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인사 드립니다. 날씨가 추워지는데 다들 몸은 건강하신지요?
일전에 진로에 대한 고민 글을 올렸다가 비판 아닌 비판을 받았지만...( 격려라고 하겠습니다.. )
https://cdn.pgr21.com./pb/pb.php?id=qna&no=52809&page=2&divpage=49&sn=on&ss=on&sc=on&keyword=%EB%B0%B1%EC%88%98
이 이후의 제 근황이라면... 될 대로 되보라는 심정으로 특송쪽 알바로 들어가서 계약직으로 전환후 일한지 1년이 다 돼갑니다.
물론 정규직 올라갈 가능성이 0%라 계속 일할 수 없다는 게 좀 많이 암울하지만... 뭐..그럭저럭 현실에서 버텨내고 있습니다.
영어를 배우고 싶어서 아침엔 학원 다니고 오후에 일하러 다니는... 반복적인 삶이네요.
( 이래 일하면서도 요리사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한 걸 보면.. 전 아직도 현실 인지가 안 되나 봅니다..흐흐. )
지금 일하는 곳이 좋은 점이라면... 여자 소장이 이끄는 곳이라 군대 문화가 없고 각자 오픈부터 마감까지 조가 짜여져 있기 때문에
자기 할 일만 하면 되는 곳입니다. 가끔 정신 나간 고객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만 빼면 회사생활에 대한 스트레스는 거의 0%입니다.
덕분에 제가 잘 버티고 있는 것일지두요.
뭐.. 제 근황은 이 정도고 .. 요즘 pgr에서 글이 올라오는 것을 보니 취업/개인사 문제 등으로 많이 힘들어하는 글이 종종 올라오더라구요.
제 기억에 있는 pgr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철한 엘리트 집단의 사이트였습니다. 자기 인생에 대해 철저하게 노력하는 분들이 많고.. 그 덕에
어머어마한 스펙을 지닌 분들이 차고 넘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이트랑 비교를 한다면.. '오늘의 유머' 고민게시판은 다정한 엄마같다면, pgr은 차갑고 냉혹한 아버지 같은 느낌이라 해야 되나요?
제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최근엔... 이런저런 이유로 유저분들이 많이 힘들어 하시는 글들이
종종 올라오더라고요.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자식에게 항상 강하게 보였던 아버지가 어느 날 방 구석에서 흐느껴 우시는 느낌이라 해야 되나요?
그걸 보고 제 보잘것 없는 인생사를 여기서 풀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사실 안 좋은 방법이지만 자존감이 떨어져 있는 사람이 그걸 회복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자기보다 못난 사람을 보고 위안을 삼는 거라죠?
pgr의 모든 분은 사실 저보다 훨씬 좋은 스펙의 분이 넘치잖습니까? 흐흐.. 그래서 이 글을 보시고 "이렇게 못난 사람도 삶을 살아가는구나..
난 저렇게 안 되야지..그리고 나 정도면 저 사람보단 훨씬 괜찮네?" 라고 생각하시게 해서 잠시나마 우울하신 마음을 위로해드리고 싶습니다. 더불어 저 자신에 대한 반성과 위로를 이 글에 담고 싶고요. ( 아참! 제 스펙은 글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실 겁니다...크크 )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제 인생사를 여러 파트로 나눠서 글을 올리겠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힘든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하면... 글을 적어보겠습니다. ( 글이 반말체가 되겠지만 양해 부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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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양력으로..전라남도 순천에서 1월 28일에 2남 중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무이가 날 몇 시에 낳으셨는지 기억을 못하셔서 지금도
난 가끔 올라오는 운세 사이트에 시간을 입력할 수가 없다. ( 보통 운세 사이트에 보면 몇 시에 태어났는지도 입력하라 해서.. )
아버지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고 어머니는 선생님을 준비하고 계셨던 사람이었다. 두 분 다 그 시절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하니
공부 머리는 나름 있으셨던 것 같다. 집안의 반대가 심했음에도.. 서로 대화가 잘 통하셨던 나머지 결국 결혼을 강행하셨다.
그렇게 형을 낳고 5년 뒤 나를 낳았다. 난 어렸을 때부터 우량아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엄청 순해서 형보단 키우는 게 훨씬 쉬웠다고
한다.. 사람의 천성이란 건 태어날 때부터 어느 정도 결정된다는 게 틀린 말이 아니란 걸 이때 알았다.
어렸을 때의 기억은 사실 없다. 내가 갓난아기 때 부모님이 제주도 여행을 가셨는데 비행기 창문을 통해 바다가 보였는데 그거 딱 하나만
지금까지 기억한다. (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갓난아기 때 본 광경을 지금도 잊지 않는 게 더 신기하다.. 공부한 거나 잊지 말지.. )
이후 얼마 안되 평택으로 이사하셨는데 결혼하고 나서 어머니의 삶은 많이 피폐해졌다. 술 먹고 깽판 부리고.. 성실히 돈 모으지 않으시는
아버지에.. 틈만 나면 며느리에게 용돈 달라하는 시어머니( 제 할머니죠.) 시누이 노릇 엄청 하는 고모들까지.. 고행의 연속이였다.
이후 내가 초등학교 진학할 때쯤.. 부산으로 이사했다. 그 전에 김해에서 잠깐 살았었다. 이 때 형의 등을 기대 자전거를 타고 연 날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초등학교 2학년까지 살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10년 가까이 하셨던 일을 그만두시고 나서 집안이 많이 어려워졌다.
그렇게 쫒기듯 부산으로 이사했다. 신문팔이를 하며 사셨는데.. 아버지는 일을 그만두신 이후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셨지만 어떤 일이든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계속 그만두셨다. (내가 이걸 닮아서 추후 오랜 기간 방황하게 된 계기가 됐나 보다. )
아버지는 인내심이 부족하셔서.. 짜증나는 일을 못 참으셨으니까.. 그렇게 쭉 가난하게 살았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형은
갑자기 간질이 걸려서 내 눈 앞에서 하얀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아직 어려서 어떻게 할지 몰랐던 난 홀로 조용히 있고 어머니는 절규하시며
형을 업어 병원에 데려갔다.
이후 한동안 형은 한의원에 몇 년을 다녀야 했고 간질이란 병은 주변 사람들에게 평생 비밀에 부치기로 한다. 남들이 알면 자칫 놀림이나 왕따를 당할 수도 있으니까. 여러모로 신평에서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하루는 학교를 가야 되는데 문방구에 있는 오락기에 빠져서
학교에 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하다가 어머니한테 걸려서 신나게 얻어맞고 발가벗겨진 채로 밖을 서성이게 된다.
그것도 비오는 날에... 크크 ( 그 이후는 기억이 안 난다.. 어떻게 됬는지... )
뭐 그 외의 기억이라면.. 이 시기에 내가 한문과 서예에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가 나를 진지하게 청학동에 보내야 할지 고민했다고 하셨다. 지금은 한문의 한자도 모르지만 내가 잘하는 게 있었다고 하니...지금 생각하면 좀 의아하고 묘하다.
이런 고통을 제외한다면.. 내 개인적인 삶 자체는 뭐 별다를 게 없었다. 학교생활도 무난했다. (이때까지는 말이지..)
이후 촌수가 좀 잇는 친척 중 한분이 아버지에게 청소공무원 자리가 하나 나서 아버지를 빽으로 넣어줬다.
그렇게 아버지는 오래 일할만한 일자리를 구하시게 되고 우리 집은 다시 한 번 다른 동네로 이사한다. 그리고 난 초등학교 4학년으로 올라갔다.
이때부터 내 인생을 뒤흔드는 비극의 서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