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2/06/20 21:21:49
Name 여기에텍스트입력
Subject [일반] 어쨌든,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아마도.
바로 전 글이자 자게에 쓴 첫 글이 여러모로 심란하고 무거웠던 편이었죠. 재차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머쓱해요]
이번 글은 그정도는 아니고, ADHD 판정 후의 삶이라는 조금 더 포괄적이면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글입니다.

0. 일단 전 글에 그렇게 심각한 얘기가 있었으니 정리는 하고 넘어가야겠죠.
- 제가 빽 지른 결과 저희 집에도 오빠의 여자친구분이 왔다가셨습니다.
- 여전히 마음엔 안드신다고 하지만, 재차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딸은 아들보다 집에 더 데리고 올 사람 없을텐데 이럴 때 자식들 취향파악 하시는 것도 나쁘진 않으시잖아요?"
- ADHD...는 뭐, 결국 제 탓으로 넘기시는 거 같은데 그간의 진료데이터를 보시던 의사쌤이 엄마쪽에서 ADHD 성향이 유전된 것 같다는 소견을 내비치셨습니다.


1. 전글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수면장애가 있는 편입니다. 이것 때문에 정신건강의학과에 처음 발을 들여놓기도 했죠. 지금도 딱히 뭐... 별로 나아지진 않았습니다. 지금 다니는 병원에서 받는 두번째 약은 다행히 한 번 잠들면 7시간 정도 잠을 보장해주고 있어서, 오늘 안먹었다가 2시간밖에 못자고 일어났는데 어째서인지 정신은 멀쩡하길래 "이게 뭔 상황이지...?" 하고 후회했죠.
결국 오후에 늘어지게 잤습니다. 젠장.... 수면장애도 ADHD 증상과 같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증상 중 하나입니다.

2. 결정장애라고 흔히 반농담삼아 말하지만, ADHD는 실제로 결정'장애'라고 언급할 수 있을법한 망설임 같은 게 있는 편입니다. 지금까지의 진료내용을 돌이켜보면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일에 '어떻게 해야 하지?'하고 결정을 내리질 못해서 남들이 보았을 때 게으르고 미루는 성향이 있는건데, 정말 간단하게는 쓰레기 버리는 일이나, 복잡하게는 내가 잘 모르는 세금 관련 신고 관련 일 같은 것도 혼자 해결하려다가 난관에 봉착하는 그런 것들이죠. 그 '마음을 먹는' 일이 어려운 게 ADHD거든요.

3. 길게 보자면, 미술전공이었던 제가 그림다운 그림을 그리지 못한 것도 ADHD의 영향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턱 막혀서, 다시 시작하려니 두려움이 크더라고요. 나이는 나이대로 먹어가는데, 왜 자꾸 그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지, '그려야 하는데 그릴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게 너무 오래 가서 이번에 병원을 찾은 거였죠. 약간 강제적인 것(공모전 등)을 이용해야 한다고 얘기하시더라고요. 마침 저번달에 공모전용 그림 그리다가 오랫동안 안그린 댓가를 톡톡히 받았습니다. 그리고 갤럭시탭에 눈이 돌아가기 시작하고....(?)

4. 그 망할 '망설임'이 벌어먹고 사는 것에 동기를 자꾸만 막고 있어서 백수로 지낸 지도 반년입니다. 사실 그런 게 있는 거 같아요. ADHD니까, 어쩔 수 없다. 하고 현재 상태에 져버린다고 해야 하나.... 패배했다고 해야 하나...
표현이 적당한게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이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농담삼아 커뮤니티에서 본 내가 크게 혼나고 있거나 했을 때 '뭐, 내가 너무 귀여운 탓인가'라고 넘어가긴 어려운 문제죠. 그건 타인이 저한테 뱉는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방어기제지 제가 저한테 뱉는 건 별 소용이 없으니.

5. 천성이 자기비관적인 성향이 있는데 하필 ADHD까지 더해져서 더 그런 게 있다는 얘기를 듣고 든 생각인데, '자기 자신을 북돋는 일'도 굉장히 중요한 거 같더라고요. 자만감 수준이면 좀 그렇고, 너무 딥한 감정으로 빠지지 않게 스스로 위로할 줄 아는 감정을 기르는 것도 필요한 거 같습니다. 한동안 유행했던 드럽게 비싼 힐링서적 이런 게 도움이 될 수도 있고(전 도움 안됐습니다 크크), 좋아하는 걸 하는 거일 수도 있고, 일상의 일탈일 수도 있고... 사람 많고 여행하는 거 별로 안좋아하는데 코시국 때문에 어디 돌아다니는 것도 어려웠죠. 이렇게 쓰다보니 가볍게 어디로 혼자 여행이나 다녀올까 싶기도 하네요?

6. 어쨌든 저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제3자 입장에서 보면 그냥 날백수긴 합니다만, 소확행이라 할 수 있는 게 그래도 가끔씩 있어서 버티고 있단 생각이 들어요. ADHD가 아닌 다른 분들도 그렇게 사실 거지만...

7. 어릴 때 '특별해지고 싶어서' 시력도 굳이 나쁘지 않은데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가 줄곧 후회하고, ADHD 증상을 받고 이게 내가 그렇게 바랬던 특별함은 아니지 않나 싶지만... 이젠 그냥 순응해야죠. 평범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모두 다 저마다의 인생에서 특별한 사람들이고, 머리가 좀 굳은 지금은 '아무리 어릴 때라고는 해도, 어지간히도 자의식 과잉이었구만...'이라는 생각이 드는 저녁입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jjohny=쿠마
22/06/20 21:26
수정 아이콘
글쓴분처럼 수면장애(기면증)와 성인 ADHD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전 글 읽으면서도 여러 부분에서 동질감을 많이 느꼈는데
이번 글도 제목에서부터 참 많이 공감이 됩니다.

남들이 이야기하는 '열심'과 ADHD 환자들이 이야기하는 '열심'은 좀 다른 형태일 수 있지만,
어쨌든 우리 모두 열심히 살아내봅시다...!
여기에텍스트입력
22/06/20 21:29
수정 아이콘
저만의 열심 기준으로라면, 저는 열심히 사는 거 같습니다.
돌아보면 이전까지는 진짜 어떻게든 사회에 적응하려고 발버둥친 삶에 가까웠던 거 같아요. 슬슬 그 발버둥 치던 삶으로 돌아가야죠.
저번 글도 이번 글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타본지7년
22/06/20 21:35
수정 아이콘
저도 우울증, 불안장애, ADHD 동시에 가지고 있고 강박장애도 있는 것 같다는 진단을 얼마 전에 받았네요.
진짜 갑자기 제어를 못 할 상황이 오긴 합니다만, 그래서 최대한 스트레스를 안 받으며 살려고 합니다. 그나마 지금은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는데(이것도 스트레스 생길 일은 천지지만..), 그나마 다행이랄까요.
남 일 같지 않네요... 하지만 다들 같이 어떻게든 잘 살아봤으면 좋겠습니다. -13살 때 난 10대를 버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현재 33살.
여기에텍스트입력
22/06/20 21:39
수정 아이콘
저도 저번에 스트레스에 관해서 방어기제가 약하단 소견을 들었거든요. 마침 댓글보다 생각났는데, 피쟐에 글 다시 쓰기 전에 0.에 쓴 일 때문에 스트레스성 장염이 잠깐 도져서... 덕분에 지금은 콘서타에 감정 컨트롤 관련 약까지 받고 있습니다 크크
박물관에서 일하신다니 저는 그 안내원...? 그런 직원분밖에 생각나지 않는데, 맞으시다면 사람 대하는 일 하시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생각이 듭니다. 직업 말해주셔서 그런데 진짜 박물관 투어도 괜찮을 거 같네요 크크
스타본지7년
22/06/20 21:55
수정 아이콘
도슨트는 아니고, 유물 관리 부서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흐흐. 저도 사람 대하는 걸 안 좋아해서요. 다만 항시 책먼지를 접합...
22/06/20 23:15
수정 아이콘
여러모로 피곤하고 힘든 세상이다보니 주변에 매사를 비관적이고 냉소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느낍니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어쨌든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기준으로는 열심히, 그리고 잘 지내려고 한다는 분들 보면 그냥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얼굴도 모르는 분이지만 앞으로도 항상 건강 잘 챙기시면서 지금 마음 먹고 계신 것처럼 열심히 잘 지내주시길 바랄게요.
저는 개인적으로 힘내라는 말보다 힘빼라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무리하지 마시고, 차근차근 소소하게 즐거움 찾으면서 살아가자구요.
aDayInTheLife
22/06/21 13:01
수정 아이콘
저도 참 쉽지 않더라구요. 약도 먹고 있고(저는 불안, 공황발작, 우울..이네요) 취준은 하려고 해도 마음도 안먹어지고 자신도 없고... 그렇다고 스펙이 쩔어서 날 뽑아가라! 도 안되서 아직 힘들긴 한데...
https://cdn.pgr21.com./qna/163657
요기 제가 마음챙김에 대해서 한번 물어본 글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본적으로 잘 자고+운동하고 를 필수조건으로 주시더라구요. 개인적으로 자는건 좀 못지키고 있긴 한데 크크크
사는 거에 열심히가 뭐겠어요. 사는 것 자체에 열심히는 괄호 쳐져서 이미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요, 우리 살아남아 보자구요.
인간실격
22/06/22 04:01
수정 아이콘
식당에서 서버분 부르기가 너무 힘들고 배달음식 하나 고르는데 2시간 걸리는 저도 잘 삽니다 크크. 결정 자체가 힘들다보니 결정을 해야하는 상황 자체를 피하게 되는 심정 저도 잘 이해가 갑니다. 이런걸 ADHD에 수반된 회피성 성격장애라고 한다죠?

전 심한 경우엔 중요한 이메일에 답변하는데 일년이 꼬박 넘게 걸려본 적도 있네요. 회피하다 까먹어서 금전적 손해도 많이 봤구요. 사람과 연락을 유지하고 답변하는 일련의 행동 자체가 너무 지치고 힘든 경우가 있습니다. 결국 그게 자기비하로 이어지구요. 이런 건 억지로 꾸역꾸역 한다고 단기적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죠.

그래서 좋은 사람을 옆에 가까이 두는게 참 중요하구요(상담사라도) 나와 다른 주변인들을 인식하고 그 사람들도 다 똑같이 스트레스받고 결정을 힘들어하는 일반인이구나, 그래도 나와의 관계를 중시하니까 내 앞에서는 이렇게 나를 배려해서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니까 나는 그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구나. 라는 희망적인 생각을 점점 키워나가는게 도움이 많이 된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네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 댓글 쓰면서 또 까먹고 미룬 할일 정리해서 제 자신에게 알림으로 보내고 있는 제 모습을 보면서 다시 반성하게 되네요...크크크.

윗분 말씀따나 사는 것 자체가 상당히 치열한 행위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거기서 조금 뒤쳐지는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큰 하자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네요. 살면서 늘 뛰어가기만 할 수는 없으니 걷고 뛰고 하는거죠. 얼마나 빠르게 목표에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을 조금 놓아주고 어디로 가는지 방향성만 명확하다면 조금 느긋해져도 좋지 않을까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6180 [정치] 만5세 입학 방안에 대한 박순애 교육부 장관 인터뷰 (+추가) [273] 덴드로븀22705 22/08/01 22705 0
96179 [일반] 유명 연예인의 안 유명한 시절 이야기 [34] 지니팅커벨여행10172 22/08/01 10172 5
96178 [일반] LG 32un650 핫딜 떠서 글씁니다. [44] 키토12303 22/08/01 12303 0
96177 [일반] 신축 아파트 벽장 똥사태 [86] 소주꼬뿌19074 22/07/31 19074 38
96176 [일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한투의 불법공매도 사태(Feat. 3pro, 슈카) [79] 도뿔이14613 22/07/31 14613 20
96175 [일반] 책 후기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 aDayInTheLife6212 22/07/31 6212 2
96174 [정치] 권성동은 직무대행 뿐 아니라 원내대표도 사퇴해야 한다. [248] 이순20292 22/07/31 20292 0
96173 [일반] 특전사의 연말 선물 [36] 북고양이9152 22/07/31 9152 16
96170 [일반] MBTI의 효용성에 관해서 (INTP 관점) [82] 만수르9226 22/07/31 9226 8
96169 [일반] 예장고신의 SFC 폐지 논의: 전통과 실효성 사이에서 [57] SAS Tony Parker 13185 22/07/31 13185 0
96168 [일반] userbenchmark에 7600X 벤치가 등록되었습니다? [14] manymaster8166 22/07/31 8166 0
96167 [일반] 한국에서 언어 차별주의는 존재할까? [66] 헤일로12510 22/07/30 12510 3
96166 [일반] [일상] 자동차보험료 갱신후 73만원 > 164만원 [68] VictoryFood14823 22/07/30 14823 2
96165 [일반] 폴란드 방산기념 이모저모 3 [42] 어강됴리15742 22/07/30 15742 28
96164 [일반] (스포) <한산> vs <명량> [73] 마스터충달8537 22/07/30 8537 6
96163 [정치] 국민의힘 권성동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 비대위 수용 [101] 저스디스18093 22/07/30 18093 0
96162 [일반] 정체를 잘 감춘 서유기 -외계+인 1부 감상 [14] 닉언급금지7310 22/07/30 7310 0
96161 [일반] 사교육자이자 두아이의 아빠가 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9화 [42] 프라임에듀10243 22/07/30 10243 15
96160 [일반] (스포) 우영우는 사랑할 수 있을까? [38] 마스터충달14134 22/07/30 14134 3
96159 [일반] 베트남에선 잘 깍으세요. [47] 헝그르르14054 22/07/29 14054 1
96158 [정치] 이재명이 과연 대안일까? [301] 삭제됨20489 22/07/29 20489 0
96157 [정치] 초등학교 입학연령 만6세에서 만5세로 1년 낮추는 방안 추진 [331] 로하스24492 22/07/29 24492 0
96156 [일반] 폴란드 방산기념 이모저모2 [45] 어강됴리11269 22/07/29 11269 2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