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경험기, 프리뷰, 리뷰, 기록 분석, 패치 노트 등을 올리실 수 있습니다.
Date 2006/03/23 22:13:15
Name Bar Sur
Subject [잡담] 고양이로소이다.
몇달 전, 어느 순간부터 내 핸드폰은 전혀 울리지 않게 되었었다. 그런데도 나는 매일같이 아침이면 핸드폰을 빼놓치 않고 챙겨서 바깥으로 나갔다. 딱히 고칠 생각도 없고, 새로 살 생각도 없이. 어째서였을까, 솔직히 나도 왜 그런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마치 그것은 휴대폰의 의지 같았다.

의지? 그래, 의지. 사람과 오랫동안 함께 하다보면 어떤 물건들에는 때때로 정(精)이 깃든다고 한다. 세상에, 그런 말을 믿는단 말이야? 남이사 믿건 말건. 어쨌든 내가 보기에 이 녀석은 정말이지 도도하다. 넌 정말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라. 볼 때마다 그렇게 말해주고 싶은 한마리의,

고양이 같다.

누군가가 부른다고해서 바로바로 응답해주는 애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나를 주인으로 인정하지도 않는다. 확신컨데, 난 이 녀석의 전생이 한 마리, 들고양이었다고 믿는다. 지금은 이렇게 볼품없는 모양으로 내 손에 쥐어진 채로 묵묵부답 침묵하고 있지만, 전생의 녀석은 늘씬한 몸매와 날렵한 움직임으로 들판을 누볐을,

한 마리 들고양이었다.

그런 녀석이 다시 태어나서는 느닷없이 핸드폰이라니, 이건 아무래도 너무하잖아. 안용복이 다시 태어나서는 시마네현 의회에서 일한다는 것만큼 황당하지. 툭하면 자길 부르는 소리로 넘처나는 이 풍진 세상에서 그 도도함을 유지하는 방법이란 침묵과 깊은 잠을 사랑하는 것 밖에 없지 않겠는가. 정말이지, 그렇다.

그런 녀석과 내가 만난 것은, 2002년 11월 29일. 그러니까 내가 수능을 보고 난 뒤 순전히 친구들과 놀기 위해 학교에 나가던 어느날의 이야기다. 그러고보면 벌써, 1210일하고도 7시간이 더 지났다. 그렇게 긴 시간을 함께 했지만 나는 녀석의 진면목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셈이다.

그러니 내가 녀석의 본질을 알게 된 것은 녀석이 고양이성(性)을 되찾은 요 몇달 동안의 이야기다. 그 뒤로도 나는 종종 녀석을 가까이하고 귀를 기울여보지만 녀석은 아무런 대답도 없다. 과연 이 세상은, 고양이들이 고양이로서 살기엔 너무 어려운 곳이 되어버렸다. 주인이 원하는대로 앞발을 내밀거나, 누군가에게 못이 박히거나. 하물며 자유로운 들고양에게.

세상은 너무한 곳이 아닐까.

그리고 며칠 전이다. 내가 학교에 핸드폰 가져가는 것을 깜빡했던 그날, 어머니는 녀석을 핸드폰 매장에 맡겼고, 아주 완벽하게 수리되어 돌아왔다. 그간의 먹통 상황이 믿겨지지 않을만큼 오랜만에 깨끗하게 누군가와 통화할 수 있었다. 나는 웃으며 친구와의 통화를 마치고 난 뒤, '이거 참, 이게 더 나을지도' 라고 생각했다. 그 잘 조련된 즉각적인 움직임과 고분고분함이 맘에 쏘옥 들었던 것이다.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지 않은가.


어젯 밤, 깊은 꿈을 꾸고 있었던 나를 갑작스런 벨소리가 깨웠다. 이 시간에 대체 누구야, 나는 짜증을 내면서도 침대위에서 뒤척이며 팔을 휘저어 핸드폰을 잡았다. 그 순간 문득, 나는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유도 없이,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주아주아주 조심스럽게, 나는 핸드폰을 열었고 천천히 귓가에 가져다 대본다. 그리고 먼저 말했다.

"여보세요?"

아주아주아주 긴 침묵 너머로 저 멀리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Red)Eyes
06/03/23 22:57
수정 아이콘
... ㅋ... 글 잘쓰시네요
세이시로
06/03/23 23:17
수정 아이콘
요새 Bar Sur 님 글을 자주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저는 ^^
My name is J
06/03/23 23:46
수정 아이콘
따끈하고 몽글몽글한- 고양이는 로망-이지만...
사실 무언가를 챙기고 책임져야 한다는 일은 귀찮죠. 사람이든 뭐든... 으하하하-
06/03/24 09:36
수정 아이콘
저도 요즘 Bar Sur 님 글이 자주 보여서 좋네요.^^
포르티
06/03/24 15:30
수정 아이콘
왠지 여기다가도 쓸 것 같더라... 후후. 내 고양이군은 아마 지독히도 나를 미워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2000 다시보는 옛날 베르트랑 선수의 원문 인터뷰. [15] 전인민의무장5390 06/03/25 5390 0
21993 [이상윤의 플래시백 3탄]한빛소프트배 온게임넷 스타리그 16강 A조 기욤:한웅렬 [4] 이상윤3549 06/03/25 3549 0
21991 깁스를 했습니다.... [20] 잊을수있다면3675 06/03/25 3675 0
21990 오랜만에 모닝스타를 했습니다... [14] 도미닉화이팅3373 06/03/25 3373 0
21989 유럽축구계를 들썩거리는 최근 4대루머... [36] 다크고스트6067 06/03/25 6067 0
21988 자동차 프라모델의 세계 [12] 군의관3431 06/03/25 3431 0
21984 외국인들이 뽑은 'pimpestplays2005' [5] 전투형나메크3537 06/03/25 3537 0
21983 축구 연재글 - (2) 다시 한번 부활을 꿈꾼다. AS Roma [10] Leo Messi3682 06/03/25 3682 0
21982 처음으로 맞춤정장을 샀습니다... [7] 도미닉화이팅3565 06/03/25 3565 0
21980 오늘 개때문에 열받았습니다.... [46] 도미닉화이팅4972 06/03/24 4972 0
21979 (입 모양) '뜨거운 거' [5] Sickal3358 06/03/24 3358 0
21978 양대방송사 5대리그 [31] 푤스미스5559 06/03/24 5559 0
21977 프링글스 MSL 공식맵이 확정되었습니다. [31] i_terran6609 06/03/24 6609 0
21976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 사정은? [33] sin_pam4221 06/03/24 4221 0
21975 차기 MSL 스타리그 감자칩 스타리그로 결정 [52] sin_pam5887 06/03/24 5887 0
21974 로또 긁으로 갑니다. [26] 해왕성3630 06/03/24 3630 0
21971 저는 소심한 재수생 입니다... [22] 시원시원하게3586 06/03/24 3586 0
21970 혹시 주변에 기타치는 친구있습니까? 그럼 혈액형을 물어보세요. [42] 드림씨어터5516 06/03/24 5516 0
21969 오랜만에 기억에 남는 꿈을 꾸었습니다. [4] 장지형3362 06/03/24 3362 0
21968 축구 연재글 - (1) 3번째 별을 향한다. Juventus [33] Leo Messi3985 06/03/24 3985 0
21967 방금 3회나 반복 된 꿈을 꾸었습니다 [31] Timeless4826 06/03/24 4826 0
21965 [잡담] 고양이로소이다. [5] Bar Sur3354 06/03/23 3354 0
21964 간만에 해보는 축구이야기. [75] Leo Messi3626 06/03/23 3626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