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09/19 22:27:02
Name 밥오멍퉁이
Subject [일반] 서울
3층짜리 빌라의 옥상에서도 서울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탓은, 이 동네가 워낙에 높은 지역에 있어서 그렇다. 맑은 날에는 한강 너머까지 지평선이 펼쳐지는 것을 보며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잠을 설치고 설렌 기억이 떠오른다. 빨간 십자가 사이로 주황색 가로등이 껌뻑이는 골목길을 눈으로 쫒으며, 반쯤 타다 만 담배를 비벼껐다. 


처음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월세방을 찾을 때, 보증금도 낮고 월세도 낮은 방을 찾아 서울 구석구석을 쏘다녔다. 일단 서울에서 혼자 살 수만 있다면 뭐든 될 것 같은 기분으로 며칠을 돌고 돌다 이 빌라의 꼭대기 옥탑방을 왔다. 보증금 100에 28만원. 서울 어디서도 이 값에 살긴 어렵다고 했던 공인중개사의 말이 떠올랐다. 서울 어디서도 이 값에 집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뜻이었겠지만, 지금 돌아보면 여기서 사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말한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서울의 삶은 마치, 미끄러운 욕실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엉금엉금, 조심조심 허리를 쑥 빼고, 옷가지 하나 걸치지 못한 몸뚱이로 행여나 미끄러지고 굴러 넘어질까 초조해하며, 이름모를 두려움에 비명을 지를 용기는 없이 수도꼭지와 수건을 찾아 허공을 휘적이는 손짓으로. 그렇게 미끄러지지 않고 휘청대다 보면 전구도 달 수 있겠지. 욕조도 넣을 수 있겠지. 비데도 설치할 수 있을꺼야. 그런 기대로 낡은 세면대를 꽉 붙잡고 버티었다는 느낌이다.


어디에 자랑하기는 모자라지만, 다음 달 월세를 내고 쌀을 사며, 가끔 친구에게 술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만큼의 돈은 꼬박꼬박 받을 수 있는 회사를 다녔다. 열심히 벌어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지. 하는 희망을 박카스 대신 꿀떡꿀떡 잘도 받아 넘였다. 티비에서는 가끔 직장에서의 갑질이나, 과도한 노동따위의 것으로 불행해진 이들에 대한 아픈 이야기가 나왔다. 아직도 스테레오는 커녕 모노사운드밖에 나오지 않는 24인치의 모니터겸용 테레비가 내는 소리로는 그보다 더 마땅한 소식이 없을 것 같았다. 사치스럽긴, 하고 삐죽이며 라면을 뜯는다. 진짜 불행은, HD방송을 틀어주는 나라에서 스테레오조차 못 내는 저 테레비같은 거야. 하고.


그런 밤들마다 방 문 바깥으로 서울의 밤거리를 저 멀리까지 바라보곤 한 것이다. 다음엔 저 동네까지 가보자. 그 다음에는 저기까지. 그 다음에는. 그렇게 한강과 차근차근 가깝게 이사를 하며, 언젠가는 강 이남의 저 커다란 아파트들의 불빛 한 조각을 맡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방문 안으로 정리한 이삿짐을 보며, 몇 년의 서울생활이 고작 우체국 박스 세개 정도면 된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회사가 두어달의 월급이 밀리다가, 사장님이 야반도주를 했다며, 근데 사장님은 야반도주도 벤-츠를 타고 했다더라. 같은 말에 문득 사장님의 트렁크에는 몇 개의 우체국박스가 들어 있었을까 싶어진다. 아, 친구들이랑 술 좀 덜 마실걸. 몇 푼 안되는 월급에도 괜시리 어깨가 으쓱해 친구들에게 삼겹살이며 회며 사줬던 일들이 아쉬워졌다. 사장님을 미워하기에는, 이미 너무 까마득한 일이었다. 


그래도 몇 년 서울살이를 했다고, 거리 곳곳을 돌다보면 한 때의 기억들이 길가 구석구석에 배여있다. 마치 전봇대 근처의 까무잡잡한 얼룩처럼, 물을 뿌리고 비질을 해도 거뭇하게 남는 자국이 되어있다. 이천 몇, 년도의 어느날들이 거리 여기저기에 뿌려져, 새 회사의 면접을 보러 다니는 내내 지나다닌 골목들에서 서울의 삶을 주워담았다. 골목을 돌고 돌아 높은 언덕을 낑낑대며 구둣발로 기어오르는, 진라면 두 봉지를 까만 봉다리에 넣어 집으로 향하는 길에는 늘 그렇게 주워온 어느 날의 서울날을 되새기곤했다. 그럴때면 약간은, 마음이 평화로워지곤했다.


새 회사는 서울에서 좀 벗어난 곳이었다. 다행히 사택기숙사가 있다고는 하는데, 월급에서 얼마를 공제한다고 했다. 집을 공짜로 살 수는 없지. 친구는 왜 그런 회사를 가냐고 했다. 글쎄, 그런 회사 말고는 아무도 날 써주지 않던데. 친구는 소주 한 잔에 그럴리 없다고 했지만, 고기 한 점에 더 좋은 회사가 있다고 했지만. 계산이요, 하고는 가만히 나를 쳐다본다. 아마 더 좋은 회사의 인사담당자들도 너 같았을껄. 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다시 서울에 올 수 있을까. 

다시 서울에 오고 싶을까.


입 안을 데굴거리며 맴도는 비명을 삼키며, 집 안에 챙길것을 둘러봤다. 더 할것도, 덜어낼 것도 없는 여섯 평의 옥탑방에도 작은 잠자리 하나는 어떻게든 마련하고자 했던 낡은 매트리스 하나를 두고 가는 것으로 서울에서 산 증거를 남겨둘 셈이었지만, 어쩐지 자꾸 아까웠다. 허리춤이 푹 꺼져서 더 쓰기도 뭐한데. 문득, 서울의 잠자리는 허리가 뻐근한 싸구려 매트리스였고, 서울에서 가장 많이 먹은 건 파도 계란도 김치도 없는 진라면 매운맛이라는 생각을 했다. 배고픈데, 진라면이 있던가. 다음에 서울에 올 때는, 좋은 매트리스랑 계란과 김치가 있는 라면, 스테레오가 나오는 티비를 가져오고 싶다고 생각했다. 올 수 있다면. 오고 싶다면.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오만과 편견
19/09/19 23:0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서울살이를 그리며 입시 준비를 하는 중 인데 느낌이 남다르네요.
허강조류좋아요
19/09/19 23:1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서글프네요
지니팅커벨여행
19/09/19 23:29
수정 아이콘
진라면 매운맛 맛있죠.
제가 자취할 때도 맛있었더라면... 흠흠

서울 올라와서 자취할 때, 누나가 자취할 때 쓰던 로터리식 아날로그 중고 테레비를 보다가 본가에서 리모컨 달린 TV를 보내 주셔서 남게된 테레비.
청량리에서 테레비 없이 자취하던 고교 동창이 저거 받으려고 봉천동까지 와서 지하철 타고 가져갔던 일이 생각나네요.
그 녀석은 당시의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오랜 친구들보다는 야망과 돈을 쫒다가 결국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서울생활이 그런 것이었을까요.
세인트루이스
19/09/19 23:34
수정 아이콘
뭔가 영화 태양은 없다에서 정우성이랑 이정재가 살던 집이 떠오르네요
19/09/20 11:38
수정 아이콘
월급 밀릴 땐 첫 달에 바로 탈출해야합니다 정말 답이 없는 상황이라.
앞으로 잘 되시길 기원합니다
4막2장
19/09/21 15:57
수정 아이콘
이거레알
결국 사장을 구로 노동부에서 재회했죠 크크
만년유망주
19/09/20 13:51
수정 아이콘
박민규 느낌이 나네요. 필력이 좋으시네요. 잘 읽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2790 [일반] 영화 [예스터데이]를 봤습니다. (스포있습니다!) [13] chamchI9538 19/09/20 9538 1
82789 [일반]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고민, 조언이 필요하네요. [28] 김유라9098 19/09/20 9098 1
82788 [일반] V50 듀얼 디스플레이를 폴더블폰(?) 처럼 사용해보자 [21] 총앤뀨9544 19/09/19 9544 2
82787 [일반] 서울 [7] 밥오멍퉁이8457 19/09/19 8457 36
82784 [일반]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을 찾은 DNA감정 [33] 박진호13037 19/09/19 13037 41
82783 [일반] 오늘 정말 무서웠던 일이 있었습니다. [60] 용자마스터14874 19/09/19 14874 19
82782 [정치] 조국 딸 표창장에 대한 소소한 의견 [100] nuki1215020 19/09/19 15020 2
82781 [일반] 52시간제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68] 러브어clock9723 19/09/19 9723 1
82779 [일반] 결혼 후기 겸, 댓글 추첨 결과입니다 [33] 센터내꼬야8515 19/09/19 8515 2
82778 [일반] 학종 vs 수시 vs 정시 [90] 주워니긔7715 19/09/19 7715 13
82777 [일반] 학종에 대한 소심한 응원글 [77] 하아위8325 19/09/19 8325 15
82776 [정치] 아마존, 알렉사를 통해 선거 정보 전달 [4] 타카이7569 19/09/19 7569 0
82775 [일반] 서울시교육청에서 일요일 학원 휴무제를 추친합니다. [121] Leeka9823 19/09/19 9823 1
82774 [일반] 담배, 니코틴, 금연, 챔픽스 [19] 모모스201312260 19/09/19 12260 5
82773 [일반] 수시로 무너져가던 모교 이야기 [71] 아웅이10623 19/09/19 10623 47
82772 [일반] 제주도 버스를 이용하실땐 카카오맵을 이용하세요 [14] 삭제됨6400 19/09/19 6400 3
82771 [일반] 이상화(Idealization)와 평가절하(Devaluation), 도덕화와 흑백논리 [13] Synopsis6521 19/09/19 6521 3
82770 [정치] 문대통령 국정지지도, 취임 후 최저치 [166] 물멱14311 19/09/19 14311 25
82769 [일반] (삼국지) 종요, 가장 존경받았던 호색한 [25] 글곰9765 19/09/19 9765 8
82768 [일반] 정말 정시는 수시보다 돈이 많이 드는, 금수저들을 위한 전형일까? [122] 25cm14602 19/09/19 14602 12
82767 [일반] [도움요청글] 본인, 주변에 RH+ 0형 계실까요? [10] 분당선6858 19/09/18 6858 1
82765 [일반]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 검거 + 경찰,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 관련해서 내일 오전 9시 30분 브리핑 예정 [220] 한국화약주식회사28837 19/09/18 28837 9
82763 [정치] 자유한국당 김재원 "수시 폐지, 정시 100%" 법률안 발의 [252] 리니지M14283 19/09/18 14283 3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