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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14:06
고려 목종과 의종을 보면 조선 시대 중종과 인조가 연산군과 광해군 살려둔 건 참 의외긴 합니다.
연산군은 폐위되고 얼마 뒤에 죽어서 죽인거 아니냐는 말이 있지만 광해군은 그냥 살려뒀으니...
23/11/19 14:23
목종은 현종보단 권력자인 강조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 죽인 걸로 보이고, 의종도 자꾸 반란의 명분이 되니 이의방에게 부담이 되어 죽였으니
연산군, 광해군이 과가 많다고는 해도 그 정도 부담이 안 되었을까 싶어서... 단종도 실제로 반란 모의가 나타나자 엮어서 죽였으니까요.
23/11/19 14:33
연산군은 말할 것도 없고, 광해군의 경우 제주로 유배당했을 때 길 가던 평민들이 면전에다가 대놓고 '나라 후루룩 말아먹은 영감'이라고 비웃었고 거기에 광해군은 아무 대꾸도 못 했다는 기록까지 있는걸로 봐서 귀족층은 물론 민심도 매우 좋지 못했습니다. 반란 모의라는게 결국 세력이 있어야 하는건데 (실제로 단종은 폐위 후에도 동정하는 사람들이 많아 세조 입장에서도 엄청난 부담이었죠) 저 둘은 워낙 왕 시절에 거지같이 해놔서 복위 세력이 남아있지를 않았죠.
23/11/20 05:11
광해군의 경우 문제가 없던 건 아닙니다. 이괄의 난 때 그 와중에도 인조가 광해군 처소를 옮겨버렸고 실제로 추대를 위한 움직임이 있었는데 실패했던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에도 청이 혹시나 광해군을 추대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습니다. 다만 말씀하신대로 조선 자체적으로 민심은 좋지 못한 왕인데다 청도 딱히 광해군에 대한 미련같은 건 없어서 지나가기는 했는데 인조 입장에서 신경쓰이기는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전쟁 끝나고 한양에 오자마자 강화도(교동)에서 탐라로 보내버린거죠.
23/11/19 15:22
조선 왕들은 명 황제라는 든든한 스폰서가 있으니 쉽게 못건드리죠. 그러니 즉위하면 최우선 보신책이 책봉 졸라대는거..
다음화에 나오겠지만 거란황제의 책봉을 받은 목종을 감히 갈아치웠다는 명분으로 대군이 쳐들어온 역사까지 남겼으니 더구나죠. 조선 건국도 고려왕들의 외가집인 원나라가 망했으니 가능했을 겁니다.
23/11/19 16:06
역알못이고 드라마 3화는 아직 안 봤는데 목종이 강조 되게 신임하던 것으로 아는데
강조는 왜 통수치는건가요? 게다가 충신인것으로 묘사되던데....거란에 잡히고도 변절안하구요 그냥 꼴리는대로 하는 트롤러다 목종이 사실 정치 못했다 현종이 시켰다 상황상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거란을 너무 싫어해서 싸우고 싶었고 거란이 책봉한 목종체제로 가면 거란이랑 싸울 명분이 없었다?
23/11/19 16:42
강조가 애초에 목종이 죽은 줄 알고 거병을 했던게 컸죠.
근데 목종이 알고 보니까 살아 있었네? 그런데 이미 거병은 해버렸네? 이러면... 본인이 칼을 거두고 싶어도 거둘 수가 없는 상황이 되버린겁니다. 여기서 병력 해산하고 원대복귀하면 목종이 설령 보호해줄 의지가 있다고 해도 결국은 프리고진 꼴 나는거라...
23/11/19 16:47
실제 역사상으로도 강조가 왜 목종을 배신하는지는 명확히 밝혀진바가 없어서 추측의 영역이 많습니다.
기록상 강조가 목종에게 죄책감이 많았고 끝까지 고려에 충성했던건 사실입니다. 강조 일파들도 고려에 충성했던지라 드라마상 묘사가 맞습니다. 일단은 강조가 목종이 죽은거라 잘못 알고는 명령보다 훨씬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내려왔는데 막상 목종이 살아있다는것을 알자 처벌받을것이 두려워 급발진한거라는게 정설이라 알고있습니다.
23/11/19 20:25
역사기록으로 봐서는 진짜 몬가몬가의 기록이라 이걸 드라마로 어떻게 표현할지 궁금했는데
강조의 대사가 상황상 너무 적절하게 대사쳤죠.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거 이상의 표현이 없었던것 같습니다.
23/11/19 21:18
1. 강조는 서경 유수/서북면 도순검사로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고려 전기의 서경은 굉장히 중요한 북방의 거점이었기 때문에
서경 유수로 아무나 데려다 놓을리는 없고 이후 행보로 보더라도 트롤러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2. 목종은 직접적인 정치보단 신료들에게 맡겨두는 방관형 정치를 했고, 기본적으로 정치 행위가 어머니 때문에 쉽지 않았습니다. 대신 목종이 가장 적극적이고 신경 썼던 것은 왕씨 사직의 보존이었습니다. 이부동생을 후계를 인정하지 않고, 대량원군을 후계로 삼았고, 군사를 보내 보호했으며 이를 관철하기 위해 강조를 불러들이게 됩니다. 3. 당시 대량원군은 목숨이 왔다갔다 하고, 지지기반이 없던 상황이라 뭘 시킬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굉장히 어렸죠. 4. 이게 가장 설득력 있는 말입니다. 강조는 목종이 시해 되었다는 말을 믿고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왔는데 와보니 상황이 아니었던 거죠. 상황이 그렇게 되어버리니 결국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세우게 됩니다. 5. 강조도 상황이 그렇게 되어서 어쩔 수 없이 본인이 나설 수 밖에 없었던거지 거란과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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