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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2/10/13 23:23:15
Name 한니발
Subject DAUM <4> 下

  이영호의 본진으로 파고든 김준영의 뮤탈리스크는 상상 이상의 반격에 맞닥뜨렸다. 터렛의 포화는 일반적인 테란 방어선의 그것보다 강력했고, 바이오닉 병력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완전한 지대공 방어를 펼쳤다. 서경종의 뮤탈 뭉치기 발견 이후 테란의 방어책도 함께 발전해왔다고는 하나, 이영호가 지금 펼쳐내는 뮤탈 방어는 개중에서도 특출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는 차라리 완벽한 맞춤 방어였다.
  이영호는 정말로 김준영을 꿰뚫고 있었다.
  뮤탈로 시작되는 일련의 흐름, 그 첫 일격을 막아낸 보상으로 이영호는 기다렸다는 듯 바이오닉 병력을 몰아 김준영의 6시 멀티를 덮쳤다. 2기의 러커도 헛되이, 압도적인 병력 차 앞에 김준영의 멀티는 파괴되고 말았다.

  - 다음은, 저글링 - 러커에 의지한 중앙 회전(會戰), 혹은 빈집을 노려온다.

  이영호는 뇌까리면서 7배럭의 바이오닉과 탱크, 베슬을 몰아 중앙으로 나섰다. 김준영은 과연 현란한 움직임으로 저글링-러커를 몰아 이영호의 후방을 노렸고, 이영호는 무려 세 기의 탱크를 내주는 뼈아픈 타격을 입었다.
  대신, 그 대가로 이영호는 김준영의 12시 멀티를 공략해냈다. 그로써 '김준영의 레어'를 끝내고 경기를 후반부로 이끌어낸다.

  - 하이브에서 디파일러에 매달려 발버둥치고,

  김준영의 디파일러는 이름난 움직임 그대로였다. 디파일러와 함께 소수의 결사대가 6시에서 화려한 전투로 이영호의 대군을 격퇴시켰으며, 그를 틈타 저는 12시의 멀티의 재건을 노렸다.
  그러나 이영호는 죽은 병력만큼의 대군을 다시 6시로 들이박았다.
  11시 멀티에서 나오는 풍족한 자원에 기대, 이영호는 죽어나가는 병력들의 빈 자리를 족족 다음 유닛으로 메웠다. 밀려드는 바이오닉의 파도는 영웅적인 활약을 한 저그 결사대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다만 덮치고, 전진하고, 덮치고, 다시 전진했다.
  6시는 두 번째로 함락 당했으며, 다크 스웜을 무용지물로 만들 스파이더 마인이 센터 전역에 설치되었다.

  - 그조차도 무위로 돌아가면 끝난다.

  최후의 생명줄, 김준영의 12시를 무너뜨린 건 다수 베슬이었다.
  필사의 각오로 최후의 일전을 치르기 위해 모은 병력들은 한 번 적들과 맞부딪치지도 못한 채, 이레디에이트에 걸려 발광하며 저들기리 부대끼면서 죽어갔다.



  3경기, 파이썬.
  김준영은 자신의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압도적인 저럴의 움직임, 화려하기 그지없는 디파일러의 활용.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파이썬에는 오직 이영호만 보였다. 이것은 이영호의 게임이었다. 이영호만의 게임이었다.
  김준영을 안다.
  물론 이영호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준영은 한 번 숨을 죽였고, 그리고는 깨달았다.
  자신은 이미 한 번 어떻게, 하고 이영호에게 물었고 그때도 대답은 없었다.
  이영호는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이쪽과 대화할 생각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 아니, 눈조차도 마주치지 않았다. 오직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가 답할 뿐.
  그런데도 그 대답은 옳다.
  무리한 전투 끝에 죽은 자리를 족족 메우는 새로운 바이오닉 병력.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는 적군 위로 용서 없이 내리꽂는 이레디에이트. 자신 외에는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을 주지 않는, 독단적이고 고고한 병력 운용.
  그런데도 승리를 향한 과정에서, 그의 선택은 항상 옳았다.
  대담함 따위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타고나는 불공평함. 재능의, 환경의, 그 외 그 모든 것들의. 이영호는 그 주어진 몫의 차이에 기대어 스스로 상대를 규정한다. 상대를 자신의 인식 위에 못 박고 게임에 임한다. 대답은 듣지 않는다. 변명도 비명도 듣지 않는다. 승패에는 영향이 없으니까.



  세상이 이해하려고 애쓰는 자, 세상이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자, 세상이 맞춰가는 자.
  세상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자, 세상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자, 세상에 맞춰가는 자.
  그것은 결코 좁혀질 수 없는 두 사람의 차이였다.
  이영호와 김준영에게 주어진 몫이었다.

  그리고 다시 김준영은 물었다.
  김준영은 누구인가.
  대답은,





  세상에 맞서는 자

「비 내리는 철이 되면 강은 맹렬한 기세로 흐르고, 붉은 갈색 채찍처럼 거칠게 요동 치고, 강 밖으로 거대한 진동이 지진처럼 땅을 뒤흔든다. 이런 힘은 강기슭에 떨어지는 비로부터 오지 않는다. 산에서부터 내려온 실개천이 바로 강물에 힘을 준다. 강물은 모든 것을 부순다. 강물은 땅을 갈아엎어 새롭게 만든다.
    … "자네들은 실개천이라네. 우리들은 강물이고……. 자, 이제 내려오게나!"」
                                                                                                                          - 마르코스,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中


  GG는 요즘에 이르러서 비단 게임 말고도 일상에서 쓰이는 말이 되었지만, 과연 이 말을 쓰는 사람들 모두가 그 의미를 알고 있는가는 의문이다.
  GG란 건 물론 본질적으로는 항복 선언이다. 패배를 인정한다는 의미다. 헌데, 어째서「이 게임에서 내가 졌다」란 말을, 「Good Game」이라고 표현하는가.
  - 비록 내가 지고 말았지만 좋은 게임이었습니다.
  - 전력을 다한 승부였기 때문에, 패배했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왔다면 그것은 자신이 전력을 다했음에도 이기지 못한 상대에게 표하는 경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위선적인 자기 위로에 불과하다.
  그 경계는 대단히 모호하다. 확실하게 그 경계선을 그을 수 있는 것은 게임에 임한 본인뿐이며, 그렇기에 GG는 패배의 의미를, 책임을, 오직 본인에게 묻는 가혹한 항복 선언이다.
  어쩌면, 김준영이 GGPlay란 이름을 선택한 순간 이미 모든 것은 결정되었는지도 모른다.



  한빛 스타즈는 본디 에이스를 가져본 적이 없는 팀이었다. 화려한 진용을 갖췄던 전성기에는 누구 한 사람을 에이스로 꼽는다는 게 쉽지 않았고, 몰락 이후로는 딱히 에이스라 불릴 만큼의 활약을 펼친 선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프로리그는「에이스 결정전」이라는 시스템을 새로이 도입했다. 경기 당 한 번씩의 출전이라는 제약을 깰 권한을 가진 단 한 명. 결전의 순간 직전까지 휘장 뒤에 몸을 숨기고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마지막 카드. 팀의 명운을 손에 쥐고 출전하는 최후의 승부사. 각 팀은 그러한 자격을 가진 선수를 의무적으로 선택해야 했다. 한빛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재균 감독은 김준영을 선택했다.
  김준영은 이번에도 그저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결정을 내렸을 때, 김준영은 아직 '한빛의 에이스'가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물론, 한빛의 선수들도, 다른 팀의 스탭들과 선수들도, 관객들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오로지 이재균 감독만이 알고서 결단했다. 김준영GGplay를 선택했다.

  - 이건 이상하다.

  '한빛의 에이스', 그 울림에 섞인 이명을 사람들이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이명은 더욱 분명히 사람들의 귀에 꽂혔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재균의, 한빛 스타즈의 이상을 눈치 채고 있었다.
  김준영만이 에이스 결정전에 출전하고 있었다.
  패배를 거듭하면서도 출전하고 있었다. 아니, 출전 당하고 있었다.
  맵을 가리지 않았다.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한빛의 에이스 결정전에는 김준영이 출전했다. '설마 또 나오랴'하는 마음으로 반신반의하면서 김준영의 출전을 대비하면 어김없이 그 자리에 김준영은 나타났다. 몇 번을 패해도 다시 나타났다.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에이스 결정전이 제공하는 특권인 엔트리 비공개의 휘장을 스스로 저버렸다는 점에서 그러했고 가장 유리한 조건이 마련된 전장에 가장 적합한 선수를 선택하여 내보낸다는 프로리그의 상식을 저버렸다는 점에서 그러했으며 다른 그 무엇보다 좋지 않은 결과가 이어짐에도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재균 감독의 선택은 이해될 수 없었다. 스폰서의 침묵은 그것이 이재균 감독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팀 운영 의지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마침내 이재균 감독마저도 손을 놓고 만 것인가를 걱정했다. 김준영이 겪을 자신감 상실과 체력 저하를 걱정했다. 이 성과 없는 싸움의 마지막을, 유서 깊은 명문 한빛 스타즈와 그 에이스의 끝을 걱정했다.
  그 에이스 - 김준영을 걱정했다.
  사람들에게, 언제부터인가 김준영은 이미 '한빛의 에이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 숱한 패배가 만들어낸 에이스. 도망치지도, 물러서지도 않고, 전장을 선택하지 않고 싸우는 자. 그 모든 책무를 등에 업고 세상에 맞서는 자.
  한빛답게.
  한빛답게, 김준영은 중얼거렸다.



  낭만시대는 어떻게 그토록 많은 영웅들과 전설들이 살아 숨 쉬는 시간이 되었던가.
  그 대답은, 황제가 패배했기 때문이다. 황제가 그 모든 것들을 틀어쥐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황제의 가슴팍에 창을 꽂았고, 그 피로 땅을 적셨기 때문이다. 그 피 먹은 창 자루 하나하나가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고목이 되어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패도를 꿈꿨던 자와 그를 가로막은 자들이 있었다. 만일 모든 이들이 그 패도에 무릎 꿇었다면, 낭만 시대라 불린 그 시간은 오직 황제 단 한 사람을 위한 용비어천가가 되었을 것이다. 오직 제국의 건국 신화였을 것이고, 그 시대를 살아간 모든 이름들은 황제의 영광을 위한 수식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황제가 몇 번이고 꾸었던 패도의 꿈은 최후의 순간마다 깨졌고 그 때마다 새로운 전설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자아내는 저마다의 이야기에 이끌려 각자의 영웅들과 함께 했으며, 그 모든 패배에 굴하지 않는 황제 또한 사랑했다. 그 시대를 살아간 모든 이름들은 그렇게 전설이 되었다. 황제가 자리를 비워도 그 빈 하늘을 지탱할 수 있는 울창한 숲이 되었다.
  그렇기에, 한빛은 낭만 시대를 연 또 한 명의 주인이다.
  박용욱은 임요환의 전승 우승을 저지했다. 김동수는 임요환의 세 번째 우승을 저지했다. 박정석은 그 둘 모두를 저지했고, 세 사람은 모두 '가을의 전설'로서 황제의 이야기를 영원히 미완 - 결코 끝나지 않는 이야기로 만들었다.
  황제는 세상이 원하는 자였다. 세상이 이해하려고 애쓰는 자, 세상이 맞춰가려 애쓰는 자였다.
  한빛의 선수들은 그 황제의 세상에 맞서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황제의 통치를 거부했고, 끝끝내 황제의 가슴팍에 칼을 꽂았다. 그리고 그들 두 흐름이 함께 하면서 다시없을 연주가 시작되었다. 꿈꾸는 항해자들의 낭만 시대가 노래했다. 폭풍 속에서도 항해자들은 저마다의 찬가를 부르며 맞섰고, 그는 마치 하나의 멜로디처럼 섞여 퍼졌다. 사람들은 마음껏 울었으며 마음껏 웃었다.
  혼자서는 결코 연주할 수 없는 음악이었다.



  김준영은 누구인가.
  한빛 스타즈, 그 단 한 명의 에이스다.
  이재균 감독은 김준영을 선택했다. GGplay를, 대인을, 세상을 받아들이는 자를 선택했다.
  그를 16강 저그로 규정한 세상을, 그토록 그에게 많은 것을 앗아간 그 세상조차도 그 그릇에 담아낼 수 있는 김준영에게 믿음을 걸었다.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자만이 세상에 맞설 수 있다.
  왜냐하면, 세상에 맞서는 자는 세상이 걸어갈 다음 길을 준비하는 자이기도 하니까.
  '한빛의 에이스'는 그 모두를 짊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 모두를 짊어질 수 있는 대인이 아니면 안 된다. 그 이름이 그가 담아낸 그 모든 것과 짊어진 그 모든 것을 말한다. 그 이름을 쓰는 이상 자신을 숨길 여력은 없다.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 적에게 간파당한 채 싸울 수밖에 없다.
  다만.
  보인다고 해서, 알아차렸다고 해서, 그는 무용한 공격일까.
  뻔하되 올곧은 직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그 일격의 무게를, 또한 알아차린 것만으로 막아낼 수 있을까.

  막아낼 수 없는 공격을 피해야 한다.
  그러나, 앎은 두려움을 쫓고, 안다고 착각함은 만용을 불어넣는다. 만용에 사로잡히면 피한다는 선택지는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이영호는 팀의 운명을 바꿔놓을 만한 재능의 소유자다. 김준영 자신과는 달리.
  그러니까 이영호는 피하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김준영의 손이 올라갔다.





  언젠가, 신이라 불리울 사나이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 사도신경(使徒信經) 中


  몽환을 버리고 몬티홀에서 끝낸다 - 이영호는 그렇게 마음먹고 임했으리라. 그리고 지금까지 그의 뜻은 모두 적중해왔다. 히치하이커에서 김준영의 의표를 찔러냈다. 파이썬에서 김준영의 패턴을 완벽하게 읽고 격파했다.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그의 손바닥 위에서 움직였다.
  하지만 지금, 흐름이 이영호의 뜻을 거슬렀다.

  - DAUM 스타리그 2007 S1 4강 B조 4경기 김준영 VS 이영호 in 몬티홀.

  시작은 뮤탈.
  그럴 것이었다. 그래서 이영호는 몬티홀의 미네랄 장벽들을 제거해나갔다. 처음엔 멀티와 연결된 위쪽의 장벽을, 다음은 아래쪽의 장벽을.
그리고 아래쪽 장벽이 열리는 순간, 바로 그 순간 아래 대륙을 횡단해온 저글링들이 한 줄로 들이닥쳤다.
  거짓말처럼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놀라 아래쪽 장벽을 향해 시선을 돌린 바로 그 순간, 이번에는 위쪽 장벽으로 또다시 수 기의 저글링이 방어선을 뚫었다.
  노 스포닝, 3해처리, 발업 저글링.
  배럭 지대를 완전히 빼앗겼다. 저글링을 가까스로 막아내자 노스포닝 3해처리가 토해낸 뮤탈리스크 떼가 하늘을 덮었다. 뮤탈에서 가디언으로, 러커로, 디파일러로, GG로, 5경기 : 몽환으로.
  날치기와도 같은 패배였다.

  "아 - 몬티홀에서 끝냈어야 되요, 왜 후환을 만듭니까!"

  전용준 캐스터의 탄식이 경기장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부스 안의 이영호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들을 필요도 없었다. 다른 그 누구보다도 이영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몬티홀에서 끝냈어야 했다.




  

  몽환에는 노스탤지어가 있다. 제노스카이와, 라이드 오브 발키리즈, 그리고 개마고원이 있다. 그 네 전장이 짜 맞춰진 맵이 몽환이다. 이영호는 그들 전장들 중 그 어느 곳에서도 싸워본 바 없다. 그들 전장이 쓰였던 시대를, 그들 전장을 누볐던 위명들을, 그들 전장이 품어낸 싸움들을 알지 못한다. 이 앞은 이영호에게 있어 미지의 전장이다.
  그럼에도 이영호가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이 앞에 깔린 전장의 안개를 헤쳐 나아갈 단서가 있다면, 그는 이영호가 김준영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준영이 가진 승리 공식이 어떤 것인지를, 이런 자리에서 김준영이 어떤 선택을 내리는 선수인가를 이영호는 알고 있었다.
  1경기, 몽환에서 김준영의 선택은 9드론 저글링이었고 자신은 그에 당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5경기다. 마지막 승부처인 만큼 김준영은 가장 안정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았다. 마지막일 수도 있기에, 자칫 허무하게 끝날 수도 있는 도박에는 손대지는 않으리라. 마지막을 두려워하는 김준영이기에, 자신이 가장 잘 하는 플레이를 시도하고 그 끝에 지더라도 기나긴 장기전 끝에 - 썩 나쁘지 않은 패배였노라 자위할 수 있는 선택을 할 것이다. 지금껏 때때로 과감한 한걸음을 보여주었다 해도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까지 스스로를 저버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영호는 확신했다.

  이영호의 선택은 1경기와 같은 노배럭 더블이었다.
  김준영의 선택은 12앞마당이었다.

  - DAUM 스타리그 2007 S1 4강 B조 5경기 김준영 VS 이영호 in 몽환.

  김준영 1시, 이영호 5시.
  적중이었다. 심지어 김준영은 자신의 노배럭 더블을 드론 서치로 확인한 뒤에도 3 해처리를 가져갔다. 이영호가 3경기에서 낱낱이 파헤친 김준영의 그 전형적인 패턴임에 틀림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시작은 뮤탈리스크.
  잠시 머린을 쉬면서까지 배럭을 늘려 뮤탈이 날아올 타이밍에 맞춰 바이오닉을 대량으로 찍어냈다. 완벽한 타이밍으로 곳곳에서 미사일 터렛을 완성시켰다. 뮤탈리스크의 습격을 맞받아칠 준비를 마쳤다.
  과연 시작은 뮤탈리스크였다.
  그러나 막기는 쉽지 않았다.

  이영호의 본진 왼쪽에서 파고든 뮤탈리스크는 미끄러지듯 움직이면서 테란 본진을 유린했다. 머린의 사거리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면서도 홀로 떨어진 SCV와 머린들은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바이오닉 병력이 쫓아오면 달아났고, 물러서면 들이댔다. 테란의 피해가 쌓여나가는 동안 저그는 11시, 제노스카이 - 옛 이름은 레가시 오브 차 -를 가져가면서 러커를 생산하여 중앙을 장악했다.
  이영호는 한 번 참아냈다.
  이제 김준영의 다음 움직임은 저럴을 사용한 중앙 회전, 혹은 빈집털이가 될 것이다. 이미 뮤탈은 막지 못했으니 과감하게 포기하고, 중앙 전투에서 승리한 뒤 김준영의 멀티를 공략하면 된다. 아직은 늦지 않았다. 여기서 저지하면 김준영의 하이브는 의미를 잃는다.
  과연 그 또한 옳았다. 이영호가 한 번 인내함으로써 11시로 이어지는 길목에 매복한 스탑 러커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영호의 병력에 곧 탱크가 합류했고, 이어 베슬이 더해졌다.
  - 바로 지금!
  이영호는 주저하지 않고 중앙으로 치고 나갔다. 이쪽저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맞붙어 박살낼 저그의 지상군을 미친 듯이 찾아 헤맸다.
  그러나 그 눈에 들어온 것은, 테란의 병력을 본체만체하고 그 옆으로 스쳐 지나는 저그의 지상군이었다. 그들은 테란의 본대와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맹렬히 질주하고 있었다.
  빈집털이.
  이영호는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감을 느꼈다.

  테란은 곧바로 저그의 뒤를 쫓았지만, 세 종족 중 최고를 달리는 저그의 기동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저글링과 러커, 더해진 뮤탈리스크는 노출된 테란의 앞마당에 머리를 들이박았다. 사방에서 SCV와 테란 건물의 폭발음이 들렸다. 막대한 피해를 입은 뒤 뒤늦게 저그 병력을 소탕하면서 이영호의 머릿 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이제는 막을 수 없다.
  이영호는 알 수 있었다.
  테란의 뒤늦은 11시 공략은 디파일러에게 막힐 것이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다음은 아드레날린 저글링이 디파일러와 더불어 날뛸 것이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쌓인 가스가 일거에 사용되는 순간 마지막 마무리가 올 것이다. 이영호의 얼굴에는 땀이 흥건했고, SCV들은 본진 곳곳에서 태업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이영호만이 아니라 이 게임을 지켜보는 그 모든 사람들이 이어질 장면을 예측할 수 있을 터였다.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총을 쏘아도 박히지 않는 아머와, 카이저 블레이드를 교차할 때마다 내짖는 괴성. 지축을 흔들며 테란을 집어삼킬 파도. 터져나올 울트라리스크 군단. 알아도 막을 수 없는, 김준영의 피니싱 무브.

  "언제, 언제 찍어 내나요 울트라리스크? 이제, 나올 것 같은데요 분위기가? 이제 나오는 분위기에요!"
  "저게, 저 에그가 울트랍니까? 5년 동안의 이재균 감독의 - 아 저글링이네요. (으하하하핫) 저글링이어도 큰 상관없습니다. 이재균 감독의 5년의 꿈을 이뤄줄 저글링이 나왔어요."
  "아, 에그도 저주 받습니까?"
  "…내가 뭐, 신예 상대로 울트라까지 써야 되겠느냐 뭐 이런 건가요?"
  "예, 아 이거. 이 친구들이, 이 친구들이 울트라겠네요 지금!"
  "저글링 같은데요? 저글링 같아요."
  "-울트랍니다아아아-! 항상 김태형 씨, 김태형 씨는 반대로 가고 있죠! 반대로 가는 해설자 김태형! 하지만, 어, 경기의 흐름은 제대로 읽고 있어요!"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핫!"

  엄재경 해설은 견디다 못해 폭소를 터뜨렸고, 관객들은 비명에 가까운 함성을 내질렀다.
  그 모두를 뚫고서, 울트라리스크 군단은 깨어나자마자 달렸다. 한 줄로 빠르게 내달리는 거체들의 옆을, 지지 않겠다는 듯 저글링들이 더욱 빨리 스쳐 달렸다. 그 무시무시한 파도 위로는 스컬지들이 하늘을 갈랐다.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그 파도는 테란의 주력군과 맞닥뜨려 - 집어삼켰다.



  부스 밖에서는 관중들이.
  땅에서는 울트라리스크가, 하늘에서는 스컬지가. 사방천지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이 화면 속과 화면 밖 전부를 뒤흔들었다. 미니 맵에는 붉은 점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울트라-저글링의 파도가 테란 병력을 덮치는 동안 그들의 뒤에서는 새롭게 생산된 울트라들의 제 2파가 밀려 내려오고 있었고 그들의 앞에서는 플레이그가 피의 비처럼 연신 테란 병력 위로 흩뿌려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김태형 해설은 머쓱함을 감추려는 듯 소리 높여 탄식했다.
  "이영호도 - 이영호도 이런 걸 당하나요?"



  이영호는 손을 들어 코에 묻은 땀을 닦았다.
  꿀꺽, 하고 목으로 마른 침을 넘겼다.
  알았는데. 다 알고 있었는데도 막지 못했다. 김준영이 내리찍은 마지막 일격은 너무나 뻔하고 또 뻔했는데도, 받아내는 순간 그 무게를 이겨낼 수 없었다.
  그 무게를 알기에는 이영호는 아직 너무 어렸다. 하지만 어린만큼 이영호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영호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고, 그 패도는 아직 멀었다.
  다만, 이영호는 이 패배로 단 한 번의 기회 밖에 주어지지 않는 그 이름, 「로열로더」는 영원히 빼앗겼다.
  송병구와 벌인 3,4 위전에서도 송병구의 캐리어에 그 위명만을 더해준 채 그의 프로게이머 인생 첫 번째 셧아웃을 당했다.
  그것은 예고에 지나지 않았다. 앞으로 이영호가 겪을 그 무수한 상실들, 지금껏 그의 곁을 지켜준 매직엔스 선배들이 남길 공백, 오랜 시간 홀로 팀을 이끌며 견뎌야 할 가혹한 시련들의 예고에 지나지 않았다.



  신이라 불릴 그 패도는, 그 모든 시련들의 너머, 아직은 먼 곳에서 자신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무대를 준비한다

  「"우리는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를 위해?"
     "자신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 이영도, 『눈물을 마시는 새』中





  김준영이 그답지 않은 V사인 세레모니를 하고 부스에서 걸어 나왔다. 그가 활짝 웃으며 이재균 감독, 그리고 동료들과 차례로 하이파이브를 하는 동안 경기장에서는 함성이 가라앉지 않았다. 사람들은 아직도 경기의 여운에, 채 가시지 않은 흥분감에 젖어 있었다. 그것은 그 때를 - 사대천왕이 건재했떤 낭만 시대의 한 가운데를 떠올리게 했다.
  온게임넷은 그를 보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마재윤이 없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결승전을 준비했던가.
  임요환이 없었을 때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결승전을 준비했던가.
  우리는 무대를 준비한다. 이 무대를 채워나가는 것은 - 누구의 몫인가.



  2007. 7. 16
  이영호와 김준영의 4강전이 벌어진 뒤 3일 후, 온게임넷은 각종 미디어를 통해 DAUM 스타리그 2007 S1의 결승전 장소가 변경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결승 장소, 울산 월드컵 경기장 호반 광장.
  수용 인원 - 5000명.



   - DAUM <5>에서 계속







===================================

  4편에서 도움받은 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재윤, 김준영, 그리고 3해처리 - 하이브 운영」- Judas Pain
「이영호 + 송병구 / 김동수」- Judas Pain
「T1의 지장 주훈 감독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이재균 감독과 조규남 감독...」 - 다크고스트
  

  내일이 부대복귀일인 관계로 DAUM 완결편인 5편은 11월 말에 올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5경기는 꼭 한 번 다시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엄전김의 개그 해설에 더해서 관중들 함성 소리와 함께 울트라들이 질주하는 피날레가 정말이지 압권이라, 해설 전체를 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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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조하는남자
12/10/13 23:33
수정 아이콘
그렇죠.. 이영호가 갓이라 불릴 때까지 꼼빠들은 고개도 쳐들지 못했었죠. 하하하.
이영호 선수가 져서 안타까웠던게 한 두번도 아니었던지라...
하지만 결국은 보상 다 받았죠. 이영호 선수 스스로도.. 그리고 그의 팬들도...

김준영 선수는... 다음 볼때는 기적이라고 생각했지만 해가 지날수록 그의 경기력을 볼 때 이 때 우승은 필연이었습니다.
대단한 선수...
Practice
12/10/14 00:02
수정 아이콘
이영호가 박카스배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리기 전까지, 이영호의 팬들은 평가 절하 당하는 이영호를 두고 박성균이 데뷔 후로부터 트로피를 들어올리기까지 걸린 시간이 1년이니, 그 시간 만큼은 이영호를 기다려줄 수 있지 않은가를 구걸해야만 하던 때도 있었지요. 그런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영호는 이영호 팬들의 기대에 훌륭하게 보답해주었습니다. 정말 고마울 뿐이에요.
12/10/13 23:40
수정 아이콘
지긴했지만 4강 5경기에서 1경기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노배럭 더블을 다시 지른 이영호선수에게 감탄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그 이영호를 운영으로 압도한 김준영..... 결승전에서 제대로 각성하게 되었죠.

여담으로 4강 3경기인 이영호vs김준영 파이썬 경기는 이영호선수가 굉장히 맘에 든 경기라고 밝힌 인터뷰도 생각납니다. 사실 이영호선수가 데뷔 초때 바이오닉 천재라는 명성이 자자했지만 저그전 방송경기에서는 저 4강전 하기전까지는 그런 모습을 별로 못보여줬었거든요.... 근데 3경기는 이영호선수가 왜 바이오닉으로 명성이 자자한지 알겠더라고요.

대인배도 꽤 잘했던 경기였는데.....

아무튼 이 두선수의 인연은 참 재밌어요 크크, 훗날의 인크루트에서의 승부도 그렇고......

이제 결승전이라는 피날레만 남았네요.... 11월까지 기다려야한다니 감질맛 나기도 하지만 꼭 기다리겠습니다~
Practice
12/10/13 23:58
수정 아이콘
"-울트랍니다아아아-! 항상 김태형 씨, 김태형 씨는 반대로 가고 있죠! 반대로 가는 해설자 김택용! 하지만, 어, 경기의 흐름은 제대로 읽고 있어요!"

이 대사는 해설자 김태형 아닌가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한니발
12/10/14 00:01
수정 아이콘
으아니 역대급 오타가...
근데 이슷빠 직장돌 프렉형 맞습니까? 저 예니-아틸라임.
Practice
12/10/14 00:03
수정 아이콘
아.. 아쉽지만 아닙니다.^^; 다만 그분이랑은 아아주 약소하게나마 인연이 있는데, 최근에는 lol을 즐기고 계신 모양이더군요.

아무튼 간에, 좋은 글 정말 잘 읽고 있습니다. 건필해주시길 부탁 드릴 따름이에요. 흐흐
한니발
12/10/14 00:04
수정 아이콘
헐 죄송합니다;;
Practice
12/10/14 00:08
수정 아이콘
연이 있으신 분과 같은 닉네임을 쓰고 있는 사람을 같은 판에서 발견하면 내가 알고 있는 그 분이 맞냐고 물어보는 건 당연한 일이죠 흐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는 글을 올려주시는 것만으로 감사 드리고 있습니다.
Mooderni
12/10/14 00:06
수정 아이콘
오오 4편까지 감사합니다! 다만 5편을 기다리는 나날들이 아쉽겠네요 ㅠㅠ
ps.그나저나 군인이셨던가요?
루크레티아
12/10/14 00:38
수정 아이콘
아니 세상에나...이런 역대급 끊어치기 신공이라니...
11월이 빨리 오길 빌겠습니다.
시네라스
12/10/14 01:29
수정 아이콘
그동안 이게 연재글인거 보고 나중에 보려고 했는데, 다음 스타리그에 대한 이야기 였군요 아아 대인배...
포프의대모험
12/10/14 01:39
수정 아이콘
다음편이 11월 --; 아아..
안수정
12/10/14 02:25
수정 아이콘
으악... 11월 ㅠㅠ
이 글 덕분에 여러가지 추억에 잠기네요..
고등학교 수험생활 때문에 잠시 손을 놨던 스타리그..
그리고 다시 한번 E스포츠에 푹 빠지게 만들어줬던 다음스타리그.....
저에게는 그런 의미가 소중한 대회였습니다.
포프의대모험
12/10/14 03:03
수정 아이콘
아 그리고 왜 이런 좋은글에 추천이 없는지
12/10/14 13:00
수정 아이콘
헐 11월이시라니 ㅠㅠ;;;

다음편엔 인크루트나 진에어, 대한항공 등도 꼭 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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