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3/09/30 01:17:36
Name 림림
Subject [일반] 더러운 꽃

1.
지금보다 더 어릴적, 붙으면 고오급 월급쟁이가 된다는 자격증을 준비했었다.
다들 어찌나 말빨이 좋던지 나도 합격하면 그들처럼 폼나게, "때 묻지 않고" 돈 벌 줄 알았다.
운 때가 닿았을 때 즈음 합격을 하게 되었고, 나를 비롯한 철딱서니 없던 친구들은 인생 핀 줄 알았다.
몇 년 뒤면 나도 '부르주아'로 점심은 라연 저녁은 스시죠, 토요일은 맨하탄, 일요일은 파리에서 보낼 줄 알았다.


2.
20대 후반 시장에 내던져진 주니어의 삶은 혹독했다. 라연보다 라면, 파리보다 파리바게트라는 웃픈 살아남기를 뒤로 하고,
자본가의 도구로 평생 업을 영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어주고 거기서 영쩜 몇프로 받아서 아둥바둥 살기 바쁜 일이었다. 엄청 화려한 일인줄 알았었는데. 텍스트 몇 글자로 설명하기 힘든 아둥바둥 그 잡채였다.


3.
우연치 않게 테헤란로 대로변 모든 오피스의 소유주를 검토한 엑셀자료를 보게 되었다. 대부분 펀드꺼인 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 그건 절반도 안되고 대부분이 개인소유(내지는 사실상 개인 소유에 가까운 법인)였다. 70년대 강남개발하던 시절 늦어도 5공시절 정계, 재계와 얽혀있는 물건들이 다수였고, 그 출처 또한 뻔한 것이었었다. 부동산도 이정도였는데, 기업의 속은 볼 것도 없었다.
자료를 검토하며 인생 조또 불공평하다고 열변을 토한다.
어렸을 때는 공부 열심히하라고 죽어라 가스라이팅 당했었는데, 막상 태어나보니 모든 땅과 물건에는 "주인"이 있고 내꺼는 하나도 없는 이거 너무 불공평한거 아니냐고 읍소를 한다. 골수 우파로 십여년 간 당원이었던 나를 뒤로 하고, 시바꺼 토지 국유화하고 자본 재 분배를 하자는 맑스가 정녕 맞는게 아닌가 상념에 잠긴다 크크크;;


4.
마스크를 안쓰게 되고 수 년만에 친척들과 우리 집에 모였다.
열명도 넘는 사람들이 우리 집에 모인게 얼마만인지 갈비 같은 손 많이 가는 초 고칼로리 음식이 상에 놓인다.

어릴적부터 돈욕심이 많던 큰이모는 내게 돈은 "개"같이 버는거고 돈 없는(또는 못 버는 )사람들은 핑계가 많다며 거실에서 열변을 토한다.
좋은 대학나와서 월급쟁이 하는건 걍 현상유지 밖에 못하는 것이고, 서울에서 그저 버티는 것 밖에 못하는 거라고
고상한 척해봤자 의미없다고 한다.


5.
틀린말 하나 없다.
다 잘먹고 잘살자고 하는거고, 남들보다 간지나게 사는 거 싫어하는 사람 하나 없고, 내가 고민하는거 대부분(아니 전부)는 사실 돈이면 해결되는거니까...
고상하게 "멋진 포트폴리오와 인센 몇푼"에 집착하며 우당탕탕 고작 직장 생활 몇 년만에 반백이 되어버린 나를 돌아본다.


6.
버블이 끝나가고, 살인적인 침체기를 맛보고 있다.
소위 전투력이 끝내주던 사람들은 리멤버에서조차 자취를 감추었다. 그 동안 공시도 되고 돈 많이 벌었을테니...
누군가가 지금 자본시장은 이미 한탕이 끝나고, 패자들끼리 뒷수습하는 패자부활전이라며 자조적인 말을 했다.
찍새도 딱새도 아닌 애매한 연차인 나는 화려한 포트폴리오를 활용할 계제가 없다.


7.
화려한 돈 이면에는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추악함이 있다. 나의 순수성 내지는 철딱서니 없음을 간직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근데, 괴물이 되어버린 어른들을 욕하던 때가 그립다.
유튜브나 블로그에서 돈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천박하다고 저렇게 까진 하고 싶지 않다던 나의 젊음을 돌아본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작은대바구니만두
23/09/30 02:17
수정 아이콘
산에 올라봐야 이 산이 아니라는걸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패마패마
23/09/30 02:52
수정 아이콘
회계사이신가요... 크크
그냥사람
23/09/30 03:33
수정 아이콘
6번 많이 공감되네요. 힘내세요!
23/09/30 09:10
수정 아이콘
뜬금없이 김훈 작가님의 글 <밥벌이의 지겨움> 이 생각납니다.

http://theviewers.co.kr/ViewM.aspx?No=746717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우리들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이혜리
23/09/30 09:48
수정 아이콘
비슷한 감정을 저도 주니어 때 느낀 적이 있어요.
증여세 계산 관련 된 거 였는데.. 40억짜리 아파트 사는데 그 집 중학생 아들이 몇 만평 되는 임야랑 몇 십억의 건물 등등을 물려 받기 위한 것..
진짜 부럽고 내 삶이 초라하고.
그때였어요 마통 풀로 땡겨서 주식 시장에 발담근게..
그래요
23/09/30 17:26
수정 아이콘
성공하셨나요?
이혜리
23/09/30 19:01
수정 아이콘
큰거두장증발했습니다.
그래요
23/09/30 20:53
수정 아이콘
아아.. ㅠㅠ
23/09/30 11:37
수정 아이콘
전 그래서 그분들이 노오력이 어쩌고 세금이 어쩌고에대해 감정이입하지않습니다. 다 똑같은 사람들이고 그환경에 맞는 노오력을 하며 살뿐 그들을 존경해 그들의 마인드를 답습하거나 감정이입한다고 내가 부자가되는건 아니거든요. 그시간에 나한테 유리한 방향을 찾거나 내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방안을 찾으면서 가진거에 만족하는삶을 사는게 낫지요. 물론 잘나신분들은 그마저도 정신승리라며 비하하겠지만 그걸 버텨낼 멘탈도 필요하고요.
샐러드
23/09/30 12:08
수정 아이콘
정신패배하는 것보다는 정신승리가 내 정신건강에 더 낫죠
-안군-
23/09/30 11:38
수정 아이콘
돈은 개같이 버는 것이라지만, 돈이 되는 일이라면 똥이라도 먹을 각오가 되어 있더라도, 현실은 똥을 먹는다고 돈을 주지는 않더라고요. ㅠㅠ
규범의권력
23/09/30 12:34
수정 아이콘
그런 일은 대개 똥이라도 먹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아무리 똥이라도 "싫으면 먹지 말든가"를 시전하는게 가능해지니까요. 슬픈 현실입니다.
이웃집개발자
23/09/30 17:41
수정 아이콘
맘이 아픈데 공감합니다
달달한고양이
23/09/30 21:43
수정 아이콘
그래도 오늘도 로또를 샀습니다.
파워크런치
23/10/01 04:53
수정 아이콘
과거처럼 정경유착을 통해 돈을 버는게 아니라면(점점 선진국화 되면서 많이 막히고 있죠) 결국 일정레벨 이상 올라가려면 사업이나 투자를 해야하는건 맞는 것 같습니다. 직장인 생활은 그 단계를 성공적으로 밟을 시드머니 + 경험치를 얻기 위한 것 같고요. 아무런 지식 없이 사업이나 투자에 들어가는건 굉장히 무모한 짓이니...
No.99 AaronJudge
23/10/17 01:34
수정 아이콘
(수정됨) 쩝…

올해 21살입니다

뭔가…….내가 아직 많이 어린건가, 란 생각이 들게 되는 글이네요..

제 나름의 ‘돈이 전부인가’..라는 소신? 철학?..이라 하기도 뭐하고 그냥 가치관 역시 부모님의 큰 등 뒤에서 편안히 지냈기에 생겨난 것이겠죠..
그리고 이제는 슬슬 제가 그 품을 떠나 독립을 준비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고…

…모르겠네요.
진로 고민을 하다가, 막연히 사오정(45가 정년이다)이란 말이나, 슈카월드 등에서 나오는 ‘50살 넘기기 쉽지 않다’ 라는 말을 볼 때마다
저 이후엔 뭐먹고 살지? 기업에 취직하다가 저때 밀려나면, 혼자 살 때야 뭐 라면 먹고 산다지만, 부인이 있으면? 자식이 있으면? …공기업이나 전문직 준비해볼까?

뭐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이 글을 읽으니 고행길이 끝난 뒤에도 마냥 완벽한 꽃길은 또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어쨌든 회사 입장에선 돈값을 시키기 위해 엄청 굴릴테니까…

사실 완벽한 진로라는건 이 세상에 (아마) 없겠죠…뭐든 간에 장점 단점은 있을 테고
저울질해가면서 그 중에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해볼만한? 하고싶은? 것은 무엇일까 한번 진득히 고민해봐야 할 것 같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9960 [일반] 비트코인 vs. 불태환 화폐(fiat currency), 게임의 최종 승자는? [194] YYB17035 23/10/05 17035 7
99959 [일반] 뉴욕타임스 8.31. 일자 기사 번역(중국 침체의 원인) [36] 오후2시12326 23/10/04 12326 9
99958 [일반] 이번 연휴 나는 솔로를 달리고 나서.. 리뷰 [24] 뜨거운눈물12282 23/10/04 12282 3
99956 [일반] 교회는 어떻게 돌아가는가:교회의 설립과 조직들 [35] SAS Tony Parker 10246 23/10/04 10246 11
99954 [일반] 주식 사기범 이희진 형제, 900억 코인 사기로 구속 [41] 검사13233 23/10/04 13233 1
99953 [일반] 자격증이냐? 4년제 편입이냐? [21] 깐부7322 23/10/04 7322 1
99952 [일반] 연휴의 마지막 [17] 及時雨10338 23/10/03 10338 13
99951 [일반] 오늘 태국 대형 쇼핑몰에서 있었다는 총기 난사사건 [25] 아롱이다롱이15585 23/10/03 15585 1
99948 [일반] 100%가 넘는다는 서울시 주차장 확보율 [155] VictoryFood18776 23/10/03 18776 2
99947 [일반] CNBC에 소개된 기아의 도약 [38] 휵스13271 23/10/03 13271 4
99944 [일반] 캐나다 소매점에 인텔 14세대 CPU 등록 [30] SAS Tony Parker 10184 23/10/02 10184 1
99943 [일반] The Marshall Project 8.31. 일자 번역 (사형수의 인간성 회복) [7] 오후2시10260 23/10/02 10260 8
99941 [일반]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 커버 연주 (+근황) [4] jjohny=쿠마6561 23/10/02 6561 5
99940 [일반] 연휴 및 아시안 게임 기념 네웹 3대 스포츠 웹툰 비교 [32] lasd24110502 23/10/01 10502 5
99939 [일반] PGR21 2023 여름 계절사진전 결과를 공개합니다. [15] 及時雨5952 23/10/01 5952 4
99938 [일반] <아키라> - 분위기로만 내달리는 오리지널의 힘. [29] aDayInTheLife10071 23/10/01 10071 5
99937 [일반] 아이폰14Pro 유저가 15Pro 사서 사용해보고 느낀점 몇가지 [33] 랜슬롯12162 23/10/01 12162 10
99936 [일반] [팝송] 올리비아 로드리고 새 앨범 "GUTS" 김치찌개6861 23/10/01 6861 0
99935 [일반] [2023여름]쌍둥이 아가들과 함께한 여름 숙제 [6] jjohny=쿠마7992 23/09/30 7992 9
99934 [일반] 10km 달리기 성공했습니다. [17] 우주전쟁8645 23/09/30 8645 18
99932 [일반] 더러운 꽃 [16] 림림9641 23/09/30 9641 27
99931 [일반] [2023여름] 부덕(不德)한 나에게 여름 밤하늘은 열리지 않는다(스압) [1] 판을흔들어라6085 23/09/29 6085 10
99929 [일반] 재외국민, 한국 휴대폰번호 없어도 여권으로 본인인증 [19] 인간흑인대머리남캐11181 23/09/29 11181 5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