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문명과 같은 류의 pc 게임을 하다 보면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문명류의 게임에서 나오는 다양한 외교, 정치, 배신, 협잡과 같은 행동들을 멍청한 AI가 아닌 사람과 직접 맞대고 하면 얼마나 재밌을까? 하는 것이었지요. 최근 보드게임에 재미를 붙여 즐기는 와중에 다시 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제가 원하는 보드게임을 찾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근래 인기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보드게임들의 대다수는 속칭 '유로 게임'으로 플레이어 간의 상호작용을 최소화한 채 일정한 시스템 아래 정해진 점수 트랙을 달리는 경쟁형 게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게임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프랭크 허버트의 SF 소설 '듄'을 원작으로 한 보드게임이었지요.
소설 듄은 황량한 행성 아라키스에서 천연자원 멜란지 스파이스를 두고 여러 세력들이 한 데 뭉쳐 아귀다툼을 벌이는 이야기입니다. 보드게임 듄은 이 멋진 테마를 가지고 독특한 비대칭 영향력 게임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아트레이트, 하코넨, 프레멘, 베네 게세리트, 초암 길드, 황제의 여섯 세력은 각각 게임의 시스템을 무너뜨릴 만큼 강력한 종족 능력을 보유하고 있고 때문에 게임의 진행 역시 일반적인 유로 게임과는 다른 양상을 띱니다.
간단히 말하면 다음번에 내가 어떤 카드를 뽑을지, 혹은 주사위를 굴려 어떤 수가 나올지 보다 내 앞의 사람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고 어떤 전략을 짜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훨씬 중요해진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슬프게도 보드게임 듄은 절판 상태...
그런데 이게 웬걸? 미국의 유명한 거대 보드게임회사인 FFG 사에서 듄 보드게임의 판권을 샀다네요?
그런데 슬프게도 프랭크 허버트의 유족이 듄의 테마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
그런데 이게 웬걸? 굴하지 않는 FFG 사는 게임의 메커니즘은 그대로 유지한 채 테마만 새로 입혀 게임을 출판합니다. FFG 사에서 가장 애정 하며 회사의 간판 게임과도 같은 Twilight Imperium(여명의 제국) 세계관을 입혀서 말이지요.
그래서 나온 게임이 소개하려는 Rex: Final Days of Empire(렉스: 제국 최후의 날)입니다.
아무래도 듄 시리즈만큼만 하겠느냐만 서도 여명의 제국 세계관 역시 제법 방대하고 깊은데요.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오래전 멀고 먼 은하계를 강대한 라작스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생긴 애들이죠.
하지만 언제나 역사가 흘러가는 방식이 그렇듯 몇만년 동안이나 은하계를 통치해왔던 오래된 권력은 폭주하며 동시에 무능력해집니다. 황제의 권력은 여전히 곳곳으로 뻗어나가며 라작스 종족의 군대는 은하계 최강이었지만 새롭게 일어나는 종족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봅니다. 그러다 결국 한 종족이 문제를 일으키지요. 네, 맞습니다. SF 소설에서 언제나 골칫덩이로 등장하는 인간이 그 주인공이지요. 여명의 제국에서는 솔 종족으로 통칭됩니다.
제국의 압제에 견디다 못한 솔은 어느 날 제국의 수도 메카톨 렉스의 상공에 드레드 노트급 함대를 이끌고 나타납니다. 그리곤 무차별 폭격을 가하지요. 제국의 중심부는 파괴되고 폭격에 휩쓸려 황제도 사망합니다. "렉스: 제국 최후의 날"은 바로 이 날을 배경으로 한 게임입니다.
상공에서는 여전히 솔의 함대가 돌아다니며 폭격을 가하고 있는데요. 봉쇄된 메카톨 렉스의 지상에서는 또 다른 상황이 펼쳐집니다. 황제의 사망으로 전 우주의 핵심 시설들이 집약된 메카톨 렉스의 주인이 사라진 것이죠. 빈 집이 된 렉스의 주요 거점 시설들을 빠르게 점령하면 순식간에 전 우주의 패권을 잡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에 마치 솔의 폭격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여러 종족들의 소규모 특공 부대들이 침투합니다. 사실 이 상황에는 배후가 있었습니다. 하칸이라고 하는 종족이 자신들의 우주선으로 열심히 특공 부대들을 수송해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칸 종족의 모습입니다. 사막 행성에서 두건을 두르고 사는 사자의 모습이지요.
이 친구들은 자신들의 사막 행성에서만 나는 특산물 교역으로 커다란 돈을 벌었고 본격적으로 무역에 뛰어들어 마침내는 전 우주에서 가장 커다란 시장을 운용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솔과 레트네브의 무역 분쟁으로 제국이 무역 봉쇄령을 내리고 여기에 커다란 타격을 입습니다. 때문에 솔의 반란을 암암리에 도운 것이지요. 하칸의 무역선은 솔의 특공대뿐만 아니라 전장의 포화를 뚫고 다른 여타 종족들의 특공대 역시 수송해옵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거든요.
솔의 렉스 폭격에는 또 다른 지원자가 있었습니다. 졸나 대학을 운영하는 하일러 종족입니다.
얘네들은 전 우주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자, 기술자 집단입니다. 솔의 함대가 제국 수도의 강력한 보호막을 뚫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들의 과학 기술 지원 덕분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과학에 대해 가지는 확신과 신뢰를 이용한 우주 정복을 꿈꿉니다.
여기에 배신과 암살을 밥 먹듯이 좋아하는 창백한 다크 엘프처럼 생긴 레트네브 남작령의 세력들이 있습니다. 딱 봐도 나쁜 놈들처럼 생겼지요. 그렇지만 싸움을 매우 잘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상대하기는 무서운 녀석들입니다.
본래 평화를 좋아하는 온순한 철학자 무리들인 즛차 왕국도 전란에 뛰어듭니다. 본디 이들의 목표는 제국에 반란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상황을 진정시키는 것이지만 렉스의 상공에서 무차별 폭격을 가하는 함대의 모습을 본 즛차 종족은 더 이상 제국에는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본디 외교와 중재를 미덕으로 하는 종족이지만 칼을 뽑아야 할 때는 뽑을 줄도 아는 종족이라고 하는군요. 강철 거북이처럼 생겼습니다.
라작스, 솔, 졸-나, 레트네브, 하칸, 즛차. 이렇게 여섯 종족이 한 데 모여 아귀다툼을 벌이는 게임이 렉스입니다.
서로 악수를 하며 동맹을 맺고는 뒤에서는 서로 어떻게 하면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를 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임입니다.
상대방의 심리를 읽는 블러핑을 통해 적은 병력으로도 큰 병력을 잡아먹을 수 있는 전술이 가능한 게임입니다.
또한 상황에 따라 1라운드에 쾌속 승리를 거둘 수도 있는, 혹은 8라운드의 마지막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승리의 행방을 알 수 없는 게임이기도 합니다.
렉스는 극적인 비대칭 게임입니다. 종족의 능력 면면을 따져보면 하나같이 죄다 사기 같은데 또 묘하게 밸런스는 맞아 들어가지요.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러한 양상이 시스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같은 종족을 플레이하더라도 조종하는 플레이어에 따라 플레이 방식이 확연하게 다릅니다. 언제는 끈끈하게 맺어진 동맹이 8라운드 끝까지 가서 결국에는 값진 공동 승리를 일구어 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몇 라운드 채 가지도 못해서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기 일쑤이지요.
정말 재밌겠지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가오는 토요일에 보드게임 하실 분을 모집합니다.
저는 렉스를 하고 싶지만 시간과 사람, 상황에 맞추어 다른 게임을 하게 되도 괜찮습니다.
보드 게임에 원래 관심이 있으신 분이면 게임을 들고 와서 같이 해도 좋아요.
장소: 대학로 레드 다이스 http://naver.me/5w4T1Zo8
일시: 4. 14 일요일 오후 3시~가능한 시간까지(최소 4시간)
예상 비용: 카페 이용료 3000원 + 음료 한 잔
렉스는 쉬운 게임은 아닙니다. 룰 설명이 30분 정도 걸릴 것이고 게임 시간은 풀팟일 경우 3시간 이상이 걸릴 수도 있는 제법 헤비한 편에 속하는 게임입니다. 전략보드게임을 평소 해보지 않으신 분은 어려울까 걱정이 되실 수 도 있어요. 그렇지만 평소 문명 pc 게임이나 여타 비슷한 부류의 게임들을 즐겨 오신 분이라면 렉스의 게임 시스템 자체는 쉬운 편에 속하기 때문에 즐기시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관심 있으신 분은 쪽지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