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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8/07/29 16:13:36
Name 윤여광
Subject Fallen Road. Part 1 -1장 17화- [-조우#8-]
Fallen Road.
[윤여광 作]

Part 1.
1장 17화.
[-조우#8-]

  궁으로 돌아온 로즈의 얼굴은 여느 때와 같이 굳어있었다. 표정 없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운 채 정면을 응시하는 그 눈에서 읽어낼 수 있는 뜻은 아무 것도 없었다. 습관적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박자를 이루듯 흐르고 그것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을 표현하기라도 하듯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이어 들어온 그로 인해 그 소박한 리듬은 멈춰졌다.

“전하.”
“어서 오렴.”
“추격에 나섰던 병사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렇구나. 다친 곳은 없었니?”
“예. 다들 무사히 귀환하였습니다. 다만…….”
“다만?”
“한 사람이 경미한 부상을 입었습니다만 가벼운 상처라 금방 치유가 가능할 것입니다.”
“그래.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모시겠습니다. 전하.”

  로즈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확히 언제인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 시절부터 그는 언제나 파벨의 옆에 서 있었다. 간혹 곤란한 농담이라도 던지면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선한 얼굴의 그는 넌지시 건네는 뜻도 바로 알아차려 쓸데없이 대화가 길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재주가 있었다. 더구나 조금만 나서려고 하면 기를 쓰고 말리려드는 파벨과는 달리 순순히 앞길을 내주는 그가 로즈 입장에선 편했다.

“파벨경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니?”
“예. 아직 소식이 없으십니다.”
“늦는구나. 혹시 어디로 갔는지는 알고 있니?”
“예. 전하. 그리 모실까요?”

  앞 서 나오는 질문. 그리고 살며시 피어나는 미소. 귀여운 아이구나 하며 로즈는 그리 웃고 있었다.

“아니. 지금은 귀환한 이들을 챙기는 게 우선이야. 안내해주렴.”
“예. 전하.”

  앞 서 직접 사건 현장을 다녀온 로즈는 생각했던 것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해 조금은 초초한 마음이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그 동안 수집했던 자료를 토대로 움직일 줄을 모르는 놀헨과 엔트릴의 무거운 엉덩이를 힘껏 걷어찰 요령이었으나 눈앞에 보이는 당장의 사건을 그것도 자국 내의 사건이 아닌 그들의 땅에서 마주친 진의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물론 그렇다고 예정되어있던 일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없어도 그만 그렇지만 가질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그런 정도의 요소였다. 그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리가 끝난 시점이었고 시에서 파견한 조사단은 나름의 조사 결과를 그대로 공개했으나 그것 역시 그다지 영양가가 높지는 않았다. 진이 활성화되던 와중에 홍연단이 공격을 가한 바람에 소환은 중간에 멈춰졌고 덕분에 진 역시 무너졌다. 그 와중에 넘어온 4마리의 오크가 소동을 벌였고 레인저들의 빠른 출동으로 사태는 마무리 되었다. 어쩌면 홍연단이 공격을 가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했을 경우엔 어찌 됐을지 모를 상황이었을 것이다. 라임턴시는 엉망이 되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굳이 로즈 일행이 힘들게 발걸음 하지 않아도 엔트릴은 움직이게 됐을 것이며 곧 이어 놀헨 역시 동참했을 것이다. 단 그것은 어디까지나 편한 길만을 생각한 것이고 그로인해 희생될 시민들을 생각한다면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비록 타국의 국민들이라고는 하나 이 곳 라임턴은 영토 전쟁으로 쇼넬이 빼앗긴 땅의 일부. 이곳에 살고 있는 이 들 중 몇몇은 옛 주인이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을 한을 갖고 살고 있다. 외면해서는 안 된다. 언젠가는 다시 품고 가야할 자국민이 될 소중한 사람들. 실제로 로즈 일행이 도착 후 간략한 가두행진에 나서던 그 때 옛 주인을 그리는 몇 몇 이의 함성이 로즈의 귓가에 울렸다. 듣지 못한 척 그대로 앞으로 걸어갔으나 미안한 마음뿐이다. 언젠가 다시 자랑스러운 쇼넬의 이름을 돌려주겠노라 다짐하며 그렇게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까지 쭉 그래왔듯.

“전하 이 곳입니다.”

  할로가 문을 열자 이제 막 귀환한 병사들은 그 무장을 아직 내리지도 않은 채 예를 갖추고 있었다. 할로의 대기 명령으로 병사들은 고단한 몸을 편히 쉬지도 못한 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괜한 짓을 했나 하며 잠시 망설이다. 우선은…….

“괜찮으니 편한 자세로 있어주세요.”
“아…….아닙니다! 전하. 감히 어찌…….”
“명령입니다. 다들 무장을 해제하시고 편하게 앉아주세요.”
“하…….하지만.”
“전하의 명령이십니다. 감히 거역하실 생각들이십니까?”

  할로의 재촉이 이어지자 병사들은 아무래도 편하진 않다는 얼굴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다만 해체한 무장을 구석에 가지런히 정리하는 일 때문에 병사들이 그녀 앞에 다시 정렬하여 자리 잡기 까지는 약간을 지체가 생기기도 했다. 할로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지만 로즈는 그대로 괜찮다며 손짓하며 병사들에 더 이상 어떤 재촉도 하지 않았다.

“고생 많았습니다. 이렇게 대열에서 따로 떨어져 오게 하여 미안해요.”
“아닙니다! 전하.”
“부상자가 있으시다 들었습니다. 어디 계신가요?”
“전하.”

  오른 팔꿈치와 손목 사이에 길게 베어나간 상처가 있는 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로즈가 할로에게 살짝 손짓하자 그는 허리에 매고 있던 작은 주머니에 넣고 있던 가루약을 꺼냈다. 비상 시 간단한 응급처치를 위하여 소지하고 다니는 악초를 빻아낸 가루였다.

“아직 치료를 받지 못한 것 같군요. 내가 너무 일찍 찾아왔나 봅니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통증은 덜하게 될 테니 조금만 참아주세요.”

  일개 병사를 직접 돌보는 왕녀의 손길에 그는 어찌 할 바를 몰라 어깨를 심하게 떨었으나 곧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는지 그 움직임은 가라앉았다.

“급한 마음에 여러분의 휴식을 방해하게 되어 미안합니다만. 여러분의 이야기를 빨리 듣고 싶군요.”
“전하.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요. 말해보세요.”
“예 전하. 빌 엘리엇, 킴블 페니, 닐 벨튼, 케니 튜리언 이상 저희 4인은 파벨경께서 명령하신 진의 시전자를 추격하여 북서로를 벗어나 일정한 방향 없이 계속해서 진로를 변경하는 그 자를 추격했습니다. 그 자는 다른 일행과의 합류 움직임 없이 계속해서 단독으로 행동하며 저희들을 피해 다녔고 체격이나 움직임을 보아 여성으로 보였습니다.”
“그렇군요.”
“예. 북서로를 완전히 벗어나 몸을 숨길만한 지형이 없어지자 그 자는 움직임을 멈추고 저희와 교전을 준비하려는 듯 캐스팅에 들어갔습니다. 저희 역시 진영을 넓게 벌리며 접근했고…….”
“그래서?”
“갑자기 다른 누군가가 그 자를 공격해오는 바람에 시야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공격? 누가 말인가요?”
“그게…….알 수가 없습니다. 갑자기 저희들의 등 뒤에서 날아온 마법에 그 자는 캐스팅을 하던 도중 완전히 피할 수가 없어 어느 정도 부상을 입은 듯 했고 가장 먼저 그 자를 치고 들어가던 케빈이 그 때문에 저런 부상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결국은 그 두 사람 모두 놓치게 된 건가요?”
“예…….전하. 죄송합니다.”

  진을 세운 시전자. 그리고 그를 추격한 또 다른 한 마법사. 진의 또 다른 피해자일 가능성이 높다.

“뒤에서 갑자기 날아든 마법에 저희가 멈칫하는 사이 그 자는 텔레포트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처음부터 저희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마법으로 발을 묶어둔 뒤 확실히 거리를 벌일 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았고 여러분들 역시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시전자는 도주했고 공격한 이 역시 찾을 수 없었다. 그 말이군요.”
“예. 전하. 그 자를 공격한 마법사는 뜻하지 않게 저희가 공격에 휘말리자 망설이는 듯 하다 그 자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그대로 모습을 감췄습니다. 저희와 같은 일개 병사로선 도저히 어찌 해 볼 방도가…….”
“여러분을 책망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무사히 돌아 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한 일입니다.”
“전하.”

  병사들은 임우를 완수하지 못한 것에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호소했다. 그들의 실패에 대해서는 어떠한 책임을 물을 생각이 없다. 홍연단의 첫 공격으로 둔해진 시전자라면 일반 병사에 추격을 맡겨도 괜찮을 거라는 자신의 오판이 가져온 결과다.

“전하.”
“응? 무슨 일이니.”
“파벨경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살짝 열린 문 틈 사이를 내내 쳐다보던 할로는 베니자크 궁 중앙 홀을 걸어가는 파벨을 발견하고 그대로 로즈에게 고했다. 로즈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며 아직 병사들 앞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자를 잡아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무사히 본대에 무사히 복귀하여다는 사실입니다.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신 것 같으니 내일 다시 움직이는 일정에 무리가 없도록 남은 시간 편히 쉬도록 하세요.”

  지친 몸을 이끌고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병사들을 만류하며 로즈와 할로는 방에서 나왔다. 홀을 지나 원래 로즈가 있었을 방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파벨의 등을 향해 그녀가 외쳤다.

“파벨경!”
“헛. 전하. 거기 계셨군요.”

  웃으며 다시 계단을 내려오는 그를 보며 로즈도 그리고 그 옆의 할로 역시 그 웃음에 전염된 것 마냥 입 꼬리가 살며시 올라가 있었다. 파벨은 무척이나 신이 난 사람 마냥 한껏 상기되어 있었고 별 것 아닌 계단 몇 개 왔다 갔다 했다고 대단한 생색이라도 내려는 마냥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들을 찾았습니다.”
“그래요. 잘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들은 우리와 함께 수도까지 동행할 것이며 연합 회의까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증언을 해주겠다 약속하였습니다.”
“잘 됐군요. 잘 하셨습니다.”
“예. 전하. 사실은 그들 역시 수도로 향하는 길이었다 하여 설득은 쉬웠습니다.”
“아 그랬군요. 그들이 가려던 길이 우리와 겹치다니 참 다행이네요. 이제 그 지루할 것 같은 연향에만 참석하면 되는군요.”
“하하. 예. 전하.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으니 그 동안이라도 쉬시는 것이.”
“그럴까요. 파벨경도 쉬고 싶겠지만. 날 위한 조금 더 시간을 써줬으면 좋겠네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그들을 만난 이야기를 좀 해줬으면 해요. 사실 모함가라는 사람들은 단 한 번도 만나보질 못한 사람들이라 알고 싶네요. 참 이상하죠. 아까까지만 해도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마음만 조급했는데 파벨경의 소식을 들으니 그 마음이 모두 풀리는군요.”
“제가 전하의 분부를 제대로 행하는 것 같아 저 역시 기쁩니다.”

  두 사람은 웃으며 다시 계단을 올랐고 할로 역시 조용히 그들을 따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울상이었던 로즈의 얼굴이 파벨의 말 한 마디에 기나긴 가뭄에 시달리다 마침내 달디 단 비를 맞이하는 한 송이 꽃처럼 밝아지는 것을 보고 할로는 역시 어려운 분이라고 고개를 휘저었다. 알기 쉬운 분을 모시고 싶다는 소망이 생긴 것은 최근 들어 로즈의 기분이 저렇게 쉽게 그리고 별 것 아닌 소소한 일로 변해버리는 일 때문이었다.

‘그래도 가끔은 재밌으니까.’

  하지만 크게 신경 쓰는 듯 한 모습은 아니었다.


#

  두 사람을 떼어 놓는 데는 의외로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절정으로 치닫던 아크와 쥰의 대립 도중 프렌과 파벨이라는 자의 난입으로 잠시 끊긴 대화의 맥은 그렇게 끊기는 듯싶었으나 거듭되는 주군에 대한 모욕에 결국 파벨이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면서 두 번째 장으로 넘어가버렸다. 결국 프렌의 중재로 세 사람은 적당한 화해와 외면으로 결론을 냈지만 여전히 앙금이 남은 듯 파벨과 아크는 서로 입술을 실룩거리고 있었다. 홀 안은 잠시 우리에게 집중되었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간 시끄러운 분위기 때문에 조용히 얘기하고 싶다는 파벨의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좁디좁은 방으로 옮겨 갈 수밖에 없었다. 계단을 올라오는 내내 계속해서 사절단의 일정 덕분에 내일 메인 스트림을 이용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계속해서 불만을 늘어놓는 쥰의 크디 큰 목소리 덕분에 나와 프렌은 어색한 웃음으로 둘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둘 다 그리 똑같은 얼굴로 툴툴대는지. 혹시나 넓디넓은 세상 어딘가 숨어있던 미처 알고 지내지 못했던 친형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왕녀를 모신다는 사람이 저리 쉽게 감정이 드러나서야 쓰겠냐만은 그 발단이 왕녀 그 자체였기 때문에 이해할 순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에이 이 사람아.

“저어. 귀하신 분께서 이 누추한 곳엔 어쩐 일로…….읍!”

  이 여관은 우리가 아닌 레인저들이 마련해준 여관이다. 습관적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적절한 처세술을 펼치다 나는 그만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프렌을 쳐다봤고 그는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피식 웃고 있었다. 아. 마구 미안해지는 이 심정.

“크흠. 프렌경께서 이미 말씀하셨지만 용건을 말씀드리기 전 제 입으로 정식으로 소개드리는 것이 제 말을 들어주시고자 부탁드리는 자로서의 예의겠지요. 인사드립니다. 쇼넬의 왕녀 로즈 쇼넬 전하를 모시는 파벨 멀린이라고 합니다. 방금 전 홀에서의 상황은 제가 큰 실례를 저질렀군요. 부디 용서를.”
"요르라고 합니다.“
“아크 단이오.”
“켈모리안이에요. 성은 없어요.”

  파벨은 방으로 들어와 그 좁은 침대와 방바닥에 모든 인원이 적절히 자리 잡자 곧바로 듣는 사람이 오히려 미안해지는 인사말을 건넸다. 사실 뭐 큰 실례까진 아니었다. 단지 이웃 나라 높으신 귀족 양반들도 우리랑 별 반 다를 바 없구나 하는 신기한 사실을 확인시켜 줬을 뿐. 그래도 어젯밤 다짜고짜 얼굴을 들이밀며 알 수 없는 말만 지껄이던 헬릭이라는 자 보다는 훨씬 수완이 좋아보였다.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께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예? 무슨…….”
“우리와 함께 수도로 가주시지요.”
“아싸!”

  난데없이 경박한 탄성을 내지른 것은 켈모리안이었다. 무슨 목적과 이유로 수도로 동행해달라고 얘기도 듣지 않은 채 그저 좋다고 저 난리법석이다. 에라이.

“말씀해주시긴 하겠지만 먼저 좀 물읍시다. 왜 함께 가자고 하는 겁니까?”

  역시 아크는 뭐든 순순히 받아들이질 않는다. 이럴 때야 적절한 의구심 표출이니 따로 할 말은 없다. 응원이라도 해볼까나.

“여러분들께서는 이 곳 라임턴시에 도착하시기 전 북서로에서 오크와 조우하여 부상을 입으셨다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이미 사정을 전해 들으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오크는 코르사크의 용납될 수 없는 만행에 의해 이 곳 라임턴의 외곽 지역으로 소환된 것이며 이것은 절대 두고 볼 수 없는 침입 행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코르사크의 만행을 연합 회의에 강력히 대처할 것을 요구하기 위해 그 동안 증거들을 모아왔습니다.”
“실례지만 제가 듣기로는 그 동안 수집하신 증거들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아니 아크…….그건 좀 그렇잖아. 빈정대는 건 아까 홀에서 부딪혔던 그 일로도 충분해. 상대가 아무리 같이 흥분하고 같이 투덜대며 계단을 올라온 사람이라지만 이웃 나라 높으신 귀족 양반이라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부족한 것이 맞습니다.”
“흠. 그렇다면 좀 더 확실한 증거를 찾아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하. 저라고 왜 그 생각을 안 했겠습니까. 뭘 해도 무엇을 가져와도 부족할 겁니다.”
“무슨 뜻인가요?”

  무작정 생떼를 쓸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아직까진 이해하기 힘든 말만 하고 있는 파벨이다.

“우리 쇼넬이 연합 회의에 이 사건을 처음으로 상정한 것은 꽤 오래 전 일입니다. 그 때 마다 그들은 갖은 이유를 대가며 대응하는 것을 꺼려왔지요. 아마 우리의 말대로 뜻을 합해 움직인다면 결국은 대륙의 짧은 평화가 깨질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말이오. 실제로 연합 회의에 참석하는 엔트릴과 놀헨의 왕가 그리고 귀족 분들께서 가장 걱정하시는 것이 그것이니 말이오.”

  잠자코 듣고 있던 프렌은 파벨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려주며 다시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파벨은 감사하다는 가벼운 목례 후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거 어째 지난 밤 란과의 머리 아픈 이야기처럼 흘러갈 그림 같은데.

“그 동안 이러한 피해는 우리 쇼넬에만 집중되어왔고 엔트릴과 놀헨에서의 피해는 보고된 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합은 쇼넬만을 노리는 범죄라고 판단하고 그것이 코르사크의 국가적 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며 특정 단체의 소행일 가능성을 주장해왔습니다.”

  그렇긴 하다. 연합 3개국에 공통으로 벌어지는 사건이 아닌 쇼넬에만 단독으로 나타나는 사건인 경우엔 그것을 연합의 공식적인 입장에 서서 처리하기는 힘든 법이다. 더욱이 쇼넬은 한 때 대륙의 가장 강한 나라이었지 않은가. 지금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전쟁을 한 번 겪었다 하여 그 국력이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지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충분히 단독으로 대처할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이제 엔트릴에서도 그것도 메인 스트림을 목전에 둔 교역 도시 라임턴에서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은 더 이상 모른 체하기 힘든 상황인 것이다.

“이번 라임턴시에서의 사건은 그렇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현장에서의 증거 발견도 중요하지만 현장 목격자와 피해자의 증언 역시 중요합니다.”
“피해자요?”
“예. 여러분은 아까 북서로에서 오크에 의해 부상을 입으셨다하지 않았습니까. 그 상황에 대한 증언과 사건이 발생한 당시에 현장으로 출동했던 레인저 대원분의 증언. 이 두 가지 요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수도로 가 연합 회의에서 그 때의 상황을 서술해주길 바란다 그 말씀이신가요?”
“예. 정확하십니다.”

  어렵지는 않은 일이다. 확실히 우리는 그 망할 놈에게 부끄럽지만 당한 것이 맞고 라임턴 시 역시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란의 말대로라면 이곳을 찾는 모험가나 상인들이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용히 넘길 움직임도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보다야 정식으로 회의에서 발표한 후 안심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맞는 말이다. 한 번 지나간 불이 다시 돌아오지 말라는 법 없다. 풍향만 바뀐다면 방향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즉 라임턴 역시 언제든 다시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

“예. 좋습니다. 저어 하지만 그 전에…….”
“예. 말씀하시지요.”
“참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우리는 북서로에서 오크와 조우할 당시 너무 급한 마음에 숨어있던 작은 토굴에 모든 짐과 돈을 두고 와 버렸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지금 빈털터리고 여행에 필요한 장비나 심지어는 갈아입을 옷마저 없습니다. 출발이 내일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고 지금 당장 그 굴을 찾아가 짐을 찾아올 수도 없고…….”
“그 점이라면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오! 보상금!!!”

  켈모리안. 넌 좀 닥쳐.

“하하. 예. 함께 수도로 가셔서 증언을 해주신다면 우리 사절단이 수도에서의 일정을 끝마칠 때까지 숙박과 식사를 책임져 드릴 것이고 분실하신 여비 역시 지급해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수도까지 여정 동안 여러분의 안전은 사절단을 호위하고 있는 병사들과 홍연단이 책임질 것입니다. 혹 떠나시려는 목적지가 어디신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아. 저희 역시 수도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아. 마침 잘 됐군요. 수도까진 무슨 일로 가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방향과 목적지과 완전히 일치하는군요.”
“예. 그렇긴 합니다만…….”

  단지 너무 쉽게 가는 것 같아서 망설여지는 것뿐이다. 왕녀 일행은 메인 스트림을 통해 수도로 곧장 달려갈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중간에 계획해둔 이 곳 저 곳을 들르는 한가로운 여행길은 아예 사라지는 것이다. 안전하고 풍족한 그러나 끝에 가서는 부담스러울 증언대에 서야 하는 길과 지금껏 해온 것처럼 천천히 기다렸다가 레인저들의 도움을 받아 짐을 되찾은 후 다시 길을 떠날 것이냐. 선택은 두 가지다. 그리고 그 선택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이미 라임턴의 시장께 현장으로 출동했었던 레인저 대원의 동행을 요청해뒀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레인저분들과 인사를 나눈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시는 길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렇다고 우리 사절단의 누군가가 여러분께 험한 짓을 하진 않을 것 입니다. 여러분이 우리와 함께 함께 하시는 순간 우리가 라임턴의 시민 분들께 받은 것처럼 여러분은 우리 사절단의 귀한 손님이 되시는 겁니다.”
“으음.”
“그래도 잘 모르겠네요. 다른 분들이면 몰라도 왕녀 전하께서 계시는 사절단에 합류해서 움직인다는 게 좀…….”
“좀?”
“무섭거든요.”
“예?”
“저어. 멀리서 구경하는 게 아니라 바로 눈앞에 이웃 나라의 공주께서 계시는데 그 여행길이 편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 떠나온 여행길에서 행동에 제한을 받고 싶지도 않고 부담을 받고 싶지도 않습니다. 더욱이 파벨…….경이라고 하셨죠? 파벨경께서는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가 어떤 성격의 사람들인지 일절 모르시지 않습니까. 왕녀를 모시는 분이라면 우리가 그 분에게 해를 입힐 수 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셔야 되지 않을까요?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멀리서 걸어가는 사람이 어디 어느 나라의 공주마마라고 한다면야 아아 그렇구나 하고 넘기겠지만 여정을 함께하는 한 무리에 같이 있게 된다는 점은 사양하고 싶다. 부담된다. 아주 많이. 내가 켈모리안을 싫어하는 것 이상으로. 근데 또 좀 끌리긴 하네. 공짜 그리고 안전. 두 가지 조건을 한 번에 해결하는 거 아냐. 단지 마지막이 좀 걸리긴 하지만.

“여러분이 전하에게 뭐라도 하실 수 있으시리라 생각합니까?”

  파벨은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은 죽여야 할 적을 눈앞에 둔 맹수와 같이 팽창해있었다. 뭐야 이거.

“그렇군요. 하지만 그 점은 이해해 주실 수 있으시다고 생각합니다. 요르씨가 말씀하신 사항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나 지금 우리는 그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여러분의 말 한 마디가 필요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아닙니다. 사려 깊은 충고 오히려 제가 인사드려야지요.”
“가겠습니다.”
“가요. 가요.”

  곰곰이 생각하는 와중에 아크와 켈모리안이 먼저 급한 말투로 가겠다며 안달이다. 잠자코 파벨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 둘은 내가 저울질 하던 두 가지 조건을 다른 것 생각할 것 없이 무조건 이득이라고 생각했는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세상에 이런 횡재도 없을 거라는 확신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 요르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가겠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쉽게 제 제안에 응해주셔서 한 숨 놓이는군요. 사실 여러분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동행을 요구하는 것이 무례인 동시에 힘든 일이 될 것 같았는데 이런 행운 같은 우연이 따라주다니 다행이군요. 여러분의 자유 의지를 거스르지 않아도 되니 말입니다.”
“확실한건가요? 정말 말씀 하신 그대로 믿고 있어도 될까요?”
“좀 모자라 보이겠지만 이리 보여도 왕녀 전하를 모시는 쇼넬의 귀족입니다. 또한 여러분을 모셔오라는 뜻은 제가 아닌 전하의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저는 전하의 말씀을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신하로서 여러분께 말씀드린 조건은 반드시 지켜드릴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동행을 거부했을 경우 왕녀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도 우릴 데려가겠다는 뜻으로 듣고 있는 사람은 나뿐인가?

“프렌경. 말씀드린 대로 현장에 출동했었던 대원들의 동행을 부탁드리는 전갈을 시장님께 전해드렸습니다. 후에 지시를 받게 되시면 베니자크 궁으로 바로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알겠소. 아마도 받아들이실 것으로 생각되니 돌아 가는대로 동행에 나설 대원들을 준비하도록 하리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연합 회의에서도 그 뜻을 원하시는 대로 관철하실 수 있길 바라겠소.”
“예. 자 그럼 저는 베니자크로 돌아가 전하께 여러분의 말씀을 전해드려야겠습니다.

  파벨은 싱긋 웃으며 순순히(?) 자신의 말에 수긍하는 방안의 모두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걱정거리가 사라지는 바람에 아예 넋이 나간 듯 다시 청할 듯 편히 앉아있는 아크 그리고 뭐가 그리 좋은지 실룩거리며 안전한 공짜 여행에 편승하게 된 것을 자축하고 있는 켈모리안 그리고 담담한 표정으로 어지러운 시의 상황이 차츰 정리 되가는 것 같아 안도하는 프렌.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기뻐하는 와중에 나 혼자만 불안한 마음에 계속해서 그의 제안을 곱씹어보고 있었다. 이상한데. 불안하고 말이지. 나도 저들처럼 아무 생각 없이 좋아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며 한 숨을 내쉬자 고맙게도 가슴속까지 한 방에 다 날려버릴 만큼의 큰 한 방이 문 밖에서 터져 나왔다.

“아아아아악!!!!!!!!!!!! 짜증나!!!!!!!!!!!!!”

  쥰이다. 아직 자리에 있었구나. 화기애애하던 방 안은 일순간 그 시원한 목소리에 멍해졌다가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연 파벨의 한 마디로 채워졌다.

“저 여성분이 홀에서 나가시면 나가도록 하지요.”
* 박진호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9-20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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