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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4/03 18:03:07
Name Eternity
Subject [일반] 네 삶의 완벽한 조연
네 삶의 완벽한 조연


2013년 여름, 우연히 '심리 검사'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하다가 한 사이트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마음보고서'라는 심리검사를 발견하고는 호기심과 궁금증에 고민 없이 결제를 완료했다. 절차는 간단했다. 카드결제를 하고 나면 며칠 후 우편으로 심리검사지가 배송됐다. 그 검사지를 받아 작성 후 다시 우편으로 회신하면 그 결과지를 바탕으로 얼마 후 <내마음보고서>라는 제목이 적힌 얇은 소책자 하나를 받아볼 수 있었다. 이 책자가 바로 이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이른바 나만의 심리검사 결과서였다. 그렇게 처음 접하게 된 이 책은 기본적으로 '나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고 때로는 가슴을 찌르는 문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현재 감정(또는 감성 자원)을 자유롭게 드러내기보다 통제하는 쪽에 훨씬 많은 에너지를 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일상생활에서 감정이 유발되는 상황을 피하려 하고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마치 '심리적 투구'를 쓰고 있는 듯한 형국입니다.]

[OOO님은 '불필요한 걱정에 사로잡히면 어쩌나'하는 의식적, 무의식적 두려움이 매우 높습니다. 그에 따른 불필요한 정신적 에너지 소모가 상당합니다. 하지만 객관적인 분석과 판단 자료에 의하면, 실제로 OOO님이 걱정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본인이 상상하는 만큼 부정적인 정도까지 내적으로 어려운 지경에 몰리지는 않습니다. OOO님에겐 그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심리적인 힘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OOO님은 이런 영역에서는 항상 자신의 심리적 힘보다 더 많은 두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불필요한 걱정입니다.]

[내가 필요할 때 원하는 만큼의 물리적, 정서적 보살핌을 받을 수 없었던 이들에겐 참는 것이 하나의 성격이 됩니다. 남들이라면 수술을 받아야 할 만큼 다급한 상황에 몰려야 '병원을 가봐야 하나' 생각합니다. …(중략)… 둘러보면 '심리적 고아'처럼 살고 있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나를 인정해주고 격려해주는 꼭 한사람입니다. 나의 깊은 내면을 누군가 이해해줬으면, 받아들여줬으면 하는 마음. '꼭 한사람'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갈망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당연한 얘기들이 당연하지 않게 다가오는 느낌이 있었다. 비슷한 얘기라도, 오로지 나를 위해 만들어진 책에서 이런 문구들을 읽는 것은 시중의 일반 서적과는 그 감회와 파장 자체가 달랐다. 어떤 시원한 결과나 명확한 결론을 떠나서 말이다.

그리고 2년 반쯤의 시간이 흘러, 몇 주 전의 어느 날 메일이 한통 도착했다. 열어보니 <내마음보고서> 심리검사 권유 메일이었다. 시간이 꽤 흘렀기에 2년 반 전의 내 자신과 지금의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체크해보길 권하는 내용의 홍보 이메일이었다. 나는 고민 없이 다시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다시 해보고 싶었다. 예전이랑 다르게 온라인 검사 기능도 추가되어 있어서 이번엔 온라인 검사 버튼에 체크를 했다. 그렇게 결제를 하고 보니 주변의 다른 친구에게도 추천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누구한테 추천해줄까?'

한 친구가 떠올랐다. 예전에 심리상담센터에서 심리치료 상담을 받은 경험이 있던 친구. 절친한 녀석이고 심적으로 힘든 경험을 많이 한 친구였기에 이 책을 소개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전에도 소개를 해준 적이 있었다. 이 책을 처음 접했던 2년 반 전에. 그땐 별 관심이 없었는지 친구는 그냥 듣는 둥 마는 둥 했었다. '그래도 다시 얘기해보자.' 나는 카카오톡 대화창을 열고 친구에게 홈페이지 링크를 걸었다. 이번에 다시 검사를 하게 됐는데, 너도 관심 있으면 시간 날 때 한번 신청해보라고 짧게 말을 남겼다. 친구는 알겠다며 단답으로 대꾸했다. 아예 관심이 없어보이진 않았지만 굳이 8만원씩이나 하는 검사비를 들여가며 결제할 마음까진 없어 보였다. 나는 어쩔까 잠시 고민하다가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근데 니 생일이 언제지?"
"나? 5월 29일."
"그럼 내가 생일 선물 미리 주는 셈치고 선물권 보내줄게."
"어? 나는 니 생일 챙겨준 것도 없는데.."
"꼭 뭐 생일날 서로 챙겨줘야 되냐. 일단 한번 해봐."

친구는 약간 의아해하면서도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표했다. 그러면서도 '이걸 왜 갑자기 나한테 보내주지'라는 약간은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사실 생일은 핑계에 불과하긴 했다.

그냥 나는 한번쯤은, 내 친구의 삶에 완벽한 조연이 돼주고 싶었다. 태어날 때부터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고정된 우리의 시야는 우리들에게 주인공으로서의 역할만을 강제한다. 그렇게 우리는 매 순간 자신만의 주관적인 시각과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수용한다. 한 번도 내가 속한 삶을 버드아이뷰(Bird's eye view)의 자유로운 시점으로 외부에서 바라볼 기회가 없다. 물론 가끔 눈을 감고 상상해볼 수는 있다. 하지만 눈을 뜨는 순간 우리의 시야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되돌아온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을 외롭게 단절시키는 또 하나의 요소가 아닐까.

당연한 듯 1인칭 주인공의 일상을 살아가며 내가 깨달은 한 가지는 이 세상의 타인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내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인생을 살다보면 꽤 많은 주변 사람들이 날 주시할 것 같고, 나에 대해 관심을 가져줄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내 가족과, 절친한 지인들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 주변인들은 내게 그리 큰 관심이 없다. 심지어 가까운 지인들마저도 (내가 그들을 조연으로 바라보듯) 그들의 카메라 렌즈 안에서 난 그저 '고등학교 동창2', '직장동료3' 등의 영원한 조연이자 타자일 뿐이다. 나는 이 당연한 사실이 가끔은 조금 먹먹한듯 답답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에 가려져, 서로가 보아야할 것들을 너무나 많이 놓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어도 그 호의의 주인은 결국 나일뿐이고 아무리 누군가를 위한 선물을 해줘도 내 카메라 렌즈에 포착되는 건 고마워하는 조연 친구와 그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는 주인공인 나일뿐이었다. 이 당연한 일을 때로는 당연하지 않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가끔 이 1인칭 카메라 렌즈로 내 주변사람을 주인공처럼 클로즈업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그냥 한번쯤은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세상이 내게 관심이 없다면, 내가 세상에 관심을 가져주면 될 일이었다. 그냥 뭐랄까, '가족을 제외하더라도 이 세상에 너를 생각하는 사람이 한명 정도는 더 있다.'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이 세상 사람들, 각박한 현실 속에 전부 자기 앞가림하기에 바쁘고 자기 위주로 세상을 살아가기 바빠도, 그래도 한명 정도는 이렇게 평소 너에게 관심을 가지고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다고. 내 친구에게 몇 안 되는 그 '한사람'이 돼줄 수 있다면, 가끔은 기꺼이 친구의 삶에서 완벽한 단역으로 출연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이면에는 누군가 그렇게 내게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는 소망, 이른바 '꼭 한사람에 대한 본능적 갈망'이 깔려있기도 하다. 사실 그랬다. 나도 항상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기대라는 건 꼭 그만큼의 실망으로 되돌아왔다. 그래서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주변 사람에게 서운함을 털어놓는 것도, 나에 대한 오해를 애써 해명하고 풀어내는 것도 어느 순간 너무 힘들고 피곤해져버렸다. 내게 생각보다 관심이 없는 주변인들을 붙잡고 그들에게 별로 중요치 않은 일을 열심히 해명하고 설명하는 것만큼 씁쓸하고 허망한 일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기대를 버리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차분하게 칸막이 쳐지듯 내몰리는 일상이 가끔은 싫었다.

한때 뜨겁게 좋아했고, 함께여서 고민 없이 즐거웠고, 격의 없이 친했던 각자가 점점 서로의 삶에서 영원한 단역으로 서서히 박제되어버리는 느낌. 상대방이 먼저 손 내밀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도 조용히 고개 돌려버리면 그렇게 박제가 완성되어 굳어져버린 순간, 손을 내밀고 싶어도 내밀지 못하는 때가 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끼는 사람들만큼은 내 삶에서 그렇게 박제시키고 싶지 않았다. 내가 조연이라도 괜찮다. 그 친구들에게 '나도 누군가에게 관심 받고 있구나.', '이 친구가 나를 이해해보려고 애쓰는구나.'라는 느낌 정도는 전해주고 싶었다.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서로가 느끼는 어떤 서운함이나 오해들도 좀 더 손쉽게 털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내 카메라 렌즈 안에서의 그 친구는 영원한 조연이 아닌 또 다른 주인공이니까. 우리들의 영화는 원톱무비만이 아닌, 가끔은 서로를 위한 '버디무비'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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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4/03 19:10
수정 아이콘
조용히 추천.
Alsynia.J
16/04/03 19:53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라니안
16/04/03 20:27
수정 아이콘
추천드립니다
언제나처럼 공감이 많이되는 글입니다
스타슈터
16/04/03 23:37
수정 아이콘
제가 늘 생각하던 일들을 가끔씩 이렇게 좋은 글로 풀어주시는데, 이것 하나만큼으로도 저의 삶의 좋은 조연이 되고 계십니다.

누구라도 좋으니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또는 나의 서포트를 받고) 마음을 조금씩 고치게 된다면 그걸로 족한데 막상 그 고마움을 알려주는 사람은 얼마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물론 애초에 그걸 바란건 아니지만요.

그래서 이 자리를 빌어 늘 저에게 고민이 되고 힘이 되는 글을 써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해주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써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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