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타 커뮤니티 독서모임의 발제를 위해 <총, 균, 쇠>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작가는 그 책을 읽으면서, 혹은 읽기 전에 가지고 있는 독자의 많은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지만, 여전히 '인간의 잔인함'에 대해서는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환경이 인간을 잔인하게 만드는 것인지, 인간이 인간 스스로 잔인한 존재인지 알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저는 축구팬이라는 이름으로 잔인하게 굴었습니다.
축구를 해본 사람이건 하지 않은 사람이건, 대한민국 국가대표의 경기를 보며 아쉬웠던 장면, 혹은 자기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뱉었던 장면이 더러 있었을겁니다. 저는 실력이 좋지는 않은 아마추어 골키퍼를 10년 가까이 했는데, 정성룡의 선방을 누구보다 기뻐하면서 간간히 보이는 그의 실수를 아쉬워 하고 이해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최고인 그가 하는 실수는 대한민국의 골키퍼 누구를 데려다 놓더라도 하지 않으리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물론, 실수가 없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그 결과는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팀'의 몫인 것이지 그 개인의 몫으로 놔둬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경기 끝나고 울고 있는 정성룡의 볼을 두드려주고 '네가 최고다'라고 말해준 이운재 선수가 한편으로는 고마웠습니다. 내가 욕했던 수 많은 시간 동안 이운재 선수는 대한민국의 최고였고, 이제는 그가 정성룡 선수에게 최고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정성룡 선수에게 엄지를 치켜드는 모습을 보며 저는 그를 욕한 시간이 부끄러웠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느끼는 상실감과 아쉬움 만큼이나 이동국 선수는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생각보다 여린 성정의 그가 이 일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을지 많이 걱정이 됩니다. 그의 선택은 최선은 아니었지만 나쁘진 않았습니다. 비슷한 상황에서 일반인 수준의 키커를 이동국 선수의 위치에 놓고 제가 그 키퍼의 자리에 선다면 저는 키퍼로서 막아낼 자신이 충분히 있습니다. 축구는 10명을 뚫어도 골키퍼를 뚫지 못하면 아무도 뚫지 못한 것과 결국 같습니다. 이동국 선수가 1:1이라는 찬스를 맞이했지만 골키퍼의 눈으로 바라본 입장에서는 5:5였을겁니다. 그 상황에서 달려나오는 키퍼의 약점 - 키퍼의 가장 취약한 약점은 서있을 때는 다리 사이, 다이빙 할때는 옆구리입니다 - 을 노리고 잘 찼습니다. 문제는 이동국 선수가 자기 확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믿고 '에라 모르겠다 막을라면 맞고 죽어라' 라는 식으로 슛을 찼어야 하는데 변수는 비가 왔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12년동안 꾸어온 꿈을 자기 스스로 부쉈습니다.
그동안의 그의 불운과 부족함을 탓하고 싶지도 않고 동정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어쨌든 그는 좋은 찬스를 스스로 만들었지만 - 그리고 그 만들어낸 찬스를 한 눈에 알아본 박지성 선수가 정말 좋은 패스를 해 주었기에 그 찬스가 완성된 것이었지만 - 스스로 부쉈습니다. 아쉽죠. 아쉽습니다. 온 국민의 기대와 자기 스스로의 기대 그리고 동료의 기대를 모두 날려버린 그는 황선홍 선수가 그랬듯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순간이 다시 찾아오기 전 까지는 아마도 그 광경을 죽을 때 조차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굳이 정성룡과 이동국의 예를 들지 않아도, 우리는 많은 사람을 욕합니다. 선수를, 감독을, 코치를 너무나도 쉽게 평가하고 쉽게 욕합니다. 팬이라는 이름으로요. 물론 축구 뿐만이 아니라 어떤 스포츠든, 음악이든 무엇이든지요. 언제나 칭찬을 해줘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팬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욕할 권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욕할 수 있는 정당성을 확보하는 때에는 그가 우리의 기대를 저버렸을 때가 아니라 우리를 저버렸을 때 입니다. 우리가 욕한 선수들 몇몇은 우리의 기대를 심하게 저버렸지만 그래도 우리를 저버리고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매너없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는 누구도 욕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반성합니다. 저도 오염라인이라는 표현을 썼고, 허정무 감독을 선수빨로 여기까지 온 감독이라고 욕했고, 김남일 선수의 단 한번의 실수에 대해 그의 여태까지의 모든 커리어와 노력을 부정하는 험담을 했습니다. 돌이켜보니 오범석과 염기훈 선수도 그 결과는 좋진 않았지만 자기가 해야 할 몫 안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단지 부족했을 뿐이었고, 허정무 감독의 면면에 동의할 수 없는 점이 많이 있더라도 그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을 원정 16강에 올린 국내 감독이라는 것에 경의를 표하며, 김남일 선수는 단 한번의 실수로 폄훼할 수 있을만한 선수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스스로의 잔인함을 반성하며 이 글을 써 봅니다.
모든 선수는 자신 스스로를 위해 최선을 다 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인생에서 최선을 다해 그들과 같이 노력한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 라는 자학적인 물음 앞에서 스스로 부끄러워하고있습니다. 굳이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라는 시를 들지 않아도, 많은 분들이 아실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축구를 제일 잘 하는 선수들이며 누구보다도 그들이기에 우리가 기대하고 희망할 수 있는 결과를 일궈냈고, 그리고 그 후의 패배 앞에서 누구보다도 진하고 깊은 눈물을 흘렸는지요.
언제나 승리할 수는 없는게 세상이고 인생이기에,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의 패배 앞에서, 실수 앞에서, 실패 앞에서 조금은 너그러워지자, 라고 다짐하며 글을 맺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