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2/07/05 00:47:25
Name Right
Subject 만나도 만난 게 아닌, 헤어져도 헤어진 게 아닌.

더운 여름날, 모처럼 폭우(?)가 내려 조금은 시원한 어느 오후, 카페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옆자리엔 또래의 두 남녀가 마주 앉아서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사실 이걸 대화라고 봐야 할지는 모르겠다) 묘하게도 둘의 시선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무척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인 것 같다. 쭉 상대방을 응시하며 큰 목소리로(내가 이들을 의식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고) 말을 이어갔고, 각종 손짓을 하며 대화를 주도했다. 반면 여자에겐 또 한 명의 친구가 더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남자에겐 아쉬운 일이겠지만, 여자는 이 친구가 훨씬 더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여자는 대화 내내 이 친구에게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못했으니까. 여자에 대한 남자의 적극적이고 생생한 목소리와 표정보단 이 친구의 ‘키읔’ 혹은 ‘히읗’이 섞인 정신없는 글귀가 더 매력적이었나 보다. 아, 근데 사실 이 친구의 성별이 남자인지는 잘 모르겠다.  

위 이야기는 실제로 얼마 전에 겪은 이야기다. 조금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나 평소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기도 하다. 하나 다른 점이라면 이 경우 보통은 남자도 자신의 스마트폰에 시선을 돌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과 대화 중에 스마트폰을 보는 버릇을 기본적인 예의가 부족한 개인의 탓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고 싶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우선 개인의 탓으로 돌리기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런 행동패턴을 보이고 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사람들과 대화 중 어느 정도의 스마트폰 사용이 무례한 것인지 규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일이 생겨서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깐 사용하는 것을 무례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은 양해 없이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꺼내 들어 시선을 옮기게 되는데, 이때 상대방은 이 사람이 지금 막차가 끊길까 봐 지하철을 검색하는지,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의 새로운 메시지를 확인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상대방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멍하니 있거나 그건 또 어색하니 자기도 스마트폰을 꺼내 들 뿐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대화 중에 스마트폰이 아니라, 갑자기 책을 꺼내 들어 진지하게 읽는다면? 휴대용 게임기를 꺼내 들어 신 나게 버튼을 두들긴다면? PMP를 꺼내 영화를 본다면? 이걸 예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근데 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스마트폰 사용에는 관대한 걸까?

사실, 정답은 위에 이미 나와 있다. 상대방은 그가 뭘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얼마나 중요한 이유로, 얼마나 오래, 얼마나 깊은 집중력으로 스마트폰을 사용할지 상대방은 모른다. 그렇다고 상대방이 얼마나 중요한 일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제지하기엔 우린 이미 형식적으로 성인에 이른 나이가 되었다. 결국, 개인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는 데 아직 우리에게 스마트폰 사용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공감대는 없는 것 같다.

이쯤에서 다시 두 남녀의 대화로 돌아가 보자. 이들은 서로 만나고 있는 걸까? 분명 둘은 마주 앉아 있지만, 여자는 반쯤은 상대방을 의식하고 있고, 반쯤은 수많은 카카오톡의 친구들을 의식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 둘은 카페에서 나왔고, 여자는 남자에게 손을 흔들며 버스에 올라탔다. ‘카톡해.’라는 말을 남기며. 그리고 집에 가서 잠들기 전까지 대화는 이어졌다. 이들은 헤어진 걸까?

오늘날 우리는 온전히 사람을 만나기가 너무 어렵다. 그리고 헤어지기도 너무 어렵다. 헤어짐이 있어야 만남이 소중한 것일 텐데, 우리는 헤어짐을 피하면서 만남도 함께 잃은 것 같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7-12 11:04)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2/07/05 00:55
수정 아이콘
사람 앞에 두고 폰보는거 너무 싫어요. 잘 읽었습니다. [m]
12/07/05 12:22
수정 아이콘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OnlyJustForYou
12/07/05 00:58
수정 아이콘
아.. 글 잘 읽었습니다.
상당히 공감합니다. 앞에서 핸드폰 만지는 거 때문에 화낸 경험도 있구요.
아 정말 만나도 만난 게 아니고 헤어져도 헤어진 게 아니네요.
12/07/05 12:25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저는 차마 화는 못 내고 그냥 멍 때리고 있거나 아무 이유 없이 스마트폰 꺼내기도 하고 있어요.
12/07/05 01:00
수정 아이콘
토론게시판에서 감명깊게 읽었던 글이 생각 나네요. 이야기나 장소의 무게감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해요.
비단 스마트폰 뿐만 아니라 대화 도중에 대화에만 전적으로 집중하는 경우도,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잘 없다고 느끼는데
스마트폰은 정말 스마트해서 "간편하게" 신경을 쓸 수 있는 여러가지 요소가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냥 수단이 달라졌을 뿐..
어차피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 대화 그 자체에 온전히 집중하는 순간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럴 필요도 없는 것 같고

온전히 만나기가 어렵지요. 근데 딱히 스마트폰 때문인 것 같지는 않아요 흐흐. 헤어지기도 너무 어렵다는 부분도 어떤 생각 때문이신지 궁금하네요.
12/07/05 12:27
수정 아이콘
그냥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해서 멍 때리는 거랑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거랑은 상대방이 받는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고 생각해요.

헤어지기 어렵다는 것은, 마지막 부분에서 보듯이 우리가 물리적으로 헤어진다해도 스마트폰으로 언제나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연결되있기에 만날 필요성도 크게 느끼지 못하고, 만나서도 서로에게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구요.
12/07/05 01:06
수정 아이콘
언젠가 한번은 카톡 대화방에 있는 사람(4명) 중 3명이 모여 나머지 한명을 기다리는데
셋이 탁자에 앉아서 카톡으로 대화를 하고 있더군요. 이게 뭐하는 짓이지 싶은 생각이 나중에서야-_-
1:1로 있을 때 카톡보고 하면 좀 짜증나는건 사실입니다. 바쁜 사람이라 약속이나 일때문에 그런건 이해하지만, 친구라던가 하면 뭐..
"걍 그 친구나 만나러 가." 라고 해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죠
12/07/05 12:29
수정 아이콘
아직 안 온 친구를 위한 카톡이군요...
3시26분
12/07/05 01:29
수정 아이콘
정말 공감가는 글이네요.
추천 살포시 누르고 갑니다.
12/07/05 12:30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 공감되신다니 다행이네요.
야광충
12/07/05 01:45
수정 아이콘
짧은 글이지만 추천을 안누를수가 없네요.
12/07/05 12:30
수정 아이콘
추천 받을만한 글은 아닌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원한초보
12/07/05 14:22
수정 아이콘
이런 상황에 대해서 평소 조금씩 고민 했었는데 생각해볼 수 있는 글늘봐서 반갑네요. 해어질 수 없는 상황이란게 많은 생각을 해보게 만드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누구 만날때 폰 만지작 거리는게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해서 잘 안하는데요 상대방이 그럴때는 뭔가 중요한 일이 이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안그런 경우도 많습니다. 그냥 단순히 이야기가 끊겨서 어색해서 그럴때도 있고요 또 그걸 보고 따라하눈 사람도 있고요. 남녀 이야기로 시작해서 만남과 대화에서 상대에 집중하는 것까지 중요한 것인데 이런것이 깨지는 이유가 다른관게에서 이별이 없기 때문이라는것은 의미있는 생각인것 같습니다
12/07/05 15:55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항상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는 말이 맞네요. 이별 없이는 새로운 만남도 없는 것 같습니다.
12/07/05 15:21
수정 아이콘
이제 슬슬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핸드폰 사용 예절도 가르쳐야 한다 봅니다. 버스에서의 예절, 연장자를 대할때의 예절을 교육하듯이요
Abrasax_ :D
12/07/13 08:48
수정 아이콘
정말 정말 좋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저도 가끔 휴대폰을 만지작 거렸는데요. 요새는 안 그럽니다.
아무에게도 연락이 안 오거든요.
12/07/22 02:07
수정 아이콘
애인이었던 분에게 이 문제로 상처받았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와닿는 글이네요.
비슷한 느낌을 받은 분들이 있다는 사실에 위안이 되기도 하고, 좋은 글 감사합니다.
ps.추천은 어떻게 하죠?
13/01/10 21:16
수정 아이콘
좋은 글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901 첫 소개팅 이야기... [49] Eva0108685 12/07/30 8685
1900 [현대사] 풍운아 '박헌영' 2 [3] 진동면도기3840 12/07/30 3840
1899 [현대사] 풍운아 '박헌영' 1 [3] 진동면도기5206 12/07/30 5206
1898 스타리그 본선에 진출한 GSL 선수 소개 [41] 여문사과8217 12/07/26 8217
1897 [연애학개론] 돌직구, 던져야합니까? [19] Eternity8455 12/07/28 8455
1893 빨치산 [20] 눈시BBver.26941 12/07/23 6941
1892 [뜬금없는 만화 리뷰] 딸기 100%를 몇년만에 다시 읽었습니다. [42] 클로로 루실루플12155 12/07/22 12155
1891 추억 [25] 공룡6993 12/07/24 6993
1890 마지막 황제 [30] 한니발11619 12/07/22 11619
1889 고백 하셨군요! [9] Love&Hate9512 12/07/22 9512
1888 리그의 과금방식 비교 [46] 어강됴리7536 12/07/18 7536
1887 이영호 vs 정명훈, 최후의 테란 [65] becker10281 12/07/17 10281
1886 내가 좋아했던 동아리 여자아이 [88] 바람모리12275 12/07/18 12275
1885 [PGR 서바이버] 술자리에서 살아남는 법 [33] AraTa_JobsRIP8938 12/07/18 8938
1884 내가 싫어 하였던 동아리 여자아이 [303] 이쥴레이19281 12/07/18 19281
1883 근대화는 절대선인가에 대해서. (원제: 조선까들의 아주 못된 버릇) [158] sungsik6405 12/07/17 6405
1882 친일파의 군 장악을 옹호하는 어떤 글 [85] 눈시BBver.210324 12/07/17 10324
1881 [연애학개론] 데이트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 [21] Eternity9314 12/07/16 9314
1880 Hello Korea, 한국으로 오는 해외 게이머들 [20] 어강됴리9706 12/07/14 9706
1879 연정훈 신발색깔은 무슨색일까 [14] La Vie En Rose10240 12/07/10 10240
1878 스타리그, 낭만을 증명하다. [28] becker8142 12/07/10 8142
1877 빛보다 빠른 것들 (1) - 정말 짧아져 보일까? [9] 반대칭고양이7385 12/07/08 7385
1876 만나도 만난 게 아닌, 헤어져도 헤어진 게 아닌. [18] Right6610 12/07/05 661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