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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1/08 14:07:28
Name EpicSide
출처 https://pgr21.com/recommend/2410?page=4&divpage=1&sn=on&keyword=%EC%8B%A0%EB%B6%88%ED%95%B4
Subject [기타] 중국의 역사를 바꾼 38개의 대전투 (수정됨)
B.C 1046 목야대전 牧野之戰

"여러 나라의 군주들이여, 사도(司徒), 사마(司馬), 사공(司空), 아려(亞旅), 사씨(師氏), 천부장(千夫長), 백부장(百夫長)들이여
그리고 용(庸), 촉(蜀), 강(羌), 모(髳), 미(微), 로(纑), 팽(彭), 복(濮)에서 온 군사들이여!
과(戈)를 높이 들고 방패를 정열하라. 그리고 창을 세우고 내 앞에서 맹세하라."

: 고대 중원 세계의 지배자를 결정지은 전투이자 소위 상주혁명(商周革命)이라는 고대 의식의 거대한 변화를 부른 전투.
주나라의 무왕이 주축이 된 제후들의 연합군이 상나라의 주왕에 맞서 승리를 거둔 이후,
중원에서 주류를 이루게 되는 문화는 후대에 비해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기존 상나라의 문화에서
현 중국 문화의 원류가 되는 주나라의 문화로 그 흐름이 바뀌게 되었다.



B.C 632 성복대전 城濮之戰

"진나라의 공자는 어질고 따르는 자들은 모두 나라의 뛰어난 신하다.
만약 하늘이 바야흐로 이를 흥하게 한다면, 누가 하늘을 거스르겠는가?"

: 춘추시대의 가장 거대한 역사적 흐름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북진하는 남방의 패자 초(楚)나라와,
중원의 맹주로서 이를 저지하려는 진(晋)나라의 대결이었다.
성복에서 초나라의 성왕은 진(陳)-채(蔡)-정(鄭)-허(許)의 나라들을 연합하여 진군했고,
진나라의 문공은 중원의 패자로서 송(宋)-진(秦)-제(齊)를 연합하여 대결에 나섰다.
이전 초나라 성왕에게 받은 은혜로 인해, 문공은 군대를 뒤로 90리나 물리고도 초나라군의 좌우 양측면을 붕괴시켜 승리를 거두었다.
중원의 패자가 초나라의 북진을 저지한 것이다.



B.C 262 ~ 260 장평대전 長平之戰

"나는 죽어야 마땅하구나! 장평의 싸움에서 항복한 조나라의 수십만 군사를 속여 산채로 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도다!"

: 문헌을 신뢰한다면, 세계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전대미문의 대학살극.
전국의 최강자 진(秦)은 이미 다른 모든 열국을 압도하는 강국이었으나, 염파-인상여-조사 등 뛰어난 인재를 보유한 조나라만이
격렬하게 진에 저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 미치지 못하던 조괄은 판단을 그르쳐 대패를 당하고,
진나라의 사령관 백기는 40만의 조나라 포로를 생매장하는 참극을 저지르고 만다.



B.C 207 거록대전 巨鹿之戰

"초(楚)의 전사들은 한 명이 열 명을 당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고, 부르짖는 소리는 천지(天地)를 흔들었으며,
제후들의 군사들은 서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이미 진(秦)의 군사를 깨뜨리고 항우(項羽)는 제후들의 장수들을 불러 보았는데,
원문(轅門)으로 들어오는 제후들의 장수들 중 무릎으로 기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감히 올려다보는 사람도 없었다."

: 전국을 통일한 진 제국의 종말을 알린 전투이자, 항우가 당대 최강의 군웅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된 전투.
시황제 사후 종말의 길로 치닫고 있던 진나라는, 최후의 명장 장한의 활약으로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진승과 오광의 장초를 무너뜨리고 위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제왕 전담을 죽이고 항량을 참살하며 무적의 기세를 이어가던 장한의 진군은,
끝내 항우가 지휘하는 초군의 맹렬한 기세에 저지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춘추전국을 거치며 살아남았던 강국,
진 제국의 멸망이 결정되었다.
  

B.C 205 팽성대전 彭城之戰

"항우는 새벽에 서쪽의 소현(蕭縣)에서 출발하여 한군을 공격하면서 계속해서 동진하여 팽성에 이르고
정오 무렵에는 한군과 싸워 크게 무찔렀다. 한군은 무너져 모두 앞서기니 뒤서거니 도망치다가 곡수(穀水)와 사수(泗水)에 빠졌다.
항우는 이 싸움에서 한군 10여만을 죽였다. 모두 남쪽으로 달아난 한나라의 패잔병을 초군이 뒤를 추격하여
영벽(靈壁)의 동쪽 수수(睢水) 강안에 이르렀다. 한군은 퇴각하여 초군에게 쫓기게 되자 수많은 군사들이 죽임을 당하고
그 중에 10여만의 군졸들은 수수로 뛰어 들었다. 이로써 수수는 죽은 한군의 시체로 흐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 서초패왕이 되어 당대 최강의 세력으로 군림한 항우와, 이에 대항한 한왕 유방의 대결.
그러나 그 실체는 전투라기보다는 참혹한 살육이었다.
제(齊)의 반란진압에 항우가 팽성을 비운 사이, 한신을 앞세운 유방은 삼진을 평정하고 관중을 장악,
곧이어 5로 제후연합 56만의 대군과 더불어 기세 좋게 팽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후 귀환한 항우는 단 3만의 군사로 자신이 왜 패왕으로 군림하는지를 증명하였다.


B.C 204 정형대전 井陘之戰

"배수진의 병법도 병서에 나와 있소. 단지 장군들이 깨닫지 못해서일 뿐이오. 병법에 이런 말이 있지 않소?
'사지(死地)에 빠뜨려야만 살게 할 수 있고, 망지(亡地)에 두어야만 일어서게 할 수 있다.'라고."

: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 '배수진(背水陣)'의 유래가 나온 전투.
유방이 팽성에서 항우에게 대패를 당하자 유방과 연합한 제후들은 반초연합을 이탈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또다시 유방을 압박해 왔다.
이에 유방의 대장군인 한신은 북벌을 감행하여 안읍에서 위표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 대(代)국을 평정,
곧이어 정형에서 절대적 열세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여가 이끄는 조군을 대파하여
마침내 유방에게서 이탈한 제후들을 정리하는 임무를 완수한다.
또한 정형에서의 승리를 기점으로 초한전쟁의 진행양상은 유방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그 흐름이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B.C 202 해하대전 垓下之戰

"힘은 산을 뽑을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만한데 시운이 불리하니 오추마도 가질 않는구나.
오추마 가질 않으니 내 이를 어찌할 것인가. 우야! 우야! 너는 어찌할거나..."

: 항우 인생에 있어서 최초의 패배가 최후의 패배가 될 줄이야...
어마어마한 기세로 천하에 군림했던 항우는 지독한 독선과 아집, 좁은 시각으로 인해 자멸의 길을 걷고 있었고,
유방은 그 대척점에 서 있으면서 계속되는 전투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부의 추를 점점 자신에게로 옮겨놓고 있었다.
마침내 한신이 북방을 평정하여 그 균형이 완전히 기운 순간, 유방은 한신, 팽월, 경포 등의 지휘관들을 총동원하여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자가 초한쟁패를 종식시키고 고대 중화세계의 완전통합을 이룰 것이다.


B.C 200 백등산 포위전 白登之圍

"마땅히 번쾌(樊噲)를 참수형에 처해야 합니다! 일찍이 40만의 장병을 이끌고 계셨던 고제(高帝)께서도 평성(平城)에서 곤경에 처하셨는데,
오늘날 번쾌는 오직 병사 10만으로 흉노(匈奴)를 유린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 동북아시아에서 유목제국의 시대를 활짝 열어 유목사의 흐름에서 실로 기념비적인 전기를 마련한 전투.
초한쟁패를 승리로 이끈 유방은 중국의 지배자로 군림하였으나, 한(韓)왕 신(信)의 반란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흉노 묵돌선우와의 대결로 끌려왔고 그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다. 이후 흉노는 향후 80여 년간 한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였으며,
한은 권토중래를 꿈꾸며 치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B.C 119 막북전투 漠北之戰

"흉노를 아직 멸하지 않았으므로, 집은 필요가 없습니다."

: 개국 후 80여 년간 '문경의 치'로 내실을 다지고, '오초칠국의 난'을 겪으며 중앙 집권을 확립한 한 제국은 그들의 저력이 어느 정도인지,
과거 백등산에서 한 고조 유방에게 굴욕을 안겨준 흉노에게 그대로 각인 시켰다.
야심에 가득 찬 군주 한 무제 '유철', 그리고 그의 양팔 '위청'과 '곽거병'은 불가능해 보였던 임무를
압도적인 보급과 엄청난 행동력으로 실행에 옮겼다. 마침내 흉노의 선우가 패배하여 달아나
곽거병의 기병대가 한해(翰海: 오늘날의 바이칼 호)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그 진가가 드러나게 되었다.


A.D 23 곤양대전 昆陽之戰

"한번의 전투로 종묘를 온전하게 지키고 곧이어 천하의 광복을 가져오게 되었다. 광무제는 실로 불세출의 인물이다!"

: 외척 왕망의 집권으로 유씨의 한 제국은 무너졌고, 현실을 도외시한 신 조정의 정책에 천하는 대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군웅들이 우후죽순으로 들고 일어섰고 왕망은 이를 막기 위해 왕읍, 왕심으로 하여금 모든 전력을 다한
42만 대군을 이끌고 곤양으로 향하게 했다. 곤양의 수비 병력은 고작 8~9천여 명. 이에 광무제 유수는 13인의 부하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서,
1만여 명의 병사를 수습한 후 귀환하였다. 그리고, 기적은 역사에 남게 되었다.


A.D 200 관도대전 官渡之戰

"적이 등 뒤까지 오거든 그때 말하라!"

: 조조를 전 중국 최강자로 만들어주는 데 있어 그 계기가 된 전투.
기주, 유주, 병주, 청주의 4개 주를 다스리고 있던 원소는 당대 최강의 군웅인 동시에 걸물이었고,
이에 비해 조조는 여러 불리한 여건 하에서 남방의 유표와 유비의 유격군까지 신경을 써야 했던 최악의 상태였다.
그러나 투항해 온 허유의 정보 제공으로 조조는 순우경이 지키고 있던 오소의 식량고를 기습하게 되고,
원소의 보급선은 모조리 불타버리게 되었다. 운명의 여신은 조조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A.D 208 적벽대전 赤壁之戰

"지금 조조는 큰 어려움을 제거하고 대략 평정을 끝냈습니다. 마침내 형주까지 격파하여 그 위세는 가히 전국을 진동합니다."

: 아마도 동아시아인들의 역사인식에서 가장 유명할 전투.
관도대전에서 원소를 격파하고 그 아들들의 분쟁을 틈타 북중국을 장악한 조조는 유표 사후 형주까지 장악하며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평생에 걸쳐 자잘한 패배를 반복하던 유비와 애송이와 다름없던 동오의 새 군주, 손권의 동맹은
난세의 간웅에게 씻을 수 없는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로 인해 조조는 자신의 생에 천하 통일을 이루지 못했으며,
'삼국지' 는 불멸의 이야기로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A.D 383 비수대전 淝水之戰

"어린 자식들이 마침내 적군을 물리쳤답니다."

: 하루가 멀다 하고 나라들이 세워지다 멸망했던 5호 16국의 난세. 이러한 상황속에서 전진의 군주 부견은
'모든 사람들이 감동할 수 있는 감동의 정치를 하면 그들은 자연히 귀복할 것이다.'라는 이상주의적 생각 아래 북중국을 평정하였고
명재상 왕맹의 공조로 한족, 강족, 저족, 선비족의 모든 종족이 통합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데 이후 왕맹이 세상을 떠나며 '무리하게 동진을 점령하는 대신 국가의 내실을 채우는 데 노력하라.'며 유언을 남겼지만
오히려 부견은 천하통일을 꿈꾸며 100만에 가까운 대군을 조성, 마침내 동진멸망을 목표로 그들을 움직이게 한다.
하지만 부대의 대혼란 끝에 대군은 패배하고 말았고,
그렇게 부견의 몰락이 시작된 순간 부견의 통치아래 통합된 이민족들은 모두 그를 배신했다.
그 후 부견은 신하였던 요장의 손에 목이 잘려 최후를 맞이하였고 북중국의 재분열 또한 격화되었다.


A.D 507 종리전투 鍾離之戰

"승리다! 승리다!"

: 양나라의 지휘관 위예(韋叡)는 몸이 허약해 말도 타지 못했지만 용맹한 지략가로 기습에 능했다.
북위 사람들은 이에 경외심을 담아 위호(韋虎)라고 그를 호칭했다.
507년, 북위의 중산왕 원영과 맹장 양대안은 수십만 군사를 100만 대군이라 일컬으며 남하하였고,
그 목표가 된 종리성은 수비를 맡고 있는 장군 창의지만이 절대적인 병력의 열세 속에 힘겹게 공세를 제지하고 있었다.
지원병을 이끈 위예는 가마에 탄 채 지팡이를 두드리며 지휘를 하였고,
북위군이 회하에 놓은 다리를 엎어 버리며 적에게 무참한 패배를 안겼다.
참수당한 북위군이 10만, 익사한 북위군이 10만이었다.
종리성에서 이 모습을 지켜본 창의지는 "승리다! 승리다!"라고 외치며 환호하였다.


A.D 612 살수전투 薩水之戰

"신묘한 책략은 천문을 구명하고 신묘한 계산은 지리에 통달했네. 전승의 공 또한 이미 높으니 이제 만족함을 알았으면 돌아감이 어떠한가."

: 고구려 역사상 가장 거대한 승리.
야심만만한 수 양제는 전투병만 113만 3천 8백에 이르는 유례없던 규모의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수군은 고구려의 끈질긴 대응과 지휘관들의 졸렬한 지휘 탓에 요동에서 시간만 보내며 전세에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결국 수군은 이러한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30만 5천의 별동대를 구성하여 평양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군수품과 병력을 지원해야할 내호아의 수군은 고건무의 활약으로 궤멸되었기에, 30만여 대군은 그저 무용지물이었다.
이윽고 후퇴하기 시작한 수군이었지만, 을지문덕은 이들을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A.D 621 호뢰관 전투 虎牢之戰

"3만의 군대만 있으면 충분 합니다."

: 건국 초, 당나라는 최악의 형세에 놓여 있었다. 수-당 교체의 대혼란 시기에 기세좋게 거병한 것은 좋았으나,
돌궐의 지원을 받는 군웅이었던 유무주-송금강의 공세에 산서의 전 지역을 잃어버린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였던 것이다.
유무주-송금강의 부대가 미친듯이 하동으로 몰려오는 상황에서 단 3만의 병력을 이끌고 나선 미래의 당 태종, 이세민은
그들을 물리치고 산서 전 지역을 수복한 후 쉴 틈도 없이 하남으로 진격하였다.
곧이어 이세민은 당대 최강의 군웅 왕세충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 끝에 그를 낙양 성내에 가두는데 성공했다.
그 때 하북의 두건덕이 왕세충을 돕기 위해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그러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오히려 이세민은 왕세충을 낙양에 포위한 채로 병력을 나눠 그 나눠진 병력으로 호뢰관에서 두건덕의 대군을 격파하였다.
단 한 번의 출정으로 천하를 평정한 것이다.


A.D 696 소라한산 전투 素羅汗山之戰

"사이(四夷)가 비록 당나라를 모두 두려워하여 나란히 있으나, 바다 밖 땅 사이에서 닳아 없어지거나 멸망하진 않을 것이다."

: 692년, 당나라는 서역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 왕효걸이 이끄는 수십만의 대군을 토번이 점거하던 안서 지역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결국 토번에 연달아 승리하여 서역에 안서도호부(安石護府)를 부활시키고,
토번을 도우러 온 서돌궐의 지원군 10만 또한 당군에 의해 궤멸당하자 당은 서역의 지배권을 다시 잡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후 695년, 가르친링이 3만의 군사를 일으켜 임조를 공격해 당군을 격파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당은
다시 왕효걸로 하여금 정예병인 금아군(金牙軍)과 돌궐병 30만명을 내주어 토번으로 향하게 하고, 이후로도 10만의 병력을 증원시켰다.
도합 40만에 달하는 병력이 토번을 공격하게 된 것이다.
이에 가르친링이 군대를 총집결 하였으나 앞서 당과의 연이은 패전으로 인해 모을 수 있는 군사는 3~5만이 전부,
그러나 격전 끝에 승리한 것은 가르친링의 토번군이었다.
이 전투로 인해 당의 군사력은 급격하게 약화되었고, 토번에 보낸 국서에 토번을 '서쪽정부'라고 칭할 정도로 위세가 실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가르친링이 자결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A.D 751 탈라스 전투 怛羅斯會戰

"몰락한 왕조의 지지자들이 부하라와 소그다니아, 그리고 페르가나에서 당군의 원조를 받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사마르칸트 지사 즈이야드 이븐 사리프에 의해 진압당했다."

: 중화문명의 당과 이슬람 문명의 아바스 왕조가 충돌하여 중세 세계의 패권국을 확인한 전투,
당나라의 지휘관 고선지는 파미르 고원을 넘나드는 진군을 계속하고 있었고,
개원 연간 당 현종 치세의 번영은 이를 가능케 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탈라스 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고선지 개인으로서도, 그리고 당 제국으로서도 더 이상의 서진이 저지되고 말았다.
그런데 끝이 없을 것 같던 당나라의 서진이 종결되었다는 현재의 의미와는 달리, 이 전투는 당시로서는 그리 큰 사건이 아니었다.
당의 사료는 탈라스 전투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며
아바스 왕조에서도 우마이야 왕조의 잔당이 당군을 끌어들여 일으킨 소란 정도로만 여겼을 뿐이다.


A.D 897 청구의 전투 淸口之戰

"방사고와 갈종주는 내 적수가 되지 못하니, 공이 친히 와서 결전을 해보시구려."

: 당나라 말기의 군웅쟁패에서 가장 앞서 나가던 군웅인 주전충은 막강한 군단을 거느렸고,
이제 남하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는 야욕을 보였다. 마침내 주전충의 수하 방사고가 7만의 대군을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회남은 두려워 하며 진동하였다. 그러나 양행밀은 자신의 3만 군사로 방사고의 군사들을 모조리 격파하여 살아서 돌아간 그 병력은
1천도 채 되지를 못하였다. 이로써 주전충의 남하는 저지되었고, 강남은 여러 소국들이 난립하는 형태가 좀 더 오랫동안 지속되게 되었다.


A.D 908 협채의 전투 夾寨之戰

"이극용은 죽었으나 이아자 같은 아들이 있으니 죽었다고 할 수 없겠구나...
아들을 낳는다면 실로 이아자와 같아야 한다. 나의 아들들은 개, 돼지에 지나지 않으니..."

: 908년 진(晋)의 지도자 이극용이 사망할 무렵, 이극용의 적수였던 후량의 주전충은 그를 궁지에 몰아 넣고 압박을 가하면서,
노주를 포위하고 있었다. 위태로운 상황에서 이극용의 후계자가 된 이존욱은 곧바로 말을 달렸다.
협채라는 요새를 세우고 노주를 공격하던 후량의 군대는 이존욱의 공격에 눈 깜짝할 사이에 격파당했으며, 그 순간 시대의 바람은 급변했다.
이존욱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본 주전충의 탄식처럼 후량은 이후 단 한번도 이존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지 못했으며,
후당을 건국한 이존욱은 925년까지 후량, 전촉, 연, 기를 모조리 진의 영역에 포함하였고,
형남에도 종주권을 가졌으며 거란 야율아보기의 남하를 수차례 저지하였다.


A.D 979 고량하 전투 高梁河之戰

"제게 군사를 주십시오. 만일 성공하지 못하면, 그때 퇴각해도 늦지 않습니다."

: 중국의 5대 10국 대에 후진의 석경당이 연운 16주를 거란에 팔아먹고 황제가 된 후부터,
연운 16주의 수복은 중원의 군주들에게는 하나의 숙명과도 같았다.
야망에 불타던 송나라의 태종은 979년 요나라의 위성국이던 북한을 멸망시켰으며,
그 기세를 타고 곧바로 요나라를 공격하여 유주를 함락시키기 직전의 형세가 되었다.
이에 요나라 황제인 경종은 유주를 포기할 마음을 먹었으나, 야율휴가는 이를 만류하고 병력을 얻어 공격을 감행,
송군에게 재앙을 안겨주었다. 연운 16주를 수복하겠다는 송나라의 야망은 여기에서 종결된 셈이나 다름없었다.


A.D 1041 호수천 전투 好水川之戰

"영웅의 삶은 마땅히 왕의 패업이 있을 뿐, 비단옷이 여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서하의 이원호는 번(番: 오랑캐)과 한의 문자 모두를 유창하게 사용할 수 있었고,
호쾌한 성격에 깊은 지략을 갖춘데다 그림을 좋아한 실로 걸물이라 말할 수 있는 사내였다.
넘치는 야망으로 황제가 된 이원호는 천수예법연조(天授禮法延祚)라는 요란한 연호를 사용했고,
이는 유일한 천자국임을 자처하는 송으로서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송의 장수 임복은 이를 물리치기 위해서 군사를 이끌었지만,
서북의 지리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이원호는 호수천의 싸움에서 송군을 전멸시켰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의 국제 역학 관계는 요-서하-송-고려로 이어지는 복잡한 형태로 전개되게 되었다.


A.D 1114 출하점 전투 出河店之戰

"신명(神明)께서 내게 경고하시는구나."

: 3,700의 금군이 10만의 요군을 대파한 전투
비록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요나라의 병력 동원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오락가락하고 부풀려져 있어 믿기 어렵다고 해도,
1114년과 1115년 무렵에 벌어진 아골타의 전투가 경이로운 수준이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단 몇 번의 전투로 동북아시아의 강국이었던 요나라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고, 그 시작은 바로 출하점 전투였다.


A.D 1268 ~ 1273 양양 공성전 襄陽之戰

"그대들이 고립된 성에서 저항하기를 어언 5년이다. 그대들의 주인이 힘을 펼 수 있는 상황이라면, 물론 그것도 좋다.
허나 세력은 다하고 지원도 끊겼다. 그대들은 수만의 백성을 어찌할 것인가?"

: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공성전 중 하나. 초원에서 시작된 몽골의 폭풍은 세계를 집어 삼켰다.
1270년이 되기 전까지 몽골은 금, 서하, 서요, 토번, 중동, 대리, 고려, 동유럽을 굴복시켰으며 세계의 절반이 그들의 손에 있었다.
전 세계가 몽골의 별동대에 유린되는 동안 문물이 가장 앞선 송나라는 40여 년의 세월을 버텼으나,
야심만만한 쿠빌라이 칸의 시대에 이르러 이제는 한계에 달하였다. 몽골군의 기마대와 투항한 한족의 부대,
중동에서 도착한 회회포(回回咆)의 맹렬한 공격과 고립무원의 상황에서도 양양성은 5년을 버텼으며,
그 5년은 하루하루가 절망과 사투의 세월이었다.
더 이상의 지원도, 원군도 기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양양성의 수장 여문환은 백성을 살리기 위해 항복하였다.

  
A.D 1363 파양호 대전 鄱陽湖之戰

"진우량은 태조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포위를 풀고 파양호(鄱陽湖)에서 역습하여 싸웠다.
진우량은 군대를 스스로 60만이라 칭했는데, 큰 전선을 이어 진(陣)을 형성하고, (배)누의 높이가 10여 장이나 되어서,
서로 이어진 것이 수십이나 되었으며, 깃발과 창, 방패들이 바라보면 실로 산과 같았다."

: 중국 역사상 극히 보기 드물게 당대 최강의 세력들이 모든 전력을 수군에 기울여 맞붙은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수전.
진우량은 압도적인 거선들을 동원하여 주원장을 압박하였으나, 갑자기 불어온 동북풍은 오히려 거선들이 화공의 표적이 되게 만들었다.
전투에 앞서 퇴로를 막아 놓은 주원장의 기민함 탓에 진우량은 탈주조차 불가능해졌고,
거대한 파양호에 있으면서도 늪지에 잘못 들어간 노루새끼처럼 빠져나오지 못하여 결국 불타 죽고 말았다.


A.D 1388 포어아해 전투 捕魚兒海之戰

"우리가 10여만의 군사를 이끌고 막북(漠北) 깊숙히 들어왔는데, 아무런 소득이 없이 갑자기 군대를 되돌린다면,
(황제께) 뭐라고 복명(復命)하시겠습니까?"

: 마침내 대륙에서 몽골세력을 정리하고 천하를 통일한 주원장이었지만 초원으로 쫒겨난 잔존 몽골세력인 북원은
명 제국의 안정에 있어 커다란 불안요소였다. 그리하여 1372년, 주원장은 서달, 이문충, 풍승으로 하여금 막북원정을 감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보급문제와 현지 지리에 밝지 못한 점 등 여러 악조건이 겹치며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명은 북원 정벌의 시기를 다음으로 미뤄야만 했다.
나하추가 명에 항복한 이후인 1388년, 명은 또다시 남옥의 지휘 아래 막북원정을 실행하게 되었다.
이때 원정군이 초원에서 길을 잃어 남옥은 회군을 고민했지만 정원후(定遠侯) 왕필(王弼)의 설득에 진격을 재개,
야음을 틈타 북원군의 진영을 기습하였다.
마침내 명군은 북원의 황제 토구스 테무르와 황태자 천보노 일행을 도주하게 만들고 수십만 단위나 되는 많은 포로들과
가축, 보물들을 노획하는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어 북원 정권을 완전히 궤멸시켰다.
북원의 궤멸을 통해 무주공산이 된 막북은 한동안 오이라트와 기타 세력들의 난립으로 대혼란기를 겪게 되었으므로
명 제국은 일시적으로나마 북방의 위협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A.D 1402 정난의 변 靖難之役

"한 고조는 열 번 싸워 아홉 번 졌는데, 끝내 천하를 가졌소. 우리는 거사를 일으키고 연이어 이길 수 있었는데,
약간 불리하다고 하여 계속 돌아간다면, 결국엔 남을 섬길 것이오!"

: 명초, 천하를 뒤흔든 거대한 내전인 정난의 변은 시종일관 황제군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 전개되었다.
중화의 부는 강남에 치중되어 있었으며 그 강남을 장악하고 있고, 사실상 전 중국을 판도에 넣고 있는 황제군은
계속해서 수십만의 대군을 동원했기에 아무리 격파되어도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았다.
그러나 절대적인 전력의 열세 속에서도 정난군은 총지휘관인 훗날의 영락제, 연왕 주체의 카리스마 아래 굳게 뭉쳐 있었으며,
황제군이 정보의 혼선으로 잠시 전력의 공백기가 생긴 그 순간, 그 조그마한 빈틈을 기어코 놓치지 않았다.


A.D 1449 북경 공성전 北京攻城戰

"남쪽으로 도망하여 멸망한 송의 전례를 보지 못했는가? 북경은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

: '토목보의 변'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대사건으로 명나라는 엄청난 국가 위기 상황에 놓였다.
오이라트의 손에 황제 정통제가 사로잡힌 상황에서, 대신들은 혼란을 일으키며 강남으로 도주할 계획까지 내놓았으나
병부시랑 우겸(于謙)은 이를 저지하고 사태를 수습한 다음, 모든 전력을 북경 한 곳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이윽고 북경을 포위한 오이라트의 에센은 북경을 수차례 공략했지만 명의 화기를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만일 이 싸움에서 에센이 승리하고 북경이 함락되었다면, 이 때 중국대륙은 원에 이어 또다시 유목민족의 지배하에 놓이고 말았을 것이다.


A.D 1619 사르후 전투(심하전투) 薩爾滸之戰

"횡시(橫屍)가 산과 들을 덮었다. 피는 흘러 도랑을 이루었다.
기치(旗幟), 기계(器械), 그리고 죽은 사졸들이 혼하를 덮으며, 마치 물이 없는 듯했다."

: 임진왜란은 여진의 누르하치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절대적 강국 명이 조선의 상황에 신경을 곤두세운 사이, 누르하치의 만주족은 급속도로 거대해졌고,
이윽고 명나라는 이들을 서둘러 제압하지 않는다면 큰 재앙에 직면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명나라의 대규모 원정군은 전력만 보자면 후금의 군세를 격파하고도 남았으나,
지휘관들의 무능한 지휘 탓에 분산되어 각각 호랑이 아가리 속을 향해 진격하는 형세가 되고 말았다.
노련한 누르하치는 승리의 냄새를 놓치지 않았고, 만주족의 기동력과 각개격파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A.D 1626 영원성 전투 宁远之戰

"짐은 25세부터 병사를 일으켜, 정벌한 이래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으며, 공격하여 극복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어찌, 이 영원(宁远) 한 성을 끝내 떨어뜨리지 못하는가?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 사르후 전투의 승리 이후 후금의 기세는 가히 노도와 같았다.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이 무너졌고, 50여개의 요새와 70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요하 동쪽에서 명나라의 영역은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었으며, 후금의 기마대가 산해관에 이르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이에 명나라의 원숭환은 산해관으로부터 약 100km 앞쪽에 영원성을 새로 축조하고 16만이 넘는 누르하치의 대부대에
최대로 잡아도 2만을 넘지 못하는 병력으로 맞섰다. 그러나 그가 이끄는 명군에게는 홍이포가 있었다.


A.D 1641 금주 전투 錦州之戰

"행군의 제승(制勝)이나 이(利)는 신속함에 있다. 짐은 적이 이를 듣고 곧 달아날까 두려울 뿐이다.
만약 달아나지 않는다면, 이를 깨는 것은 개를 풀어 짐승을 쫒는 것처럼 행하기 쉬운 일이다."

: 청나라의 군대가 산해관을 돌파하려면 그 전에 뚫어야 하는 것이 외곽의 4개 성인 송산, 행산, 금주, 탑산의 방위망이었다.
산해관은 이들과 유기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기에, 성 하나를 함락시키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이를 돌파하려는 청나라에 맞서 명나라는 홍승주를 사령관으로 하여 10만이 넘는 대군을 구성했으나,
지구전을 원한 홍승주와는 달리 이미 바닥이 난 국가의 재정 상태는 그를 억지로 야전에 나서게 만들고 말았다.
이를 절호의 기회로 여긴 홍타이지는 코피를 흘리면서도 말을 달려 현장으로 출동했고,
마침내 5만 이상의 병력을 격파하고 홍승주를 항복시켰으며, 4개의 성을 모조리 함락시켰다. 명나라의 최후 전력마저 소멸해버린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산해관의 오삼계 뿐이었다.


A.D 1644 일편석 전투 片石之戰

"만 마리의 말들이 튀어 올랐다."

: 오삼계의 잔존한 명군 부대와 예친왕 도르곤의 청군이 힘을 합쳐, 명나라 말기 대대적 농민반란을 일으킨 이자성을 격파한 전투.
명나라가 멸망한 시점에서 천하의 세력은 북경을 차지한 이자성, 산해관에서 버티고 있는 오삼계,
중국 본토로의 진출을 노리는 청나라가 삼분하고 있었다.
청나라와 이자성은 각각 오삼계를 끌어들이려고 노력했으나, 오삼계가 선택한 것은 청나라였다.
이로써 청군에게 그토록 열리지 않던 산해관은 성 밖이 아닌 성 안에서 열렸으며, 양군의 연합은 이자성을 격파하여 몰락시켰다.


A.D 1696 차오모드 전투 昭莫多之戰

"나는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하늘과 땅, 그리고 조상에 호소했다.
병사 가운데는 소년 마부라 할지라도 가르단을 궤멸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대 고관들은 힘쓰기를 두려워하는 비루한 아녀자 같은 겁쟁이들이다.
나는 망설이는 자는 누구든지 확실히 죽이거나, 원정에서 축출해낼 것이다!"

: '천고일제(千古一帝)'라 불리우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
강희제는 외몽골 준가르부의 가르단을 물리치기 위하여 수차례 몽골 원정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수하 장수 피양구의 부대로 양군을 나누어 가르단을 몰아가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가르단과 강희제, 피양구 모두는 보급 부족으로 인해 서로 아사 직전까지 몰리게 되었다.
모든것이 허사로 돌아가는 듯 했지만, 6월 피양구의 1만 4천 부대는 극적으로 가르단의 도주로를 막아세웠고,
마침내 그를 파멸시키는데 성공했다.
가르단의 죽음은 지난 수천 년의 세월동안 중화세계를 위협하는 강력한 유목 세계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더 이상 그들의 말은 절대적인 도주 수단이 되지 못했으며, 초원 역시 적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안식처가 되지 못하였다.


A.D 1841 진강전투 鎭江之戰

"....그 원인이 이다지도 부정한 전쟁, 이다지도 영속적인 불명예가 될 전쟁을 나는 지금껏 알지 못했고, 읽은 적도 없습니다.
지금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신사는 광저우에서 영광에 가득 차 휘날렸던 영국 국기를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그 국기야말로, 악명 높은 금제품의 밀수를 보호하기 위해 펼쳐진 것입니다.
현재 중국 연안에 게양되어 있는 것처럼만 그 깃발이 휘날린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그것을 보기만 해도 공포를 느끼고 전율하지 않을 것입니다."

: 세계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1차 아편 전쟁의 종말은 진강(鎭江)에서 마무리되었다.
파죽지세로 진군하는 영국군은 7,000의 병력이 장강으로 진입해 진강으로 진군했고,
이미 쇠퇴하여 몰락해가고 있던 청나라의 진강 방어 부대는 2,000도 채 되지 않았다.
진강을 수비하던 주방만주기병 부도통(副都統) 해령(海齡)은 갖은 힘을 다해 저항하여
아편전쟁 시기의 청나라 지휘관 중에서는 영국군에 가장 많은 피해를 안겼으나, 그렇다고 해서 승패를 바꿀 힘은 없었다. 진강이 무너지자 청나라는 항복 선언을 했다. 중화제국이 세계의 중심이라 자부하던 청나라의 자존심이 이제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이다.


A.D 1864 남경 공성전 南京攻城戰

"유주가 즉위한 이후, 병사들에게는 줄 곡식이 없었고, 군대는 그야말로 혼돈상태였다...
군주는 어렸고,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 문관과 무관을 막론하고, 천경에는 해결책을 생각해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 이 해 7월 19일,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마침내 남경 성벽의 한 쪽이 무너졌고, 청군은 이를 통해 성 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성내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학살당했다.
이로써 홍수전이 거병의 기치를 세우고 전 중국을 뒤흔들어 2,000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낸 태평천국운동은 최후를 맞이했다.
태평천국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청나라는 군벌의 존재가 생겨났으며 태평천국운동의 영항을 직, 간접적으로 받은 혁명가들도 탄생하였다.


A.D 1894 황해해전 黃海海戰

"정원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습니까?"

: 평양 전투와 함께 청일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투.
이홍장의 북양해군은 일본의 연합함대에 비해 중포는 두 배 이상을 갖추었으나,
배수량, 철갑선 숫자, 평균 속력, 실제 마력, 속사포 등에서는 크게 밀렸다.
특히 속사포는 청군이 6문이었지만 일본군은 67문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불행하게도 기함이었던 정원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신호 마스트가 포탄을 맞고 부러졌는데,
해전에서 지시를 내릴 정원의 신호 마스트가 부러졌기에 북양 함대는 오합지졸이 되어 서로 각자 싸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황해해전은 청나라의 대패로 끝났고, 이는 전 중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아편전쟁의 패배는 대부분의 중국인들에게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있어 이는 그저 과거에도 종종 있었던 이민족의 침략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자문명의 수혜자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일본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은,
가장 보수적인 유학자라고 할지라도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청일전쟁의 패배 이후 중국의 근현대사는 급속도로 빠르게 전개된다.


A.D 1928 국민군 북벌 北伐

"당과 국가의 존망, 이념의 성패, 인민의 화복, 동지들의 영욕은 모두 이번 전쟁에 달려 있다."

: 장제스의 상해 사변 이후 잠시 분열되었던 북벌군은 다시 수습되었고, 1928년 1월 8일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장제스, 풍옥상, 염석산, 이종인, 양수장으로 구성된 북벌군은 노도와 같은 진격을 감행하여 손전방, 오패부, 장종창 등을 모두 물리쳤다.
이제 최후로 남은것은 80만의 군대를 가지고 있는 북양군계 봉천 군벌 장작림 이었으며,
4월 7일 북벌 총공격령을 내린 이후 산동의 봉천군은 탑이 무너지듯 붕괴되었다.
장작림은 결국 패배를 직감하고 산해관 밖으로 이동했으며,
이로써 위안 스카이의 시대로부터 중국을 장악하던 북양군벌의 힘은 거의 꺾이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A.D 1948 요심전역 辽沈戰役

"동북야전군은 피로와 소모에 구애받지 말고, 추위와 기아에 굴복하지 말 것이며,
오로지 신속한 속도로 전군을 이끌고 입관, 화북야전군과 협력하여 화북의 국민당군을 포위 섬멸하라."

: 1948년 가을, 중국 공산당의 가장 뛰어난 군사 지휘관인 린뱌오(林彪)는 돌연 공격을 감행하여 금주와 장춘을 함락하고
11월 경에는 심양을 점령하였다. 요심전선에서의 승리로 100만이 넘는 린뱌오의 군대는 중국 관내로 진입, 화북야전군과 합류하였다.
이후의 전쟁은 더 이상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소탕전에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양쯔강 이북 지역은 모조리 공산당에 손에 들어가게 되었고, 장제스는 결국 최후의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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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와 직간접적으로 맞닿아있는 전투들도 몇몇 있네요...

이와 별개로 중국에서 마오쩌둥을 숭배하고 신성시하는 이유 중 하나로 '천하통일의 업적을 달성한 위인'이라는 점이 있다고 하던데...

수천년의 복잡다난한 중국사 속에 천하통일을 이룬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를 생각해보면 그럴만도 하다 싶기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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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꾼
22/01/08 14:08
수정 아이콘
신불해님 글이 재수입되었네요
EpicSide
22/01/08 14:09
수정 아이콘
오.... 원산지가 여기였군요
낚시꾼
22/01/08 14:10
수정 아이콘
EpicSide
22/01/08 14:14
수정 아이콘
출처를 바꾸는걸로....
League of Legend
22/01/08 14:13
수정 아이콘
신불해님이 중국 롤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했는데..
파다완
22/01/08 14:22
수정 아이콘
우지 헌정글이 명문이였죠. 다시 보고 싶네요. 역사글이든 롤글이든.
12년째도피중
22/01/08 15:15
수정 아이콘
롤글 올리시면서 안티들이 생겨버린게 문제라면 문제였죠. 원래 중국역사 글을 자주 소개해주시는 분이다보니 중빠네 뭐네 하면서 피지알 밖에서 안티들이 득시글했더라구요. 우지 헌정글도 디씨 댓글들 보니 피지알처럼 마냥 좋게 흘러가지는 않았던걸로.
파다완
22/01/08 15:27
수정 아이콘
?? 피지알에서는 역사글이든 롤글에서든 안티는 못본거 같은데 다른 커뮤에서는 안티들이 많았나요? 퍼간글 출처도 안적고 심지어 자기 의도랑 다르게 욕하는데 써서 롤글 절필하신걸로 기억하는데 안티도 많았군요...
12년째도피중
22/01/09 03:37
수정 아이콘
중국에 대한 혐오를 기반으로 한 확증편향에 가깝습니다. 안티...라기보다는 그 쪽이 맞겠네요. 일부의 디씨부심까지 포함해서.
깃털달린뱀
22/01/08 14:14
수정 아이콘
파양호 전투랑 정난의 변 보고 신불해님 떠올랐는데 맞았군요 크크크크크
22/01/08 15:10
수정 아이콘
초한지 셋, 삼국지 둘이군요.
유게보다 자게가 어울릴 듯 합니다.
잘 봤습니다.
구마라습
22/01/08 16:21
수정 아이콘
초한지 시작이 진시황 사후부터 시작하니 거록대전도 초한지에 들어간다고 봐야겠죠.
서초패왕 항우가 천하에 이름을 새긴 전투이기도 하구요.
22/01/09 14:37
수정 아이콘
그렇군요, 초한지는
유방부터 시작이라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그 전에 장량이
시황제 암살시도 하는 것도
본 기억이 나네요. 감사합니다
사업드래군
22/01/08 15:23
수정 아이콘
아편전쟁은 없나?
파다완
22/01/08 15:29
수정 아이콘
A.D 1841 진강전투 鎭江之戰

1차 아편전쟁 마지막이 있습니다.
사업드래군
22/01/08 15:34
수정 아이콘
앗, 제대로 안 봤네요. 감사.
일루인
22/01/08 15:29
수정 아이콘
딱 둘을 더 넣어 40을 채우고 싶군요.

후연이 무너지고 북위가 오호십육국에서 남북조로 가는 관문을 열어젖힌 참합피 전투 (A.D. 395) 와 송나라의 마지막을 장식한 애산 전투 (A.D. 1279) 정도면 어떨까 싶기도.
22/01/08 16:01
수정 아이콘
신불해님 요새 피지알 안오시나요? 저 와우하다가 우연히 신불해님 만났을때 연예인 만난 기분이었는데
저는 애산전투의 포풍간지가 제일 좋습니다
스타본지7년
22/01/08 19:40
수정 아이콘
생업이 바쁘신지 역사글도 잘 안올리시긴 합니다.
말다했죠
22/01/08 16:05
수정 아이콘
부견좌 당신은 대체..
에이치블루
22/01/08 16:08
수정 아이콘
한국전 참전도 역사를 바꾼 전쟁에 들어가지 않을까요...우리에겐 아픈 역사지만..
22/01/08 16:23
수정 아이콘
중국사 책이든 뭐든 볼 때마다 중국 학생들 역사 시험 볼 때 머리 빠개지겠구나 하는 생각만 듭니다 크크..
구마라습
22/01/08 16:40
수정 아이콘
팽성대전은 볼때마다 저게 가능한가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승자의 기록만이 남는 역사에 당당히 한페이지를 장식하는 패자의 승전기록이니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흔히 중국사에서 소수가 다수를 압도한 전투로 팽성대전, 곤양대전, 비수대전을 꼽는데, 팽성대전이 압도적이라 봅니다. 3만으로 56만을 박살낸 항우도 대단하지만, 56만을 말아먹고 권토중래하여 다시 일어선 한나라를 생각해보면 소하, 장량의 내치 역량 또한 항우의 무력에 비할만 하겠습니다.

해하대전에서 실질적으로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지만, 유수전투에서 이미 한고조 유방의 승리는 결정되었다고 봐서 유수전투도 들어갔으면 합니다만, 제가 써놓고도 좀 애매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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