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한 이세돌 9단에게는 정말 대단하다는 말 외엔 떠오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지레 겁먹고 포기할만도 한 승부에서 끝까지 승부의 끈을 놓지 않고 이기는 길을 찾으려는 모습에선 감동과 왠지 모를 애잔함까지 섞여 울컥하기도 했고요. 그런 이세돌 9단의 진정성에 지금 사람들이 감동하고 열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류를 대표해서 이보다 더 잘 싸울 수는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봅니다.  

우선 저는 타이젬에서 7단을 두는 애기가입니다. 이번 챌리지매치는 너무너무너무(너무x100) 재미있었습니다. 다른 대국과는 달리 이번 매치는 1국부터 5국까지, 첫수부터 끝수까지 매우 집중해서 보았고 대국이 있는 전날밤에는 자기 전 누워서 내일은 알파고가 어떤수를 둘까 하는 궁금함에 잠못 이루기도 했고요. 지금 다들 이세돌 9단의 관점에서 열광하고 있습니다만(그게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고요.) 저는 알파고에 초점을 맞춘 후기를 써보려 합니다.

'컴퓨터가 과연 얼마나 둘까? 망신만 안당하면 다행이지.' 하는 호기심에 1국을 보았고 이세돌 9단도 약간의 호기심과 경적으로 1국을 패하게 됩니다. 그 때만 해도 컴퓨터의 1승이 놀라웠고 이세돌 9단이 심기일전해서 두면 결과는 다를 것이고 진정한 승부는 이제부터라는 생각에 2국부터 엄청 기대하며 기다렸죠.

2국은 확실히 달랐습니다. 이세돌 9단도 최선을 다했고 그에 반해 알파고의 오묘한(?) 수들(초반 손빼고 중국식, 5선 어깨짚음, 중앙을 눌러두며 두터움을 유지하는 수)이 나오며 말그대로 점입가경이었죠. 그리고 마지막 끝내기에서의 완벽함까지... 마이클 레드먼드 9단의 인터뷰처럼 바둑의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한 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 알파고가 바둑의 신 아니냐는 말이 솔솔 나오기 시작했고요.

3국은 하루 쉬고 했는데요. 그 쉬는 하루가 따분하게 느껴질만큼 3국이 기다려졌고요. 대국 내용도 기대만큼 흥미진진했습니다. 흑을 쥔 이 9단이 초반부터 거칠게 몰아부쳤고 알파고도 전혀 피하지 않으며 맞받아치는 형국이었죠. 해설하는 분들(홍민표, 이희성)도 몰입하며 엄청난 수읽기가 오고가는 그야말로 꿀잼 대국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론 5국을 통틀어 가장 재미있는 바둑으로 꼽고 있습니다. 서로 치고받으며 싸우는데 형세는 어느새 백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죠. 그 순간 느껴지는 알파고의 공포란...... 놀라웠죠. 정말 이기고 싶은 의지로 가득한 이 9단이었기에 바둑은 더욱 처절했고 막판 거대한 하변 백진으로 들어갈 때는 비장미마저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여유로운 토요일 오후, 제 3국을 보며 감동한 사람들이 많았고 일반인들도 이 때부터 엄청난 관심을 보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기름을 온 몸에 들이붓고 타들어갈걸 알면서도 불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이세돌 9단...' 인터넷에서 봤던 이 댓글이 지금도 생각나네요.  

3국에서 거대한 백진에 들어가서 수를 낸 이세돌 9단이 전략을 바꿔 거대한 모양바둑으로 둡니다. 내 모양은 확실하게 지키고 상대의 큰 모양에서 수를 내려는 전략으로 이세돌 9단은 참고 또 참습니다. 그리고 결국 78이라는 묘수를 날리죠. 그리고 알파고는 예상못한 수에 당황한 듯 어이없는 떡수들이 속출하였고 승부가 일순간에 이 9단 쪽으로 기웁니다. 이 9단의 승리에 다들 열광하는 분위기였고 각종 포털의 게시판은 '갓세돌'로 대동단결이었죠. 3연패의 압박 속에서도 참고 또 참으며 한방을 준비한 이 9단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솔직히 알파고에게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78의 묘수를 당했어도 침착하게 대응(해설진들도 예상했던 흑으로 호구쳐서 중앙집을 지키는 수)했으면 모르는 바둑이었고(끝내기의 정확도를 봤을 때 오히려 알파고에게 부가 있다 생각됩니다.) 일순간에 어이없이 무너져 버리니 이기는 입장에서도 사실 좀 김이 빠지는 모양새이기도 했고요. 암튼 승자는 이세돌 9단이니 각종 언론들은 승자에 촛점을 맞춰 드디어 알파고의 해법을 찾았다는 식으로 보도하고 5국도 이길 것이라는 식으로 오버하더군요. 실상을 알려주기보단 결과에만 입각하여 5국도 이길 것이라 단정짓는 언론의 행태에 조금 실망했습니다.  

알파고가 어이없는 수가 아닌 납득갈만한 수를 두고 그에 더 멋진 수로 대응하여 이세돌 9단이 5국을 승리하기를 바랬고 그런 의미에서 알파고가 4국같은 어이없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5국을 기다렸습니다. 역시 쉬는 하루는 지루하더군요. 완전 빠졌어요. ^^

5국은 결론부터 얘기하면 알파고의 명국이라고 감히 얘기하고 싶습니다. 백으로 세력바둑을 펼친다? 흑은 몰라도 백으로서의 세력바둑은 정말 어렵다 생각합니다. 물론 할 수도 있겠지만 승률이 잘 나오지 않기 때문에 선실리 후타개에 밀려 점점 사라지는 기풍이 되어버렸죠. 물론 호쾌한 세력바둑은 많은 애기가들의 로망입니다만 모양이 지워질 때의 허망함을 생각하면 쉽게 두기 어려운 선택이죠. 그런데 그 길로 알파고는 갑니다.

초반 우하귀 수읽기 싸움에서 이 9단이 앞서며 거대한 집을 형성합니다. 그 와중에 알파고는 세력을 택합니다. 이단젖히기를 하지만 흑이 중앙으로 시원하게 머리를 내밀고 그 뒤에 좌상 날일자 모양에 흑이 어깨짚는 삭감을 들어가서는 이 바둑은 흑쪽으로 거의 기울었다 느꼈고 내가 백을 잡는다고 가정했을 때 느껴지는 갑갑함은 형세를 그대로 말해줬죠. 그런데 그 두터움을 바탕으로 알파고가 하나하나 이득을 보더니 형세를 기어코 맞출 때는 경이롭기까지 하더군요. 어떻게 백으로 세력바둑을 저렇게 잘 둘 수 있을까 하는 경이감이요. 이건 알파고 만큼의 균형감과 계산력이 없으면 흉내내다 망칠 수 있는 영역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후반으로 오면서 바둑은 어느새 역전이 돼 있었고 이세돌 9단의 비틀기에도 꿈쩍않고 바둑을 마무리 짓습니다.

5국을 다 보고 난 후의 느낌을 적으면...... 이건 욕을 먹을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제 생각을 솔직하게 적고 싶습니다.

우선 알파고는 아직 바둑의 신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바둑의 신으로 가는 길을 걷고 있다 보고싶네요. 그 길은 전판을 넓게 보는 완벽한 균형감과 계산능력으로 가능할 것 같습니다. 특히 프로들도 어려워하는 중앙에 대한 처리능력이 탁월해 보고 있으면 바둑이 아름다움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리고 실력 얘기를 하고 싶은데요. 저는 이세돌 9단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이세돌 9단에 국한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고 인간을 이미 뛰어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솔직히 4국도 알파고의 오류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고요. 그 때 외에 딱히 이9단의 바둑이 좋았던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완벽합니다. 어느 댓글에서 본건데 알파고를 상대로 이긴 처음이자 마지막 인간이 이세돌 9단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포석이 약하다고는 하는데 딱히 느껴지지 않고(자기만의 초식이 있는 듯 해요.) 전투는 이세돌 9단이 밀릴 정도였으니 말 다했고 끝내기 형세판단 전판을 아우르는 균형감까지 뭐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전력입니다.

한국기원이나 바둑계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알파고의 실력은 이미 인간계를 뛰어넘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뛰어넘은 실력이 인간계의 그것이 아닌 우아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영역의 바둑이라 바둑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앞으로 프로들끼리의 바둑을 보며 이정도의 감동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인간 대 알파고의 바둑을 계속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깁니다. 그러면서 생길 바둑 패러다임의 변화에도 기대하지 않을 수 없고요.

이건 정말 잔인한 얘기지만 알파고 대 인간의 칫수 고치기 같은거 하면 보는 입장에선 정말 흥미진진할거라 생각합니다. 이게 프로에게 너무 잔인한 매치업이라면 세계 10위까지의 프로기사 열명이 돌아가면서 두게 하면 좀 더 부담이 덜하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그러면 과연 칫수가 어케될까요? 제 생각에는 인간은 실수가 없을 수 없으므로 정선에도 까딱하다간 질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5국 때 공중파 방송은 물론 대부분의 방송들이 생방송에 열을 올렸습니다. 이거야말로 대중들의 관심이 엄청나다는 반증이며 기업이던 방송사던 이런 엄청난 기회를 그냥 버리지는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제 2, 제 3의 매치업이 성사될거라 생각하며 이는 바둑계의 지각변동과도 연계될거라 생각합니다. 그 변화가 좋은 쪽일지 나쁜 쪽일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저는 지금 알파고의 아름다운 바둑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네요.

다음 매치업(개인적으론 커제가 되었음 좋겠어요.) 기대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