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이야기 :
https://cdn.pgr21.com./?b=8&n=69054 )
글을 쓰는 건 노가다입니다. 쓰고 지우고 쓰고 고치고를 무한에 가깝게 반복하는 작업이죠.
온 신경을 기울여 소설을 쓰다 보면 글이 잘 풀리지 않으면서 몹시 피곤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이런 우스개류의 글을 쓰며 기분전환을 합니다. 퇴고할 필요가 없는 글을 쓰는 건 나름대로의 휴식이 되거든요.
즐겁게 읽히기를.
----------------------------------------------------------------------------------
“저들을 태워 버려라, 위대한 드래곤이여!”
드래곤이 입을 벌리자 바위마저 녹여버릴 만큼 뜨거운 불길이 앞으로 뿜어져 나갔다. 불길을 뒤집어쓴 괴물은 미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증발해버리고 말았다. 바위에 검게 눌어붙은 찌꺼기만이 한때 그곳에 존재했던 괴물의 잔해로 남았을 뿐이었다.
명예로운 드래곤나이트,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면서 또한 가장 지혜로운 생물인 용을 타고 하늘을 날며 적을 무찌르는 위대한 용사가 기다란 창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 드래곤이 거대한 날개를 펼친 채 지시에 따라 선회했다. 또 다른 괴물이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여지없이 드래곤이 다시 불을 내뿜었다. 불길이 스치고 지나가자 한때 키가 오 미터나 되었던 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허연 김이 피어오르는 발목 세 개만이 덩그러니 남았을 뿐이었다.
용사가 호탕하게 웃었다.
“악의 무리들이여, 얼마든지 와 보거라. 내가 모두 상대해 줄 테니!”
“이봐. 그건 아니지.”
드래곤이 지적했다.
“아까부터 적을 상대하고 있는 건 나라고. 불을 내뿜는 것도 나고, 발톱으로 저들을 찢어발기는 것도 나고, 이로 그들을 동강내는 것도 모두 내가 한 일이야. 네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잖나.”
용사가 머뭇거리다 반박했다.
“그렇지 않다! 내가 올바른 방향을 가르쳐주지 않았더라면 그대가 적들을 어찌 이토록 빨리 섬멸할 수 있었겠는가!”
“아니. 별 도움이 안 돼.”
드래곤이 냉정하게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까부터 왼쪽이니 오른쪽이니 멋대로 가리켜 대는 통에 방해만 되고 있다고. 좀 가만히 있어 주면 좋겠는데.”
용사가 발끈했다.
“하지만 내가 가만히 있는다면 저 왕과 그의 백성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명예로운 드래곤나이트가 아닌, 그저 드래곤의 힘에 의지할 뿐인 남자로 생각할 게 아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잖나.”
드래곤의 말에 용사가 벽력같이 고함쳤다.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그게 뭔데?”
그러자 용사가 신념과 열정이 넘쳐흐르는 얼굴로 창을 번쩍 들며 외쳤다.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다! 드래곤나이트가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속에 적과 맞설 수 있는 용기가 싹트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의무임을 결코 잊지 말지어다, 위대한 드래곤이여!”
“그게 왜 ‘우리’의 의무인지 모르겠군.”
드래곤이 투덜거렸다. 그리고 말했다.
“오른쪽 날갯죽지 아래.”
용사는 재빨리 창을 오른쪽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창끝에 붙은 가시달린 공으로 드래곤의 날개 아랫부분을 문질렀다. 드래곤이 만족스러운 듯 신음소리를 내고는 코로 유황 연기를 피워냈다.
“제대로 잘 긁는군. 마음에 들었어.”
“필요하다면 언제나 요청하라, 드래곤이여. 나와 그대는 마음으로 연결된 사이가 아니더냐!”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하려다, 그마저도 귀찮아진 바람에 드래곤은 입을 다물었다. 천 이백 년이나 되는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여러 드래곤나이트들을 겪어 봤지만 이번처럼 말이 많은 드래곤나이트는 처음이었다. 그의 수다에 질린 나머지 하늘에서 떨어뜨려 버릴까 싶은 마음이 들었던 적도 몇 차례나 있었다. 그의 목숨을 구해준 건 그의 능력이었다. 그에게는 드래곤이 원하는 곳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아주 적절한 힘으로 긁어줄 수 있는 귀하디귀한 재능이 있었다. 그런 재능을 지닌 사람은 전설의 용사 이상으로 찾기 힘들었다.
지치지도 않았는지 용사가 재차 외쳤다.
“왼쪽이다, 드래곤이여! 저기 트롤의 무리들에게 그대의 벽력같은 불길을 내뿜어 불지옥의 맛을 보여 줄지어다!”
드래곤은 왼쪽으로 날아가 트롤들에게 양 앞발톱을 휘둘렀다. 녹색 피가 사방으로 흐드러지게 피어올랐다가 드래곤의 살갗에 내려앉으며 찐득하게 들러붙었다. 드래곤은 일부러 불 대신 발톱을 쓴 것을 후회해야 했다.
“아, 이런. 괜한 짓을 했군. 이거 끝내고 씻어야겠는걸.”
드래곤이 투덜거렸다.
적들과의 싸움은 오래지 않아 종결되었다. 그건 싸움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살육에 가까웠다. 왕국을 침공해 온 수천이나 되는 괴물 무리들 중 살아남아 돌아간 녀석들은 두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찐득하고 냄새나는 트롤의 피를 뒤집어쓴 바람에 기분이 나빠진 드래곤이 심할 정도로 꼼꼼하게 적들을 박살내고 다닌 탓이었다.
용사는 왕궁 위를 한 바퀴 돌면서 왕에게 인사할 것을 원했지만 드래곤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안 돼. 어서 가서 씻고 싶다.”
“하지만 드래곤이여. 우리가 건재함을 보여주는 것도 우리의 의무일지니......”
“다음에.”
드래곤이 딱 잘라 말하자 용사는 더 이상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대신 드래곤의 둥지가 있는 벼랑 위로 날아가는 동안 드래곤의 목덜미 위에서 계속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드래곤은 용사를 무시하고 둥지로 날아왔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용의 모습으로 씻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 모습 그대로 몸을 씻으려면 폭이 삼십 미터쯤 되는 폭포나 호수가 필요했다. 그러나 깎아지른 벼랑 위에 그딴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오직 작은 샘물뿐이었다.
“얼른 내리라고. 변신할 테니.”
“변신한다고?”
용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드래곤은 눈살을 찌푸렸다.
“드래곤이 변신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건 아닐 텐데?”
“물론 그러하다, 드래곤이여.”
용사가 말했다.
“다만 나는 그대가 무엇으로 변신할 것인지 궁금했을 따름이다.”
“인간으로 변할 건데?”
드래곤이 말했다.
“깨끗이 씻으려면 인간 모습이 제일이지. 다른 짐승들은 다들 털이 나 있어서 말리기 귀찮거든.”
용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생각해 보니 그럴듯하군.”
“그래. 그러니까 어서 내리라고.”
드래곤의 재촉을 들은 용사가 잽싸게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드래곤은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강력한 마나의 힘이 몸 주변을 감싸더니 드래곤의 모습을 빠르게 변형시켰다. 드래곤은 작아지고, 날개가 사라지고, 앞다리가 팔로 변하더니 곧 완전한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키가 늘씬한 아름다운 미녀의 모습이었다. 용사가 잠시 침묵하더니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드래곤이여, 그대의 성별이 여성이었단 말이냐?”
“그래. 왜?”
“뜻밖이로군. 나는 그대가 당연히 남성일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건 무슨 근거 없는 추측이냐. 하기야, 너희 족속들이 우리의 성별을 구분하는 건 어렵겠지.”
용사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대들의 성별을 구분하는 법을 알려줄 수 있겠는가?”
“그딴 거 묻지 마. 당연히 실례라고.”
“그런가? 사과하겠다, 드래곤이여.”
용사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다시 말했다.
“그런데 드래곤이여.”
“씻어야 하는데 왜 자꾸 귀찮게 굴어?”
“미안하다. 하지만 하나만 더 묻게 해 주지 않겠는가?”
인간의 모습을 한 드래곤이 체념한 듯 말했다.
“알았어. 말해봐. 뭔데?”
용사가 말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나체의 모습인가?”
“하?”
드래곤이 한심하다는 듯 콧소리를 냈다.
“옷을 입고 있지 않으니까 나체지. 설마 그런 것도 모르는 거냐?”
“아니, 그 의미가 아니라......”
용사가 그답지 않게 말을 더듬다가 다시 말했다.
“부디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대에게 말하건대, 나는 남자고 그대는 여자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렇게 벗고 있으면 그게 좀 그렇지 않느냐는....... 뭐 그런 뜻이다, 드래곤이여.”
“어쩌라고.”
드래곤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너 때문에 번거롭게 옷이라도 찾아 입으라는 거냐? 여기저기 트롤의 피가 묻어서 짜증나 죽겠는데 말이야. 왜 자꾸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네.”
“그런가. 미안하다, 드래곤이여.”
용사가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좋아. 네 사과를 받아들이지. 그럼 이제 씻으러 가도 되겠지?”
드래곤이 말했다. 그러나 용사가 다시 한 번, 좀 더 오래 고민하며 주저하더니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드래곤이여.”
“아, 왜!”
드래곤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또 뭔데! 자꾸 짜증나게 굴면 확 잡아먹어 버린다!”
용사의 몸이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드래곤이 발을 구르며 성질을 내다 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드래곤나이트의 맹약에 따르면 너는 내게 필요한 질문을 할 수 있지. 그 질문이 정당한 것이면 나는 대답해야 하고. 그러니까 말해 봐. 다만 부탁인데, 이게 마지막 질문이면 참 좋겠네.”
“안심하거라, 드래곤이여. 이것이 진정 마지막 질문이니.”
용사가 말하더니 가만히 드래곤의 나신을 위아래로 꼼꼼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의 몸을 보니 지저분한 곳이 많아 보인다. 그대의 건강을 관리해야 하는 드래곤나이트로서 그대에게 묻노니, 가장 최근에 몸을 씻은 게 언제인가?”
드래곤이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이십일 년 전인가. 실수로 진흙에 발을 담근 바람에 씻었지.”
용사는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위대한 드래곤이여. 오직 그대를 위하여 내 마음에서 우러난 충고를 건네노라, 그대의 건강과 악취 방지를 위해서 적어도 사흘에 한 번씩은 씻는 게 어떠한가?”
드래곤이 고개를 저었다.
“귀찮다고. 씻는 것도, 말리는 것도.”
용사가 말했다.
“하지만 자주 씻는다면 그렇게 자주 등 언저리가 간지러울 일이 훨씬 줄어들 것이다, 드래곤이여.”
“그래?”
드래곤이 솔깃한 듯 귀를 기울였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들어 용사에게 등을 긁어달라고 요청하는 횟수가 부쩍 늘어난 상태였다. 드래곤은 곰곰이 생각한 후 말했다.
“좋아. 네 청을 받아들이지. 사흘에 한 번은 씻어 보겠어.”
용사가 점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다, 드래곤이여.”
그리고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한 드래곤이 샘물로 몸을 씻는 동안, 용사는 뒤돌아선 채 내내 먼 산을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