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시장을 독식해보려던 일본을 무참하게 짓밟은 후 미국은 일본의 전쟁수행능력을 철저히 분쇄하기로 작정합니다. 평화헌법은 물론이고 재벌을 해체하여 산업생산능력을 말살하려고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계획이 무르익기도 전에 한국에서 전쟁이 터져버립니다. 미국에게는 병참기지가 필요하게 되었고 그래서 일본은 한국전쟁특수로 신나게 물자를 생산하게 됩니다.

전후 혼란에 빠졌던 일본은 이를 계기로 경제난에서 벗어나게 되고 50년대에는 이를 기반으로 필리핀(약8억불), 남베트남 등의 국가에게 전쟁 보상금도 제공 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과도 보상협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1) 한국의 요구액수가 높았고(70억불 상당) 2) 일본은 동남아시장에 진출을 원했지만 한국시장은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으며 3)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한국과 달리 승전국의 지위에 있었다는 점 때문에 한국과의 협상은 지지부진 했습니다. 아니 그냥 일본은 한국과 협상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 1960년대에 이르자 상황이 조금 변하기 시작하죠.

1947년부터 20여년 간 미국은 한국에 130억불의 경제지원을 합니다. 한국민 1인당 약 600불 정도의 액수가 지원되었다고 하죠(오오 천조의 은혜!). 참고로 같은 시기 대만은 약 50억불을 지원 받았습니다. 2차 대전 후 미국의 경제가 욱일승천하던 시기에는 이 정도 액수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터진 전쟁과 린든 B 존슨의 그레이트 소사이어티로 표방되는 복지정책, 즉 전쟁-복지국가 정책으로 미국에도 재정적 부담의 그늘이 드리워지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미국은 동북아시아의 최전선을 이루는 대만과 한국이라는 요새를 유지하는 비용에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되죠. 한국과 대만을 좀 먹고 살게 해야겠다. 전쟁무기도 좀 스스로 생산하게 하고... 그런데 기술과 자본이 없으니 일본을 추동해야겠군.

그리고 한국에도 변화가 있었죠. 일본에 막대한 보상을 요구하던 정권이 스스로 무너지고 정통성이 떨어지는 군사정권이 들어섭니다.

그래서 미국의 지시 하에 한국과 일본은 협상을 시작하고 간략하게 3억불 + 3억불이라는 36년 간 피해를 입은 한국이 4년도 피해를 받지 않은 필리핀만도 못한 보상금 액수로 합의를 하게 됩니다.

뭐 어쨌건 미국의 그랜드 플랜은 제대로 작동했고,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통해 일본의 자본과 기술을 넘겨받은 한국은 공장에서 열심히 기계를...아니 노동자를 굴렸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하청으로 한국(그리고 대만)은 미국의 민중들이 필요로 하는 생필품을 싸게 만들어 납품하게 되었고 일본은 그래서 번 돈으로 미국의 국채를 사는 방식으로 미국의 패권유지비용을 지불했죠. 그리고 그 사이에 한국과 대만도 잉여자본을 축적하게 되었고...

즉 1965년의 기본협약의 본질은 미국의 지시 하에 일본과 한국 간에 맺어진 수직적 하청계약이었죠. 그 목표는 최전선 요새인 한국의 자립과 일본의 후방기지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때문에 일본은 1965년 협정을 하면서 오만한 태도를 보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과거 식민지시절의 행위가 부끄럽거나 미안해서 협약을 맺은게 아니거든요. 미국이 시켜서 한 건데... 뭐 사실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에 행한 행위로 사과하거나 보상한 경우도 없고 말이죠.

일본에 진실성은 없었고, 그리고 한국에서는 민중의 동의가 없었지만, 그래도 이 협약은 이후 이어집니다. 어쨌건 북한과 중국과 러시아는 한일의 공동의 적이었고, 미국이 한일 관계를 관리감독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한국과 일본도 각각 수직적 하청 관계에서 이득을 얻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아시다시피 IT 산업혁명과 중국의 대두로 모든 것이 변하게 됩니다.

IT 산업에서 뒤처진 일본은 더 이상 한국의 갑이 될 수 없었고(그리고 자동차, 조선, 철강 등에서도...), 중국시장의 개방과 소비에트의 몰락으로 중국과 러시아가 적인지 아닌지 좀 아리송해지기도 했고요. 더구나 미국은 더 이상 한국과 일본의 관계 유지를 위해 신경 쓰지 않게 됩니다. 미국의 심정은 솔직히 이런거라고 봅니다. "50년이나 지났잖아... 이젠 둘이 좀 알아서 해라..."

한국에서는? 6억불 받아 쳐먹고 실질적 피해자들을 짓밟아온 자한당 계열이 몰락합니다. 뭐 언제든 돌아올 수 있지만 당분간은 힘들겠죠. 그래서 위안부와 징용공 등의 목소리가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됩니다.

일본의 심정이야 뻔하죠. 하청이나 받아먹던 한국이 이제 목소리를 내니까 불쾌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이젠 더 이상 미국도 일본의 등을 밀지 않고 말이죠. 더구나 6억불이건 뭐건 일단 한국은 돈을 받아 쳐먹지 않았냐는게 본심이고, 더구나 어차피 1965년에도 그 이후에도 솔직히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했던 건 아니니까요.

최근의 한일관계 파탄은 그래서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던 겁니다. 미국의 관리감독이 느슨해지고 한일이 서로의 관계에서 절실하지 않으니... 결국 1965년 진실에 기반하지 않은 봉합조치는 이렇게 결단이 납니다.

저는 한국과 일본은 진나라 앞에 놓인 조위한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봅니다. 위에 대항하는 촉이나 오이거나. 순망치한이라고 한국이 없어지거나 일본이 없어지면 결국 중국만 웃겠죠. 하지만 이런 과거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상황이 변했기 때문에 이젠 한일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국가 모두 상대국에 대해 인식을 전환해야 할 필요가 있겠죠. 안 그러면 일본이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은 뒤에서 "반인륜범죄국"이란 나팔을 불고 있을테고, 한국이 뭘 해도 일본은 뒤에서 막강한 자본력을 통해 훼방을 놓으려고 하겠죠. 하지만 새로운 관계는 갑자기 떡하니 생겨나는 건 아닐테고, 지금 같은 갈등을 통해 상처를 입고 입히는 경험을 해야 생기게 될 겁니다. 인간은 워낙 어리석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