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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8/06/03 20:29:28
Name kikira
Subject [소설] 4회 :『녀소 는리달 을간시』- 헤겔은 잔소리꾼












※ 이 소설은 픽션입니다. 따라서 순환론과 관련된 인명, 서적, 논문, 학파 등에 관련된
    모든 내용은 허구이며, 혹 그 관련이 의심된다면 그것은 순전한 우연임을 알려드립니다.












세 번째 이야기 - 헤겔은 잔소리꾼






  Vraiment?(Really?) - 정확한 연대와는 상관없이 80년대는 프랑스에서 나온 이 말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주인공은 클로레스-몰랑대의 가든 교수. 원래는 거시경제학자였고 과거 콜레쥬 드 프랑스에서 강의한 경력도 있는 이 저명한 학자는, 자신의 저서『텍스트 의미의 생산』을 통해 훗날 ‘종결론’이라 불리는 거대한 사조를 창조해내었고 순환론의 다카시 교수와 버금가는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불행하게도 과거 자신이 고투했던 개인의 소비와 거시 경제 주체와의 관계에 관한 학문적 업적은 완벽히 잊히고 말았다.


  교수는 저서 첫 줄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망상이 현실을 잡아먹는 미친 세계에 살고 있다.”

  교수의 말이 조금 심한 것 같지만 그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잠깐 텍스트로 다시 돌아가 보자. 텍스트 속 타임리프와 텔레포테이션은 시전자의 원래 상태 그대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과거로 돌아간 가츠코는 앞으로 일어난 사고를 미리 알 수 있다. 즉 기억이 유지된 채 이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순환론자들의 주장대로 텍스트 처음과 끝이 원환적 순환을 한다면 텍스트 마지막 부분에서 가즈오에 대한 기억이 지워진 가츠코가 텍스트 처음 부분에서 가즈오를 기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실제 작품은 어떠한가? 작품 첫 페이지는 가츠코와 가즈오가 학교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이 모순을 두고 가든 교수는 이렇게 일갈한다.

  “작품에 순환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작품의 내용뿐이다.”

  즉, 순환론적 논의는 ‘생산’된 것일 뿐이고, 비록 그러한 작품 의미의 창조적 생산 그 자체가 이롭거나 해로운 것은 아니나 현재의 순환론 열풍은 ‘광기’일 뿐이라는 것이 저서의 주조를 이루고 있었다. 가든 교수는 내가 궁금했던 사실들, 즉, 왜 그다지 새롭지도 않고 참신하지도 못한 순환론이 전 세계적 관심과 지지를 받았는지 냉철하게 규명했다. 그러나 두꺼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 실증적인 규명 과정은 역설적으로 80년대 초, 중반을 주도한 종결론 논의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거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순환론의 모순을 지적한 사람들은 역시 가든 교수 이전에 여럿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울리지 못했고 가든 교수의 그것은 그러했다. 종결론은, 최소한 그 수용과 확산에 있어선 순환론의 쌍생아였다.

  또한 당연하게도 그 저서로 인해 이듬해인 1982년, 가든 교수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종결론은 세상에 그렇게 등장했다. 종결론이 유별났던 점은 그 이론의 거의 모든 내용,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전부 가든 교수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아나끼 교수에 의해 원형적 모습으로 태동되고 이후 많은 석학들에 의해 조금씩 완성되어간 순환론에 비교하면 이러한 완전성이야 말로 종결론의 특징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종결론 내에도 수많은 의견과 그것들의 대립이 존재한다. 가든 교수는 요즘 말로 하자면 온건주의자였다. 그는 작품의 대한 여러 해석이 존재함을 부정하지 않았고 그러한 풍요로움을 환영했다. 그러나 또한 그는 순환론적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분명히 지적했다. 즉, 종결이란 작품 해석의 종결이 아닌 순환론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후, 당연히 종결론적 관점에서 작품을 해석하려는 연구가 뒤따랐다. 그 연구의 스펙트럼은 퍽 넓어서 아슬아슬하게 순환론과의 조우를 시도하는 연구들도 있었고, 작품의 일자무오설을 주장하는 과격주의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가든 교수에서 기대고 있었고, 종결론은 가든 교수의 것이었다.  

  또한 세상은 종결론의 것이었다. 교육과정에서 순환론의 내용은 대폭적으로 수정되었고 순환론을 전공하던 학생들에겐 지도 교수가 없어졌다. 또한 정당에선 순환론자들이 쫓겨났다. 정당들은 그 자리에 종결론을 다시 세우고 싶었으나, 종결론은 순환론과는 달리 학문적 담론 그 이상이 되지 못했기에 곧 그러한 구상을 포기했다. 쫓겨난 순환론자들은 뿔뿔히 흩어졌으나, 순환론의 경향이 강하던 미국에서는 순환론자들끼리 제3당을 만드려는 노력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또한 그 상관관계는 알 수 없지만, 종결론을 받아들인 선진국들의 자살율이 다시 한번 증가했다. 세상사는 어지럽게 돌아갔으나, 정작 종결론자들은 외려 조용했다. 이제 남은 것은 종결론적 해석을 완성하는 일 뿐. 오직 그것만이 남은 일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   *   *   *   *



  가든 교수의 뒤를 이어 ‘올바른’ 작품 해석을 시도한 수많은 종결론자들은, 그러나 결코 해석의 ‘온전한’ 완성에는 이르지 못했다. 텍스트의 글자가 지워지지 않는 한, 작품 초기의 가츠코는 계속 라벤더 향을 맡으며 무언가를 회상했다. 순환론이 그러했던 것처럼 종결론은 이 ‘가츠코의 라벤더’ 문제를 완벽히 해결해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후속 연구의 선두에는 가든 교수를 제외하고 가장 유력하게 노벨문학상 후보에 거론된(그렇지만 수상엔 실패한) 종결론자 노구치 교수가 있었다.
  “해석에는 힘이 없다.” 그의 이 유명한 말엔 울음기가 배어있었다.

  교수는 1988년「New York Herald-Tribune」과의 인터뷰에서 ‘작품 초기’, ‘라벤다 향에 대한 가츠코의 반응’(종결론자들은 결코 가츠코의 잠재기억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등과 같은 종결론 특유의 단어를 포기하진 않았으나 다음과 같이 깊이 탄식했다.

  “ ▷ …… 작품 초기의 가츠코와 작품 말미의 가츠코가 라벤더 향에 대해 보이는 반응이 동일하다는 해석은 또한 가능합니다. 허나 가즈오에 대한 기억은 그렇지 않아요. 가든 선생은 바로 이점을 지적한 겁니다. 헌데 그 라벤더 향에 관한 반응이란 것이 가즈오에 대한 기억이 지워지고 나서야 생길 수 있는 반응이란 것이죠. 솔직히 우리는 작품 초기의 가츠코가 그러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저는 가츠코가 이러한 인과율을 거부한 괴물이란 사실을 깨달은 뒤부터 작품을 읽기가 두려워졌습니다.

  ▷ 두려움이라니요?  

  ▷ 해석은 작품의 엄연한 실제, 구조, 그런 것들 앞에 너무도 무기력합니다. 제 두려움은 결국 거기서 기인하는 것이죠.”



   *   *   *   *   *



  종결론자의 항복 선언이라 불린 그 인터뷰 이후 몇 달 안 돼, 아나끼 하시모토 교수가 향년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얼마 남아있지 않은 순환론자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종결론자들 또한 이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던 인물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그러나 사실 아나끼 교수는 죽기 전 10년여 동안은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순환론의 초기 몇 년 동안엔 약간의 저술 활동도 했으나, 그 영향력은 극히 미미했고 교수는 곧 지루한 투병생활에 들어갔다. 그 투병 생활은 곧잘 니체의 말년과 비교되었으나 어쨌든 그럼으로써 아나끼 교수는 순환론자와 종결론자 모두에게 극상의 존경을 받았다. 누가 무어라 해도 현실적으론,「텍스트에 있어서 순환과 단절의 문제」- 이 논문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 세계적 존경 덕에 일본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그의 서거일을 기념일로 지정하기 시작했다. 후기 순환론을 이끌어간 와이즈먼 교수가 있는 영국, 크리스틴 교수의 캐나다, 종결론의 종주국 프랑스 등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순환론의 열기가 뜨거웠던 미국에서도 주립정부차원의 기념일을 지정했다. 거기에 그동안 순환론과 관련된 세계적 시류를 열심히 수용하던 한국 문단도, 아나끼 교수의 기념일을 제정하기 위해 재빨리 움직였다. 그 성급함과 어울리게 한국은 일본을 제외하면 아시아에서 첫 번째로 아나끼 교수의 기념일을 제정한 나라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저 쉬는 날이 하나 더 늘어났다는 소식에 기뻐했지만, 순환론과 종결론을 포함한 모든 논의에서 한 번도 그럴듯하게 참여해 본 적이 없는 나라에선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기념일이었다.



  80년대 말엔, 순환론은 물론이고 종결론적 담론 또한 거의 실종돼 있었다. 노구치 교수의 항복 선언 이후, 모두들 지쳐있는 기색이 뚜렷했다. 물론 순환론 혹은 종결론적 성향이 강한 나라들 - 소위 ‘가츠코의 본고장’들에서는 이런 저런 논의가 계속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한 학파, 한 나라의 차원을 넘지 못했고, 과거와 같은 전 세계적 열풍은 다시 오지 않을 듯했다. 80년대는 이렇게 저물어 가는 듯 싶었다. 하지만 그 마지막 해 겨울, 과거 순환론 트로이카 중 한사람이며 소장파 순환론자들의 거두였던 크리스틴 교수가 순환론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이러한 전향 선언에 전 세계 저널리즘은 민감히 반응했다. 어느새 지구엔 다시 가츠코의 기류(氣流)가 불고 있었다.              











                                                                                                                                                                5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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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6/21 20:41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다음 회도 기대하겠습니다.^^
08/06/22 11:56
수정 아이콘
순환론 작품들에 관한 생산 이론적 담론이 있었으니 이제 반영 이론이나 수용 이론쪽으로 갈려나요
Black_smokE
08/06/22 17:58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 ^
08/06/23 09:16
수정 아이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더욱 열심히 '퇴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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