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humoruniv.com/pds1346541
누나가 죽었다.
누나는 선천적인 중증 뇌성마비였다.
태어나 한번도 본인의 사지를 마음껏 움직여본적이 없다. 그래서 언제나 집의 한 자리에 누워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다가오는것이 있다
펫로스 증후군이라는걸 얘기 들었었다. 애완동물이 사라지면 그 빈 자리를 크게 느끼는 그런거
난 그게 사람이 죽었을때와 좀 다르다고 생각했고 그 이유를
성인이 된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살기에 심지어 자식이 죽더라도 이미 독립된 삶이기에 서로의 생활권이 달라 삶 자체에는 영향을 덜 받지만 애완 동물은 완전히 내 삶과 일체화 되어 사라지면 그 빈틈을 메꾸기 어려워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생각한적이 있다.
그런데
우리 누나는 어떤 애완 동물보다도 가족의 삶에 붙어 있었다.
우리에겐 언제나 그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특히 결혼하고 나온 나와 달리 부모님 입장에선
누군가가 도와주지 못하면 살지 못하기에. 하루 밥 최소 두끼. 똥 오줌 모든걸 책임지며 데리고 살던 자식이다 .
그것도 48년을. 본인들 20대에 낳아 48년을.
아버지 경우엔 누나 두고는 어디 못간다고 그 48년동안 혼자 여행을 한번도 가지 않았다.
물론 명절에 친척집이라도 갈때에는 누나를 데리고 갔지만. 그 외 혼자 떠나는 여행은 정말 한번도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난 기회를 보다 몇년전 누나까지 데리고 제주도를 한번 데려간적이 있긴 하다.
평생 바다구경도 못해본 누나랑 여행을 가보고 싶었다.
누나는 장애가 심해 의자에 앉질 못하니 비행기는 불가능하고. 아버지는 누나 데리고 다닐려면 자기차가 꼭 필요하다고 해서 인천에서 페리선에 차 실고 가는 여행으로 계획을 잡아 갔다.
누워서 가고 올때도 배에 누워서 왔다.
그때 같이가서 너무 좋았고 잘한것 같았다.
그래서 사실 아쉬웠던점들 고쳐서 한번 더 제주도에 같이 가고 싶었는데. 우리가 다녀온 직후에 페리선이 사라져서 못간게 아쉽다.
차라리 인천 근처 섬이라도 한번 더 데려갈걸.
우리 부모님 입장에서 누나는. 평생 집에 있었기에 언제나 집에 오면 누워있던 자식이었다.
방문을 열면 언제나 그자리에 누워있던 자식
TV 보는게 일이라 언제나 거의 반백년을 집 거실 TV 앞에 누워있던 딸이 사라진거.
그렇게 집에 남은게 여럿 있다.
그중에 떠오르는게 최근 몇년 누나가 맛에 들어
최소 주에 한번은 사먹던 연어회. 목요일이면 꼬박 꼬박 연어회를 사줬었는데. 마침 아버지가 연어회를 사간 그날 못먹겠다더니 병원에 가야할거 같다고 해서 병원에 실려갔다. 그렇게 먹지 못한 연어회가 집에 남았다.
실려간 첫날 위독하다더니 이틀만에 좀 괜찮아졌다고 하니 집에 데려와서 몸 뉘여야 겠다며 의사가 누워서 숨쉬기 편하게 몸을 좀 세워둘만한걸 얘기해서 가져가려고 챙겨뒀던 등받침은 우리집에 남았다.
마침 보름전 아버지가 사달래서 가득 산 기저귀 몇백개. 한번에 몇박스씩 사둬서 이번에도 4박스를 샀는데 아직 박스도 안뜯었는데 집에 남았다.
엄마는 7남매 맏이 로써 어디서 약한모습 한번 보인적 없는 전형적인 리더 타입이다. 하지만 속이 생각보다 많이 여리다.
집에 있는 누나의 흔적을 그 어느것도 보고 버틸수가 없는 성격이다. 전부 치워줘야한다.
어머니가 누나를 대하는건 조금 애매하다.
딸이고 보살피지만 필요한 선이상 뭘 하지는 않았다. 말그대로 T의 사랑이었다. 필요한것만 베풀었다.
심지어 누나를 두고 혼자 여행도 몇번을 갔었다. 굳이 아버지가 챙길수 있으니 자긴 없어도 된다는 생각이다. 나와 비슷하다.
이렇게 딸을 대함에 과한 무언가가 없던 우리 어머니가 과했던 시점이 하나 있다.
누나가 나이를 먹어가고 성인이 넘어가던 시점에 즉 성인이 되려는 시점에 뭐라도 누나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거 같다.
사실 그 시점에 나라에서 애를 장애인 직업 학교에 보내라고 공문이 왔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우리딸도 학교에 갈수 있는건가? 기대가 생겼다.
전국의 장애인 학교는 다 연락하고 조금만 괜찮다고 하면 누나를 등에 업고 찾아갔었다.
버스타고 기차 타고 전국을 다 찾아 갔다.
이때 알게 된게 장애인 시설은 대부분 산 중턱에 있었다.
버스도 잘 안다니는 시골에 있었다.
왜인지 우리는 안다.
장애인 시설은 기피 시설이니까.
그 산을 어머니는 누나를 업고 다 다녔다.
버스도 잘 안다니는 그곳들을 직접 업고 다 다녔다.
당연하지만 어떤 장애인 학교도 사지에 입까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누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난 어머니가 어디라도 받아주면 편도 몇시간 거리를 아침 저녁 누나 데리고 갈 생각이었던걸 안다. 굳이 필요없다면 안하지만 필요하다면 무엇이라도 했다.
그래서 어디서도 안 받아준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이때 자신이 면허증이 없어서 누나를 업고 그 길을 다녔던것에 후회가 남아 나중에 결국 환갑도 넘어서 면허를 땄다.
그리고 이때쯤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두고 자영업을 하고 벌이가 확실하지 않게 되면서 집에 돈을 제대로 가져오지 못하자 어머니는 도배를 시작하셨다.
사실 어머니는 평생 안해본 부업이 없었지만 좀더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아니어도 돈을 벌어야 된다 생각하셨을거다.
그런데 그 얘길 하면 기분 나뻐할 아버지를 아니까 별 다른 소리도 없이 일을 다녔다.
그렇게 가족을 보살폈다.
아버지는 달랐다.
무뚝뚝하지만 전형적인 F의 사랑이었다. 필요한지 안한지 보단 감정에 가까웠다. F의 사랑이었다.
요령은 없었지만 정말 성심성의껏 보살폈다. 평생 어디 놀러가지도 않고 누나의 곁에서 집에서 지냈다.
누나가 먹고 싶다는건 정말 뭐든 사다 날랐고 자기가 해줄수 있는건 어떻게든 해줬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는 못 붙어있었지만 회사를 그만 둔 뒤부터는 아침 저녁까지 직접 챙기기 시작했다.
야밤에도 옆에서 잠들고 자다가도 눈떠 보살피는게 생활이 됐다. 10~11시에 한번 잠들고 1~2시간뒤 일어나 한번 보고. 다시 자고 또 2~3시간 뒤 다시 한번 보는 식으로 하루 5~6시간의 잠을 쪼개어 자다 깨다 하는 삶을 20년 넘게 보냈다.
요령이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본인이 할수 있는 성심성의껏 딸을 보살폈다.
그렇게 평생을 70이 훨 넘는 나이까지 보살폈다.
자기가 먼저죽으면 딸을 보살필 사람이 없는걸 제일 두려워 했던걸 안다.
난 동생이라 별게 없었다.
무뚝뚝해서 어머니 아버지에게도 안하는 애정표현을 누나에게 하기도 어려웠다.
뭐 아프다고 손잡고 있는것도 그렇잖아.
그냥 같이 있을때면 누나 팔 하나 땡겨서 머리와 어깨사이 목 위치에 두어 목배개를 하고 누워서 책을 봤다.
내가 친한 사람들에게 바라는게 대화보단 그냥 옆에 있는거였기에
내가 해줄 수 있는것도 그거였고. 그랬다.
그런 누나에게 배운게 몇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대화다.
누나와 대화를 하는건 쉽지 않다. 힘들게 힘들게 한단어 내 뱉는게 전부인데. 그걸로 다 파악해야한다.
정말 온갖 추리를 다해야 답이 나온다. 논리적으로 선후를 이해하고 들은 단어를 유사한 모든 음절의 단어로 바꿔보며 생각하며 대화를 해야한다.
이게 정말 쉽지 않다.
하지만 같이 살때는 부모님보다 내가 훨씬 누나 말을 잘 알아들었다.
지금 시점에 말을 거는건 높은 확률로 먹고 싶은거 얘기라는걸 이해 한 상태에서 입모양을 보며 발음을 유추하고 '되애기' 라고 말하는건가? 예상하면... 돼지고기가 먹고 싶다는거고 최근 맛있게 먹은 돼지고기는 돼지불고기 였다는걸 떠올려. 돼지불고기? 라는걸 한번에 이해하곤 했다.
그런식으로 눈치가 빨라졌다. 사실 눈치라는건 그 사람과 나 사이 모든 이야기와 주변 상황을 살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내는건데. 난 그걸 엄청나게 하드한 상황에서 훈련받은 셈이다.
내 짧은 인생 내내.
난 이 눈치 도움을 평생 많이 봤다
하라를 키움에도 하라도 모르는 하라가 원하는걸 먼저 파악하는 요령하나는 뛰어났다. 이건 연애때도 도움이 됐다.
게다가 이 눈치는 속독과 연결되서. 회의라도 들어가면 내용 이해를 빨리 하는데 도움이 되서 평생 사회생활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사실 너무 어린시절에 눈치부터 배워서 난 5~6살때부터 애늙은이 소릴 들었다. 어린나이에 주위 상황이 보이게 되니 평생 뭘 사달라고 조르는일 없는 아이로 컸다. 내 독립성도 그렇게 키워졌다. 누구도 가르친적이 없었지만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으면 나가서 빈병이나 고철을 주워 팔아 사먹는 아이로 컸다.
참고로 속독조차 누나덕분에 생긴건데.
누나덕분에 나를 과하게 보호하던 아버지 때문에 동네 친구들이 나랑 안놀아주던 시절이 있었다. 7~8살 이전. 그 당시 친구들도 안놀아주고 집밖에 못나가고 집에서 책만 보던 시절 생겨난 능력이다. 집에있던 인간시장 이나 토종비결등 온갖 책을 무한 반복으로 보며 속독능력이 생기고 이후 평생 책이 눈앞에 없으면 불안해 하는 사람이 됐다.
나와 누나와 관련된 이야기를 몇개 더하면
누나는 태어나서 몇년동안 울지 않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야 애가 왜 이러지? 돌이 지났는데 왜 기지도 않지? 같은 의문이 들고 병원에 데리고 다니며 중증 뇌성마비라는걸 알게 되어 이유를 알게 됐다고 한다.
태어났는데 몸은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뭔가 맘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 누나가 울음을 멈친 날이 내가 태어나서 집에 온 날이라고 한다.
동생이라고 앞에 눕혀두자 꼬물거리는 날 보면서 처음으로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위키드를 보면 첫째딸이 문제가 있다고 둘째딸은 그런 문제를 생기지 않게 하려고 우유꽃을 계속 먹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우리집도 그리 다르지 않다.
뇌성마비 첫째를 낳은 집이 둘째를 낳을때 얼마나 두려움이 많았을까. 엄청나게 겁나고 두려웠다고 한다.
그런 두려움 속에 낳은 아이가 건강했고 그 아이를 보며 매일같이 울던 첫째가 울음을 멈췄다.
애를 키워본 집은 알거다. 집에 쉬지 않고 우는 애라는게 어떤 존재인지. 육아를 가장 힘들게 하는 무언가고 그걸 몇년간 겪던 집이 겨우 숨쉴수 있게 되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난 그만큼 우리집에서 대단한 애였다.
문제라면 그럼 뭐 때문에 그리 됐을까 같은거고.... 사실 원인은 누나를 베었을때 연탄가스를 마신적이 있는데 그게 아닌가 싶어 아직도 어머니는 안타까워한다.
사실 모든 생각을 속으로만 삮히는 어머니 성격상 딱 한번 말했던 이야기다.
누나와 있었던 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일은
무엇보다 가장 놀랐던건 어느날 날 갑자기 부르기에 갔더니.
TV를 눈으로 가르키는거다. TV? 왜? 하니까 누나가 뭐라뭐라 말하는데 어? 평상시 말하는거랑 다른거다. 뭐지? 어? 지금 TV 자막 읽은거야? 하니까 정말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날보며 웃었다.
TV만 보고 한글을 뗀거였다. 그리고 그걸 자랑하는 거였다.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닌 이 사건이 난 평생 기억에 남았다.
나도 모르게 누나가 머리도 나쁠거라고 생각했던거 같은데 TV만 보고 글을 떼운걸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TV만 보고도 한글을 배우는건 다른 사람들도 어렵지 않나 싶었다.
나이 드신 분들 중에도 TV는 보지만 평생 한글 몰랐다며 한글을 배우는 분들도 있는데. 그냥 TV만 보고 한글을 떼는게 쉬운가?
실제 생각해보면 누나는 생각보다 머리가 좋았다.
아주 옛날에 봤던 영화도 거의 대부분 내용을 전부 기억했다. 몇년전에 보다 만 TV 시리즈도 정확히 어디까지 봤는지 다 기억했다. 그 내용을 물어보면 정말 할 말이 많은지 엄청 열심히 얘기하는데 난 그중 10%도 이해는 못했다. 그렇지만 다 기억한다는건 알수 있었다.
누나는 머리가 좋았다. 기억력도 좋았고 이해력도 좋았다.
누나가 뜬금없이 금을 사달라고 하면 금값은 올랐고.
누나가 뜬금없이 부동산 얘길하면 부동산이 올랐다.
근데 이 두갠 진짜 신기하게 잘 맞췄다. 최근 2~3년전에도 아버지가 뜬금없이 전화해서 누나가 갑자기 금을 사달라고 조른다고 금좀 사달래서 5돈인가 10돈인가 사갔던 적도 있었고 역시 금값은 두배 이상 올랐다. 이건 아마 집에 있을건데.
이런걸 신기하게 잘맞췄다.
아이트랙킹 마우스를 사면 누나가 혼자 컴퓨터를 할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한 시절이 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반에게 판매하는데가 없어서 구하기 힘들었다. 몇번을 알아보다가 포기했다.
장애인 단체에 문의해볼까 하다가 그럴정도까지 인가 생각하다 말았다.
그게 조금 아쉽다. 직접 컴퓨터를 했으면 어떨까.
누나는 머리도 못가누고 덩치도 20키로 초반대로 너무 작은데다가 몸이 딱딱하게 굳어서 휠체어를 사도 제대로 쓸수가 없었다.
제주도 여행갔을때 대여해주는곳에서 어린이용 휠체어를 빌려서 겨우 태웠지만 너무 불편했다. 사람손을 놓으면 몇분도 못버티고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렇다고 휠체어에 잔뜩 묶어두기에 몸이 약해서 어떻게 될지 몰랐다. 실제 들어올리는 힘에 다리가 뿌러졌던적도 있다.
몸무게도 가볍다 보니 차라리 내가 안고 다니는게 더 편했다.
그런데 작년 어느날 회사에 가다 우연히 장애인용 유모차를 발견했는데 누나에게 딱 맞아보였다. 그걸 인터넷을 뒤지다 결국 못찾았다 그나마 비슷한거 찾은건 300만원이 가볍게 넘었다. 좀 비쌌고 좀 싼녀석들도 뒤져보며 고민하다 외출자체를 안하는데 이걸 사서 언제 쓰지 싶어 다음에 여행이라도 다시 가게 되면 그때 사야지 생각하며 아직도 크롬에 그룹으로 창을 모아뒀는데 결국 살일이 없어졌다. 쓸데 없으니 저 창을 닫아야 하는데 닫기가 싫다.
누나가 독감으로 병원 가기 바로 몇일전에도 찾아갔었다.
언제나 찾아가면 난 누나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게 해줬기에 매번 신나서 보고 싶은 영화를 말하는데 이번엔 모아나 2 였다. 안타깝게도 아직 ott에 안올라와서 그건 안된다고 했고 다른거 보고 싶은지는 제대로 안물어보고 그냥 말았다.
그날은 그냥 그렇게 지나갔고
그렇게 누나는 모아나 2를 보지 못했다
장애인 가족으로써 정말 싫어하는 말이 몇개 있다.
1. 장애인을 죽인 가족 뉴스에 장애인 보살피느라 힘든 가족 생각해서 감경 해야한다는 말.
치가 떨리게 싫은 말이다.
그딴 짓은 장애인을 죽이는 가족만 늘어난다.
부모가 자식 죽이고 자살하는걸 동반자살이 아니라 아동살해라고 표현해야하는것과 똑같다. 그저 장애인살해일뿐이다.
방어능력이 없는 사람을 죽이는것은 감경이 아니라 가중처벌을 해야한다.
어떤 이유든간에 가족을 죽이는데 감경한다면 그것 역시 살인 방조 다.
2. 보살피던 장애인이 죽었으니 이제 고생안해도 되니까 맘편히 살라는 얘기
솔직히 보살피는게 힘들긴 하지. 그런데 그걸 고생이라고 생각하면 이걸 못한다.
그냥 우리에겐 생활이다.
그런데 그걸 고생이라 하며 죽어서 잘됐다는 식의 말은 치욕적이기 까지 한다.
고생이라해도 살아있는것이 낫다.
살아있는것이 맘이 편하다.
3. 장애인 당사자가 평생 고생했다며 그런거 보면 신은 없다는 소리
이건 특히 그냥 무신론자로써 신이 없단 소릴 하고 싶어서 이기회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것 같아보이지도 않는다. 그냥 당사자 입장 자체는 눈꼽만치도 안한 개소리다.
울 아버지 입장에선 그런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제일 필요한게 신이다.
그저 울 누나는 천국에 먼저 간거고 곧 가서 만날거리는 믿음이 없으면 울 아버지는 그 즉시 무너진다.
신은 그래서 필요하고 있어야 하는것이다.
그런데 그 앞에서 니 딸 고생하는거 보니 신은 없는거 같다는 소릴 하는건 진짜 아무 생각없이 떠드는 거지
중증 장애인과 같이 사는 삶은 그냥 삶이다.
같이 살 뿐이다.
그것은 인내해야할 부분이 분명 있지만 그 가족에겐 매일 밥을 먹고 잠을 자듯 당연한 생활이다.
힘들어도 같이 있는게 무엇보다 더 나은 삶이다.
누군가에겐 그냥 불쌍한 그 삶도 누나에겐 평생 그랬던 그런 삶이다.
말은 안했지만 가족들 모두 누나가 언제라도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뇌성마비 환자중에서도 손 꼽힐만큼 중증인 우리 누나는 더욱 위험했다. 병원에 갈때면 병원에선 이런 환자를 본적이 없다며 어떻게 보살펴야 할지 모르겠다며 거절 했었다. 대학병원에서도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 사례가 없는 케이스였다.
나름 건강체질이라 감기 몇번 걸린적 없지만 누워있고 입도 맘대로 못움직이니 음식섭취가 쉽지 않고 서서히 서서히 몸이 약해지는건 어쩔수 없었고 골다공증까지 와 뼈가 약해져 몸을 들어올리는데 다리가 걸렸다고 허버지뼈가 뿌러져서 살을 뚫고 나온적도 있었다. 그때 들어올린게 어머니인데. 허벅지에 튀어나온 뼈와 솓구치는 피를 손으로 막으며 버틴뒤로 어머니는 누나를 들어올리는걸 매번 두려워했던걸 티를 최대한 안냈지만 우리는 안다. 그 시점부터 아버지가 누나를 더 많이 돌보게 됐었다.
그렇게 평생을 죽음을 생각하며 같이 했고 그 순간이 왔다.
사실 작년에 아버지는 누나 이름으로 된 청약통장을 해지하려고 했었다. 청약통장을 쓰려면 본인이 직접 해야될게 많아 누나명의로는 사실상 사용이 불가능하다는걸 우연히 알게된 시점이었다. 그런데 본인이 안오면 해지가 안된다고 하고 본인이 와도 직접 사인을 못하면 해지를 못해주겠다고 은행이 거부했다. 그럴거면 가입은 왜 시켜줬는데.
그래서 결국 부모가 대리인 자격을 얻어야 해지가 가능했는데 .
변호사에 의사를 집으로 불러서 상태 확인을 받고 기타 등등해야 대리인 자격을 가질수 있다고 했다. 은행의 변호사가 그 과정을 대신 해주겠다며 수수료를 몇백을 불렀다. 청약통장에 있는 돈의 2/3 쯤 됐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돈을 주더라도 대리인 자격을 받고 통장을 해지하려고 하기에 내가 그냥 말라고 했다. 1~2백 돈 남길려고 그 짓할 필요가 있냐는 생각이었고 아버지는 성격이 급하고 약간 옳은짓에 강박증이 있어서 못 쓸 통장을 그럼 내버려두냐고 그 돈을 써서라도 대리인 자격을 얻어서 없앨거라고 했다.
난 그런 불필요한짓을 왜 하나 싶고 길게 설득도 어려워서 어차피 누나 죽으면 그 통장 그냥 해지 될테니 냅두라고 했다.
말이 씨가 됐는지 1년도 안되서 누나가 죽었다. 아마 곧 해지될것이다.
누나의 독감은 아버지가 옮아온것이었다.
아버지는 한 대학교에서 관리소장을 하셨고 사람들을 관리하다보니 여럿을 만나다 독감에 옮았다.
그리고 2024년 12월을 마지막으로 회사에서 나이가 많다고 짤렸다.
사실 몇년전 70세가 넘겼을때 이미 한번 짤렸었지만 새로 뽑은사람이 너무 일을 못했고 나이상관없이 아버지에게 일 시키라는 윗사람의 호출에 불려가 몇년을 더 일했지만 지금 다시 나이가 너무 많다고 결국 짤렸다. 그렇게 짤리기 직전 사람들과 만나다 옮은 독감을 누나에게 옮겼다.
차라리 한달만 일찍 그만 뒀어도 예전에 그만뒀어도 독감을 옮아올 일은 없었을 텐데. 그랬다면 외출도 안하던 누나가 독감에 걸릴일도 없었을텐데.
그래도 누구도 그 얘기를 말로 하지는 않는다.
그게 문제가 아닌걸 안다. 하지만 누나의 빈자리가 보일때쯤이면 어느순간 아버지는 그 사실을 다시한번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나의 영정사진은 누나가 아니었다.
누나는 몸이 뒤틀려 정면을 보며 앉는게 불가능했다.
그러자 장례식장에서 그나마 얼굴 정면이 찍힌 누나의 사진을 가져다가 얼굴을 다른 사람몸에 합성해서 사진을 만들어줬다.
평생 본적없는 너무 그럴싸한 앉아있는 모습에 장례식장에서 어머니는 계속 내 딸 아닌거 같아 라고 말했다.
입관할때 마지막으로 본 누나는 염을 어떻게 한건지 누나 특유의 그 뇌성마비 환자 특유의 좌우가 다르게 일그러진 얼굴이 전부 펴져 있었다.
내 평생 최근 40년안에는 처음보는 좌우가 맞는 얼굴이었다.
나 역시 어머니처럼 누나 아닌것 같다고 생각했다.
너무 오래 알고있던 순간이었다.
누나와 함께한 모든 시간동안 가족 누구도 이때가 오는걸 알고 있었다.
화장할때도 묻을때도 누구도 울지 않았다.
울기엔 너무 오래 준비를 해왔다.
엄마는 그저 누나의 모든물건을 집에서 빨리 치워버리고 싶어했고.
집에 오자마자 쓰래기봉투를 사서 전부 담고
쓸수 있는 물건은 교회에 전부 기부해버렸다.
난 몇개 챙기고 싶었지만 그 말을 꺼낼수가 없었다.
그저 사망신고전 누나의 주민등록초본을 하나 떼서 따로 챙겼다. 48년간 살았던 흔적이 종이 3장에 남아있었다.
다시 본가에 가면 아마 누나의 물건은 그 어떤것도 없을것이다.
우리 누나는 그렇게 평생을 누워 집에 있었고. 그런 누나를 만나 본사람도 일부 병원사람과 친척들 뿐이었고 누나가 쓰던 물건도 전부 사라졌다.
그래도 가족말고도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걸 누군가는 알았으면 싶다.
글을 잘쓰고 싶었는데 쓰다보니 계속 생각나서 그냥 생각다는대로 쓰며 빨리 마무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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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comment :
저 글을 읽고, 몇년전에 오랫동안 비슷한 장애로 고통받으시다가 돌아가신 친척분도 생각나고 해서 좀 많이 울었습니다.. 저 분과 저 분의 가족이 얼마나 오랜 기간 고통받으셨고 오랜 기간 애쓰셨을지 저로서는 감히 짐작도 되지 않습니다.. 이 글은 많은 분들이 읽으셔야 한다고 생각해서 펌하고 싶었는데, 유머게시판에는 적절치 않은 글 같아 자유게시판에 펌 합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하는 글인데,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괜히 말실수할까봐 감히 말을 첨언하기가 두렵네요. 글이 담담해서 더 슬프네요. 글쓴분과 글쓴분의 가족분들의 마음에 평안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