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2/02/16 19:55:57
Name 王天君
Subject 신화를 읊고 농담을 던지는 그대들을 위해
요즘 들어서 끊었던 스타를 다시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원래는 삼성의 경기만 챙겨보다가, 요즘은 경기수가 많지 않은 관계로 자연스레 모든 팀의 경기를 다 보고 있습니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주 5일제 두 방송사에서 빡세게 게임단 돌리던 과거보다는 훨씬 낫네요. 경기 수가 적으니 나쁘면 나쁜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감사하면서 봅니다. 저 같은 스덕에게야 스타 경기 보는 게 하루에 세 끼 밥먹는 것 같아서 되려 경기가 흥하면 흥하는 대로 본방사수를 못해서 짜증나고, 망하면 망하는 대로 맛없는 밥을 두 세 그릇씩 챙겨먹는 것 같아서 짜증났거든요. 오늘은 뒤숭숭해서 공부도 손에 안잡히고, 이영호 손 가는 듯이 키보드에 손 가는 대로 놀기로 작정했습니다. 이렇게라도 스트레스를 풀면 집중력이 향상되겠지 하고 현실을 외면하면서 놀고 있네요 하하

타지에서 생활하는 관계로 본방을 사수하기에는 조건이 빡세서 하루나 이틀이 지난 다음 유튜브에서 경기를 시청하고 있습니다. 어찌어찌 하다가 우연히 이번 시즌이 올라온 것을 발견한 이후로 꼬박꼬박 보고 있는데, 처음에는 최근의 경기를 영어로 더빙해놓은 경기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전혀 재미가 살지 않네요. 선수들의 면면이나 경기력은 흠잡을 데 하나 없이 대박 경기인데 혼자서 아!! 대박!! 하면서 혼잣말로만 중얼거리다 보니 여간 심심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 온전한 동영상들을 찾아보면서, 해설진들의 존재에 새삼 감사하게 되더군요. 얕은 소견으로 그저 멀티 수나, 혹은 굵직한 전략에서나 승패의 향방을 가늠할 줄 아는 미천한 스덕에게 꼼꼼한 해설로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쉽게 풀어주니 참으로 고맙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스타크래프트 실력 늘리는 거야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스타 경기를 재미있게 볼 수 있게 하는 건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갈 수록 매니아의 영역으로 그 입지가 좁아지는 만큼 오히려 대중들에게 그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자 침이 마르도록 떠들어대는 그들의 열정과 식견에 감탄합니다. 역시 진지한 놀이일수록 전문가들의 고매하신 의견을 들으면서 감상해야 그 맛이 사는 거죠.

역설적으로, 오프라인에서 스덕은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없던 스덕친구가 외국이라고 생길 리 만무하죠. 같이 지내는 한국인 룸메이트들은 스타에는 관심이 1g도 없는 모양이고 저도 폭력성을 조장하고 청소년들의 타락을 유도하는 해악스러운 매체를 가지고 떠들 용기가 없습니다. 스타가 흥하던 임요환 시절부터도 친구들과 스타를 같이 보고 떠들기보다는 혼자서 감상하고 즐거워하는 편이 훨씬 편하더군요. 라이트 시청자에 속하는 친구들을 저만의 과한 감동의 도가니탕에 합류시키기도 껄쩍지근하고, 이제는 그나마 보던 친구들도 전부 다 스타를 끊어서 대학로 c모 극장에서 조조할인으로 혼자 영화 보는 기분으로 스타를 봅니다. 사실 무언가를 감상하고 평하는 오덕질이 사교적인 취미로 발전하기에는 조금 어렵기도 하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요.

왜 스덕의 고립감을 토로하느냐, 저는 해설진들의 존재 의의를 그들의 본질인 중계보다도 스덕의 쾌감을 함께 나눌 일종의 '동지'를 찾은 그 반가움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나보다도 더 스타에 미쳐있고 돈 벌면서 스타를 했고, 스타를 보고 스타를 떠드는 사람들이 신나게 썰을 풀고 있구나 생각을 하면 무슨 경기를 어떻게 중계를 하든 보는 제 입장에서는 참 신이 납니다. 누구랑 또 이 스타판에서 어떤 선수가 잘 나가고 누가 죽을 쑤는지 이야기를 할 수 잇을까요? 이영호는 지지를 않네, 씨제이는 통신사만 만나면 체납요금 독촉받는 불량고객처럼 탈탈 털리는구나, 그래도 신상문이는 투스타로 저그들 발라먹으면서 연봉 값은 하는구나, 이신형 저거 실력은 좋은데 경기는 이상하게 꼬이네...오프라인에서 스덕을 만나고, 또 그 스덕과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건 그야말로 달나라 트랜스포머 비밀기지 옆에서 방아찧고 있는 토끼를 볼 확률보다 낮겠지요. 내가 사랑하는 선수와 스타를 아주 찰지게 빚어주는 해설진들의 만담을 듣고 있으면 비할 데 없이 즐겁단 말입니다. 1승에 목마르고 누구 하나 질 수 없는 이 팍팍한 프로리그의 현실에서 해설진들로 인해 우리는 동맥이 경화되는 것처럼 속이 끓기도 하고 사랑으로 마음이 충전되는가 하면 막힌 변기 뚫린 듯이 시원한 쾌감을 느낍니다. 선수들과 경기를 가지고 농담을 주고 받는 이 훈훈한 모습. 그 어느 스포츠에서 이만큼이나 다양한 개성의 선수들을, 진지함과 박장대소가 맞물리는 상황들을 또 마주하겠습니까. 저는 이제 현실에서 취업 이야기를, 요새는 자동차가 뭐가 좋다더라, 집 사려는 데 적금은 얼마동안 때려부어야 하나 하는 팍팍한 이야기나 하겠지요. 열광하는 것을 열광적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작지 않은 행복이라는 것을 한 살 더 먹어갈 수록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의 만담을 개콘보다도, 라디오스타보다도 더 즐깁니다. 유재석이 온들, 탁재훈이 온들 박태민 해설을 세팅 삼만년이라고 깔 수 있겠습니까? 여기, 우리만의 놀이터에서 해설진들은 누구 못지 않은 최고의 골목대장들인거죠.

그들의 입에서 그렇게 신이 잉태되고 괴물이 형체를 갖추며 괴력란신의 기기묘묘한 존재들이 태어납니다. 그 거룩한 창조의 순간에도 우리는 그토록 가볍고 시시껄렁한 잡소리를 늘어놓으며 그들을 희롱하고 즐깁니다. 우리들이 노는 이 세계에서 누구보다 힘이 세고 빠르고 지혜롭고 용감한 것이 게이머들이라면, 그들을 말로 달래고 어르면서 우리들에게 현신의 존재로, 반인반수의 존재로, 또 그들에 맞서 칼을 휘두르는 전사로 보다 명확하게 주조하는 것은 바로 해설진들입니다. 철학가와 시인, 웅변가와 어릿광대가 함께 노래를 부르고 떠드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놀이터의 터주대감들, 그리고 놀이터를 옮긴 지 얼마 안되는 옆동네 청년들과 놀이터로 들어온지 얼마 안되는 신참까지, 신나게 떠들어주시길 바랍니다. 내일이면, 혹은 모레면 또 만나겠지요. 해가 지고 집에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져도 저는 불안해하지 않겠습니다. 다음날에는 더 많은 꼬마, 동네 형 누나 들이 와서 놀이터에서 노는 걸 구경하고 즐기는 그런 날이 오리라 마냥 기대합니다. 그만 놀아라 하는 어른들의 과한듯한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는 계속 놀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빙 둘러쌓인 놀이터 한가운데는 듣는 우리를 열광케하는, 주먹을 불끈 쥐고 함성을 내지르게 하는, 허리를 젖혀 깔깔대게 하는 당신들이 있습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2-20 11:00)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누나전문깔대기
12/02/16 20:37
수정 아이콘
일단 추천부터 날려야 할 글이네요. '열광하는 것을 열광적인 사람들과 함께 나눌수 있다는 것이 작지 않은 행복이란 것을 나이먹어 갈 수록 느낍니다' 라는 글에 밑줄긋고 두번 동감하고 갑니다. [m]
12/02/16 20:50
수정 아이콘
추천을 안 할 수가 없네요.. 필력이 정말 좋으십니다..

일단 그건 그렇고

이제동맥경화 경기 만약 해설이 없었더라면...........

해설자들은 스타시청자들에게는 큰 보물입니다. 어쩌면 프로게이머보다도요..

그들이 명경기에 소리지르고 거기에 우리도 소리지르고 싶네요. 빨리 토요일이 됬으면 좋겠습니다.
12/02/16 21:01
수정 아이콘
이 글을 보니까 지난번 오프 갔다가 성캐 만났던 생각이 나네요.
경기장 앞에서 사인 받았는데 중간에 펜 잉크가 다 닳아서 사인을 받다 말았습니다 흑흑...
PoeticWolf
12/02/17 10:32
수정 아이콘
이건 뭐.. '추천을 부르는 글' 이외에는 어떤 댓글도 못달겠네요.
마지막 두 문단 표현들에 공감할 수 있을만큼 스타문화를 즐겨왔다는 게 혼자 뿌듯할 정도입니다.
12/02/17 21:19
수정 아이콘
너무나 멋진 글이네요.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 호들갑 떠는 그들이 참 사랑스럽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737 연인보다 먼, 우정보다 가까운 남녀 이야기 [26] 유유히8721 12/02/27 8721
1736 테저전 하나의 최종양상-> (레이트)메카닉vs퀸활용종합선물셋트 [18] meon7725 12/02/26 7725
1735 추천하는 일본 영화들 [73] Neo17245 12/02/25 17245
1734 (내용정정)그들은 정말 사랑했을까 [27] happyend7618 12/02/22 7618
1733 픽업과 연애 #2 높은 프레임. [42] Love&Hate10947 12/02/22 10947
1732 심심해서 적어본 가온다운로드 순위 분석 자료 [15] 홍승식9304 12/02/20 9304
1731 교통사고와 관련된 두서없는 몇가지 예시들. [13] 비타민C6129 12/02/20 6129
1730 픽업과 연애. [40] Love&Hate16202 12/02/20 16202
1729 그녀와 애프터를 하기 위한 아주 조그만 팁. [33] Love&Hate12089 12/02/17 12089
1728 거기까지 도대체 언제 가나 [46] 삭제됨14940 12/02/17 14940
1727 신화를 읊고 농담을 던지는 그대들을 위해 [5] 王天君5453 12/02/16 5453
1726 교통사고와 관련된 몇가지 두서없는 정보들. [46] 비타민C7572 12/02/16 7572
1725 실패는 풀리고, 밤은 깜깜해야 제맛 [15] 삭제됨10413 12/02/14 10413
1724 화장실 솔에 박힌 머리카락도 자라나? [23] 삭제됨14301 12/02/13 14301
1723 [TIP]인터넷서점 제휴 신용카드/멤버쉽 포인트 비교(스압) [11] 블루드래곤5916 12/02/12 5916
1722 온게임넷, 스타리그를 포기하지 마세요! [19] Xyrosity7008 12/02/11 7008
1721 한국의 서비스업에 대한 개인적 단상 [31] 로렌스7705 12/02/11 7705
1720 암호를 대란 말이다! [43] 삭제됨14196 12/02/10 14196
1719 치킨샐러드를 먹어봅시다. [24] Love&Hate8946 12/02/09 8946
1718 안녕, 내사랑 [43] happyend9147 12/02/07 9147
1717 [모호한 소리] 이 따위로 자란 이유 [18] 삭제됨9147 12/02/07 9147
1716 아버지와 아들 (上) [10] happyend4524 12/01/28 4524
1715 아버지와 아들 (下) [14] happyend3786 12/02/02 3786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