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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12/08 17:08:01
Name 나는모른다
Subject [일반] 제논의 역설은 어떻게 풀렸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물음이다. ‘보편적인 논리학이 얼마만큼 가능한가?’ 달리 말해서 최소한 이론적으로라도 논변들을 제시하는 형식과 거기에 기대어 그러한 논변들을 비판하는 표준들 두 가지 모두 영역에 따라 불변적이게끔 논변들을 제시하고 비판하기를 바랄 수 있는가?”


(스티븐 툴민의 “논변의 사용” 중에서)




이 글의 원래 제목은 “토론의 수학화 불가능성” 입니다.




이 글은 예전을 위한 글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토론으로 얻고 싶은 게 무엇이었는지를 물어보는 글입니다.




대부분의 내용은 거의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6


"제논의 역설은 미분의 개념과 운동의 개념을 고안한 근대 고전 물리학의 발달에 의해 반박되었다. 제논은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면서 물체가 이동한 거리만을 고려하여 물체가 이동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려하지 않았다. 실제 물체의 이동은 움직이는 데 걸린 시간으로 움직인 거리를 나누어서 속도를 구하여 비교해야 한다. 즉 물체의 이동은 속도에 의해 표현된다.




수학적인 해결법으로는 고등학교 2학년 과정에서 배우는 무한등비급수를 이용할 수 있다." - 위키피디아




이것은 현재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제논의 역설의 반박 방법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반박이 아닙니다.


이 반박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알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역설에 나와 있는 더 깊은 토끼굴을 보여줄 것입니다.


이 역설을 진짜로 푸는 방법을 설명할 것입니다.






7


그 전에, 사람들의 생각처럼, 하나의 방법을 제거해봅시다.


철학적 문제를 제외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오직 과학적인 문제와 수학적인 문제에 맡겨서 상황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물리학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 물리학을 공부함이 없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가망 없는 것이다. 만일 이런 철학적 문제에 해답이 있다면 그것은 수리물리학의 방정식으로 씌어지게 될 것이다."


논리와 확실성을 추구한다고 해봅시다.


그리고 철학적인 방법은 될 수 있는 한 제거해보도록 하죠.






8


제논의 역설에 있는 두 가지 문제점을 먼저 제시하겠습니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보다 10배 빨리 달릴 수 있다고 가정하고, 거북이를 아킬레스보다 100m 앞에서 출발시킨다. 아킬레스가 100m를 달려가면 거북이는 10m를 가고, 따라잡기 위해 아킬레스가 10m를 가면 그동안 거북이는 1m를 나아간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기 위해 달린다 하여도 그 시간동안 거북이는 움직이므로 아킬레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 위키피디아




제논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분명 잘못 전제한 두 가지의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하나는, 저기에 있는 해결 방법이 말한 것처럼, 물체의 운동에서의 거리만을 고려했지 물체의 운동에 필요한 시간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도라는 개념에서 시간이 필요함에도 시간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어떠한 값을 무한하게 더하는 것의 답이 필연적으로 무한해지지 않게 된다는 점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무한히 더한다는 것으로 무한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고, 이것을 무한등비급수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역설이 전부 반박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논증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전부" 반박되었다고 하기에는 다른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단지 전제일 뿐이므로, 역설에서 문제가 된 전제가 고쳐진 새 역설을 보여준다면 어떻게 할까요?






9


이제 지금 상황에서 제논의 역설이 진짜로 어떻게 적혀 있었는지 말하는 게 좋은 것 같네요.


이 역설이 온전히 남겨져 있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서 나옵니다. 거기에 있는 내용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우리가 알던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논의 역설이 말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운동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첫번째는, 움직이는 것은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에 앞서 먼저 그 중간에 도달해야만 하기 때문에 운동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에 관한 논변이다.”


첫번째 역설은 이분법의 역설입니다. 시작점 A에서 목적지 B로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A로부터 B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선분 AB의 중점 C를 통과해야 하고, 또 선분 AC의 중점 D를 통과해야 하고, 이렇게 무한개의 중점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것은 무한한 시간이 걸리는 일이므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대의 방향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선분 AB의 중점 C를 통과해야 하고, 또 선분 BC의 중점 D를 통과해야 하고, 이렇게 무한개의 중점을 통과해야 한다는 역설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두번째는 이른바 아킬레우스의 역설이다. 달리기 할 때에 가장 느린 자는 가장 빠른 자에 의하여 결코 따라잡히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따라잡기) 전에 쫓는 자는 달아나는 자가 출발했던 곳에 도착해야 하고, 그래서 더 느린 자가 항상 약간이라도 앞서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번째 역설은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역설입니다. 아킬레스는 조금이라도 먼저 출발한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킬레스가 거북이의 위치에 닿았을 때, 거북이는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가 있을 것이고, 이러한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테미스티오스라는 주석가가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의 이 부분에 “가장 느린 자” 대신 “거북이”로 바꿔서 주석을 달았는데, 이 이후부터 아킬레스와 거북이란 말로 남게 되었습니다.)




“세번째는, 움직이는 화살이 정지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지금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하는 데서 나온다.”


세번째 역설은 화살의 역설입니다. 시간은 최소의 단위인 ‘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제논은 말합니다. 이제 쏜 화살은 움직이거나 멈춰 있어야 하는데, 만일 화살이 움직인다면 순간은 적어도 어느 순간의 시작점이란 부분과 끝점이라는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최소의 단위인 ‘순간’을 분할할 수 있다는 얘기로 모순이 되므로 화살은 정지해 있어야만 합니다. 날아가는 화살은 각 순간마다 정지해 있고, 정지로 이루어졌으므로 운동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역설은, 지금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거의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글 이후부터는 이 역설들은 마치 하나인 것처럼 언급되고 서로 바뀌어가며 쓰게 될 것이니 이 점을 알아줬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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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논의 역설이 저 두 가지 문제점에 어떻게 대응하는 지를 생각해봅시다.




첫번째 지적은 물체의 운동에 필요한 시간이란 개념을 도입한 속도가 그렇게 잘 정의가 되지 않았다고 대응할 것입니다.


화살의 역설을 생각해보죠. 화살의 속도가 무엇인지 확인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제논이 정지되어 있다고 말하는 화살은 그 시간이 “지금들”에서의, 순간으로서의 지금입니다. 직선에서 점의 길이가 0이라고 하는 것처럼, 여기서 나온 시간은 0입니다. 정지되어 있다고 말했으니 거리는 0이죠. 이 화살의 속도는 0/0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값은 정해지지 않는 값이고, 따라서 아직까지 문제가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 지적은 무한히 더한 값이 무한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 이 무한히 더한 값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대응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무한급수의 값이 유한하느냐 무한하느냐를 두고 수렴한다, 발산한다고 하는데, 발산하지 않는 무한급수가 있다는 사실이 지금 이 급수, 100미터를 달려간 뒤 10미터를 달려간 것을 반복한 이 급수가 발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도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급수가 수렴하거나 발산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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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또다른 제논의 역설에 대한 논박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하나는 시간이나 공간이 플랑크 시간, 플랑크 길이로 나뉘어져 있다는 물리학적인 논박입니다. 플랑크 길이라는 게 있어서 이것이 나뉘어질 수 없으니 무한히 나뉘어지지 않으므로 제논의 역설은 풀려진다는 입장을 가지는 것이죠.




다른 하나는 위에 있던 대응에 대한 재반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수렴판정법을 도입하면 이것이 수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하급수의 수렴판정법을 쓰면 100m부터 뛰어간 아킬레스는 길이가 1/10만큼 줄어들으니까 수렴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0/0이 되는 화살의 경우에 대해서도 현대의 미분법을 사용해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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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논박들은 사실 잘못되었습니다.




첫째로, 플랑크 길이와 플랑크 단위에 대해서는, 이것이 사실 이런 의미를 전혀 지니지 않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플랑크 길이는 플랑크 상수로부터 정의되는데, 광자의 에너지와 진동수의 관계로서 나오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나뉘어져 있다는 있다는, 이산적이라는 논의는 오직 이것을 쓰는 성질에서 나올 뿐입니다. 광자가 내는 에너지가 양자화되었으므로, 그때까지 연속적이었던 현상들이 계단처럼 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이것이 에너지 그 자체의 양자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플랑크 길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플랑크 길이는 빛의 속도로 가는 광자가 플랑크 시간만큼 간 거리로 정의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양자역학이나 중력의 공식들을 쓸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입니다. 그래서 플랑크 길이가 의미 있는 최소한의 거리라고 불리게 되죠. 하지만 이것이 플랑크 길이가 우주의 최소 길이임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비유를 들어보죠. 어떤 외계인이 지구를 관찰합니다.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데, 아파트에서 내려갈 때 계단을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계단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계단과 그 위에 있는 계단 사이에 있는 의미 없는 공간은 사용하지 않고, 오직 계단이 나와 있는 “의미 있는” 공간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플랑크 길이가 우주의 최소 길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아파트에서 계단을 사용한다”에서 “아파트의 공간 자체가 이산적이고 단절적이다”를 이끌어낸 외계인이나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주는 이산적일까요 연속적일까요? 이것에 대한 물리학자의 의견은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플랑크 길이만으로는 이 논의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실험상의 결과가 아니더라도 물리학자들은 이에 대한 이론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물리학자인 헤르만 바일의 논증을 살펴볼까 합니다. 헤르만 바일은 공간이 이산적이게 된다면 큰 결함이 생기기 때문에 공간이 연속적일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 큰 결함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있는 공간이 사각형으로 구성된 이산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만일 이런 상태에서 직각삼각형은 어떻게 구성될까요? 이산적인 공간에 가로로 8칸, 세로로 8칸인 직각삼각형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 직각삼각형의 대각선은 사각형의 이산적인 공간에 있으므로 가로, 세로와 같은 8칸을 가지게 됩니다. 사각형이 더 촘촘해져서 10칸, 15칸, 30칸으로 삼각형을 만든다고 한들 똑같이 대각선은 가로나 세로와 같은 길이를 가질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해, 빗변의 길이가 n√2 -n만큼의 차이가 가까워지지 않은 채 계속 나므로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있는 공간은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적용되는 것처럼 보이죠. 따라서 공간은 연속적이라는 논증입니다.


플랑크 길이나 이산적인 공간을 가정하므로 풀린다는 결과는 틀렸거나 더 이상한 문제들을 끌어들이는 것 같습니다.




이제, 다른 논박을 살펴보겠습니다. 수렴판정법을 쓰면 이 등비급수가 수렴한다는 것은 극한의 정의가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판정법이 기하급수 판정법이든, 근 판정법이든, 비 판정법이든 극한의 정의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가 먼저 물어보아야 하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극한값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극한값이 무엇인가를 따지기 위해서 현대 수학은 엡실론 델타 논법이라는 것을 사용합니다.






{A


뇌절 파트 A입니다. 괄호 안에 들어간 글은 많이 어려우니 넘기셔도 됩니다.






100m 뒤에 10m를 뛰어간 아킬레스를 생각해볼 때, 여기에서 쓰이는 엡실론 델타의 내용은 이것과 같습니다. 


“임의의 e>0에 대하여 M>0이 존재하여 x>M이면 항상 dist(f(x)-L)<e 일때, L은 f(x)의 극한값이다”


어려워보이는 이 내용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x와 f(x)를 맞추기 위해, x는 뛰어간 것을 실행한 횟수로 두고, f(x)는 뛰어간 거리라고 두었습니다. 이 함수의 정의역은 자연수밖에 없습니다.


e는 마치 error를 뜻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dist(f(x)-L)의 error, 차이가 어떻게 나는지를 검증하는 도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dist(f(x)-L)이라는 것은 f(x)-L의 절댓값입니다. f(x)-L와 L-f(x) 중에서 양수인 값을 고르는 함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 아킬레스의 경우에서는 L-f(x)만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M이 하는 역할을 보면, x가 커질 때 L-f(x)를 만족하는 것을 두고 M보다 큰 경우라고 둔 것이나 다를 바 없어집니다.


M을 사용하는 것 대신, “x가 충분히 커진다면”이란 말로 교체할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이것대로 저 엡실론 델타 논법의 정의를 좀 알기 쉽게 보겠습니다.




“임의의 e>0에 대해, x가 충분히 커진다면  L-f(x)<e를 유지할 때, L은 f(x)의 극한값이다”




이제 직접 대입해봅시다.


f(x)는 뛰어간 거리가 되었고, L은 111.1111...입니다.


error인 e가 커지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e를 100으로 잡는다면 x가 1일때 L-f(x)는 11.1111...이 되므로 이미 조건을 만족하죠.


e가 작아지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e가 1/1000이라고 둡시다. x가 몇이 되어야 L-f(x)임을 만족합니까? x가 계속 커져서 f(x)가 110, 111, 111.1 로 계속 반복할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L과 f(x)의 차이가 0.1111..., 0.0111..., 0.0011... 로 계속 줄어들 것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x가 5 이상인 때부터는 0.0001...에서 계속 줄어들기 때문에 L-f(x)<e를 유지한다고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e에 어떤 값을 대입하더라도 계속 줄어드는 L-f(x)를 보아서  L-f(x)<e가 나올 것이고, 이 방법을 통해서 현대수학은 L이 이 함수의 극한임을 정의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무엇인가 설명을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f(x)가 L에 그래서 도달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습니다. 여기서 하고 있는 말은 L과 f(x)의 차이가 e보다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고, x가 커질 수록 그 차이가 점점 줄어듬을 보여줄 뿐입니다. 






뇌절 파트 A가 끝났습니다.


}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L에 도달하는지,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잡아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마치 아킬레스와 거북이는 이만큼 가까이 있을 수 있다고만 알려주는 것 뿐입니다.




왜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냐면, 이것이 가무한만을 사용한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가무한이란 잠재적 무한이라고 불리는데, 단지 원소들이 추가될 뿐 무한해지지는 않는 경우를 가무한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자연수로 나열된 수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수열에서 유한한 자연수만을 선택할 경우 그 끝나지 않은 수열 뒤에서 그 선택한 자연수보다 더 큰 자연수가 있을 것인데, 이 상황은 그 어떤 유한한 자연수를 선택하든 똑같을 것입니다. 완결되고 확정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오직 “그보다 더 많아질 수 있다” 는 점으로 무한에 대한 일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 때문에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사례는, 또한 극한에 대한 설명은 가무한만을 사용한 설명입니다. 확정적으로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잡는 일 없이, 아킬레스와 거북이가 가까워진다고 해도 “그보다 더 가까워질 수 있다” 는 점으로 현대 수학은 극한을 설명합니다. 이 방법으로는 무한한 일에 대한 설명을 바랄 수 없는 것입니다.








[]








13


이렇게 된 상황에서, 이 역설에는 더 중요한 점이 들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논이 역설을 만들 때 더 큰 목적이 있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제논이 이 역설을 만들어낸 이유는 운동을 부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운동을 부정하고자 했던 이유는, 그의 스승이자 동료였던 파르메니데스의 학설을 지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파르메니데스도 제논처럼 운동을 부정하는 사상을 취했는데 이에 대해 어느 정도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소크라테스 전 시대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자연과 천체를 탐구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중요한 관찰을 하나 하게 되었습니다. 달이 그 모습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태양의 불빛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어두워지는 것뿐이고, 달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기서 그는 자연을 어떻게 접근해야 진정한 진리를 얻는지를 알아내려 했습니다.


그는 감각적인 경험은 (달의 사례처럼) 진리를 얻지 못하는 방법이고, 오직 이성으로 생각하는 논변만이 진리에 향하는 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논증을 펼치게 됩니다.


파르메니데스가 말하길, 이 세상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있다”(혹은 “이다”)라는 길이 있고,


다른 하나는 “있지 않다”(혹은 “이지 않다”)라는 길입니다.


그는 그리고 “있지 않다”라는 길을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있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말해지고 사유되기 위한 것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있음을 위한 것”이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논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없다는 것은 없다. 없다는 것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있다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는 빈 공간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빈 공간이란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은 “있지 않다”라는 길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그는 생성이나 소멸과 같은 개념을 부정합니다. 생성이라는 말이 쓰이려면 “언젠가는 없었다가 언젠가는 있게 되었다”라는 말을 써야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한 “언젠가는 없었다”라는 표현은 “있지 않다”는 길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공간을 구분하려고 하는 모든 행위도 부정합니다. 구분할 수 있으려면 “여기는 ..이지 않고 여기는 ..이다”라는 말을 써야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한 “여기는 ..이지 않고”라는 표현은 “있지 않다”는 길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종합하면, 이 세상은 단 하나의 “있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고, 시간에 의해 생성되거나 소멸되는 것 없이 “그 자체로 놓여 있으며”, 모든 방면으로부터 완결되어 있다고 논증을 펼쳤습니다. 진흙을 “잘 둥글려진 공의 덩어리” 모양으로 만든 것처럼, 이 세상 하나가 존재로 꽉 차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학설을 위해 그는 운동을 부정합니다. 운동이라는 것이 있으려면 “이때 ..에 있었다가 이때 ..에 있다”라는 말을 써야 하지만, “..에 있었다”라는 표현은 “있지 않다”는 길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그 모든 운동은 무엇일까요? 달이 햇빛에 가려지기만 할 뿐 없어지지 않는다는 점처럼, 감각적인 경험은 사람들을 많이 속이고 있습니다. 파르메니데스는 감각은 기만적인 것이라 믿어서는 안되고, 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나쁜 논리로 보일 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논증입니다. 이것은 인류 최초의 논증 중 하나입니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논증이라는 점을 중요시한 칼 포퍼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증명이 논박이라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의 논박이며 경험적인 이론에 대한 그리고 변화가 존재한다는 이론에 대한 분명히 많은 시험을 가진 논박이다. 제논과 고르기아스의 증명도 그러하다. 그리고 물리 수학적 증명들 중 대부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 증명은 간접적이기 때문이다. 논박은 논증의 논리, 즉 증명의 논리 영역에서 최고의 지위를 누린다. 이것은 예전의 소크라테스에게 그리고 내 생각에는 플라톤에게 최고의 영예를 얻고 있다.”




제논은 파르메니데스와 20년의 터울을 갖는 제자이자 동료였으며, 파르메니데스의 의견을 반대하는, 특히 운동의 없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반박들을 논파하기 위해 이 역설을 세운 것입니다.


제논이 제자가 된 뒤부터 약 30년 동안 논증의 형태는 제논의 역설의 형태처럼 고도로 추상화되었습니다.




이것까지가 제논의 역설에 대한 뒷배경입니다.








14


제논은 최초로 논리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달한 사람입니다.


그의 스승인 파르메니데스는 내용은 있었으나 형식은 하나의 운율을 가진 시로 자신의 철학을 표현했고, 파르메니데스의 라이벌인 헤라클레이토스는 오직 명언으로만 자신의 철학을 표현했죠.


바로 이 제논이란 사람부터 자기의 이론을 논리로 전달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제안이 나옵니다.


이것이 원래 역설이 아니라 제논의 논증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봅시다.


이 논증을 내려놓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요?


운동을 부정한다는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역설은 사라지고, 이것은 오히려 오래 전 사람의 불충분한 주장으로 남게 됩니다.




하지만 내려놓는 것은 반박이라, 논증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제논이야말로 이것을 가장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꼬여 있는 문제를 제시한 뒤, 상대방이 반박하지 못하면 그 문제가 참이라고 주장하는 수법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상대방이 그저 문제를 내려놓는 것에 그친다면, 제논은 그의 이론이 참이라고 계속 주장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토론의 수학화가 가능한가?


과연 논리에 반박하지 못했다고 그의 이론을 참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말입니다.






제논은 어쩌면 논리라는 오류를 인식한 최초의 사람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어쩌면 그 이후의 세상과 인류의 모든 역사를 수반한 논리에 대한 희망엔 맨 처음부터 비논리적인 낙인이 찍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15


러셀은 제논의 역설이 아주 심도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것이 해결된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논부터 오늘날까지, 각 세대의 최고의 지성은 차례로 문제를 공격했지만, 대략적으로 말하면,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날은, 이것을 완전하게 풀었다. 수학에 익숙한 사람들을 위한 이 해결책은, 더 이상 최소한의 의심이나 어려움을 남기지 않을 정도로 명확하다. 해결법은 데데킨트가 처음 시작해서 결정적으로 칸토어에 의해 해결되었다.”


그래서 칸토어가 어떻게 해결한 것일까요?




러셀이 말하는 칸토어의 제논의 역설 해결법은, 초한수와 측도론을 사용하는 증명입니다.




첫번째와 두번째 역설을 해결할 때는 초한수를 씁니다.


아킬레스와 거북이가 있습니다. 아킬레스가 처음 거북이가 있었던 위치에 도달하면 1번째라고 하고, 아킬레스가 그 뒤의 거북이가 있었던 위치에 도달하면 2번째라고 합시다.


이렇게 3번째, 4번째… 를 반복하여 무한히 반복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이 역설이었습니다.


여기서 칸토어가 한 것은 초한수를 둔 것입니다. 무한한 수에 대한 서수를 초한수라고 합니다. 보통의 수는 무엇이 얼마나 있느냐를 확인하는 기수인데, 이것이 아닌 무엇이 어떻게 나열되어 있느냐를 확인하는 서수를 두면 무한에 대한 경우 기수와는 다른 결과를 가지게 됩니다. 가장 먼저 나오는 초한수는 ω이라고 하는데, 이후부터 ω+1, ω+2라고 정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아킬레스는 1번째에도 도달하지 않고 2번째에도 도달하지 않지만, 무한한 수인 ω번째에는 거북이와 같은 위치에 도달하고, ω+1번째에는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는다는 설명으로 역설을 해결합니다.




세번째 화살의 역설을 해결할 때는 측도론을 씁니다.


시간은 최소의 단위인 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실수선은 점으로 이루어졌고, 점의 길이는 0입니다. 그리고 0부터 1까지의 구간의 길이는 1입니다. 


측도는 길이에 대한 일반화입니다. 구간이 더해지면 측도가 더해지고, 구간이 평행이동하면 같은 길이므로 측도도 같습니다.


하지만 이 측도는 일반적 산술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직선에 있는 점의 개수로는 측도의 크기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또한, 측도가 0보다 큰 점들의 집합은 셀 수 있는 집합보다 훨씬 더 큰 셀 수 없는 집합인데, 그래서 설령 무한한 수의 점이라 하더라도 셀 수 있는 집합, 예를 들어 유리수들을 모은 집합은 측도가 0입니다.


따라서 이 측도를 사용하여, 화살이 순간, 점에 간 길이는 0이고, 무한히 더하는 것은 셀 수 있는 무한으로 제한되었으므로 0을 더하는 것으로는 0밖에 되지 않지만, 그 구간의 측도는 0보다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으로 역설을 해결합니다.




(현재는 이것이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 내용에 필요하므로 참고의 용도로서 여기에 올립니다.)




역설을 해결한다고 꺼낸 도구가, 딱 알맞게도, 그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초한수와 측도론인 것입니다.


이것으로 역설은 해결이 된 것일까요?


저는 이것이 논의의 끝이라고 보여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논의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B


뇌절 파트 B입니다. 괄호 안에 들어간 글은 많이 어려우니 넘기셔도 됩니다.


지금 이 글 전체가 다 괄호 안에 있으니 다음 글을 보세요...






16


그렇다면 초한수와 측도론에서 어떤 문제점을 말할 수 있을까요.




칸토어는 초한수의 개념을 고안한 때에 둔 어떤 목표가 하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쓰이지 않는 표현이지만, 칸토어는 서수 중에서 유한한 수의 경우를 first number class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초한수인 ω, 그리고 ω+1이나 ω+2에 대해서 second number class라고 했습니다. 오직 그 전임자(predecessor)들의 집합이 셀 수 있는 집합일 때에만 second number class라고 했고, 이렇게 그는 ω와 ω+1을 넘어서 ω+ω인 ω·2, ω·2에서 ω·3, 그리고 이를 넘어선 ω·ω 등을 구성해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second number class의 집합의 크기는 first number class의 집합의 크기보다 더 큼을 증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칸토어는 third number class라는 것을 도입합니다. 전임자들의 집합이 처음으로 셀 수 있는 집합보다 더 큰 경우를 서수로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fourth number class, fifth number class... 를 도입했습니다.




이러한 서수에 대한 생각은 그의 정렬 집합에 대한 생각을 위해 나왔습니다. 집합에 순서관계를 부여할 수 있고, 그때 어떻게 부분집합을 잡아도 최소원소가 있는 경우 그 집합을 정렬집합이라 합니다. 자연수에 우리가 아는 <가 순서관계로 정의된 경우는 이미 0 혹은 1로 시작하기 때문에 최소원소가 있기에 정렬집합이지만 , 정수에 <로 정의된 경우는 부분집합을 {-1, -2, -3, …}로 잡으면 최소원소가 없기 때문에 정렬집합이 아닙니다.


칸토어는 모든 집합이 정렬집합이 될 수 있다고 봤고, 이를 위해서 실수 집합을 third number class를 사용함으로서 정렬집합으로 만들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정렬 정리입니다.




나중에 체르멜로는 이 모든 집합이 정렬집합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을 더 직관적이었던 선택 공리를 통해서 증명했습니다. 


선택 공리가 다른 공리와 독립이고 선택 공리가 정렬 정리와 동치이며, 이러한 역사를 볼 때 정렬 정리를 하나의 공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공리라는 점은 이상해 보입니다. 공리라고 말할 때 일반적인 뜻은 증명할 필요가 없는 자명한 진리를 진리라 가정한 명제를 뜻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렇게 자명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이야기하겠습니다.






17


초한수와 정렬 정리의 관계를 더 설명하기 전에, 측도론에 대한 문제점을 설명하겠습니다.




이것은 다른 화살의 이야기입니다.


원의 반지름이 1인 과녁이 있다고 합시다. 여기서 화살을 날려, 원의 중점을 맞힐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확률을 제시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양의 실수를 대입해도 그보다는 작은 값을 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0도 아닌 것 같습니다. “원의 중점을 맞힐” 사건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답은 0입니다.


이것은 “원의 중점을 맞힐” 사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건은 분명히 있습니다.


이것이 0인 이유는 이것이 0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는 어떨까요. 원의 반지름이 1이고, 좌표축에 중점을 (0,0)으로 둔 뒤에, 화살이 x와 y값이 모두 유리수인 경우의 점을 맞힐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이것 또한 답은 0이라는 결과가 나옵니다.


점의 개수가 무한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답은 0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는 어떨까요. 원의 반지름이 1이고, 중점을 지나는 길이 2의 선분 하나를 놓습니다. 화살이 선분을 맞힐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답은 0입니다.




이것을 measure 0라고 합니다. 이것은 제논의 역설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측도론을 통해 이렇게 ‘크기를 재기’ 위해서는 이런 비직관적인 결과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 비직관적인 결과가 나옵니다.


이것은 잴 수 있다고 합니다. 0이라고 해도 잴 수 있는 것입니다.


잴 수 없는, 측도를 정의할 수 없는 경우가 존재합니다.






{C


뇌절 파트 C입니다. 괄호 안에 들어간 글은 많이 어려우니 넘기셔도 됩니다.






18


수직선을 하나 생각합시다.


-1부터 2까지의 구간의 길이는 3입니다.


0부터 1까지의 구간의 길이는 1입니다.


그리고 화살처럼 한 순간, 하나의 점의 길이는 0입니다.




그리고, 0부터 1까지의 숫자를 정렬합니다.


이것에 정렬 정리가 된다고 생각하세요. 이것은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을 빠짐없이 나열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간단한 크기 순서, <의 기호로는 표시할 수 없습니다. 0 다음 숫자라는 것을 정의할수도 없을 테니까요. 어쩌면 이것을 표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다고 봅시다.




그리고 정렬된 0부터 1까지의 실수를 초한수를 사용해서 대응한다고 합시다.


여기서 v라는 집합을 하나 만듭시다. v의 첫번째 원소는 그 정렬된 0부터 1까지의 실수 중 첫 숫자입니다. 그리고 v의 두번째 원소는 정렬된 숫자에서 v의 첫번째 원소와의 차이가 유리수가 아닌 첫 숫자로 합시다. 그리고 v의 세번째 원소는 v의 첫번째 원소와도 v의 두번째 원소와도 차이가 유리수로 나지 않은 첫 숫자로 두는 것입니다. 이렇게 v의 네번째 원소, 다섯번째 원소, 를 무한히 반복하여, 그 뒤에도 더 무한히 반복하여, 정렬된 0부터 1까지의 실수 중 마지막 수까지 과정을 진행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v가 만들어집니다.




이 v를 수직선상에 놓습니다. 0과 1 사이에 v의 점들이 놓여 있습니다.


v+1이라는 집합을 수직선상에 놓아봅시다. v+1은 v의 모든 원소에 1을 더한 집합입니다. v+1의 점들은 1과 2 사이에 놓여 있을 것입니다.


이제 v의 모든 원소에 어떤 유리수, 예를 들어 3/7을 더한 v+3/7이란 집합을 수직선상에 놓는다고 생각해봅시다.


여기서 v와 v+3/7 간에 중복이 있는지를 생각해봅시다. 모든 v의 원소들은 각각이 유리수로 차이가 나지 않게 구성되었습니다. 이는 어떤 v의 원소도 각각이 3/7만큼 차이가 나지 않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v와 v+3/7 간에는 중복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v+1와 v+3/7 간에도 중복이 없습니다.




v+3/7에 이어서 다른 유리수를 더한 집합을 수직선상에 놓아서, -1부터 1까지의 모든 유리수에 대해 집합을 만들어 이런 식으로 수직선상에 놓아봅시다.


여기서 하나의 사실을 알려주겠습니다. 이렇게 할 경우, 0부터 1까지의 모든 숫자는 v나 v에 유리수를 더한 집합 중 하나에 속하게 됩니다.


이것에 길이가 있다면 0부터 1까지의 모든 숫자가 속하니 1보다는 클 것이고, 모든 숫자가 -1부터 2 안에 속하니 3보다는 작을 것입니다.


여기서 v 하나의 길이가, 측도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v 하나의 측도는 0이 아닙니다. v들의 합은 1 이상이어야만 합니다. 0의 합은 0일 수밖에 없습니다.


측도는 어떤 양수가 될 수 없습니다. v들은 무한하고, v들의 합이 무한히 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v들은 셀 수 있습니다. 덧셈의 원칙은 계속 적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0이어서 0인 경우, 양수여서 무한한 경우, 이 이외에 다른 경우는 없습니다.


v는 측도를 정의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뇌절 파트 C가 끝났습니다.


}






19


이런 측도를 정의할 수 없는 집합을 비가측집합이라고 부릅니다.


측도가 불가능한 집합을 사용해서 나오는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 같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반직관적인 결과를 함의합니다. 




이 비가측이란 것으로부터 최근 굉장히 유명해진 역설이 나옵니다. 바로 바나흐-타르스키 역설이라고 하는데, 유튜브 Vsauce 채널에서 다뤄서 아실 수도 있습니다. 링크는 여기 있습니다.


3차원 상의 공을 유한 개의 조각으로 잘라서, 변형 없이 순수 공간이동만으로 재조합하면 원래 공과 같은 부피를 갖는 공 두 개를 만들 수 있다는 정리입니다. 




이 영상에서 도형을 조각내는 방법, 분해하는 방법이 많이 괴상하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지금 위에 다룬 v를 구성하는 방법도 아주 비슷하게 괴상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이것을 수학자들은 “역설적 분해”라고 합니다. 이렇게 이상한 방법으로 선택하고 분해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역설이라고 하고, 수학자들도 “역설적 분해”라고 이름붙였지만, 현대수학에서 technically,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증명되었으므로 정리입니다. 수학자들은 보통 이 역설, 이 정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결과가 직관과 맞지 않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수학의 중요한 점입니다. 처음에 맞부닿친 사람이라면 선택 공리의 결과가 이상하겠지만, 선택 공리를 계속 사용하고부터는 선택 공리의 결과가 아닌 사례가 더 이상해 보이게 됩니다. 이것을 오래 공부한 수학자들은 기저가 없는 벡터공간이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모든 집합이 가측이게끔 집합의 정의가 한정된 경우를 괴상하다고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서는 바나흐 타르스키 역설이 잘못되었다는 생각도 이해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저는 이것에 동의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사실, 선택 공리를 공리로서 받아들인 것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고, 선형대수학이라도 안다면 아주 설득력과 정당성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택 공리가 직관을 아주 벗어나는 것이라는 의견은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직관과 아주 다른 것을 받아들인 뒤 그에 따른 정리를 받아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엄밀히 말하는, “논리”적인 것을 요구하는 상황에서는 좋은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반직관적인 것에 대해 적응이 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직관적인 것이 엄밀하지 않은 것처럼 수학자들의 생각도 똑같이 엄밀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다른 직관을 만든 것입니다.






뇌절 파트 B가 끝났습니다.


}






{D


뇌절 파트 D입니다. 괄호 안에 들어간 글은 많이 어려우니 넘기셔도 됩니다.






20


이제 선택공리가 가진 문제를 그만두고 무한 공리가 가진 문제를 말할 때입니다.


그 전에, 다음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 이야기를 들려주겠습니다.




현대 수학은 실수 체계를 씁니다. 실수는 수학에서 많이 쓰이는 것이지만 엄밀하게 정의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실수를 엄밀하게 구성하기 위해서 그 당시 무시받던 무한집합 이론을 인정했다는 사실도 알면 좋습니다.




이 무한집합을 인정하게 됨으로서, 실수 체계도 있지만 다른 체계를 가진 수 체계를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 hyperreal number라는 게 있는데, 이 체계를 써서 제논의 역설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으로 만들어진 해결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hyperreal number는 무한소라는 개념을 정의할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무한소란 실수에는 없는 아주 작은 수를 뜻합니다. 그렇게, 실수와 실수 사이에 무한소만큼의 차이를 보이는 무한한 수의 hyperreal number가 있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또한 hyperreal number의 성질 중 하나를 이 해결책에다가 넣었습니다. hyperreal number와 hyperreal number 사이의 무한소에 대해서는 어떤 방법의 측정이나 관찰을 할 수 없다는 점을 여기에 넣었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순간으로 이루어져서 점으로 표기할 수 있지만 점과 점 사이에 관측할 수 없는 운동이 있다고 보고 역설을 해결했습니다.




정확한 이해는 hyperreal number를 자세히 이해해야만 가능하므로, 앞 단락을 이해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해결책이 꽤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이 해결책을 제시한 사람조차도 많이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이론은 운동의 사실을 설명하지만 ‘현재 운동’의 본성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현재 운동’이라는 개념이 있다면, 무한소에서의 열린 구간을 정의한 것을 가리켜야만 한다. 사실, 무한소에서 ‘현재 운동’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잘 정의할 수 없다. 물체가 구간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순간적으로 점프하거나, 구간 내를 불균일하게 이동하거나, 구간 내를 균일하게 이동할 수 있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 물체는 구간 내에서는 어떤 시공간 내에도 없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 이론은 운동을 무한소인 거리의 유한한 단계로 나타낸다. 만일 어떤 사람이 ‘현재 운동’을 정의하고 싶다면, 이 운동 이론과 일치하는 방법으로만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제논의 역설과 부딪치지 않은 채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증명할 수 있지만, ‘현재 운동’이 무엇일지는 증명해낼 수 없다. ‘현재 운동’은 관찰할 수 없는 무한소의 구간에 있기 때문이다. 변화의 과정은 숨겨져 있지만 변화의 효과가 보여진다.”




운동은 측정이나 관찰을 할 수 있지만, 현재 어떻게 운동하고 있느냐를 묻는 상황에서는 전혀 대답할 수 없게 만드는 상황을 만들어 놓습니다.




이것은 현재 운동이 무엇인지 모르는 문제를 낳습니다. 무한소 내의 구간에서는 한 물체가 어떻게 운동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 어떻게 운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논의 역설에 맞서서 운동이 존재한다는 반론이 될 수 있냐고 비판할 수 있을 것입니다.






21


이것을 좀 더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논의 역설과 비슷한 시기를 공유하는 거짓말쟁이 역설은 또한 여러가지 이야기할 점이 많은데, 가장 중요한 점으로는 복수(revenge)의 문제가 있습니다. 거짓말쟁이 역설을 해결하는 방법이 제시되었을 때 역설을 약간만 변형할 경우 또다른 역설에 빠지게 할 수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혀졌습니다.




거짓말쟁이 역설이 어떻게 복수하는지 보겠습니다.


“크레타인이 이렇게 말했다.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이다’. 이 말이 참이면 그 크레타인은 문장대로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이 거짓이면 그는 그 말대로 참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역설이 발생한 원인은 모든 명제가 참이거나 거짓일 거라고 판단하는 배중률 때문인 것입니다. 참도 거짓도 아닌 ‘미확정’이라고 하면 거짓말쟁이 역설은 해결됩니다.”


“문장 R을 생각해보자. ‘이 문장은 거짓이거나 미확정이다.’ R이 참이면 문장대로 R이 거짓이거나 미확정이라는 것이 참이다. 그러므로 R은 참이 아니다. R이 거짓이라면 문장대로 R이 거짓이거나 미확정이라는 것이 거짓이다. 그러므로 R은 참이다. R이 미확정이라면 R이 진술하고 있는 것이 미확정이라는 것이고 R은 거짓이거나 미확정이라고 진술하고 있기 때문에 R은 참이다.”




제논의 역설 또한 이렇게 복수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복수하는 제논의 역설”을 제시하겠습니다.




“움직이는 화살이 과녁에 맞는 때의 운동이 무엇인지를 정의할 수 없다.”


혹은, “움직이는 화살이 어떻게 도착점에 도달하는 지를 알 수 없다.”




이것은 이 해결책에서 운동이 아닌 “현재 운동”을 지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비를 전혀 할 수 없게 됩니다.


이 복수하는 역설은 측정이나 관찰을 할 수 없다거나, 정의를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왜 사실상 문제를 푼 것이 아닌 것인지를 명료하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뇌절 파트 D가 끝났습니다.


}






22


Max Black이라는 철학자는 러셀이 내놓은 무한공리를 사용한 해결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Max Black이 가장 주목한 부분은, 러셀의 해결 방법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주장한 한 내용이었습니다. 




"infinite sequence of tasks", "infinite series of tasks"라고 불리는 것인데, sequence와 series는 여기서 수열이나 급수가 아니라 일상용어로 쓰이는 일련, 연속, 반복을 의미합니다. task는 일을 뜻하는 것입니다. 러셀의 옹호자들은 이 "무한한 일련의 task(일)들"을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오직 인간의 상상력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관점을 지지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일, task에 대해 일이라는 한국어를 쓰지 않고 task라고 영어로 쓰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아시게 될 것입니다.)




Max Black은 복수하는 제논의 역설을 하나 가정합니다.


사고실험으로 Alpha라는 기계를 도입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왼쪽 상자에는 구슬로 가득 차 있고, 오른쪽 상자는 비어 있다. Alpha라는 기계가 작동된다. 처음 1분동안 구슬을 가져가서 빈 상자에 옮겨 놓고, 그 뒤 기계는 1분간 쉰다. 그 다음 30초동안 기계는 왼쪽에 있는 두 번째 구슬을 가져가서, 그것을 옮기고, 그 뒤 기계는 30초간 쉰다. 세 번째 구슬은 15초 안에 움직인 뒤 15초간 쉬고, 그 다음 구슬은 그 시간의 반 안에 움직인 뒤 쉰다. 정확히 4분이 지나자 기계가 멈추게 되고, 왼쪽 상자는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비어 있던 오른쪽 상자에는 구슬이 가득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 Alpha라는 기계는 러셀의 해결책대로라면 충분히 가능하고, 실제로는 불가능할 지 몰라도 논리적으로 가능할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Beta라는 기계를 도입합니다.


“이제 왼쪽 상자에 구슬 하나만 있게 하고, Alpha 기계가 쉬는 동안 구슬을 돌려주는 기계가 있다고 하자.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기계를 Beta라 한다. 기계의 일은 예전과 변하지 않았다. Beta의 작업의 어려움은 Alpha와 작업이 똑같은데, Alpha는 구슬을 무한히 옮기는 것이고, Beta는 그 같은 구슬을 다른 쪽으로 무한히 옮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Alpha가 움직일 수 있다면 Beta가 움직일 수 있다. Alpha가 task를 성공할 수 있다면, Beta가 task를 성공할 수 있다. Alpha가 성공할 수 없으면 Beta가 성공할 수 없다.”


그리고 여기서 이 Beta라는 기계가 있음으로서 무한한 일련의 task(일)들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구슬을 옮기는 그 순간 다시 오른쪽에 구슬이 있으므로 task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논의 역설과 Alpha, Beta를 보면 알겠지만 단계는 무한하지만 시간은 유한하다는 공통점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복수하는 제논의 역설을 supertask라고 부릅니다. supertask는 무한히 많은 일련의 단계로 구성되지만 유한한 시간 안에 완성되는 task를 말합니다.




이런 supertask는 여럿이 있고, 복수하는 제논의 역설도 여럿이 있다는 점도 알려줘야 할 점입니다. 이 supertask라는 것이 진정 역설적인 것이고, 이것이 모순을 보인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사람으로 James Thomson이 있습니다. 그는 톰슨의 램프라는 예시를 제시했습니다.




“램프에 스위치가 하나 있다. 꺼진 램프에 스위치를 누르면 램프가 켜지고 켜진 램프에 스위치를 누르면 램프가 꺼진다. 누군가 스위치를 무한 번 누른다고 가정하자. 그는 첫째에 스위치를 1/2분 안에, 두 번째에 스위치를 1/4분 안에, 세 번째에 스위치를 1/8분 안에 누르고, 남은 시간의 간격에 무한한 반복을 한다. 스위치를 무한히 반복하여 누른 후 램프의 최종 상태를 생각해본다. 램프가 켜져 있는가, 꺼져 있는가? 그것은 켜질 수 없다. 켜져 있었을 때마다 전원을 껐기 때문이다. 꺼질 수 없다. 꺼져 있었을 때마다 전원을 켰기 때문이다.”




램프의 최종 상태에 있어서 램프가 켜져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램프가 꺼져 있다고 할 수도 없는 경우를 만들어 냅니다.


수학적인 공식을 만들어 이를 해결하려고 하더라도 극한의 사용이나, 초한수의 사용이 이 문제의 해결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것이 켜져 있는지 꺼져 있는지는 문제가 남습니다.






23


이 톰슨의 램프에 대해 반박을 한 사람으로 Paul Benacerraf가 있습니다. 베나세라프는 이 톰슨의 램프라는 논증에 큰 결점이 있다고 주장한 사람입니다.


그 핵심은 이렇습니다. supertask가 진행될 때, 1분 후 램프의 상태에 대한 내용은 그 전까지의 램프의 동작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램프가 켜져 있다는 설명이 나올 수 없고, 램프가 꺼져 있다는 설명도 나올 수 없습니다. 둘 다 될 수 있고, 단지 설명이 부족할 뿐이라는 게 설명입니다.




마지막 상태에 대한 내용을 그 전의 동작으로부터 설명할 수가 없으므로, 이 문제는 아직 불특정적이라는 것이 그의 의견으로, 이것을 통해 각각 supertask가 일어난 뒤 램프가 켜지는 경우, supertask가 일어난 뒤 램프가 꺼지는 경우의 사고실험을 각각 구현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반박에 대해서도 말할 부분은 존재합니다. 그는 이 톰슨의 램프가 불특정적이고, 문제의 설명이 부족하다는 이 논증 뒤, 모든 역설을 만드는 supertask가 불특정적이고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 모든 supertask에서의 역설이 이것을 따를지는 불특정적인지 아닌지를 요구하기 때문에 남겨져 있습니다.




supertask에 대한 다른 예시들은 Alpha, Beta나 톰슨의 램프를 제외하고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거꾸로 된 톰슨의 램프라는 것이 있습니다. 묻는 곳이 거꾸로 되었습니다. 다른 램프가 있어서, 어떤 시간에서 1/2분이 지난 뒤에 램프는 켜져 있었고, 어떤 시간에서 1/4분이 지난 뒤에는 램프가 꺼져 있었고, 1/8분이 지난 후에는 램프가 켜져 있었던 것을 반복했었는데, 이 supertask가 시작되기 직전 그 어떤 시간에 램프 상태가 어떤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베나세라프의 해결 방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것 또한 불특정된 문제이며 켜져 있는 상황과 꺼져 있는 상황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




여기서 묻는 곳을 거꾸로 바꾼 또다른 supertask 문제가 있습니다.


“소년, 소녀, 그리고 개는 직선 도로에서 같은 지점에 있다. 소년과 소녀는 앞으로 걸어간다. 소년은 시속 4마일로 걷고, 소녀는 시속 3마일로 걷는다. 그들이 전진할 때 개는 시속 10마일로 그들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개가 방향을 바꾸는 것은 순간적이라고 가정한다. 한 시간 후, 개는 어디에 있고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가?”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답을 제시합니다. 개는 소년과 소녀 사이의 어느 곳에서도 있을 수 있고 어느 쪽으로도 향할 수 있다는 것이 그 답입니다.


증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시간 후에, 강아지를 소년과 소녀 사이의 어느 위치, 어느 방향으로든 두어 놓습니다. 이제 시간을 역행한다면 세 사람은 출발점으로 같은 순간에 돌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로 답이 있고 이것이 답이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러한 답을 제시해서도 안되는 설명이 부족한 불특정한 문제일까요?


이 문제는 실제로 답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어떠한 점에서 답이 불특정한지도 제시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진실로 큰 문제점이 나오게 됩니다. 지금 이야기하지 않고 나중에 이야기하겠습니다.








[]








24


어떤 사람은 이러한 supertask와 제논의 역설은 문제가 되는 부분이 다르므로 제논의 역설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Wesley Salmon이란 사람은 제논의 역설은 연속적으로 이루어짐에도 supertask의 사례들은 단계마다 달라지는 이산적인 것이므로 제논의 역설에는 문제가 없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Adolf Grünbaum이란 사람이 제시한 “스타카토 제논의 역설” 이후로는 없어졌습니다. 아킬레스와 같이 뛰어서 도착점에 같이 도착하는 육상선수가 하나 있다고 합시다. 그는 시간의 반을 쉬는 데, 다른 시간의 반을 아킬레스의 2배의 속도로 뛰는 데 써서 구간의 1/2을 아킬레스와 같이 도달합니다. 또다시 반을 쉬고, 반을 뛰어서 구간의 3/4을 아킬레스와 같이 도달합니다. 이것을 반복하여 아킬레스와 같이 도착하는 육상선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킬레스와 이 육상선수는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supertask에서 나오는 문제와 그에 대한 상반된 의견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Ross–Littlewood paradox가 있습니다. 이도 또한 같은 종류의 supertask 중 하나인데, 답변이라고 제시되는 것이 극명하게 다릅니다.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정오 1분 전, 빈 꽃병과 무한히 많은 공이 있다. 첫째로 정오 1/2분 전에 10개의 공이 꽃병에 추가되고 1개의 공이 제거된다. 둘째로 정오 1/4분 전에 10개의 공이 꽃병에 추가되고 1개의 공이 제거된다. 남은 간격에 무한한 반복을 한다. 일이 끝났을 때 꽃병에 공이 몇 개 들어 있는가?”




처음 나오는 의견은 이 꽃병에 공이 무한히 많다는 것입니다. 10개의 공에서 1개의 공을 제거하므로 9개의 공이 추가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처음 제기한 Littlewood는 예상과 반대로 이 꽃병에는 공이 없다는 의견을 세웠습니다. 그는 공에 숫자를 적어낼 경우 더 명료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공에 숫자를 적어서 다시 이 문제를 보았을 때, 1,2,3,4...라 적힌 공이 처음에 1부터 10까지 추가된 뒤, 1을 제거하는 것, 다시 11부터 20까지 추가된 뒤, 2를 제거하는 것과 같다고 봤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어떤 n을 제시해도 n번째 상황에서 n이라 적힌 공이 제거가 되므로 이 꽃병에는 공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에는 다른 의견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조건에 따라 달라지며, 어떤 방법으로 공을 제거하는지에 따라 내가 원하는 수의 공을 남겨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8개를 남기고 싶다면, 1부터 10까지 추가되었을 때 1부터 8까지 남겨둔 뒤 9를 제거하고, 11부터 20까지 추가되었을 때 10을 제거하고, 21부터 30까지 추가되었을 때 11을 제거하는 것을 반복하는 방법을 사용하면 일이 끝났을 때 8개만을 남겨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약간의 조작으로 모든 자연수에 대해서도 남겨둘 수 있다는 것이 이 의견입니다.


또 다른 의견으로 베나세라프의 해결 방법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불특정적이며, 일이 끝날 때의 상황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의 일들로부터 설명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supertask의 역설이 불특정적이기 때문이라면 이렇게 주장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나온 마지막 의견으로 Jean Paul Van Bendegem의 의견이 있습니다. 문제가 잘못 구성되었다는 의견입니다. 이것은 이 문제로부터 supertask의 구성 자체를 의문시하는데, 무한히 많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정오라는 시점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고, 정오에 공이 얼마나 있는지를 묻는 것은 정오에 도달한다는 것을 가정하므로 질문이 모순을 내재하고 있다는 의견입니다.






25


이제 악명 높은 의견이 하나 남습니다.


“수학은 정해진 공리로부터 연역된 정리들로 이론을 만들어내는 학문이다. 공리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맞는 것이고, 더 이상의 의문을 가져서는 안된다.”


이것은 논의를 끊기 위해서 나옵니다.


지금 이 이야기에선, 좀 더 직접적으로 ZFC 공리계라고 직접적으로 공리를 제시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ZFC 공리계에서 선택공리와 무한공리가 있고, 현대 수학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공리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학자들은 공리를 이렇게 형이상학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현대의 수학자들은 공리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자명한 진리” 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철학이 수학처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1900년대 초반 논리학자 중 많은 사람들은 논리주의자였습니다. 그들은 공리를 진짜 증명할 필요가 없는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수학자들 중 대부분은 논리주의자가 아닌 형식주의자였습니다. 형식주의자는 “왜 이게 공리이냐”라는 말에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체스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왜 폰은 처음에는 두 칸을 갈 수 있을까요? 왜 킹이 한 번도 안 움직였다면 룩과 함께 두 기물을 동시에 옮길 수 있는 것일까요? 만약 체스 기사에게 이것을 진지하게 문제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이런 규칙으로서 나오는 체스 게임들이 어떻게 되어있는지다’라고 할 것입니다. 수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리는 자명한 진리가 아닌 규칙 같은 것이고, 진짜로 중요한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일 때 나오는 진짜 수학의 정리들입니다.”


ZFC를 고안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쓰이는 표현은 아니지만) 집합론주의자들이라 하는데, 이들은 이런 형식주의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럼에도, 이렇게 말했음에도 악명 높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통 이런 말에 대해선 현학적인 말을 길게 써서 해결하는 게 보통이지만, 저는 다행히도 굉장히 좋은 반례, 논의를 끝낼 수 있다기엔 너무나 반대되는 반례를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대한 앤드류 와일즈의 풀이는 ZFC를 벗어났다는 점입니다.


앤드류 와일즈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의 증명을 위해 그 전에 있었던 심화된 현대수학의 정리를 가져다 왔습니다. 이 때 그는 SGA IV라는 책에 있는 정리들을 가져다 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SGA IV에 있는 정리들 중 몇몇은 Grothendieck universe라는 것의 존재를 가정하고 만들어진 것인데, 이 Grothendieck universe는 ZFC에서 연역될 수 없는 독립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이 굉장히 쉽게 ZFC에서 연역될 수 있게 우회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라고 해도 “수학은 ZFC의 공리들로부터 연역된 정리들로 이론을 만들어내는 학문이다”를 강조할 수는 없습니다.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한 사람을 앤드류 와일스가 아니라 이 사소한 점을 알아내고 ZFC로 최초로 옮긴 어떤 한 대학원생이라고 말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논의가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26


이런 것은 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전혀 문제로 두지 않습니다.


그들이 전혀 문제로 두지 않는 이유는 좀 더 현실적이고 더 열매가 많은 문제에 신경쓸 뿐, 이러한 문제는 다른 데다 맡겨두기 때문, 철학자의 문제일 뿐이라고 밀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견은 이견입니다. 이런 역설, 이런 질문, 이런 의견은 이런 것을 위해 제기되었습니다.




무한 공리와 정렬 정리로 불린 선택 공리와 같은 것은 다른 공리로는 증명이 불가능합니다. 이 공리가 없어도 그와 독립적인 다른 형태의 수학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 다른 형태의 수학은 수학입니까?


수학의 정초에 대한 문제는, 다시 말해 수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은 문제가 남았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문제들이 전부 “수학으로 풀 수 있는 문제”입니까?




여기서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라는 사람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는 러셀과 함께 수학 원리라는 책을 쓴 공저자입니다.


대표적으로 수학 귀신이란 책에서도 나온, “1+1이 2라는 것의 증명으로 온갖 기호가 나오는” 그 기호뭉치들이 바로 수학 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화이트헤드와 러셀은 선구자인 프레게와 함께 수학은 논리의 일부이며, 수학적 참은 논리적 참임을 표명한 논리주의자였습니다.


선구자인 프레게는 이것을 위해 매우 노력했지만 러셀의 역설이라는 것에 무너졌고, 러셀과 함께 쓴 수학 원리는 10년이라는 세월을 들여 매우 노력하여 작업했습니다.


그러나 수학 원리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러셀의 역설을 피하기 위해 ramified type theory라는 것을 썼는데, 이것을 쓰면 “공집합이 아닌 상계를 지닌 실수의 집합은 모두 최소 상계를 갖는다” 같은 일반인에게는 어려울지 몰라도 수학자에게는 아주 기본적인 정리조차 정식화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해결하는 환원 가능성 공리라는 것을 도입했고, 평소에 논리를 매우 신봉했던 러셀조차도 이것이 왜 공리인지에 대해 거의 얼버무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수학자들과 논리학자들, 철학자들은 거의 모두 이 공리에 대해 비판했습니다.


환원 가능성 공리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대신 비유를 들어주겠습니다. “이 세계를 지키는 것은 코끼리입니다. 이 세계 아래에 코끼리가 있어서, 세계를 받춰주기 때문에 이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코끼리 발 아래엔 무엇이 있습니까?” “거북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거북이 아래엔 무엇이 있습니까?” “또 다른 거북이입니다.” “그 아래에도 거북이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한 거북이가 조금이라도 다르게 행동한다면 모든 거북이와 코끼리와 세계가 무너지는 것 아닙니까?” “그러지 않습니다. 모든 거북이는 코끼리 바로 아래에 있는 거북이와 똑같이 행동합니다.” “어찌 그렇습니까?” “어찌 그렇다니요? 당연하잖아요.”


러셀은 이 수학 원리라는 책을 쓴 이후에도 논리에 매우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철학적 행보를 보였지만, 화이트헤드는 시기를 거치면서 다른 철학적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화이트헤드는 마침대 1927년 “과정과 실재”라는 책을 쓰면서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글과 철학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수학 원리가 원래 목표에 실패했다고 인정하며, 논리와 완전히 다른, 사변을 중심으로 한 철학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논리”란 파스칼이 말하는 “기하학적 정신”과 굉장히 비슷해 보입니다.


기하학적 정신이란 기하학적 방법처럼 몇몇 원리로부터 출발하여 엄밀한 추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합리적 인식 능력을 말합니다. 파스칼은 이 정신의 문제점을 이렇게 말한 적 있습니다.


“기하학 정신의 원리들은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만큼 분명한 것들이기는 하지만 일상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것들이다.”


“기하학자들은 섬세한 사물들을 기하학적으로 취급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들은 정의로부터 시작하고, 그다음에 원리로부터 시작하려고 하다가 웃음거리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수학 원리라는 책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이유를 예측한 듯한 문구입니다.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길지만 인용하겠습니다.


“철학은 오랫동안 다음과 같은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왔다. 즉 철학의 방법이라는 것은 명석판명하고도 확실한 전제를 독단적으로 명시해야 하고, 나아가서 그러한 전제들 위에 연역적 사상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일반성을 정확히 표현한다는 것은 논의의 목표이지 그 출발점은 아니다. 철학은 수학의 본보기로 말미암아 오도되어 왔다. 수학에서조차도, 궁극적인 논리적 원리에 관한 진술에는 아직도 극복할 수 없는 난점이 따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귀류법의 남용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많은 철학적 추론이 이것의 남용으로 말미암아 손상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일련의 추론에서 모순이 생겼을 때 거기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논리적 결론은, 그 추론 속에 들어 있는 전제들 가운데 적어도 하나의 전제가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의 그릇된 전제는 더 문제삼지 아니한 채로 성급하게 가정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누군가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비판이 아닌 어떤 lament, 비탄일 뿐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비탄이면 뭐 어쩌겠습니까?






27


선형대수학이라는 수학의 한 과목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교재는 거의 대부분 외국인이 썼거나 그런 외국인이 쓴 것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하지만 “선형대수와 군”이라는 책은 우리나라 사람이 직접 쓴 책입니다. 이외에도 내용이 좋다는 점 등등으로 이 책은 마이너한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지금 이 이야기와 관련된 내용이 나옵니다. “모든 벡터는 기저를 가지고 있다”라는 정리를 “초른의 보조정리”로 증명하는데, “초른의 보조정리”가 바로 선택공리, 즉 정렬정리와 동치입니다. 이것은 공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게 어떻게 참이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크크 (초성체로)”. 정말입니다. 찾아보세요.




이상하다고 느껴지시나요?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아주 “논리”적이라고, “논리”의 극치라고 생각합니다.




Wesley Salmon은 제논의 역설이 순수하게 논리적이거나 수학적인 용어로 해결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구체적인 물리적 현실의 서술에 추상적인 수학적 체계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 사람들의 생각처럼, 하나의 방법을 제거해봅시다.


철학적 문제를 제외하는 것입니다."


"철학적인 방법은 될 수 있는 한 제거해보도록 하죠."




이것이 얼마나 naive한 생각이었는지 지금 드러납니다.


철학적인 방법은 불가피하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토끼굴은 더 깊습니다.






28


“시간이 흐르면서 라이프니츠는 이른바 '보편 기호학 characteristica universalis'을 완성하기 위한 ‘보조적인' 성격의 또 다른 기획들을 추가하면서 이 조합 기술을 더욱 복잡하게 발전시켰다. 여기서 '기호'들은 종류를 초월한 모든 언어의 기호를 가리키며 '보편 기호학'이란 무엇보다도 ‘조합 기술에 관한 논문’에서 제시되었던 형태의 언어를 암시한다. 이어서 라이프니츠는 개념들을 완전하게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 단계에 도달하려면 무엇보다도 인간이 소유하는 모든 지식의 일반적인 목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라이프니츠는 당대의 모든 지식을 수용할 수 있는 백과사전의 구축을 다양한 방식으로 모색했다. 백과사전이 완성된 다음에 해결해야 할 과제는 두 가지였다.


첫째, 개념들의 분석과 재조합 과정을 완성하기 위한 규칙들을 정립할 것.


둘째, 진정한 기호학을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문자 체계를 찾을 것.


첫 번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라이프니츠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분석'과 '조합'을 토대로 하는 새로운 과학의 정립이었다. 두 번째 과제의 해결을 위해 라이프니츠는 가장 적합한 문자 체계의 발견에 집중하는 아카데미의 설립을 시도했다. 기호들의 조합 기술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인간의 사고가 하나의 연산으로 환원된다는 것이었다. 라이프니츠는 라틴어 알파벳의 철자들을 개념 혹은 문장을 대체하는 변수로, 수학의 합산 기호들을 논리적 연산을 표상하는 기호로 활용하면서 거의 두 세기 후에 논리학자 조지 불이 독자적으로 재발견하게 될 결과를 얻어 내는 데 성공했다.”




철학적 해결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여기서 또 나이브해져 봅시다. 철학이 수학처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1900년대 초반 논리학자처럼 생각해봅시다.


그것은 바로 논리적 도식을 만들어 해결해 보려는 접근입니다.




이 접근 방법은 두 가지의 중요한 점들을 의도하기 위해 쓰입니다. 첫째로 명료성입니다. 명료하게 말하는 과정, 단어를 엄밀하게 말하는 과정을 통해 이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둘째로 논박을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멀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소피스트적 논박”에서부터 진행된 것으로, 논변과 궤변을 구분할 수 있고, 논리적 오류를 지적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려야만 할 것은 이 두 가지 목표는 논리적 도식을 구성하는 것을 제외하고도 많은 철학적 방법에서 대다수가 의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논리는 철학사에서 많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논리적 도식을 이 글에서 예로 들 수 있겠지만, 뒤에 나오는 사례가 이 논리에서만 해당되는 일이 아님을, “보편 기호학”까지 해당되는 일임을 알려야만 합니다.






29


다음과 같은 도식을 생각해 봅시다.




1 - 이 가설로 세운 램프는 가능하다.


2 - 어느 주어진 순간에 램프는 켜져 있거나 꺼져 있다.


3 - 물리적인 과정들은 연속적으로 바뀐다. x의 크기를 가진 task(일)가 시간 t 이전에 끝나도록 설정되어 있다면, x가 얼마나 작다 한들, task가 끝난 뒤에 물리적 상태가 바뀌도록 설정되어 있다.


4 - 시간 t가 1초이다. 1초 전의 x의 크기를 가진 task에서, 램프는 꺼져 있었다.


5 - 시간 t가 1초이다. 1초 전의 x의 크기를 가진 task에서, 램프는 켜져 있었다.


6 - 1초에, 이 램프는 켜져 있다. (3과 4로 인해)


7 - 1초에, 이 램프는 꺼져 있다. (3과 5로 인해)


8 - 모순이 생긴다 (6과 7로 인해)




이것은 전에 있었던 톰슨의 램프에 대한 엄밀한 논리적 도식입니다.




이 도식은 전과 달리 모순이 생긴 것으로 끝나 있는데, 전에 언급했던 베나세라프가 말한 역설이 해결될 수 있다는 주장과 다른 결론을 낸 것입니다.


이때 베나세라프와 같은 해결을 내려는 사람들은, 아직 이 도식이 더 드러내 주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엄밀한 도식이 아직 전부 엄밀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첫째로 도식에 나와 있는 문구 중 하나를 제시하여 문제를 삼을 것입니다. 


둘째로 도식에 나와 있는 용어가 애매하게 쓰여졌고 그것의 명료화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도식에 나와있지 않은 전제가 하나 있어서 그 전제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 등등 많을 것입니다.


이들은 사실상 같은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이 논리적 도식에서 베나세라프가 해결 방법을 결론으로 두기 위해서는 3에서 나오는 문구를 문제삼아야 합니다. task(일)가 어느 정도의 크기를 가지는지에 대한 명료화를 제시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도식에 전제가 하나 있어서 그것이 문제임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 숨겨진 전제라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3.1 - task(일)의 크기는 0초보다 크다.


베나세라프의 해결 방법을 결론으로 두기 위해서는 이것을 지적해야만 합니다.


task가 정확히 0초의 크기를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task라는 것은 0초의 크기를 가질 때에도 해당됨을 주장해야 합니다.




이것을 과도한 주장이 아니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3에서는 “x가 얼마나 작다 한들”이라는 표현이 있었기 때문에 0초도 포함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예시가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과도한 주장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0초간 진행되는 task의 실제 사례가 무엇인지를 전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정확히 전에 말했던 measure 0의 문제와 동일합니다.


확률이 0이라는 것, 선분이 길이가 없다는 것, 즉 “확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률이 0이라는 것”이 이 문제와 동일합니다.


그 문제가 수학 자체로 풀릴 수 없는 일임은 이 전에 설명했습니다.




“0초의 크기를 가진 task가 있을 수 있느냐”의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이것이 톰슨의 램프가 아닌 모든 supertask의 문제에서 전부 해당되는 문제기 때문입니다.


제논의 역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킬레스가 0초의 크기를 가진 task가 있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문제에 맞닥뜨린 베나세라프의 주장입니다.


베나세라프는, 베나세라프의 해결 방법대로라면 0초인 task가 있다고 주장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일상의 용어사용에서 쓰이는 방법을 지켜보아야 문제가 풀린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용어, 즉 task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곳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진다고 보았고, 최소의 시간이 없는 경우에 사용될 경우 0초의 task가 있을 수 있고, 최소의 시간이 있어서 0초보다 더 크기가 커야만 하는 곳에 사용될 경우 0초의 task가 있으면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0초의 크기를 가진 task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베나세라프의 의견 철회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언어의 사용으로부터 의미가 변하니 용어의 사용을 지켜보자는 의견이라면 대체 supertask에서 0초의 task가 있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대답을 확실히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타카토 제논의 역설”로 전에 언급한 Adolf Grünbaum은 베나세라프의 이 해결에 대해서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언어에 몰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언어에 의해 희생당하거나 모욕당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Adolf Grünbaum은 그렇게 0초의 크기를 가진 task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 또한 언어의 형이상학적 혼란에 빠진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논리적 오류를 지적함으로서 풀려지지 않을 문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0초에 할 수 있는 task가 있느냐라는 문제는 결국 0초, 0이라는 것이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에 대한 것인데, 0초에 할 수 있는 일로 measure 0가 있고 그것이 아닌 0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0초의 크기를 가진 task는 있다”고 찬성하는 자는, 지금까지 0이라는 표현이 애매성을 가지고 있었고, 0에는 measure 0와 measure 0가 아닌 0이 있고, 0초이므로 task를 해낼 수 없다는 주장은 애매성의 오류를 가진 것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0초의 크기를 가진 task는 없다”고 반대하는 자는, 0초인 것에는 아무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며, 0초가 measure 0와 measure 0가 아닌 0이 있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0초이므로 task를 해낼 수 있다는 주장은 언어를 구별해서 쓰지만 언어의 의미상의 차이가 없는 차이 없는 구별의 오류를 가진 것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30


이러한 논리적 도식의 문제는 화이트헤드의 또다른 주장, 또다른 비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철학적 범주의 도식을 하나의 복합적인 주장으로 보고 거기에다 논리학자가 말하는 참과 거짓이라는 양자택일적 척도를 적용시킬 경우, 그 대답은 그 도식이 거짓이라는 것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논리적 도식을 만들어내어 참과 거짓을 분류해낸 뒤 자기 주장을 표출하게 된다면, 무조건 그 도식이 잘못되었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러셀과 수학 원리를 공저한 한 논리학자의 주장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 주장에서 끝낼 것이 아닌 더 강한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명료성과 제1원리와 같은 것을 추구하는 철학자들에게 똑같이 그렇게 생각하는 다른 철학자들이 그를 절대 동의하지 않으리란 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비탄은 논증을 두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는 일반논증이고 하나는 메타논증입니다.


일반논증은 논리적 도식 안에 들어가 있는 명제입니다.


메타논증은 하나의 논리적 도식이 어떤 명제와 같은 지위를 차지할 때의 그 명제입니다.


메타논증의 예로, "이 논리적 도식은 잘못되었다.", "이 논의는 철학적 혼란에 불과하다.", "도식에 나와있지 않은 전제가 하나 있어 그 숨겨진 전제가 문제가 있다."가 있습니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려는 것은, 논리를 과신하는 철학자들과 그들의 학문의 방식을 다른 학문에서도 적용하려 하는 논리학자들이, 일반논증으로 구성된 논리적 도식으로 한 주장을 참이라고 제시할 경우, 똑같이 논리를 과신하는 다른 자들이 언제나 그 논리적 도식에 대한 메타명제를 제시하여 그를 비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메타명제는 또한 명제고 일반명제이기 때문에, 메타메타명제, 메타메타메타명제... 로 이어져 이 논리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알 수 있습니다.






31


이외에도 제논의 역설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아주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점을 기하학의 가장 작은 단위로 두는 현대 기하학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기하학이 더욱더 철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점보다 더 작은 공간인 gunk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어떤 사람은 역설 자체의 논리적 위치를 순화시킵니다. 논리학 안에서 어떤 모순은 참된 모순이라고 주장하고, 모순에 대한 논리학의 금지를 순화하면서 “화살은 이 순간 이 점에 있다”와 “화살은 이 순간 이 점에 있지 않다”를 둘 다 참이라고 봅니다.


어떤 사람은 철학의 위치를 제한합니다. 철학이 할 수 있는 것과 철학이 할 수 없는 것을 규정하려고 시도합니다. 보통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논변과 무한에 대한 논변을 제한하기 때문에, 제논의 역설을 철학이 풀 수 없는 것, 해결되는 것이 아닌 보여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논변들은, 그러나, 이에 대한 또다른 비판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점에 대항하는 gunk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gunk와 gunk 사이의 운동에 문제를 제기하는 또다른 복수하는 제논의 역설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역설을 순화시킨 논리는 부정의 절대적 특성이어야 할 "부정"이 결정적인 특징을 포함하지 않고 연산자가 되었다고 비판받았습니다.


철학의 위치를 제한한 사람은 그 제한이 대체 어느 정도여야 하느냐는, 제논의 역설의 해결이 포함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반론에 시달렸습니다.








[]








32


제논의 역설은 어떻게 풀리는가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논의 역설은, 아직까지, 그리고 아무래도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겁니다.




과학적이고 수학적이게 끝날 것 같았던 제논의 역설에 대한 해결은, 과도하지만 필요했던 분석을 통해 task가 0초일 수 있냐는 문제로 변해버렸습니다.


세계에 대한 통찰에 대한 문제가 사소한 용어에 대한 분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화이트헤드는, 이런 상황이 모든 논리적 도식에서 반드시 일어날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메타논증이 일반논증으로 바뀌는 상황을 절대 막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논의 역설이 풀릴 수 없음을 화이트헤드가 증명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증명이지는 않습니다. 화이트헤드가 말한 것은 논증이 아닌 lament, 비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탄이면 뭐 어쩌겠습니까?)




처음으로 논증으로 자기 철학을 밝힌 사람의 논증, 이렇게나 원시적인 논증 앞에서도 우리는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논은 어쩌면 논리라는 오류를 인식한 최초의 사람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어쩌면 그 이후의 세상과 인류의 모든 역사를 수반한 논리에 대한 희망엔 맨 처음부터 비논리적인 낙인이 찍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비트겐슈타인이란 철학자는 이런 철학적 상황에 대해 간파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철학적 이론이 반박이 불가하다고 말합니다.


제논의 역설마저도 반박이 불가하다면 모든 이론이 반박 불가능한 것은 사실로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 논증과 비판들은 무엇이었을까요.


비트겐슈타인은 지금까지의 수많은 논증들은 객관적 진리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그림, 인식 틀을 제공함으로서 일어나는 설득, 개종과 같은 설득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수학의 기초를 분석하면서, 심지어는 수학에서 나오는 증명마저도 깊게 들여다보면 그런 개종에 불과했다고 말합니다.






{E


뇌절 파트 E입니다. 괄호 안에 들어간 글은 많이 어려우니 넘기셔도 됩니다.






33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그림에 대한 설명은 이렇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5×4=4×5의 증명이 이것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OOOOO


OOOOO


OOOOO


OOOOO




마치 어린아이에게 책상 앞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저렇게 써진 종이를 계속 돌려가면서 보여준 뒤에 어린아이가 5×4이 4×5임을 깨닫는다면 이것이 증명의 지위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더해서, 모든 수학적 증명이 알고보면 다 이런 것이라고 말합니다.


A에서 B가 참임을 보이는 증명이 있다 할 때, A에서 어떻게 B가 되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A에서 C가 된 뒤에 C에서 B가 됨을 보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다시 A에서 어떻게 C가 되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A에서 D가 된 뒤에 D에서 C가 됨을 보일 것입니다. 이것을 계속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비탄합니다.


"단지 우리는 그렇게 한다라고 말해야 하는 우리의 과정에 대해서 어떤 정당화를 부여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언젠가는 그 사람이 그것이 공리라고 말하거나, “단지 우리는 그렇게 한다”고 말하면서 그 증명의 타당성에 대해 호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밝힐 것이라고 말입니다.




5×4=4×5임을 더 구체적인 논리를 사용해 증명할 수 있지 않느냐고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페아노 공리계와 집합론을 사용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접근이 기존 수학을 엄밀히 서술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면 몰라도 철학적으로는 전혀 가치를 가지지 않는, 단지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이럼에도, 5×4=4×5임을 저 그림을 통해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회의주의를 거부하려 합니다. 이런 것을 극단적 사변이라고 보고 이런 일이 보통 일어나지 않음을 보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임무가 정신적 혼란을 잠재우는 일이라고 봤습니다. 사유의 늪에 빠져버린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 개종을 시도하는 것이 철학의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뇌절 파트 E가 끝났습니다.


}








1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물음이다. ‘보편적인 논리학이 얼마만큼 가능한가?’ 달리 말해서 최소한 이론적으로라도 논변들을 제시하는 형식과 거기에 기대어 그러한 논변들을 비판하는 표준들 두 가지 모두 영역에 따라 불변적이게끔 논변들을 제시하고 비판하기를 바랄 수 있는가?”


(스티븐 툴민의 “논변의 사용” 중에서)




제논의 역설은 무엇을 뜻할까요?


바로 보편적 논리, Universal Logic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런 생각은 라이프니츠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현재는 라이프니츠라고 하면 수학에서 미적분으로, 철학에선 모나드와 예정조화설로 유명하지만, 이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가장 많은 학문적 활동을 한 것은 바로 보편기호학이라는 것입니다.


이 곳에서 인간의 모든 지식을 기호로 넣을 수 있고, 이 기호를 기계를 통해 연산할 수 있다는 일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철학은 그가 말한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지적 논쟁이 ‘이성의 위대한 도구’라고 불리는 한 기계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날 때, 더 이상 목소리를 높여 떠들지 않고, 단지 '계산하자'고 말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제논의 역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완벽한 언어, “유리알 유희”, 보편기호학, Universal Logic이 절대 일어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토론의 수학화”는 이중적으로 거짓입니다. 토론은 수학화될 수 있다는 환상과, 수학화라는 환상.




이것은 그다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철학계의 공공연한 비밀에 불과합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스티븐 툴민이라는 사람이 “논변의 사용”이라는 책에서 이러한 보편적인 논리학이 가능한가를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철학자들이 말하는 가능성과 필연성, 그리고 법학자와 과학자와 일반인들이 보는 가능성과 필연성이 얼마나 다른지를 300페이지를 들여 논증합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말의 일부분을 부분적으로 인용하겠습니다.


“천문학자들이 확신에 찬 예측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 하지만 철학자가 필연적 함축을 요구하기 시작하는 순간, … 그 적합성을 테스트하기 위해 사용된 실험들과 관찰들이 … 인식론자들에게는 가치가 없을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천문학자들의 계산들을 산출해서, 강철처럼 견고해 보이는 논변에 의해서 그들이 예측과 관련된 천체의 과거의 위치에 관한 자료로부터 미래에 그것이 차지하게 될 위치에 관한 예측에로 이행하는 데 그 이론들을 사용하는 방식을 지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일이 철학자의 가혹함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지는 못할 것이다. … 철학자는 그 정당한 이유에 대해서 그 이론이 제공하는 지지작용을 계속 물고 늘어질 것이다. … 천문학자의 주장은 미래에 관한 것이고, 그의 자료와 지지작용은 현재와 과거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형의 비약 자체가 난점의 원천이며,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어떤 시도가 없는 한, 모든 주장은 모두 다 위험에 빠진다.”




이 “논변의 사용”은 현재 “논증의 탄생” 등의 책에서 나오는 등 비형식적 논증을 체계적으로 구성했다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제가 이 책을 읽어보니 이 책은 그런 비형식적 논증의 구성을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이 가장 중요시한 것은, 형식적 논리학의 비판, 그리고 그 당시 분석철학의 태도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스티븐 툴민이 목적한 것은 더 나은 논증이 아닙니다. 차라리 리처드 로티의 “교화적 대화”라는 개념이 훨씬 더 비슷한 것입니다.


리처드 로티와 “교화적 대화”가 무엇인지는 뒤에 설명하겠습니다.






2


그러나 우리는 논증에 너무나 많은 힘을 주고 있습니다.


토론에서 또 “논리”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Universal Logic은 존재하지 않으나, 토론에서 “논리”라는 단어가 나온다면 거의 모두 Universal Logic을 지시하거나, 이것과 정반대인 것을 가정합니다. 모두 Universal Logic을 지시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당신은 “논리”라는 단어를 주의해서 사용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Universal Logic을 지시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3


이 제논의 역설 이야기와 Universal Logic의 이야기가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고답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중요함을 알려주는 예를 들어주겠습니다.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전에 새로운 무신론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알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는 유신론을 지지하는 논변을 만드는 신학자이자 분석철학자입니다.


그는 도킨스에게 한번 토론을 해보자고 승부장을 내밀었지만 도킨스가 그 토론을 포기함으로서 유명세를 탄 사람입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논증은 kalam cosmological argument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원인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원인이 있다는 것이 그 논증의 축약인데, 그는 굉장히 길고 엄밀하게 이 논증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논증의 전제 중에서 “시간에서 실무한은 존재할 수 없다”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줄곧 이야기한 것입니다. 러셀을 따른 제논의 역설의 가장 표준적인 해답은 실무한이 존재한다고 전제하지만, Max Black이나 James Thomson이나 Jean Paul Van Bendegem은 그것에 의문을 던졌던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놀랍게도 kalam cosmological argument를 비판하는 가장 중요한 반론자 중 한 명이 바로 Adolf Grünbaum입니다. 그륀바움은 논리실증주의자로서, 러셀을 지지하여 러셀적인 제논의 역설 해결법을 제시한 사람입니다. 그는 시간에서 실무한이 논리적으로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크레이그는 실무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위해 supertask를 반론으로 제시하기까지 했습니다.




제논의 역설은 고답적일 수 있지만, 신은 가장 중요한 논쟁 주제 중 하나이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과연 신에 대한 문제는 풀릴 수 있을 것인가?






4


둘이서 논쟁을 하고, 누군가를 완전히 반박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자기의 뜻을 밝히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것만으로도 토론의 뜻을 이룬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몇몇 철학자들은 논증, 논쟁, 토론이 아닌 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 믿었습니다.




리처드 로티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철학은 체계적 철학이었다고 말하고, 체계적 철학은 인식론을 만들어 그 토대를 만들어야만 했다고, 거기서 철학자들이 논증을 합리화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것을 매우 비판하면서,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철학적 혼란에 빠져 헛돌기만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논증 대신 제시한 것은 교양적, 교화적 철학입니다. 우리는 논증을 해야 할 것이 아니라 교화적 대화, 영원한 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모든 서술을 하나로 모아서 본질을 찾으려는 생각은 버려야만 한다고, 대화는 그 대화에 맞는 시대가 지나가면 무의미해질 거라고, 이런 점을 생각했을 때 철학이 발전하거나 체계화되는 것은 오히려 나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논리의 문제로 들어갑니다.


제논의 역설이 보여준 것은, Universal Logic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외의 논리는, 논리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기 위해선, 처음부터 설득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체계적 철학은 엄밀하게 살펴보니 애초부터 없었던 이상이란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남은 것은 교화적 철학뿐입니다. 이것도 인식론적이긴 하겠지만, 지금까지의 인식론과는 다르게 토대를 세우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아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인식 틀의 변경, 초점 변경 뿐입니다. 이것에 대한 궁극적 목표는 바로 마지막에 남은 치유라는 것입니다.


철학의 함정 속으로 들어간 사람에게 개종할 수 있게 만드는 인식 틀을 주는 것, 설득을 통해 초점을 바꾸게끔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성으로 생각하는 논변만을 중시했던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에 대한 비판이고 제논의 철학에 대한 비판인 것입니다.


누구나 철학적 함정에 빠질 수 있고, 어떻게 보면 모두가 그러한 철학적 질병을 가지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다른 점은 타인에 대한 태도입니다.


훨씬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논쟁으로부터 자신의 의견을 바꾼 사람들은 그 자신이 논증 때문에 바뀌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논증 안에 있던 대화가 타인과 대화하고 싶었던 그의 태도와 결합했기 때문에 철학적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논리는 철학적 질병의 치유라는 면에서 “크크 (초성체로)”나 다를 바 없습니다.




“누군가가 디오게네스의 앞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을 지지하며 운동을 부정했다.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것이 움직이는 듯이 보이나 실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폴짝폴짝 뛰며 그 사람의 주위를 뱅뱅 돌았다.”




제논의 역설에 대한 디오게네스의 비판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이것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5


논리에 대한 예전 생각과 비탄 이후의 생각은 매우 다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토론을 봅니다.


이 글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제논의 역설은 반박불가합니다. 논증은 끝에선 결국 “단지 우리는 그렇게 한다”란 호소에 불과하기 때문에 라이프니츠적인 Universal Logic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토론의 의미는 애초에 없었거나 잊혀졌고, 교화적 대화라는 것만이 남게 됩니다.




저는 정말 이것에 대해 호소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토론을 신격화했습니까?


왜 우리는 원래 재미와 정보를 얻고 싶어서 했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논리와 팩트란 단어를 엉망진창으로 넣어서 쓴 댓글을 봐야 하는 것입니까? 왜 논리와 팩트를 말하는 사람일수록 더 안 좋은 주장을 하는 것입니까? 왜 우리들은, 다른 사람이 말만 하면 일단 아니라고 하고, 남을 존중하는 비판 대신 어떻게든 비꼬기만 하고 앉았고, 대화가 되지 않은 채 자기 주장만 말하는 사람에게, 그저 논리와 팩트라는 단어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면죄부를 주었던 것입니까?




저는 그들이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논리", "팩트", "반박", "감성", "명료".


이렇게나 많이 쓰이고, 너무나 분명해 보인 이 단어들이, 사실은 얼마나 낯설고 혼란스러운지, 얼마나 이상한 위치에 있었는지.




이제는 토론을 원래의 위치로 옮겨야 할 때입니다.


토론의 진짜 의미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교화적 대화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어떻게 보면 리처드 도킨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 같은 새로운 무신론자에 대한 비판으로 보일 수도, 조던 피터슨과 벤 샤피로와 같은 대안 우파에 대한 비판으로 보일 수도, 전여옥과 유시민 같은 한국의 유명 토론가에 대한 비판으로 보일 수도, 혹은 키배로 가득 찬 한국 커뮤니티에 대한 비판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은 실제로 그러기도 합니다. 그들은 어떠한 "인식 틀"을 중시했고, 그것을 심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인 그 "인식 틀" 자체에 대한 비판입니다. 따라서 저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인식 틀에 대해 비판해야겠지만, 여기서 그것에 대해 글을 쓰기엔 글이 너무 길어진 것 같습니다.






0


아킬레스는 무의미한 달리기를 멈추었습니다.


아킬레스는 거북이와 대화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러자 어느샌가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앞서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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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08 17:11
수정 아이콘
헤헤 저격글인줄 헤헤
사업드래군
21/12/08 17:16
수정 아이콘
아, 완벽하게 이해했어!
읽음체크
21/12/08 17:20
수정 아이콘
첫 줄부터 문장자체가 이상한데..
21/12/08 17:21
수정 아이콘
제논의역설은 거북이를 따라잡는 순간까지를 묘사한거죠
즉, 10초후 거북이를 따라잡는다고 하면
개구간 (0,10) 내의 어느 순간에서도 제논의역설은 참입니다
쉽게말해 9초 9.9초 9.99초 9.999초... 의 어느순간에서도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보다 뒤에있는거죠.

9초에서 0.9초만큼 더뛰어가도 거북이는 그보다 더앞에있으며
9.99초까지 뛰어가도 거북이는 더 앞에있고
9.999초까지 따라가도 거북이는 더 앞에있고..
21/12/08 17:24
수정 아이콘
제논이 괜히 참수를 당한게 아니라는 걸 알게되는...
이른취침
21/12/08 17:24
수정 아이콘
(수정됨) 이거 양자역학이면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나요?
무한히 나눌 수 있다는 가정 자체가 틀린 거니까요.
상대성원리로 봐도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이 절대적이지 않으니
제논의 역설이라는 건 고전역학의 한계(?)를 보여주는 예시일 뿐이라고 생각하네요.

이상 문과였습니다;;; 반박시 님말이 맞음.
레드빠돌이
21/12/08 17:27
수정 아이콘
어떤 명제를 가지고 토론을 할 때 당사자들이 해당 명제를 제외한 다른 명제에서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토론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부먹파vs찍먹파가 토론을 하는데 탕수육은 어떤 음식인가에 대한 정의가 서로 다르다면 토론은 이루어질 수가 없죠.

즉 토론은 서로 간의 약속된 정의가 없으면 불가능한 거죠.
따라서 이상적인 토론은 이데아에나 존재하는 것이고, 현실은 내가 너보다 더 지적인 존재야! 라고 자랑하는 수단에 불과한 거죠...
루카와
21/12/08 17:28
수정 아이콘
이래야 내 피쟐이지
제주삼다수
21/12/08 17:30
수정 아이콘
자를수 없는걸 자르니 일어날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것처럼 보이는거죠
그러니 해서는 안될일을 저지른 자들에겐 물리적 거세가 필요합니다
썬업주세요
21/12/08 17:59
수정 아이콘
어질어질하다 그죠?
RapidSilver
21/12/08 18:09
수정 아이콘
(수정됨) 다른 커뮤니티에서 본 글이네요 크크 반갑습니다

최근 몇년간 소위 '논의' '담론' 이라 칭해지는 것들을 보면서 화가 난다거나 마인드 컨트롤이 안된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았는데, 좀 자제하려고 소크라테스와 관련된 고전들을 다시 읽는 버릇이 생겼어요. 테스형의 '넌 x도 모른다'는 그 말씀이 참 곱씹어볼수록 위대한게, 내가 키배를 뜨면서 맞는말을 했든 틀린말을 했든 테스형의 말씀을 다시한번 곱씹어보고 재고하면서 수치심과 자기위안감에 빠지면서 자기반성하기 딱 좋거든요. 이러면서 조금은 더 정신적으로 성장한 느낌도 들구요.

사실 뭐 세상사 다 그런거 아니겠습니까. 저는 모든 지성체에겐 각자마다의 유니버설 로직이 있고, 자신도 모르게 자신만의 유니버설 로직을 '신'처럼 생각한다고 생각해요. 자기의 유니버설 로직이 절대적인거고, 그래서 근본적으로 다른 유니버설 로직 위헤서 사고하는 타인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유니버설 로직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 자체도 유니버설 로직처럼 작용하죠. 이 글의 전제가 되는 '공리'를 누군가 부정하려 들 수도 있기도 할테고요. 그래서 참 철학이 재밌어요. 결국 사이클이고, 그래서 우리는 우주에 대해서 x도 모르는거고요.
21/12/08 18:14
수정 아이콘
일단 긴글추 하고 이따 읽겠습니다
회사에서
21/12/08 18:18
수정 아이콘
읽다가 뭔가 이상해서 쭉 내리고 마지막 부분을 읽어도 이상해서 작성글보기 하고나서 깨달은 점.

이분 아직도 병원 안갔네
기술적트레이더
21/12/08 18:21
수정 아이콘
뭐야 이게~ 솔직히 이정도 쓰고나면 고생했다고 후방짤이라도 하나 넣어주시지.. 빙글빙글
어둠의그림자
21/12/08 18:25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그런데 1~5는 어디로 갔나요?
헌트쿡
21/12/08 18:33
수정 아이콘
잘 안읽으셔서 그렇습니다 다시 잘 읽어보시길
21/12/08 18:29
수정 아이콘
16번에 초한수 설명하시면서 ω 쓰신 것은 아마 기수(ℵ0)를 잘못 쓰신 것 같고, 19번에 비가측 집합은 비가산집합 말씀을 잘못 쓰신 것 같습니다.
글 내용 상당수를 예전에 봤던 것 같아서 찾아보니 1년도 더 전에 다른 곳에 올라왔던 내용이고, 만약 본인 글이 아니시라면 펌글 표시는 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찾았던 커뮤니티 글 하나 링크만 겁니다. 아마 더 나오긴 할겁니다.
https://www.fmkorea.com/2897882327
21/12/08 21:37
수정 아이콘
두동동
21/12/08 19:12
수정 아이콘
(수정됨) 어 전 형식주의자였군요! 공리가 왜 그렇게 설정되는지는 별로 중요치 않고 그래서 그 공리계로 무얼 할지가(그리고 어떤 결론을 만들 것인지가) 재미있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왜 이렇게 흥미가 안가지 하면서 읽었네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지만, 인석이형 선형대수학 서론에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해리포터 읽고 감명받아서 쓰셨다고 밝히셨습니다
그래서 책 구성이 소설 같습니다. 앞에서 간단해보이는(?) 정리 보여주고 증명은 공란으로 두고 주석에 [그런데 사실 여기에는 지금은 전혀 알 수 없는 의미가 있다..] 이렇게 복선 깔고 뒤에서 회수한다던가.. 책 내용도 단순한 수식적 증명보다는 큰 그림 그리는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고요. 재밌었던 기억이 납니다. 증명으로 한 줄 적혀있는 '당연하다' 읽을 때는 화났던 것 같지만 크크
Promise.all
21/12/08 19:29
수정 아이콘
재밌게 읽었습니다. 다만 저는 제논의 역설을 타파할 무기가 있네요.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을지 안따라잡을지는 그것이 양자역학적으로 중첩된 상태로 있기에 둘다 맞습니다.
답이머얌
21/12/08 20:45
수정 아이콘
추천 올린 분들은 다 읽고 한걸까요, 아니면 똥누면서 보다가 손가락이 미끄러져서 그런 걸까요?
21/12/08 21:13
수정 아이콘
생각을 쭉 따라가는게 재밌네요
Foxwhite
21/12/08 21:14
수정 아이콘
팩트: 팩트다.
차단하려고 가입함
21/12/08 21:41
수정 아이콘
나는모른다
21/12/08 22:27
수정 아이콘
아킬레스가 10 km/h 속력으로 달리고,
아킬레스 앞 5 km에 있는 거북이 1 km/h 속력으로 기어간다면,

1시간후 아킬레스가 거북보다 4 km 앞에 위치할 거라고 봅니다.

달리는 동안 서로 곁눈질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21/12/08 22:30
수정 아이콘
몇 년 간 님의 글을 접해오면서 저는 당신이 진실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 있지만 표현함에 있어서 서투른 사람인가, 아니면 그냥 지적 허영으로 가득한 사람인가 불확실했는데, 이 글을 읽고 당신이 후자에 속하는 부류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존재와 무존재, 변화에 대한 철학을 이야기하다가 토론은 교화라는 어처구니 없는 얄팍한 결론으로 빠지는 건 뭡니까? 이렇게나 가능성이 많은 주제를 가지고 결국 하고 싶은 말이 그겁니까? 이런 결론으로 가는데에 있어서 대체 글쓴이분께서 글에서 사용한 복잡한 철학적 개념들이 대체 어떤 기능을 하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이런 어려운 개념들을 굳이 가져와서 쓰신 건 그냥 단순히 나는 이런 것들을 알고 있다는 지적 허영심의 표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겁니다.

백주대낮에 개활지에서 수음을 하는 일은 부끄러운 일인 만큼, 이렇게 공개된 공간에서 단순히 자신의 허영을 위해서 자신도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는 글을 올리는 건 부끄러운 일입니다. 글을 읽는 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이런 알맹이 없는 긴 글을 읽느라 남의 시간을 쓰게 만드는 것에 대해 미안함이란 걸 가져본 적 있느냐는 겁니다. 이젠 앞으로 당신의 글을 읽는 데에 무의미한 시간을 쓰지 않겠습니다.
21/12/09 01:36
수정 아이콘
문제 자체에 내재된 한계 또는 전제를 무시하고 그 범주 밖에서의 문제 해결이 다시 문제 내부에서 풀리기를 기대하는 인식 오류에 기대는 트릭이지요. 동시에 인간의 오성 내에서의 인식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수학으로 풀려 하면 역으로 함정에 빠집니다. 헤겔을 이해하면 쉽게 풀릴 이야기지요.
유목민
21/12/09 10:12
수정 아이콘
이글을 끝까지 읽으신 분들...

존경합니다.
유자농원
21/12/09 12:48
수정 아이콘
의식의 흐름 기법같은데 연구하시는 분들에겐 좋은 소스가 될 것 같습니다.
물맛이좋아요
21/12/09 14:24
수정 아이콘
저도 글을 잘 쓰는 편은 아닌데 이 분글은 진짜 읽기 힘듭니다. 거의 다 아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구요.
21/12/09 19:02
수정 아이콘
일부러어렵게쓰는사람들을 전 혐오합니다
브리니
21/12/10 08:34
수정 아이콘
수리적인건 모르겠고...1미터를 1초에 간다고 상정했으면 10미터를 가는데 10초 걸린다 거기서 역설이 깨집니다. 역설이 맞으면 0.5미터 가는데 0.5초가 걸리고 절반씩 쪼개면 무한히 작은시간엔 무한히 작은 거리밖에못가니 움직일 수가 없죠 모든 것이 멈춘 세상. 그런데 이미 문제에서 얼마에 얼마를 간다고 해놨으니 출발자체를 거역했으니 제논은 맞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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