걸 목격할 수 있다는 게 참맛이 아닐려나요. 장진 감독은 정말 연극광인 것 같더군요. 오히려 영화 감독보다도, 연극 쪽에 더 많은 애정을 둔 것처럼 보였습니다.

- 결국 원작을 읽어봐야 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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