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8/11/03 14:00:51
Name 글곰
Subject [일반] 병원일기 1일차
  관련글 : https://cdn.pgr21.com./?b=8&n=78735

  세상이 좋아서 병원 침상에 앉아 식사용 판떼기 위에 서피스를 올려놓고 피지알에 글을 쓸 수가 있습니다.

  사고가 난 다음날, 출근해서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서 몸이 많이 안 좋다는 걸 느꼈습니다. 병원 예약 시간이 되어서 일단 진료를 보았죠. 뼈는 부러지지 않았다 하네요. 하지만 목, 어깨, 허리, 엉치 등등이 여전히 쑤시고 결리더라고요. 그래서 의사선생님 아파요(ㅠㅠ)를 시전했는데 어찌 반응이 영 뜨뜻미지근하더군요. 아플 수도 있고, 필요하면 입원을 할 수도 있고, 물리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고...... 묘하게 모든 문장에 조동사 may를 넣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튼 그 병원은 회사 근처에 있어서 다니기가 별로 안 좋았기에 집 근처 병원으로 옮기기로 합니다.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더니 마침 집 인근에 무슨 자동차사고 전문 한방병원이라는 게 있다고 나오더라고요. 버스를 타고 그리로 갔습니다. 그런데.......

  어 뭐랄까.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건물 두 개 층을 다 쓰는데 불을 꺼 놓아서 을씨년스럽고, 그 너른 공간에 접수보는 간호사 한 사람만 앉아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사람 외에는 간호사가 아예 없더군요. 간호사가 원장을 찾아 한참을 헤매더니 어디선가 발견해서 데려왔습니다. 원장실로 들어갔는데 어둑한 방 안에 구식 가스난로 하나가 불타고 있는 음침한 공간이었습니다. 목 어깨 등 옆구리가 아프다...고 했더니 별다른 설명도 없이 치료 들어간다며 물리치료실로 안내합니다.

  물리치료실도 침상이 열 개쯤 되는데 물론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기 누워 있다가 잠들면 누가 장기 떼어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으스스하더라고요. 한쪽 구석, 유일하게 형광등이 켜진 곳으로 안내받아 잠깐의 추나요법+물리치료+부황+침 세트를 시전받습니다. 치료를 받고 나오는데 어혈을 풀어준다는 이상한 한약을 한아름 안겨줍니다. 이미 내심 내렸던 결론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여긴 아무래도 너무 수상쩍어서 안되겠다고요.

  괜히 이상한 곳을 갔었던 스스로를 자책하며 인근의 제대로 된 큰 병원으로 왔습니다. 시간이 늦어서 응급실 접수하고 대충 병세를 설명하니 입원해서 며칠 경과를 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알겠다고 하고, 수속을 밟은 후 병실로 올라왔습니다. 아내에게 연락하니 퇴근하고 와서 속옷이랑 세면도구 같은 걸 가져다 주었습니다. 귀한 주말인데 같이 놀러가지는 못할망정 혼자 병원에서 죽치고 앉아 육아를 아내에게 떠넘긴 셈이라, 마음이 영 불편하더군요. 하지만 아내 역시 환자복 입고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저를 보니 영 마음이 안 좋은 모양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다 아내는 딸아이를 보러 집으로 돌아갔고 저는 홀로 남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혼자는 아니네요. 4인 병실인데 저까지 포함해서 환자 두 명이 쓰는지라 상당히 아늑한 편입니다. 같은 병실에 있는 아저씨는 저와 마찬가지로 교통사고 환자인데, 간호사가 들어올 때마다 꼭 한마디씩 던지면서 작업을 거는 근성 넘치는 사람입니다. 가끔씩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상대 보험사 직원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일부러 죽치고 있는 거다, 수틀리면 한방병원 가서 추나요법 3개월 끊을 거다, 뭐 그런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안 아프다니 좋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첫날에는 스르륵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잠들기 직전에 그런 생각이 떠오르군요.

  글 쓸 거리가 생겨서 잘 됐구나.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화염투척사
18/11/03 14:21
수정 아이콘
크크 글쟁이의 결론은 다르군요. 얼른 쾌차하시길!
18/11/03 21:23
수정 아이콘
얼른 집에 가고 싶습니다... 서피스로 글쓰기 힘들어요. 허리도 아프고.
아마데
18/11/03 14:50
수정 아이콘
빨리 나으시길 바랍니다. 거 곰이면 트럭에 치여도 우웅? 하고 멀쩡하게 돌아댕기는거 아니었나요??
붉은빛의폭풍
18/11/03 15:07
수정 아이콘
불곰국이라면 그럴수 있을지는 몰라도... 여기는 불곰국이 아닙니다 크크크

각설하고 글곰님의 빠른 쾌유를 빕니다
18/11/03 21:19
수정 아이콘
설령 불곰국이라 해도 제가 불곰이 아니라.....
혜우-惠雨
18/11/03 15:19
수정 아이콘
교통사고 후유증이 무서운데...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18/11/03 21:23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한 두세시간마다 아픈 곳이 달라져서 하소연했더니 '교통사고는 원래 그래요'라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18/11/03 15:26
수정 아이콘
교통사고와 한방병원... 요새 문제가 많죠. 잘 나오셨습니다.
18/11/03 21:18
수정 아이콘
노골적으로 쓰지는 못했는데 아무리 봐도 환자 치료가 아니라 합의금 올려받는 게 목적인 곳 같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18/11/03 19:51
수정 아이콘
우리나라 보험 시스템이 우리나라 입원 및 치료 시스템을 만들었죠. 살짝 범퍼만 닿아도 뒷 목 잡는 구조가 기형적인건 확실합니다.
18/11/03 21:22
수정 아이콘
분명 잘못된 건 확실해 보입니다. 그 빈틈을 노려 이익을 챙기는 사람도 많은 것 같아요.
18/11/03 20:43
수정 아이콘
자 이제 삼국지 글쓰시면 됩니다.
18/11/03 21:19
수정 아이콘
허리가 아파서 오래 못 앉아 있겠습니다. ㅠㅠ
18/11/03 22:11
수정 아이콘
빠른 쾌차를 기원합니다. 글곰님 마저 아프시다니 더 쓸쓸해 진다고 할까요.
쓸쓸할때는 글쓰기가 최고 아닐까요? 크크
우연히 보험사기를 목격하고 그걸 파헤치는 옆 침대환자 주제 어떨까요?
콩탕망탕
18/11/05 08:43
수정 아이콘
사고로 몸이 아픈건 참 안된 일이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고.. 아무튼 잘 쉬시고 쾌차하시길 빕니다.
덕분에 생긴 시간, 글도 많이 쓰시구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8767 [일반] 오늘부터 유류세가 인하됩니다 [36] 삭제됨8137 18/11/05 8137 1
78766 [일반] 두번의 수치플 이야기 [6] Asterflos9440 18/11/05 9440 10
78765 [일반] 대기업 못갔다고 실패한 인생이란 소리 들으니 기분 쳐지는군요. [239] 음냐리26681 18/11/05 26681 8
78764 [일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38] 삭제됨9279 18/11/05 9279 8
78763 [일반] [스포주의] 방구석 아조씨가 술김에 남기는 두서없는 보헤미안 랩소디 3회차 후기 [19] 람보르기니9762 18/11/05 9762 7
78762 [일반] 누나가 사라졌습니다. [94] bettersuweet17207 18/11/04 17207 113
78761 [일반] 병원일기 3일차 [7] 글곰5739 18/11/04 5739 6
78760 [일반] 산업위생이야기 2. 국내 직업병의 역사 [10] rectum aqua4991 18/11/04 4991 15
78759 [일반] 산업위생공학 이야기.. [14] rectum aqua5459 18/11/04 5459 12
78758 [일반] 짧은 썸이 끝났네요. [169] 제발조용히하세요20445 18/11/04 20445 10
78757 [일반] 교통공학 이야기 - 4. 교통사고 연구의 어려움 [21] 루트에리노6217 18/11/04 6217 11
78756 [일반] 이번 강제징용 배상 판결문의 한일기본조약 관련 부분. [20] 불똥6529 18/11/04 6529 1
78755 [일반]  레이달리오의 '원칙' [5] 시드마이어6321 18/11/04 6321 1
78754 [일반] 양심적 병역 거부 무죄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 [120] Danial11304 18/11/04 11304 20
78752 [일반] 오래 좋아했던 사람이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86] 루카쿠12948 18/11/04 12948 42
78751 [일반] 병원일기 2일차 [13] 글곰6066 18/11/04 6066 2
78750 [일반] 고대사서에 '근화'는 과연 오늘날의 무궁화일까요? [25] 물속에잠긴용5759 18/11/04 5759 0
78749 [일반] 편지 [9] 삭제됨4077 18/11/04 4077 12
78748 [일반] [토요일 밤, 좋은 음악 하나]Travis scott-SICKO MODE [7] Roger3283 18/11/03 3283 2
78747 [일반]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7200억원의 상속세를 낸다고 합니다. [174] 홍승식18863 18/11/03 18863 37
78746 [일반] <완벽한 타인> - 많이 잘했으나, 딱 하나 아쉽다 [35] 마스터충달9892 18/11/03 9892 12
78745 [일반] 성평등 지수가 높을수록 이공계에 여성 비율은 줄어든다?(추가) [104] BurnRubber15242 18/11/03 15242 14
78744 [일반] 병원일기 1일차 [15] 글곰8330 18/11/03 8330 9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