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에서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는 퇴근길에 주변을 살펴 보곤 하는 게 일상이었죠.
이번에는 어떤 가게가 생겼나, 또 어떤 상점이 문을 닫았나 하며 말입니다.
5년 전까지 살던 동네에는 치킨집이 무더기로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는데, 그런 풍경들을 보고 자영업자들 고생이 말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십여 년 넘게 살던 곳이라 나름 애착도 가고 해서 동네 슈퍼들이 하나 둘 편의점에 밀려 사라지거나 자기 자리를 편의점에 내주며 획일화되어 가는 모습을 숱하게 봐 왔으니, 월급쟁이였지만 동네 상권에는 항상 민감했어요.
이사 온 동네도 크게 다를 바 없긴 했지만, 그래도 서울에서 중소형 슈퍼들의 사정이 가장 나은 곳이라는 얘기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 편의점에 맞서서 이곳 저곳에 슈퍼가 보이곤 했지요.
하지만 역시나 몇몇 슈퍼를 제외하고는 상점들이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예전부터 자리를 지켜왔던 동네 철물점이나 문구점, 식당, 술집들이 하나 둘 다른 옷으로 바꿔 입었고, 치킨집이 늘어나고, 미용실이 우후죽순 생겨나곤 했고요.
그렇게 망해가던 동네 가게들 속에서, 임대료가 쌌던 것인지, 어느 시점부터 젊은 사장들이 각자 개성에 맞는 카페와 찻집을 하나 둘 내기 시작하면서 급기야 속칭 x리단길이라 불리며 상권이 다시 살아나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퇴근길, 이상한 간판을 내건 가게가 새로 생긴 것을 보게 되었지요.
한 블럭만 더 가면 집이 있는 골목길로 접어드는데 우연히 그 전 블럭으로 들어가는 골목길 안쪽에 붉은색 간판이보였던 것입니다.
그 골목 입구 건물과 옆 건물에는 식당과 사무실이 있었고, 더 안쪽은 주차장이었기에 그 주차장에서 한칸 더 지나 있는 건물은 옆모습이 드러나 보였습니다.
바로 그 1층 옆 벽에 글자 자체가 붉은색으로 [PEOPLE]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지요.
저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퇴근길이 바빴기에 그냥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매번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치곤 했는데, 어느날은 도대체 왜 저런 간판을 걸었을까, 어떤 가게일까 하다가 간판의 모습으로 보건데 무슨 클럽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이런 동네에 클럽이? 아니면 무슨 유흥쪽일까?
온통 빌라 천지인 이곳에 저런 업종이 들어서면...?
그런 생각 속에도 그냥 지나치기를 반복하다가 문득 한번 지나가 보자 하는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그냥 자전거를 몰고 골목길로 들어갔지요.
불과 50미터만 더 들어가면 되는 것을 뭐하러 그런 궁금증을 가지고 오만가지 생각을 했을까 하는 후회도 잠시, 그 가게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건물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은 [PEOPLE]이었는데, 정면의 간판은 [BURGER], 바로 햄버거집이었어요.
버거피플.
참 황당하고 허무했습니다.
일개 햄버거집을 두고 이상한 상상을 했다니.
밖에서 본 그 집의 인상은,
시멘트 색깔을 그대로 살린 벽에,
약간은 구식스러운 탁자와 임시 공연장에서 자주 볼법한 접이식 의자,
주방에는 패스트푸드점에서 볼 수 있는 음료 따르는 기계와, 생맥주 꼭지.
수제 햄버거에 생맥주를 먹을 수 있다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손님은 서너 명 있었던 걸로 기억하고요.
여기 동네 상권 바뀌는 추세에 맞게 이곳에도 새로 합류한 젊은 사장님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얼마 뒤, 일요일 저녁 준비 전 집에서 무심코 그냥 툭 던진 한마디로 그 집을 방문합니다.
'저녁꺼리가 마땅치 않으면, 우리 햄버거 먹은 지도 오래 됐는데 햄버거로 때울까?'
가끔 땡기는 날엔 저 멀리 맘스터치나 버거킹에서 사다 먹던 햄버거인데, 예전에 느꼈던 호기심과 오해로 인한 미안함이 집 근처 수제버거 집으로 발길을 돌리게 했죠.
메뉴는 세 가지였습니다.
기본, 파인애플 버거, 매운 버거.
기본 두 개와 매운 거 하나를 사서 집으로 왔습니다.
물론 가게 주인한테 그동안 한쪽 벽에 있는 간판만 보고 오해를 했다는 얘기를 들려 주었고, 나같은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 차라리 [버거]와 [피플]의 간판 위치를 바꾸는 게 어떻겠느냐고 사족을 달았습니다.
주인장은 재미나다는 듯 웃더군요.
감자튀김은 기본으로 제공, 햄버거는 아주 크진 않았지만 매우 두꺼웠고, 육즙은 철철 흘렀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먹은 햄버거 중 가장 맛있었던 건, 이전 회사 다닐 때 뉴질랜드 출장 가서 점심 때 같이 일하던 아저씨들이랑 근처 식당에서 먹었던 햄버거였거든요.
그 이후 어떤 햄버거를 먹어도 그와 비슷한 맛을 찾을 수 없었는데, 바로 이 집에서 산 버거는 그때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맛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입소문도 냈고, 자주 놀러 오는 절친에게도 얘기했죠.
동료들이랑 이야기 하다가 x리단길 얘기가 나오면 다른 집은 몰라도 그 집 햄버거는 꼭 가서 먹어볼 만하다는 말도 해 줬고요.
그렇게 또 한두 달이 흐른 것 같아요.
친구네 가족이 우리집을 방문했고, 그 친구는 오기 전부터 저녁은 바로 그 수제 버거다 하며 벼르고 있었습니다.
물론 가족들의 햄버거는 따로 사줬고 친구와 저는 가게에 앉아 수제 생맥주와 수제 버거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와 있던 손님은 2자리 총 4명이었는데, 먹다 보니 저희 둘만 남았죠.
수제 생맥주 또한 꽤나 풍미있고 맛도 좋았습니다.
국내 소규모 양조 업체에서 만든 맥주라고 하더군요.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버거를 먹고 있는데, 가게 안으로 들어 오려던 손님들을 직원이 나가서 뭐라 설명하더니 돌려 보내는 게 보입니다.
다른 종류의 맥주를 한잔 더 시켜서 마시는 도중 또다시 가게 입구에서 손님을 돌려 보내는 모습이 보였고, 얼핏 '패티가 다 떨어져서...' 라는 설명을 들었어요.
그 직원은 가게 유리문에다 어떤 문구를 적어서 붙였습니다.
아마 오늘 영업이 종료되었다는 것인듯 했고, 그 다음에 들어서려던 한 커플이 종이에 적힌 글을 읽고 발길을 돌리네요.
친구랑 그런 얘기를 했죠.
여기 재고 관리가 잘 되나보다,
지금 7시 반인데 왜 벌써 패티가 다 떨어졌을까,
우리 들어올 때 4명 있었는데 점심때 토요일 낮이라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었나...
맥주와 버거를 다 먹고 8시 좀 넘어서 계산대 앞의 사장님을 마주했습니다.
"햄버거 맛있네요. 저 예전에 왔을 때 간판 얘기 꺼낸 사람인데, 사람들 많이 오죠?"
"아, 네. 생각납니다. 그분이시군요. 그게 저희 가게 컨셉이었는데... 그런데 저희 다음주에 장사 접습니다"
"아니 왜요? 맛있고 특색있는데..."
"그러게요, 저희 가게 문 열고 두달만에 다른 곳에 햄버거집이 생겼어요. 아시죠? 저 건너편에 큰 수제 햄버거 프렌차이즈가 생겨서 그런가 장사가 잘 안 됐네요."
"여기 언제 생긴 건가요? 한 1년 쯤 된 것 같은데..."
"아, 저희 6개월 됐습니다. 완전히 접는 건 아니고요, 다음주 리모델링 해서 수제 맥주 전문점으로 바꿔서 다시 시작할 겁니다."
"그럼 식사나 안주류로 햄버거도 계속 하는 건가요?"
"버거류는 당분간 안 하고, 일반적인 맥주 안주류를 낼 거예요. 버거 노하우는 간직하고 있으니 상황봐서 결정하려고요."
"아. 정말 아쉽습니다. 자주 오려고 했는데..."
"네 고맙습니다. 바뀌면 그때 다시 와 주세요."
그렇게 단골이 되려 했던 저와 친구는 씁쓸한 마음을 간직한 채 가게를 나왔습니다.
2차로 이동하려고 x리단길을 서성이면서 자영업과 프랜차이즈, 이 골목의 특징과 젊은 사장들, 앞으로의 국내 경제 상황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좀처럼 목적지를 찾지 못했어요.
그리고 다음날 오후, 집에서 쉬려던 계획을 뒤로하고 둘째 녀석의 성화에 못 이겨 오후 느즈막히 산책을 나섰습니다.
호수와 공원을 한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어제 그 가게가 생각나서 한번 지나쳐 봤지요.
다음주 부터 리모델링이라 했으니 일요일인 오늘까지는 할 줄 알았는데,
가게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문 앞에 쓸쓸한 작은 나무판에 아래와 같은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그동안 'BURGER PEOPLE'을
사랑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저희는
보다 나은 모습으로
새롭게 단장하여
'수제 맥주 전문점 xx x xxx'로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우리 가게에서만 맛볼 수 있는
'송파 I.P.A'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 버거피플 -
결국 문을 닫는 어떤 가게의 마지막 손님이 바로 제가 되어 버린 것이죠.
단 두번 밖에 가지 않았지만, 어쩌면 가장 오랫동안 기억되는 가게가 될 것 같습니다.
다시 시작한다는 젊은 사장님들 힘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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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밍이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새로 생긴 프랜차이즈 버거집도 전국적인 규모는 아닌 걸로 알고 있고, 그 자리의 기존 상점이 계속 장사가 안 되었던 곳이라 어찌 보면 x리단길에 사람을 끌어 들이는 가게인지도 모르거든요.
어쨌든 거대(?) 자본이긴 하니 여러모로 아쉽고 씁쓸한 상황입니다.
저는 유명한 명동 따로국밥집의 마지막 손님이었습니다.
몇년 전 그곳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한 날이었는데, 식사중에 갑자기 밖이 시끌시끌 한겁니다.
어찌어찌 다 먹고 나왔는데, 저만치 가다가 뒤돌아보니 강제로 간판을 철거중...;;
집에 와서 검색해보니 건물주와 오랜 갈등이 있었나보더라구요.
그러다가 터진건데 그게 하필 제가 찾아간 날.
지금은 을지로 3가로 이전해서 성업중이더군요.
전 예전에 다니던 대학 주변 어떤 무한리필 초밥집의 마지막 무한리필 손님이었습니다.
저희 팀을 마지막으로 다음 날부터는 몇 개 세트 당 얼마 식으로 주문 받으시기로 했다고 계산할 때 말해주시더군요...
어쩐지 달걀이랑 새우 초밥만 계속 주시는데 계속 눌러앉아서 먹고 나가던 차라 죄송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