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06/12 00:55:55
Name Lotus
Subject [일반] 박제
네가 내게 ‘사람 그 자체’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그 떨떠름한 기분을 기억한다. 와 닿지는 않았지만 그건 내가, 당연히도 완전히 너의 입장에 설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너의 눈 너머를 더듬거리며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기다림이 끝난 건 ‘변했다’는 너의 말과 함께였다. 너 자신도 특별한 이유를 대지 못하는 그 말— 그 말과 함께 나는 몇 바퀴나 제자리를 빙빙 돌곤 했는지. 내가 모르는 너의 친구들에게 나를 ‘섬세한 사람’으로 이야기하곤 했다는 너의 말, 거기에 동봉된 뿌듯한 미소, 그리고 나의 허무함이 떠올랐던 건 그때였다.

너와 내가 멀어진 일이 정말로 슬픈 것은 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간들이 어느 달력의 하루 언제쯤으로 박제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너는 더 이상 너, 너의 동그랗고 큰 눈과 순진한 표정 웃을 때 생기는 입가의 주름 따뜻하다 못해 뜨겁기까지 했던 손 내 품으로 육박하며 꿈틀거리는 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이런 저런 말들로만 존재하고 나는 그것들을 내 손아귀에 넣고 내려다본다. 무엇을 찾는지, 그것들을 이리저리 뒤적거리고 들추어봐도 이전의 향취는 없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생각하기를 그만두는 것이다. 그것이 너에게도 나에게도 최선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너는 그저 너로서만 저 멀리 그렇게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섞이지 않았고 너는 내게서 매끈하게 빠져나갔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서양겨자
19/06/12 01:09
수정 아이콘
이 계절은, 참 느리게 간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6월이다. 할 일 없이 빈둥대면 시간은 느리게 가니까, 어쩌면 다른 해보다 많이 늘어져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얼마나 무료한 나날들이 빛 속에 있었나... 그날 죽을 것 같은 무료함이 우리를 살게 했지, 아주 어린 짐승의 눈빛 같은 나날이었다.
별바다
19/06/12 02:37
수정 아이콘
시간이 갈수록 감정은 흐려지는데 정말 애틋했다는 사실 그 자체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어서 더 씁쓸한 것 같습니다 분명히 정말 소중하고 좋았었던 건 명확한데 막상 이게 어떤 느낌이었는지 떠올릴 수 없을 때 이 감정을 뭐라고 해야 될까요
말이 짧아서인지 맘이 무뎌서인지 뭐라고 설명을 못하겠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1486 [일반] [여행기] 프랑스 신혼여행 후기 [24] aurelius8899 19/06/14 8899 11
81485 [일반] 차이잉원 "홍콩 사건, 일국양제 수용 불가 이유 보여줘" [24] 나디아 연대기12986 19/06/14 12986 3
81484 [일반] 자극적인 보도들이 불러온 음모론 참사 [102] 마법거북이16360 19/06/14 16360 11
81483 [일반] 궁내체고의 가수 various artist의 곡 듣고 가시죠. [36] 설탕가루인형10078 19/06/14 10078 3
81482 [일반] No.10 플레이메이커가 이끄는 언더독 팀의 매력 [9] 쿠즈마노프9000 19/06/14 9000 5
81481 [일반] 한때 내가 찬란했던 때의 추억 [10] 태양연어6319 19/06/14 6319 1
81480 [일반] 호르무즈 해협에서 유조선 2척 어뢰 피격 추정 공격받아, 1척 침몰 [31] 후추통15116 19/06/13 15116 3
81478 [일반] 내가 스미싱에 당할 줄이야..... [72] handmade28035 19/06/13 28035 15
81477 [일반] 중국의 국가정보법 -전 국민의 정보원화 [20] 사악군9095 19/06/13 9095 14
81476 [일반] 리사수 : 인텔 중저가 라인업도 장사를 접도록!!( [90] 능숙한문제해결사15578 19/06/13 15578 2
81475 [일반] 개인적으로 느끼는 한국 보수의 스펙트럼(2) [67] Danial10141 19/06/13 10141 52
81474 [일반] 직원들에게 아이스크림, 붕어빵 사주는게 사내복지 해결책인가요? [108] 쿠즈마노프16093 19/06/13 16093 10
81473 [일반] 홍콩 범죄인 인도 반대 시위가 격화되고 있습니다. [49] 캐모마일11505 19/06/13 11505 10
81472 [일반] 고유정은 어쩌면 연쇄살인마일 가능성도 있어보입니다. [55] 마빠이15765 19/06/13 15765 2
81471 [일반] 함평 폭력 사건으로 경찰의 현장 매뉴얼을 생각하다. [64] handmade15350 19/06/12 15350 8
81470 [일반] 물들어온다고 노젓진 말아줬으면 하는 직업 [24] 시린비17623 19/06/12 17623 7
81469 [일반] 여러분이 생각하는 X-MEN 순위는 어떻게 되나요? [75] 삭제됨10218 19/06/12 10218 1
81468 [일반] [컴퓨터] 라이젠 사용자 여러분은 윈도우10 1903 패치를 적용하세요. [19] 김티모14900 19/06/12 14900 2
81467 [일반] 황석영이 말하는 이문열 [45] 서양겨자16838 19/06/12 16838 75
81466 [일반] 박제 [2] Lotus7290 19/06/12 7290 12
81465 [일반] 1주택 양도세 비과세 폐지' 투표 부쳤다 발 뺀 기재부 [95] 미뉴잇13885 19/06/11 13885 17
81463 [일반] PGR 아저씨들! 옛날 노래 좀 듣고 가요~ [104] Cand10506 19/06/11 10506 5
81462 [일반] 그렇다면 독립운동가 때려잡던 간도특설대가 국군의 뿌리인가요? [485] 쿠즈마노프22426 19/06/11 22426 37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