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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1/30 19:35:16
Name 유쾌한보살
Subject [일반] 그리운 설날 풍경.


마침내... PGR의 글쓰기 버튼을 누르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이 공간을 알게된 지  어언 3년, 그 때부터 거의 매일이다시피 나명들명 드나들었습니다.
수많은 사실을 알게되고,  수많은 정보를 얻고,  간간히 깨우침의 순간도 가졌지요.
간혹 .. 논리적 반박과 설득의 숨가쁨도 맛보았고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첫 글은,  과거 개인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재탕하고자 합니다.
(이웃이 매우 한정적이었기에 알아볼 회원님이 계실 리 없으리라 믿고 싶군요. )
편의상 경어를 쓰지 못함을 양해 바랍니다.




설날을 닷새 앞두고 있다.   치루어내야 할  의무의 날이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세뱃돈, 설빔, 맛있는 음식,  간만의 만남, 그리고 왁자지껄함..... 은,
아득한 시간 저 먼 곳에서 누렸었던 명절날의 모습일 뿐이었다.
장손 며느리 37년차에겐 차례음식 장만과 선물 마련, 손님 접대....로 인한 노동과 피곤함과 부담감이 있을 뿐이고...
그래서인가....온전히 즐거웠던 그 시절 설날로 잠시라도 돌아가보고 싶다.


일곱살 적,   나의 설날은 시냇가 방천에서 시작되었다.
강정을 만들기 위해선 쌀을 쪄서 덕석에 말려야 했는데 (약 사나흘)
그 찐쌀을 참새나 닭들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게 나의 임무였기 때문이다.
햇살이 퍼지면 긴 막대를 하나 들고 방천으로 나갔다.
할머니 집 대청마루 위에서 머얼리 방천이 다 보였기에
이 미션을 수행하는 데 있어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다.
나보다 겨우 두어 살 더 먹은,  한 촌수 위 7촌 5촌 당고모들과 소꼽놀이를 하거나
징검다리 아래 고드름을 따고 놀면서 참새 등 조류를 쫓았다.
바람이 퍼진 햇살을 걷어갈 즈음... 할머니가 오셔서 함께 덕석 위 찐쌀을 걷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내가 지켜낸 찐쌀을, 작은할머니4께서 뒤집은 솥뚜껑 철판에 조금씩 놓아
나무주걱을 쉴새없이 놀려 정성스레 튀기셨다.  거의 한나절을 솥뚜껑 아래 불조절을 해가며 ...
약 2배쯤 부풀은 그 뽀얀 쌀알 중 일부는, 치자로 물들였다.
그리고 치자색으로 물든 쌀알을 간간히 섞여 조청으로 버무려 일정한 두께로 반듯하게 썰었다.
또 반쯤은 땅콩과 튀긴 검은콩과 대두를 섞여 만들기도 했다.
이것은 차례용이고, 아이들 이 겨우내 먹을 군것질용은 뻥튀기 강정이었다.
나는 쌀이나 보리 튀긴 강정보다 옥수수를 튀겨서 조청에 아무렇게나 뭉쳐 만든 강냉이강정을 가장 좋아하였다.
요즘도 먹고 싶어서 강냉이 강정을 애써 찾아 보았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유과에는 강정보다 더 긴 시간과 정성을 들였다.
설 보름 전에 이미 도랑사구에 불린 찹쌀을 넣어 봉놋방 구석에서 썩혀야만 했다.
그래서 우리는 숨바꼭질할 때 그곳으로 숨으러 가지 못했다.
남자 발냄새 + 청국장 냄새 + 장 달이는 냄새..랄까..  악취 死 할 것 같은....
그래서 지금도 유과를 별반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왜?  완성된 유과에는 그 혐오스런 과정의 흔적이 1나노그램도 남아있지 않은지....

작은할머니5는 그렇게 삭힌 찹쌀에 콩가루를 살살 뿌려가면서 반죽을 하셨다.
그리고 방망이로 얇게 밀어 정사각형으로 잘라 따끈따끈한 방바닥에 한지를 깔고 주욱 널어 놓으셨다.
꾸덕하게 마르면 펄펄 끓는 기름에 튀겨내어 조청을 바르고 쌀튀밥가루에 묻혔다.
이렇듯 조청은 약방 감초처럼 강정 유과를 비롯, 과일 정과 흰엿 등을 만드는 데 두루 쓰였다.

나는 조그만 조청 단지를 안고 대청마루 끝에 앉아 구운 인절미를 찍어먹곤 했다.
열 손가락 모두를 쪽쪽 빨아가면서 말이다.
당시 나는 혼자 시골 할머니 댁에 와 있었다.
언니는 학교에 다녔고 남동생은 어린데, 어머니는 임신(여동생) 중이어서
존재감 없는 미운 일곱살인 내가 할머니에게 위탁보육되는 건 당연했다.
나는 어머니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했으므로 이 상황에 전혀 상처 받지 않았는데,
할머니는 내가 안 되어 보였는지 손님 상에만 오르는 대봉감 홍시나 고동시 곶감을 주시곤 하셨다.

아......엿 고으는 그 날을 어찌 잊으리....
사랑채 큰 가마솥에서는 엿물이 처음엔 설설 끓다가 나증엔 서서히 달여졌는데, 한나절 이상 고았던 것 같았다.
작은할머니4가 치마를 걷어 올리고 속곳이 보이거나 말거나
가마솥 한 쪽 부뚜막에 다리를 걸치고,  큰 나무주걱으로 끊임없이 저어주셨다.

달착지근한 내음이 온 집안을 휘감은 가운데
우리는 마당에서 사방치기나 콩돌줍기 땅따먹기를 하며 조청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주걱에서 엿물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고아지면,
할머니는 먼저 한 숟가락 떠서 찬물에 담근 후, 나에게 주셨다.
그러면 작은할머니4도 당신의 자식들인 오촌아재나 당고모들에게 하나씩 조청 숟가락을 들려주셨다.
우리는 조청 숟가락을 빨면서 계속하여 놀이에 열중하곤 했다.

할머니는 꿀단지 몇 개에 조청을 분산하여 담으시고, 나머지 조청울 한 시간쯤 더 달이셨다.
그 강엿을 작은할머니3가 ` 양팔 늘이기 수천 번 도전 `도 아니고,
몇 시간을 반복하여 잡아늘여서  흰엿으로 만드셨다.
우리는 옆에서 고동색 강엿이 흰색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넋을 잃고 침까지 흘리며 구경했다.

잊지 못할 풍경이 어디 그 뿐이랴...
안방에 솜이불을 뒤집어쓴 커다란 단술(식혜)단지.  그 날은 방이 지글지글 끓었다.
시루떡 찌는 솥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솟구치고,
작은할머니1,2는 대청마루에서 2인 1조를 이루어 손발을 척척 맞추어
인절미를 썰고 절편을 찍어내셨다.
톳골댁 아주머니와 우리 고모는 종일 벌겋게 얼굴을 달구며 아궁이에 불을 때어댔다.

할머니는 총 감독.
어머니는 코치
근데 왜 작은어머니 일하는 모습은 기억에 없을까..  크크

우리도 덩달아 종일 돌아다니며 적당히 집어 먹고
내가 놀다 지쳐 지글지글 끓는 방에서 흥건히 땀에 젖어 자고 있을 때
언니와 당고모 7촌고모들은 작당하여 훔쳐온 음식을 싸들고
방갈로같은 논 볏집가리 속에 들어가 섣달 그믐날을 새우기도 했다.




할머니 몇 분이서 흰수건을 쓰시고
부엌에서 마당에서 뒤란에서 우물가에서...
몇 날 며칠 종일 분주하게 움직이시던 그 모습이 꿈 속 장면같이 떠오른다.
무슨 수행 고행도 아니고...평생 노동만 하신,
그 풍경 속 할머니들은 한 분만 남고 모두 돌아가셨다.
어릴 적 설날 풍경이 이대도록 그리운 것은
그 분들이 사무치게 그립기 때문 아닐까... 아....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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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GainNoPain
19/01/30 19:40
수정 아이콘
피지알 첫글 축하드립니다.
유쾌한보살
19/01/30 22:00
수정 아이콘
첫 댓글 고맙습니다. 경품 드리고 싶군요.
김제피
19/01/30 19:46
수정 아이콘
와. 글을 정말 잘 쓰시네요.

아련하기도 달큰하기도한 추억 잘 읽고 갑니다.

그리고 첫 글 축하드려요. 저고 첫 글 쓸 때 엄청 고민했던 기억이 있네요.

자주 부탁드립니다.
유쾌한보살
19/01/30 22:04
수정 아이콘
덕담... 고맙습니다. 사실 첫 글은 산고를 겪고 올려야 하는데 말입니다.
최종병기캐리어
19/01/30 20:28
수정 아이콘
이야기로 듣던 '시골' 풍경이네요. 아버님이 이런 이야기 많이 하셨는데...
유쾌한보살
19/01/30 22:09
수정 아이콘
제가 춘부장과 연배가 비슷할 지도 모르겠군요. 하하 왠지 조금 민망하기도 합니다.
최종병기캐리어
19/01/30 22:11
수정 아이콘
아버님은 칠순이 넘으셨는데....
유쾌한보살
19/01/30 22:18
수정 아이콘
어이쿠 ~ 그러시군요. 춘부장께서도 그리운 그 시절의 기억을 가슴에 많이 담고 계실 듯합니다.
독수리가아니라닭
19/01/30 20:38
수정 아이콘
읽기만 해도 맛있네요
유쾌한보살
19/01/30 22:15
수정 아이콘
맛있는 글이라고 해석해버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만년유망주
19/01/30 22:35
수정 아이콘
머릿 속에 그려지는 글을 쓰시네요. 감사합니다.
유쾌한보살
19/01/31 07:56
수정 아이콘
흐읍...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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