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니어스라는 프로그램을 처음 알게된것은, (PGR에 계신 많은 분들도 그렇겠지만) 전 프로게이머 홍진호가 참가한다는 얘기를 들은 무렵부터였다. 홍진호의 오랜팬이자, e스포츠의 초창기부터 꾸준히 지켜온 나에게는 흥미로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e스포츠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겠지만, e스포츠라는 것이 꽤나 마이너한 취미다 보니까 프로게이머가 게임 이외의 방송에 나온다는건 그 자체로도 화제가 되는 일이였다. 그들이 게이머들을, 그리고 그들을 응원하는 우리같은 팬들을 대표한다는 생각에 괜히 응원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사실 보통 그런 게이머를 대표하는 자리가 있으면 그 주인공은 황제 임요환이였다. 스타크래프트는 몰라도 임요환은 안다는 얘기도 있고, 이미 그가 가진 상징성이라는 것은 다른 프로게이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 임요환이 아니라 홍진호가 나온다는 것에 대해서 반가우면서도 왜? 라는 느낌을 받기도 하였다. 다만 지니어스는 10-20대의 시청자들을 타겟으로 하는 tvn에서 방영된다는 점에서, 젊은층에는 충분히 어필 할수 있는 사람이겠거니 싶었다.
시즌 1 초기에 홍진호의 모습은 뭔가 어설프고 불편해보였다. 가넷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그의 전략도 막히는가 하며, 거기에다 게이머시절에도 눈에 띄이던 딕션이 방송인들과 어울리다 보니 유독 튀겠는가. 그의 어리버리한 모습에 스갤에서 놀림받던 콩이 생각나면서 자칫 잘못하다가 또 까일거리만 또 주고 떨어지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와중에 김구라와 대립하면서 위기를 맞고, 탈락후보가 되면서 벼랑끝에 몰리게 되었다.
그 벼랑끝에서 홍진호가 김구라를 꺾던 순간, 나는 통쾌함에 절로 박수가 나왔었다. 많은 사람들이 홍진호의 최고 명장면으로 콩픈패스, 혹은 5대5 필승전략을 꼽지만, 개인적으로 지니어스에서 내가 가장 크게 감정몰입이 됐던 단 한순간을 꼽자면 바로 인디언 포커에서의 역전극이였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판단력을 잃지않고 살아났던것도 그렇고, 그 와중에 카드카운팅을 함으로써 자신의 최대 적이였던 김구라를 꺾은 것이, 뭐랄까, 여러 표현을 생각해봤는데, 졸라 멋있었다.
그의 오랜 팬으로서 고백하기엔 웃긴 얘기이긴 한데, 홍진호라는 게이머가 멋있게 보였던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이다. 그는 01년에 데뷔하여 11년까지 10년의 커리어를 가졌지만, 홍진호는 본인의 최고 전성기던 2003년 이후로는 압도적인 경기력, 누구도 넘을 수 없는 포스와는 거리같은 수식어와는 먼 게이머였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2인자의 상징으로, 콩으로, 삼연벙으로, 폭풍설사로, 혹은 장판파로 까이면서 인간미가 넘쳤던 게이머에 가까웠다. 희화화가 너무나도 많이, 그리고 오랫동안 되어왔기에 많은 이들이 잊고 있었지만, 분명히 원래의 홍진호는 외부요소 없이 그 경기력 자체만으로도 빛이나는 멋있는 프로게이머였었다. 그렇게 잊혀졌던 전성기 시절의 프로게이머 홍진호가, 스타크래프트가 아닌 지니어스 안에서 보여지기 시작한것이다.
아마 그때부터가 터닝 포인트였던것 같다. 홍진호는 더 이상 어리버리 타는 일도 없었고, 본인 스스로도 잊고있었던 자신의 원래 모습을 찾았는지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였다. 홍진호는 다수연합의 견제에도 자신의 실력만으로 이겨냈고, 그 후 데스매치를 두번이나 더 갔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더니 결국엔 시즌1의 최후의 승자가 되어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더니 시즌2에서도 돌아와서도 게임을 하드캐리하기 시작한다.
콩픈패스, 5대5, 그리고 인디언포커.... 이러한 홍진호의 명장면들이 사람들에게 어필을 한 장면들이였다면, 나는 시즌 2 초기의 홍진호야말로 그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홍진호의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즌 1 후반부부터 시즌2 초반까지 지니어스를 매주 챙겨보는것은 삶의 낙이였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10년전 코흘리개 시절의 내가 좋아했던 게이머의 플레이가 보였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홍진호의 이런 활약은 그의 라이벌들에게 견제대상 1호였고, 그를 견제하기 위해 "연예인/비연예인" 프로파간다가 완성되면서 시즌2는 누구도 예상하지못한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7계명에서의 석패를 시작으로, 카드 절도사건에 한국 커뮤니티가 전시상황에 돌입하더니, 그 다음주에는 인디언홀덤에서 패배하여 탈락하고 말았다. 그의 총명함과 승부사적 기질을 보는것이 즐거웠던 나로서, 홍진호의 2회연속 우승이 좌절되는 순간 꽤나 안타까워 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한시즌을 건너뛰우고 왕중왕전에서 돌아온 홍진호였는데, 그의 모습은 시즌 1-2의 모습과는 달라보였다. 발톱이 없어진건지, 혹은 발톱을 숨긴건지 모를정도로 병풍이 되어있었고, 게임을 캐리하는 것은 더이상 홍진호의 몫이 아닌 이상민과 장동민의 몫이였다. 이제는 방송인이 되어 바빠진 스케쥴 때문인지, 더이상 지니어스에 간절함이 없어진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즌 4의 홍진호의 모습은 또 다시 한번 더 그런 멋진 활약을 바랬던 나의 기대와는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어제, 최후의 불꽃을 불태워 주길 바랬던 마지막 기대와는 다르게 그는 Top 4에서 좌절하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시즌 1,2, 그리고 4를 거친 홍진호의 지니어스의 행보는, 그의 프로게이머 시절의 행보와 아주 흡사하게 보여져있었다. 어느순간부터 주변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더니 최강자의 반열에 올랐고, 그 후 좌절 한 뒤 다시 돌아왔을때는 이미 그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지니어스의 세계에 들어와있었다. 처음 홍진호가 했던 오픈패스급 발견은 그 누구나 다 생각할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고, 그보다 더 빠른 두뇌회전과 정치력,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이 홍진호를 초라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지니어스를 본 사람들중 누군가가 프로게이머시절의 홍진호를 묻는다면, 혹은 프로게이머 시절의 홍진호를 기억하는 사람이 지니어스의 홍진호를 물어본다면, 나는 '당신이 봤던 것과 똑같은 모습이였다'라고 얘기해줄수 있을것 같다. 그 시작에는 누구보다도 빛났고 멋있는 사람이였지만, 새로운 강자들의 출현에 그 빛을 조금씩 잃어갔던 사람, 그 와중에도 무언가 해줄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게 했지만 안타깝게 거기서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고.
그러나 그의 프로게이머 시절과 지니어스의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지니어스에서의 홍진호는 결국 모두에게 인정을 받는, 정점을 찍은 1인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매번 최고의 자리 그 직전에서 좌절했던 그였지만, 지니어스에서만큼은 아이콘이였고 주인공이였다. 비록 후발주자들의 등장으로 몇 년뒤 사람들에게 최고의 지니어스 플레이어를 물어봤을때 홍진호의 이름이 거론이 안될 수도 있겠지만, 한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최강자였고 1인자였던 홍진호였다.
그 사실들만으로도, 아쉽게나마 나는 만족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