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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6/14 01:11:41
Name
저글링앞다리
Subject
[일반] 시작하는 연인을 위해
October - Memories of you
출처 : 브금저장소 (http://bgmstore.net )
* 평어체로 작성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하는 연인이 생겼다.
생에 다시는 사랑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되게끔 하려고 노력했는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해서 뜻대로 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게 사랑인지도 몰라 한참을 고민하다가, 사랑인 것 같다고 인지하면서도 인정하기 싫어서 또 혼자 뻗대다가, 그렇게 빙빙 돌았는데도.
그래, 이제 막 시작했다. 사랑이란 게 어떤 것이었는지, 어떤 감정이 들고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도 모두 잊어버릴 만큼 아주 오랫동안 나와는 상관없었던 그 사랑이란 짓을.
동시에 또 하나를 막 시작했다. 나는 사실 끝을 준비하고 있다. 조금 더 명확히 표현하자면 그녀와의 관계는 끝을 각오하고 시작하는 관계다.
따지고 보면 나는 성인이 될 무렵부터는 늘 시작과 동시에 끝을 준비하며 사랑해왔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나 상대방의 의지, 그 두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헤어져야만 하는 여러 가지 상황을 준비하고 각오하면서. 실제로 당사자들의 의지나 상황과는 상관없이 헤어져야 하는 상황을 맞았을 때, 내가 시작부터 각오하고 준비해왔던 그 모든 것들이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는 걸 몇 번이고 경험했으면서도, 나는 사랑을 시작함과 동시에 관습처럼 끝을 밑그림 그리곤 했었다. 그 위에 현실이 덧칠되면 밑그림은 다 가려진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었을는지도 모른다.
"너와 사귀지만 난 여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너를 좋아하는 거야"라고 말했던 여자들, 그녀들이 결국은 내게 질려서든 나와 함께 견뎌야 하는 현실에 질려서든 평범한 남자에게로 떠나던 뒷모습을 보면서 생긴 상처가 또다시 생기는 게 두려우니까.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면서도 현실에 부딪혀 나가떨어져서는, 한번 끌어안아 보지도 못하고 멀찍이서 미안하다며 우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했던 그때의 후유증을 다시 겪을까 봐 두려우니까.
그러니까 나는 또다시 시작부터 이별을 준비한다. 비겁한 걸 알면서도.
이전에 쓴 글에서 밝힌 적이 있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밝히자면, 나는 어머니께 내가 동성애자인 것을 커밍아웃했고, 어머니는 동성애자라는 딸의 '존재'를 '반대'하시고, 결국 어머니와 나는 '합의'를 한 상태다. 어머니께서 내게 결혼을 강요하지 않는 대신, 나는 여자를 만나지 않고 어머니 계신 동안에는 혼자이기로.
그래, 내게 여자가 생겼다는 건 어머니와의 '합의'를 어긴, 명백한 계약 위반이다. 이 계약을 어겼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이전에 어머니께서 하셨던 일들을 반추해보면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내가 괴로운 것은 버틸 수 있어도, 내 옆의 사람이 괴로워지는 것을 나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다른 일에는 관대하시고 인자하시고 교양있으시고 예의 바르신 어머니께선, 전에도 그러셨듯 내 옆의 사람의 '존재'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못하실 것이다. 아마도 예전처럼 인자한 표정으로, 교양있는 말투로, 예의를 갖춰서 내 옆의 사람에게 '부모로서의 부탁'을 하실 것이다. 그 부탁을 받고 내 곁의 사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다.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예상하면서도, 그녀를 내 곁에 두길 원했다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를. 아예 시작하지 말았어야 하는 관계란 걸 알면서도 붙들고 있는 내가 얼마나 저열한지를.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내가 기억하는 '동성애자 딸을 인정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이제 좀 옅어지지 않았을까 막연히 기대하는 내가 얼마나 비겁한지를.
다 알면서도 나는 그녀의 곁에 있고 싶다. 오랫동안 연애를 하지 않아 누구보다도 딸의 생활 패턴을 잘 아시는 어머니께서는 금세 내 곁에 누군가가 있고 그것이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실 것이다. 내가 언제까지 변명하고 숨길 수 있을까. 절대 들키지 않을 수 없는 관계다. 그리고 들키면 그 끝은 셋 모두 공멸이다. 모두가 상처만 받고 끝날 것이다. 다 알면서도 나는 그녀가 내 곁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
아아, 이 얼마나 빌어먹도록 이기적인 심보인가.
그녀 또한 독신주의자로 포장했지만, 집에는 커밍아웃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와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든 집에 알려진다면 어떤 상황을 겪게 될지 모를 일이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라는 그녀의 집에서 행여 이해를 받게 된다 치더라도, 들키면 안 될 곳이야 얼마든지 있다. 직장, 친구, 지인... 그거야 나도 마찬가지다.
그녀도 나도 사랑에 눈이 멀어 현실을 보지 못하는 나이가 아니다. 그녀도 나도 우리가 함께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을 포기해야 하고 어떤 것들을 인정해야 하며 어떤 것들을 각오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시작과 동시에 끝을 준비해야 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함께 꽃길을 걸을 수 있을 거란 꿈을 꿀 나이가 아니니까.
우리는 맨발로 선 살얼음판 위에서 손을 잡았다. 발이 시리다고 종종걸음을 걷지도 못할 것이고, 힘들다고 주저앉지도 못할 것이고, 춥다고 발을 동동거리지도 못할 것이다. 우리가 딛고 선 살얼음이 녹아버릴까 봐 너무 뜨겁게 사랑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래도, 뭐 어때. 그녀도 나도 어차피 혼자일 때 역시 살얼음판을 딛고 서 있었다. 둘이서 손을 맞잡고 걷는다고 더 쉬워지거나 편해지거나 나아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맞잡은 손은 힘이 되겠지. 어차피 평생 걸어야 할 살얼음판이라면 곁에 함께 걷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위안이 되겠지.
그러다가 살얼음판이 깨지고 함께 심연으로 추락해도 옆 사람의 손을 잡고 있다면 마지막까지 좀 덜 무섭겠지. 혹은 한 사람이 깨진 얼음판 아래로 추락하려고 할 때 다른 한 사람이 구해주겠다고 손을 내밀어 버틴다면, 물론 그녀도 나도 그 손을 어떻게든 놓아버리겠지만, 추락하는 순간에 아주 행복하게 가라앉을 수 있겠지.
이 정도면 기꺼운 마음으로 준비할만한 끝 아닌가.
한번 이기적이었던 것으로 나는 족하다. 다시는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곁에 있어 달라고 말할 수 없겠지. 이별을 막을 도리가 없으니 이별을 준비할밖에. 그녀를 위한다는 비겁한 변명을 대며 나는 나를 위해서 끝을 준비한다. 함께 하고 싶은 것을 떠올리기도 전에 서로 다치지 않고 이별할 방법을 강구한다.
이 질척한 구차함에 구역질이 나는 것을 참으면서.
비겁하고 이기적이고 구차한 사랑을 받아야 할 내 곁의 그녀를 위해 건배.
시작하는 연인을 위해 건배해주시겠습니까?
지금부터 끝을 향해 가는 연인을 위해, 부디 건배를.
빌어먹을 사랑을 위하여, Ch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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