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3/06/12 12:56:40
Name 두괴즐
Link #1 https://brunch.co.kr/@cisiwing/4
Subject 흔한 기적 속에서 꿈이가 오다 (육아 에세이)
흔한 기적 속에서 꿈이가 오다
(첫 만남에 대한 기록)



예정일은 넉넉히 남았지만, 뭐든 예정대로 되지만은 않는 법이다. 담당의는 아기가 아직 많이 위에 있다며 운동을 권했고, 우리는 그날도 그렇게 할 예정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날이 그리될지는 몰랐다. 아내의 몸만이 은밀히 알았을까? 그날 아침, 양수가 터졌다. 우리는 거북이가 되어버린 자가용을 겨우 움직이며 병원으로 갔다.



주말인 탓에 담당의는 없었고 그의 동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 출산이었기에 유도 분만이 시도되었다.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분만은 그다지 유도되지 않았다. 별수 없게 되자 의사는 쓸데없는 고통을 지속하기보다는 수술이 낫다는 수를 내놓았다. 아침에 시작된 아기의 탈출 시도는 해가 기울 때까지 계속됐다. 나는 설명을 듣고는 있지만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한 채 수술 동의서에 사인하고 있었다. 의사는 ‘별일 없을 거고, 이것이 최선’이라고 했고, 나는 그저 아내의 고통이 덜어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수술이 시작됐고 나는 대기실에서 가족을 비롯하여 지인들에게 연락을 했다. 축하와 위로, 놀림과 응원이 돌아왔고, 몇 개의 기프티콘이 남았다. 조금 멀어졌다고 생각했던 한 친구는 느닷없이 동료가 되라며 당(sugar)과 카페인(caffeine) 교환권을 보냈는데, 나는 아내가 이걸 먹을 수 있는가 의아했다. 어쩌면 내 몫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두 돌이 된 아들을 둔 아버지다.



수술은 잘 끝났고, 나는 중력을 견디며 폐호흡을 하는 꿈이(태명)를 만났다. 으앙으앙 울고 있었는데, 내게는 쿠와앙 쿠와앙 우는 것처럼 들렸다. 간호사는 의식을 치를 준비를 했다. 우는 꿈이를 보면 나도 우앙 울게 될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신비한 동물사전에서 나온 희귀종을 보는 기분이었다. 꿈이를 보는 내 눈이 초롱초롱하여 간호사는 웃었고 우리는 함께 몸을 씻겼다.



그새 훌쩍이라고 할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초보 부모의 서툰 걱정을 꿈이는 누적된 유전적 반응으로 돌파했고, 우리는 함께 곤고했다. 피로가 집을 지배하지만, 덕분에 조금씩 안도하게 된다.



신혼 때는 찾아오지 않았던 아기는 우리의 생식기능이 괜찮은가 싶어서 병원을 갔을 때 왔다. 다행이다 싶어서 안도하던 시기에는 조기 자궁수축이라는 판결 속에서 입원했고, 영문을 들어도 쉬이 설득되지 않은 시절을 보냈다. 우여곡절 끝에 온 꿈이는 악착같이 제 아비의 손가락을 쥐었고, 그러는 사이에 그동안 보이지 않던 온갖 동료들이 등장했다. 다들 위대한 육아의 항로에서 항해 중이던 것이다. 낚시로 가득 찬 원피스를 향한 탐험에 나도 합류했다.



나에게 기적은 드물다. 그래서 기적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기적은 흔하다. 그런 게 기적이다. 준비가 되지도 않았는데, 먼저 라이선스가 나왔다. 부모는 그 자격을 앞으로 증명해야 한다. 꿈이는 나와 아내의 반복을 꿈꾸며 유일무이하게 자랄 것이다. 우리는 반복의 착각 속에서 꿈이의 독립을 응원하겠다. 흔한 모험이 기적을 타고 시작됐다.




* 오르골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12-04 02:10)
* 관리사유 :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23/06/12 13:04
수정 아이콘
축하합니다 :)
몸은 힘들지만 그보다 큰 기적같은 일들로 행복하실거에요!
두괴즐
23/06/12 13:21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김선신
23/06/12 13:10
수정 아이콘
멋진 글입니다 준비되지 않았는데 나온 라이선스에 크게 공감합니다 축하드립니다
두괴즐
23/06/12 13:23
수정 아이콘
라이선스를 이렇게 무분별(?)하게 발급해도 되는 것인지. 흐흐. 감사합니다.
23/06/12 13:37
수정 아이콘
축하해요~

저희는 이제 14주가 됐어요
아직도 입덧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어서 보기만 해도 안쓰럽기는 한데 조금씩 배가 불러오는게 신기하네요
두괴즐
23/06/12 20:20
수정 아이콘
그러시군요. 입덧은 참 곤욕이지요. 옆에서 많이 도와주려고 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많이 미진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내가 내색하진 않지만요. 부모가 되는 일은 참 오묘하고 신기한 것 같습니다.
23/06/12 13:45
수정 아이콘
블로그 보니 소띠 아빠 이신가봐요! 저희 아기도 소띠(10월 생)에요 흐흐.
요즘 봐도봐도 너무 예뻐서, 내새끼가 제일 예뻐서, 울어도 예쁘고 짜증내도 예뻐서 (잘 때가 제일 예쁘긴 한데요!!) 매일 감탄 중인데, 주변에 물어보니 아직은 계속 상승세가 이어질거라고, 정점 찍으려면 2~3년 남았다고 하더라구요. 얼마나 더 예뻐질 지 두근두근합니다.
얼마 전에 분수대에서 아기가 뛰어 노는데 정말 생전 처음 느껴보는 벅차오름과 뿌듯함이 뇌리를 스치면서, 이래서 아기로부터 오는 행복은 아이 없이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종류의 행복이라고 하는 거구나 체감했습니다. 지금의 예쁨으로 평생 효도 다 하는 거라더니 정말 그런가봐요.
두괴즐
23/06/12 20:25
수정 아이콘
맞습니다. 같은 또래네요. 흐흐. 저도 요즘 너무 예쁩니다. 신생아 때는 정말 뭐랄까요, 자신을 돌보는 존재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니. 크크. 이제는 좀 컸다고 아빠아빠하고, 놀다가도 낯설면 막 달려오고 하는게 너무 사랑스러워요. 육아는 힘들긴 하지만, 그 순간의 기쁨을 위해 일상의 고됨을 견딥니다. 흐흐.
우유크림빵
23/06/13 11:02
수정 아이콘
축하드립니다! 길을 걷다가 문득문득 보이는 애기들을 보면 그렇게 귀여워 보일수가 없는데 본인의 아이라면 얼마나 사랑스러울 지 감히 상상도 안 되네요.
매일같이 웃음이 넘치는 가정이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두괴즐
23/06/14 14:45
수정 아이콘
아이때문에 희로애락을 경험하는 나날이네요. 감사합니다 :)
23/06/13 11:29
수정 아이콘
축하드립니다. 저희도 첫째 둘째 둘 다 자궁수축이 심해서 아내가 임신 6-7개월부터 거의 2달 씩 병원에서 자궁수축을 막는 레보도파?인가를 맞으면서 누워있었죠.

고생 많으셨습니다.
두괴즐
23/06/14 14:46
수정 아이콘
저희와 같았네요. 제 아내도 그런 경우였어요. 두 아이 모두 그랬다니, 많이 힘들었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23/06/13 15:32
수정 아이콘
두분 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두괴즐
23/06/14 14:47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공지 추천게시판을 재가동합니다. [6] 노틸러스 23/06/01 30598
3758 [역사] 산업혁명이 만든 기네스, 과학혁명이 만든 필스너우르켈 [27] Fig.16118 23/08/10 6118
3757 오래 준비해온 대답 [17] 레몬트위스트5954 23/08/08 5954
3756 나는 운이 좋아 칼부림을 피했다. 가해자로서든, 피해자로서든 [45] 상록일기6235 23/08/04 6235
3755 몇년이나 지난 남녀군도(+도리시마) 조행기 [4] 퀘이샤5676 23/08/03 5676
3754 사극 드라마에서 나오는 이방원에 대한 이성계의 빡침 포인트에 대한 구분 [29] 퇴사자5787 23/08/02 5787
3753 권고사직(feat 유심) [60] 꿀행성14840 23/07/30 14840
3752 가정 호스피스 경험기 [9] 기다리다13112 23/07/28 13112
3751 만년필 탄생의 혁신, 그리고 두 번의 뒤처짐 | 워터맨의 역사 [12] Fig.112749 23/07/26 12749
3750 교사들의 집단우울 또는 분노 [27] 오빠언니13097 23/07/22 13097
3749 초등학교 선생님은 힘든 것 같다... 아니 힘들다 [98] 아타락시아112926 23/07/20 12926
3748 제로 콜라 그럼 먹어 말어? [71] 여왕의심복13677 23/07/14 13677
3747 밀란 쿤데라, 그리고 키치 [10] 형리11810 23/07/13 11810
3746 [역사] 설빙, 샤베트 그리고 베스킨라빈스의 역사 / 아이스크림의 역사 [42] Fig.111841 23/07/11 11841
3745 중국사의 재미난 인간 군상들 - 위청 [26] 밥과글11837 23/07/10 11837
3744 펩 과르디올라는 어떻게 지금 이 시대의 축구를 바꿨는가. [29] Yureka11855 23/07/01 11855
3743 [기타] [추억] 나의 기억들 [10] 밥과글12204 23/06/19 12204
3742 [역사] 김밥은 일본 꺼다? / 김밥의 역사 [29] Fig.112629 23/06/28 12629
3741 자영업자 이야기 - 직원 뽑기에 실패하였습니다. [46] Croove12832 23/06/26 12832
3740 흔한 기적 속에서 꿈이가 오다 (육아 에세이) [14] 두괴즐13555 23/06/12 13555
3739 imgur로 피지알에 움짤을 업로드해보자 [8] 손금불산입13462 23/06/01 13462
3738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겪은 버튜버 걸그룹 "이세계 아이돌" 감상기 [49] 잠잘까16326 23/06/14 16326
3737 아이가 요즘 열이 자주 나요 (면역 부채와 열 관리 팁) [62] Timeless15398 23/06/10 15398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