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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2/05/18 01:15:15
Name 눈시BBver.2
Subject [오늘] 5.18 (2)


당시 11 공수여단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4일, 11공수여단은 전교사 매복부대와 한 차례, 31보병사단 (이들은 시위진압이 아니라 기지경비에 투입됐었죠) 과 한 차례 오인교전을 벌입니다.

11여단이 전체 기간 동안 사망한 수는 11명, 그 중 3명을 제외한 이들이 이 오인 사격으로 사망합니다. 반면 전교사에서는 2명 중 1명, 31사단은 전체 피해 3명 모두가 이 오인교전에서 발생합니다.

이 때 11여단은 매복한 전교사의 조직적인 사격에... 반자이 돌격으로 맞섭니다. -_- 무턱댄 돌격에 아군의 피해가 커진 것이죠. 반면 31사단에서는 자기 병사 3명이 사망했음에도 그것도 중상을 입은 중대장이 상황판단을 제대로 해 더 이상의 희생을 막았죠.

이 11여단이 도청 앞에서 발포한 이들입니다. 유명한 버스 공격을 한 것도 바로 이들이구요. 도청 발포 후 옥상에 저격수를 배치, "조준 발포"를 한 것도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그 외의 부대 역시 무차별 발포를 한 사례가 있긴 하지만 피해자는 한두명 정도였고, 31사단 등은 시민군이 조직된 후의 교전을 했지 무차별 발포를 하진 않았죠.

대규모 무차별 발포를 한 주역, 아군과의 오인 교전에서 돌격을 해서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이 같은 여단이라는 것이죠.

첫 발포와 두번째 발포가 있은 후, 전교사와 31사단 측에서는 실탄 통제에 나섭니다. 위에 올렸듯 그 때 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발포하지 못 하게 했죠.

바로 그 때 공수여단은 실탄을 분배하고 있었습니다.

도청에서, 31사단은 철수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전교사 측에서는 일단 한 발 물러서려 했습니다.

그 때 공수여단은 실탄이 없는 병력이 실탄을 소지한 병력과 교대하고 있었습니다.

상급부대는 한 발 물러서려 했는데, 왜 하급부대인 공수여단은 오히려 실탄을 분배하고 발포를 했느냐, 이것이 문제의 중심이죠. 지휘권의 혼란, 다시 말 하면 누가 정상지휘계통을 깨뜨리고 공수여단을 조종했느냐의 문제입니다.


그 의혹을 받는 인물이 바로 특전사령관 정호용입니다. 그가 직접 서울과 광주를 왕복하며 직접 월궐행위를 한다고 한 것이죠. 1996년 당시 법원에서는 작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긴 했지만 실질적인 작전지휘권을 행사하진 않았다는 결론을 냅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작전지휘권을 행사해야 하는 전교사 등에는 이 공수여단의 발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공수여단, 특전사 병력은 UN사 및 한미연합사에 포함되지 않는 부대입니다. 다른 부대가 미군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면, 이 부대는 "통보"만 하면 되죠. 국가에서 보다 더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부대입니다.

정호용은 12.12 후 50사단에서 특전사령관이 됩니다. 그 역시 12.12의 주역이며, 하나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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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 쏘는 거야?"
"아직 쟤네들이 안 쐈어!" - 블랙 호크 다운

"도청 안에서 정신을 수습하고 있는데 중사 한 명이 들어와서 '그 녀석들이 내 부하를 죽여서 무차별 난사했다'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더군요. 그때까지도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를 못했어요. 아무리 수만의 시위대에 포위됐고 군인의 희생이 발생했더라도 시민들한테 총을 겨누고 쐈다니..." - 진압군 출신 이경남 목사

시민 측의 공격에 위험해서 자위권을 발동했다, 이것을 자위권이라 한다면 그들의 말이 틀린 건 아닙니다. 첫 발포는 자기가 죽을 위기에 처하니까 쏜 것이고, 두 번째 발포는 몇 명이 시위대의 차량에 압사당한 후 쏜 것이었으며, 도청 앞 발포 역시 한 명이 죽은 다음에 쏜 것이니까요.

문제는 왜 그런 상황이 생겼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현지 상급부대가 실탄을 금지했음에도 실탄 발포가 계속됐고, 현지 상급부대가 상황을 진정시키고 철수하는 가운데에서 계속 시민들과 부딪히게 됐느냐는 것입죠. 왜 발포가 됐음에도 31사 및 전교사에는 제대로 보고가 안 들어간 것인지, 왜 31사단은 철수하고 있는데 공수여단은 철수 명령 없이 계속 도청에서 버티게 됐는지...


"전 각하 : 초병에 대해 난동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

그가 그런 상황으로 몰아넣었다는 답밖에 나오지 않죠.

공수여단의 지침은 군인에 대한 두려움을 줘 조기에 뿌리를 뽑는 것, 하지만 그 결과는 시위대의 확대만 불러왔습니다. 군 내에서도 상황을 진정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걸 거부하고 자위권 발동을 강조합니다. 그렇게 공수여단은 다른 부대보다 더 강한 "자위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철수 명령을 받지 못한 채 분노한 시민들과 맞서게 됩니다.


"현지 상황이 더욱 악화됨에 따라 5월 22일 자위권 발동도 가능하다는 계엄사령부의 작전지침이 지휘계통을 통해 하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5공 청문회 국회증언 속기록

그가 발포를 명령한 증거는 절대,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그는 단지 과잉 진압을 명령해 시민들을 분노하게 했고, 그런 시민에 맞서는 진압군에 자위권 발동을 강조한 후 둘을 부딪히게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그는, 신군부의 주역들은 발포의 책임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발포를 원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광주 시민들이 자기 말만 잘 들었으면 이런 일 없었을 거라 생각하겠죠. 그리고 그들이 말을 듣지 않은 이상 발포라도 해서 말을 듣게 하려 했겠죠. 하지만 그것을 직접 명령하면 안 됐습니다. 그것은 "불행한 사고"여야 했으니까요.


유태인에 대한 "최종 해결책", 그가 여기에서 구체적인 명령을 내렸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는 그저 유태인에 대한 "추상적인 분노"만을 보여줬을 뿐이었죠. 그 부하들은 알아서 "효율적으로" 유태인 문제를 처리했고, 그는 이것을 "모른 척" 합니다.

+) 최근에 발견됐다는 카더라는 들은 적 있습니다만, 어쨌든 자기가 최대한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 했다는 것은 확실하겠죠.

이 경우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가 명령을 내렸다는 증거는 영영 발견되지 않을 겁니다. 빠져나갈 구멍을 모두 만들어 놓고 한 것이었으니까요.

시민들이 무장한 이후에는 참 편했을 겁니다. 이렇게 "폭도"가 "무장"했으니까요. 광주를 고립시킨 후 굳이 공수여단이 아니더라도 시민군만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던 민간인을 사살한 것은 투입된 전군이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11여단은 여전해서 미니버스를 공격해 말 그래도 "학살"한 것이 바로 그들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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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포가 일어난 것에 최대한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제... 좀 남은 얘기를 해 보죠. 이 얘기들도 짧진 않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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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폭도가 되고 싶은 거야?"
"폭도요? 우리가 폭도라고요?"

시민들의 첫 무장, 이건 그리 좋게만은 볼 수 없습니다. 첫 무장은 두 번째 발포가 일어난 새벽부터 아침에 걸쳐 이루어졌고, 특히 발포가 시작된 13:00부터 14:00까지 각 파출소나 무기고를 공격합니다. 마치 도청에서의 발포를 기다렸다는 듯이요. 광주부터 화순, 나주 등에 걸친 조직적인 움직임이었습니다.

진압군이 철수한 이후에는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시작됩니다. 협상과 무력 항쟁으로 나뉘어진 것이죠. 교련수업이 남아 있었다 하나 총기에 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발이 많았죠. 이들이 온건파를 그리 좋게 대하지도 않았구요. 폭발을 우려해 탈취한 폭탄들의 뇌관을 제거하고 진압군에게 넘기려 했던 이는 끝까지 같이 싸웠음에도 프락치로 몰렸다가 최근에야 재평가 받고 있습니다.

유언비어 역시 마찬가집니다. 경상도 군인이 죽이러 왔다는 말이 퍼지면서 19일부터 경상도 출신의 가게가 불 탔고, 이것이 시위를 과격하게 하는데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시민군 무장 당시, 발포로 300명이 사망했고 그에 대응해 총기를 탈취하는데 성고했다는 삐라가 돌기오 했구요.

만약 광주에서 추가 발포가 없었다면 이건 비판받기에 충분했겠죠. 이런 모습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저 쪽에서는 이를 핑계로 폭동이 맞다고, 은폐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들을 정당하게 만든 건 바로 진압군이었습니다.

①사태수습 전에 군 투입을 하지 말라.
②연행자 전원을 석방하라.
③군의 과잉진압을 인정하라.
④사후 보복 금지.
⑤책임면제.
⑥사망자 보상.
⑦이상이 관철되면 무장해제를 하겠다.

광주 내의 여러 인사들이 만든 수습대책위원회와 온건파 학생들이 만든 수습대책위원회, 이들은 서로 의견을 모아 위와 같은 조건을 진압군에게 내밉니다. 그 대답은 다들 아시겠죠.

광주의 시민군들이라고 다 이성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니 이성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었죠. 그럼에도 광주는 이성을 어떻게든 지키고 있었습니다. 강경파는 일부였고, 같이 총을 들었다 하더라도 협상이 이루어지면 총을 내려놓을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강경파와 대립했을,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으려 했던 수습대책위원회의 일원이었던 조비오 신부, 그가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봅시다.

"나에게 총이 있었다면 나도 총을 쐈을 것이다"

선후관계로 다시 얘기해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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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14일과 16일에 시위를 엽니다. 경찰은 이를 크게 제지하지 않았고 이 "횃불 시위"는 평화롭게 끝났죠.

18일에 다시 시위가 열릴 때, 학생들은 별다른 무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진압군은 이를 아주 철저히 짓밟았죠. 학생들 뿐만이 아니라 시위에 참가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폭행이 가해졌습니다.

19일부터 시민들이 과격해지기 시작하고 전교사와 31사가 실탄 통제를 하고 한 발 물러서려 할 때, 진압군으로 파견된 공수여단은 명령을 무시하고 실탄 사격을 시작합니다.

그게 자위권 발동이든 뭐였든, 총을 쏜 것이었죠. 그리고 강경파 쪽에서 총기를 탈취하는 동안 대규모 발포가 있었습니다. 당시 11공수여단의 기록에는 시민 측의 발포를 기록하고 있지만, 그 때 죽거나 다친 이들 중 총상이 있는 군인은 없었습니다. 대규모 발포 전에 총을 쏘며 맞서려 했던 이들이 있었지만, 최소한 그들은 그 전에 총을 쏘진 않은 겁니다.

과격했다는 비판은 가능할지언정, 그들이 틀렸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죠.

시민들 내에서는 온건과 강경 사이의 다툼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진압군과의 협상을 하려 했습니다.

그 동안 진압군 내의 온건한 움직임은 다 밀리고 강경 진압만이 계속됐죠.

침소봉대라고 하죠. 그들은 시민들 내의 과격했던 움직임만 강조해서 그것을 폭동으로 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후관계에서 보듯 모든 원인은 진압군 쪽에 있었습니다.

도청에서의 마지막 날, 마지막까지 남은 200여명의 시민군에게 실탄을 주고 발포명령을 내렸던 이가 있었습니다. 결국 진압군에 의해 생포되고 무기징역을 받은 이였죠. 그는 최근 정반대의 판결을 받습니다. 재판은 하루도 끌지 않았습니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120303030824689&p=donga&t__nil_news=downtxt&nil_id=10

"따라서 피고인의 행위는 헌정질서 파괴의 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하는 행위로서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행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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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증언에서는 진압군들이 막걸리를 먹었다는 것이 나옵니다. 직접 이들에게 물어봤던 이는 식사 추진이 제대로 안 돼서 술이라도 먹는다는 대답을 들었죠. 이것이 군인이 술 쳐먹고 사람들을 죽인다는 유언비어의 원형입니다. 뭐 크게 틀린 말은 아니네요.

진압군은 연초부터 휴가가 통제된 채 혹독한 훈련을 받았고, 자기들의 행동이야 어찌됐든 생명의 위험을 받으며 계속 작전을 했습니다. 상부에서는 강경 진압을 강조했고, 하급 부대에서는 이를 충실히 따랐죠. 그렇게 그들은 "폭도"를 때려잡는 일에 동원됐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같은 국민에게, 무고한 시민들에게 총을 쏘게 됐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좀 특이한 수 있는 부분이 있죠. 군 내에서 범죄를 저질러 징계를 받은 이의 수입니다.

그 중 가장 많은 일을 저질렀던 11공수여단에서 나온 인원은 44명, 그보단 덜 했지만 다르지는 않았던 7공수여단에서는 29명이 나왔습니다. 3공수여단에서도 23명이 나왔구요. 모두 광주에 갔다 왔던 이들입니다. 광주에서 있었던 일이 아닌, 모든 일이 끝난 후 나왔던 범죄들입니다.

광주에 투입되지 않은 1여단은 7명, 9여단은 18명, 13공수여단은 15명 등으로 광주에 다녀온 이들이 대체적으로 높습니다. 특히 11여단은 44명이라는 참 독보적인 수죠. 그들이 광주에서 얻은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들 역시 이런 상황에 몰린 또 하나의 피해자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시민들을 마구 때려죽이고 총을 쏜 것을 무마할 수 없습니다. 사병 단위까지 일일이 찾아 처벌하는 건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최소한 개인 단위의 반성이 없다면, 후회가 없다면, 피해자들의 짐은 물론 자기 자신들이 지고 있을지 모르는 짐을 내려놓을 수도 없을 겁니다.

군은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존재입니다. 오히려 국민에게 총을 쏜 것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어찌 당당히 국민을 지킨다고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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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이 김대중 때문이다... 라 한다면 어디까지를 말 하는 걸까요?

초기 시위에서 김대중 석방은 분명 중요한 주장이었을 것입니다. 김대중이 체포된 게 바로 그 시점이고, 고인이 된 지금도 김대중은 호남권에서 지지받는 정치인이니까요. 이것이 강경 진압에도 맞서는 이유의 하나로 볼 순 있습니다. 자기들이 지지하던 정치인이 투옥된 것이니까요. 그리고 이건 정당한 요구입니다.

하지만 일이 커진 것은 이를 강경 진압한 것입니다. 이 때부터 이미 김대중 석방 문제는 둘째였습니다.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시민들 역시 마구 구타 체포한 것이 문제인 것이죠.

김대중부터 김영삼 등 야당 인사들은 이 때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민들의 지지를 받던 이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시위의 이유 중 하나가 될지언정, 광주 전체가 그것 때문에 들고 일어났다고 할 순 없습니다. 부마항쟁의 발단 역시 김영삼에게 있는데, 그렇다면 부마항쟁이 김영삼 하나 살리려고 한 것이었을까요? 거기다 이들이 무슨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하라고 주장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노태우가 대통령이 됐다고, 김영삼이 대통령이 됐다고 광주에서 무장 봉기라도 일어났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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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신군부를 막을 수 없었고, 또 다른 독재가 7년간 계속됐습니다. 그 원인을 찾자면 다시 박정희에게로 갈 수밖에 없죠.

박정희는 군부를 너무 키웠습니다. 아니 군부가 문제가 아니라 전두환, 노태우 등이 주축이 된 하나회가 문제였죠. 전두환은 5.16 당시부터 생도들을 이끌고 지지 시위를 벌였고 박정희의 맘에 딱 들었습니다. 하나회는 박정희의 보호 아래 군을 장악했죠.

군부터 최규하 등 당시의 정치인들도 이에 너무 무력하게 당합니다. 삼김을 대표로 한 야당 인사들 역시 바로 붙잡혀서 이들을 막을 수 없게 됐죠. 그나마 이를 막으려 했던 광주에서는... 군의 무력 진압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3개의 공수여단이 서울에 배치됐고, 2개의 여단은 부산 일대에 배치됩니다. 전국은 계엄령으로 군에 장악돼 버렸죠. 서울에서는 이 힘에 굴복해 물러났고, 광주에서는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이 작은 차이가 그 많은 피를 낳았죠.

다른 지역에서 같은 일이 있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아마 전국에서 그런 유혈사태가 벌어졌다면 또 모를 일이긴 하죠. 그렇게 됐다면 미국도 그냥 두고 볼 순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미국 역시 유혈사태가 일어난 후라면 모를까, 군 동원을 막진 않았습니다. 광주에서 병력이 추가 투입됐듯이, 부산과 대전에서 일이 벌어진다면 신군부는 해병대를 투입할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이를 승인할 예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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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이라고 해야 될까요. 국민은 미국의 본 모습을 알게 됩니다. 미국에게 중요한 것은 한국의 민주화가 아니라 한국의 안정이었죠. 박정희의 최측근이자 역시 반공을 내세웠던 신군부는 딱히 거부할 필요 없는 파트너였습니다. 한국에 큰 신경을 쓸 수 없을 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지미 카터 정권이 최악의 레임덕을 겪고 있었거든요.

그들이 군 동원을 묵인하긴 했지만,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릴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 때가 그 대신이라고 해야 될 지 그는 유신 때처럼 김대중을 필두로 한 야당 인사들의 목숨을 최대한 구했죠. 하지만 이미 미국은 낙인이 찍힌 상태였습니다.

이후 전반적으로 나타난 반미 흐름, 미국은 그제야 민주화 세력의 편을 듭니다. 6월 항쟁 때 계엄령을 철저히 막았고, 아예 출동하려는 군을 무력으로 막았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 이후 5.18의 기록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때 기밀 문서를 잔뜩 해제해 신군부 인사들의 왜곡을 막아주기도 했죠. 그 양 덕분에 아예 독립된 카테고리로 승격됐죠.

그래도 부족하다는 생각은 드네요. 어찌됐든, 미국이 그냥 좋아서 한국을 도왔던 게 아니라 자기의 이익에 맞췄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광주에서 흘린 피는 미국 역시 책임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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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개입설, 뭐 그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간첩 한둘은 있었겠죠. 하지만 시민군은 그런 간첩을 진압군에게 넘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 역시 잊으면 안 됩니다.

진압군의 피해 중 시민군의 총에 사망한 것은 3명, 원인이 확실하지 않은 것을 다 여기에 넣어도 10명도 되지 않습니다. 총 쏘는 데는 지지 않을 북한군이 있었으면 이것밖에 안 됐을까요? 이 차이는 양 쪽의 화력과 훈련도가 얼마나 차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그보다 중요한 게, 강원도 쪽으로 침투해도 소수밖에 못 오고 나라 자체가 들썩거리는 상황에서 광주에 수백명이나 어떻게 알고 침투했을까요? 그리고 진압군은 그걸 파악도 못 했을까요? 왜 이렇게 너무나도 좋은 거 놔두고 "폭도들의 난동"으로 계속 발표했을까요? 정작 이 말이 나온 건 민주화 이후입니다.

그 때 북한도 좋다고 사람 보내려 했지만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다... 는 결론을 다들 한 번씩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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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민주화 운동, 광주 사태, 광주 사건, 광주 항쟁...

광주 사태라는 말을 무조건 배격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서의 "사태"는 "발포"를 뜻 해야죠. 이걸 쓴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그 에 따른 분노를 감당할 수는 있어야 될 겁니다. "사태"는 광주 시민들을 "폭동"으로 밀어붙이던 말이고, 그들은 지금도 그 뜻으로 쓰고 있습니다.

만약 광주가 약간의 충돌로 끝이 났다면 그 명칭은 "항쟁"이 됐을 것입니다. 사실 민주화 운동이라기보다는 항쟁이 더 어울리죠. 문제는 5.18이 현 민주화에 끼친 영향이 너무나도 크다는 것입니다.

그 때의 광주 시민들은 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자기 가족들을 위협하는 군에 싸웠고, 무고한 시민들을 폭행하고 발포한 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민주화를 외치는 이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최소한 사람이 죽지 않았다면, 발포가 나오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광주에서의 일도 하나의 항쟁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민주화도 조금 늦어졌을지 모르고, 신군부를 욕 할 큰 이유 하나도 줄어들었겠죠. 주사파나 극단적인 반미 등도 조금은 줄었을 것입니다. 민주화 운동이라는, 민주화의 성지라는 영예로운 말을 듣지 않더라도 피해가 조금이라도 더 줄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죠.

하지만 그건 강경 진압한 신군부에 물어야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그 분들께 말 할 것이 아닙니다. 그 분들은 그렇게 군부의 압제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 분들이 흘린 피 앞에서, 민주화 운동이라는 말도 부족합니다.

한국인들...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죠. 그 때도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정치인들에게 잘 속고, 유언비어에도 잘 휩쓸리고, 자기 앞가림에 바쁘고, 이익에 따라 잘 기울기도 하구요. 그 때의 광주 시민들도 그렇게 민주주의만을 위해서 싸우진 않았을 겁니다. 그 중에는 "저 학생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왜 시위냐 하냐"고 했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정말 아무 관심 없었는데 끌려가고 총 맞아 죽은 이들도 있을 것이며, 하다못해 박정희를 지지했던 이들도 없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최소한 군이 같은 국민을 때려잡는 것을 막기 위해 일어섰고, 싸웠습니다. 그들이 꿈꾼 세상이 완벽하게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이상의 세계는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최소한 국민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할 수 있고 그걸 위해 싸울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싸웠습니다. 군의 무력에 의해 짓밟혔지만... 그래도 싸웠습니다.

신군부가 그 이후 어떻게 했고, 지금 어떻게 했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 때 싸우신 분들과 그 가족분들이 어떻게 됐고... 이런 얘기도 하지 않겠습니다. pgr에도 그런 분들이 많으실 테니까요.

잊지 맙시다.

32년 전 5월 18일 오늘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는, 광주 시민들은 독재에 맞서 싸웠습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5-26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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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ne sais quoi
12/05/18 01:2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눈시님 글 중에 가장 읽기 힘든 글이네요.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수구 집단에 대해 절대 내 1표는 줄 수 없다는 생각이 만들어진 계기이기도 합니다. 국민학교 시절 명동에 어머니 따라 갔다가 우연히 만난 시위대 덕분에 광주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30대 중반이 된 지금도 다시 보기가 무서워지는 사진을 국민학교 시절 보게 되었으니 그 충격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언제쯤이면 우리 사회에 이런 일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내려질까 궁금해지네요. 지금으로선 별로 기대도 안 갑니다만.
모든 고인의 명복을 빌고, 이 일로 아파하는 모든 분들이 조금이나마 마음의 평화를 찾기를 기원합니다.
포포시
12/05/18 01:48
수정 아이콘
글을 읽으신 분 들 중에 518을 더 잘 알고 싶으신 분들께 림철우의 <봄날> 이라는 소설을 권하고 싶어요.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시실적으로 잘 다룬 소설이에요. 정말 추천드립니다.
파트라슈
12/05/18 02:5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눈시님, 그저 달력에 보이는 숫자만으로 가슴 두근거리고 무언가 북받치는 날임에도 언제나처럼 꾸밈없이 담백한 좋은 글 감사합니다.

현재를 얻기 위해 과거에 싸워 온 사람들의 흘린 피를 기억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현재는 또한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억압과 부조리를 위해 싸우는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하구요...

감정이 울렁거리지만 다잡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우리의 현재를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워간 당신들을 존경합니다.
aesthetic
12/05/18 04:17
수정 아이콘
화려한 휴가 영화가 개봉하고 이런 말들이 있었죠. 영화에서 시민들이 당하는 장면이 많이 과장 되었다..
그말에 대해 당시 이투스 학원 역사 강사였던 강민성 강사가 그 영화는 15세 관람가라
거기에 맞춰 축소되어서 나온것이다라고 반박했던게 기억나내요.
5.18공원만 가봐도 당시에 참혹했던 사진들을 볼수가 있습니다. 믿지 못할정도로 끔찍한 사진도 본적이 있구요.
5.18 민주화 운동을 사람들이 잊지 않고 기억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힘들다면 적어도 말장난식으로라도 비하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12/05/18 08:43
수정 아이콘
많이 슬픕니다.
자유수호애국연대
12/05/18 08:49
수정 아이콘
http://www.youtube.com/watch?v=m9idgpQbpsw



This black page in history is not colourfast, will stain the next
All that remains is just a feint of what was meant to be
This black page in history is not colourfast, will stain the next
And nothing seems in life, in dreams like what was meant to be
(역사의 검은 페이지는 그 색 바래는일 없이, 뒷장 또한 물들이지.
지금 남은 건 모두 원래대로여야할 모습들을 가장할 뿐.
역사의 검은 페이지는 그 색 바래는일 없이, 뒷장 또한 물들이고
삶에서든 꿈에서든 원래대로여야할 모습들은 아무데도 보이지않아.)

Every beat of your heart tore the lies all apart
Made foundations quiver
Every wave in the lake caused the porcelain to break
And I shiver...
(그대 심장 뛸때마다 거짓들은 부서져가
바닥까지 뒤흔드네
호수 물결 퍼져나가 도자기에 금이 가듯
내 몸마저 울려오네)
12/05/18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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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많이 슬픕니다.
여러번 보아왔던 사진이지만, 마지막 아이(제가 75년생이니까 저랑 또래일것 같네요.) 사진에서는 눈물을 참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리메
12/05/18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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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근대사의 비극이자 가장 알려지지 않았고 가장 현재 사는 사람들과 연관있음에도 그렇기 때문에 진실을 파기 어려운 5.18이네요. 숙연해지는 하루입니다.
아티팩터
12/05/18 09:45
수정 아이콘
아직도 디씨 등지에선 폭동 드립하며 민주화라는 말의 오용으로 518을 비꼬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걸 재미있다고 따라하고,
따라해서 뭐라 그러면 지금껏 자기가 써온게 잘못되었다고 인정하기 싫으니까
정당화를 위해 518을 또 까내리고...

참 안타까워요. 여러모로.
하심군
12/05/18 10:19
수정 아이콘
넓은 의미에선 냉전이 낳은 최악의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같은민족을 죽이는데에 거부감을 가지게 되지 않은 군대가 자국민을 해치는 것도 거리끼지 않게 되었죠. [m]
Neandertal
12/05/18 12:14
수정 아이콘
5.18 민주화운동이 있었기에 1987년 6월 항쟁 때 전두환이 군을 동원할 수 없었다라는 의견도 있더군요...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을테고 정권이양기에 88올림픽등 여러가지 변수들이 군 출동을 막았겠지만 어떤 의미로 6월 항쟁과 민주화는 5.18에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봅니다...
다시 한번 희생되신 분들과 유가족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rechtmacht
12/05/18 13:34
수정 아이콘
5.18 관련글을 읽는 것은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요
RegretsRoad
12/05/18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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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고인의명복을빕니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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