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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8/06/04 13:01:30
Name lunaboy
Subject 이 사람들은 왜 이길 수 밖에 없는가? - 1. 무질서의 절대적 강력함


며칠간 촛불집회를 "구경"하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87년 6월에 23세의 청년으로 그 뜨거운 현장에서 "구경"을 했던 세대로서, 이번 촛불집회를 보는 저의 마음은 참으로 복잡했습니다.

뭐라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
벅차기도, 흐뭇하기도 하고, 두렵고 혼란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고 갑갑하기도 하고...

많은 생각 끝에 제가 내린 결론은
"이 현상은 해석이 쉽지 않다"
그리고,
"이 싸움은 절대 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끝을 알 수가 없다."
였습니다.

80년대 중반 학번의 세대로서, 87년을 전후한 80년대와 2008년을 비교해보면서 몇가지 재미있는 차이점을 개인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첫번째 느낌, 무질서의 절대적 강력함에 대해 써 보고자 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번 촛불집회는 "한심할" 정도로 무질서합니다.

집회를 진행하는 주최측(?)도 도대체 뭘 주최한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그저 모인 사람들을 한곳에 모이게 하는 역할만을 합니다.
예전에는 대형 집회의 경우 고 문익환 목사님(명복을 빕니다), 백기완선생님(건강하세요), 야당의 몇몇 인사, 각 종교계 어르신들 등 소위 명망가의 연설, 총학생회, 노동조합등 각급 단체 대표의 연설, 선언문 발표, 노래 함께부르기, 행진 등 정해진 집회의 형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몇곡의 노래를 반복해서 틀고, 그나마 그 노래를 다 아는 사람들도 없고, 아는 사람은 따라부르고, 모르는 사람은 그냥 앉아 놀고, 행사진행이라고 해봐야 시민 발언대를 열어 몇몇 시민들이 올라가 열정적이지만 대부분 두서없는 열변을 토하고, 그리고는 "자, 이제 갑시다" 하며 떼로 세종로를 점령하고 걸어가기 시작하는 것이 행사의 전부입니다.

행진중에도 곳곳에 산만한 깃발들이 나부낄 뿐, 통일된 구호, 구호를 외치는 형식 등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누가 외치면 따라 외치고, 힘들면 그냥 걷고, 구호도 가장 원시적인 네자 구호, 여덟자 구호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 무질서는 정말 무섭도록 유연하고 강력하더군요.
어제 그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광화문을 거친 시위대는 서대문을 지나 경찰청에 도달했습니다.
시위대의 맨 앞은 각 단체의 깃발들이 차지했고, 시위대는 경찰청 정문앞 저지선부터 서대문 로터리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여전히 중구난방식의 "폭력경찰 물러가라" "어청수를 구속하라" "물대포를 맞아봤냐" 등의 구호를 한 20분 쯤 외치고 서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필연적으로 충돌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 시위대의 선두와 후미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선두는 "선봉대"의 자리이고, 선두에 따라 전체 행렬의 움직임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대규모 대치의 상황, 뒤돌아 설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선두와 경찰의 물리적 충돌을 통해 그 대치를 해소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폭력양상이 시작되는 거죠.

그런데....
기가 막히게, 이놈의 시위대는 "뒤로, 뒤로"를 외치며 슬슬 뒤로 돌아서더니...
맨 후미가 선두가 되어 그냥 또 광화문으로 "빠꾸"를 합니다.

조직화된 시위대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절대적 유연함이 빛을 발하는 겁니다.
앞뒤가 따로 없는, "하등동물적" 시위대!!

이건, 저희 세대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당연히 경찰들도 예견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돌아설지, 안돌아설지 모른다는데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전략을 파악하기 힘든 것이 아니라,
아예 "전략이 부재" 하기 때문에, 대처할 방법이 없는 것이죠.

세계의 어느 공권력이 이런 "무질서", 그것도 꼬투리 하나 잡기 힘든 "평화적 무질서"를 경험해 봤겠습니까?

이건 정말 이기기 힘들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분석불가능성"을 무기로 삼은 수만명의, 그리고 그 뒤에 그것을 함께 지켜보는 수백만의 사람들을 어떻게 이깁니까?

"대중"을 "대상"으로 생각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던 저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대중에게 무릎꿇어야만 한다"는 절대 진리를 다시 한번 보게 만든 무섭고 재밌는 경험이었습니다.

다음 글은 "폭력에 대한 반응의 상이함" 에 대한 감상을 이어서 써 보겠습니다.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9-07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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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토스
08/06/04 13:05
수정 아이콘
와 멋진 글입니다.

다음 글이 기대되네요.

저도 많이 참가했습니다만, 새벽에 경찰 시외대 모두 과열 될 때를 제외하고 11시 12시를 전으로 한 그때까지의 시위는....

이게 시윈지 걷기 대회인지 분간하기 힘들정도였어요.
[NC]...TesTER
08/06/04 13:06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정말 다음 글이 너무 기대됩니다.
08/06/04 13:13
수정 아이콘
96학번인 저로써는 알지 못하던 내용입니다. 다음 글이 기대되네요(2) ^^
누리군
08/06/04 13:15
수정 아이콘
원래 하등동물... 이라는 이야기는 비하의 의미로 쓰이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서는 굉장히 재미있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네요 ^^

다음 글 저도 기대됩니다! ^^
Who am I?
08/06/04 13:17
수정 아이콘
유쾌한데...이상하게 서글프군요.

잘읽었습니다. 다음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슈퍼슈프림
08/06/04 13:1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정말 다음 글이 너무 기대됩니다.
08/06/04 13:19
수정 아이콘
흠 재미있네요. 역시 글은 재미있어야 합니다. 근데 배너좀... ^^;
08/06/04 13:23
수정 아이콘
저도 잘 읽었습니다. 다음 글도 기대가 되는데요.^^
오소리감투
08/06/04 13:24
수정 아이콘
미소를 머금게 하는 집회후기네요^^
08/06/04 13:25
수정 아이콘
분수님// 배너 달았습니다. ^^ 여러분 부커진 많은 참여 부탁드려요..^^
물흐르는소리
08/06/04 13:25
수정 아이콘
사실 2002년 월드컵 당시 거리응원을 보며 동생과 나누었던 얘기들이 생각납니다. 국가권력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에너지가 우리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이 눈으로 확인되었고, 사실 이 에너지는 당시 정부였던 김대중 정부뿐만 아니라 ‘진정한’ 기득권(이라고 쓰고 수구xx라고 읽습니다)층이라면 상당히 불편해야 할 현상이라고...

그 에너지가 미선·효순양 사건때 맹아적으로 드러났다고 보고(시작은 자발적이었으나, 기존 운동조직이 담아내기에 그렇게 버겁지 않았던 정도), 그것이 탄핵사태를 거쳐 이번 촛불시위때 극적으로 원형 그대로 드러났다고 생각됩니다. 최초의 가두진출이 일어났을 때, 통제되지 않는 대중의 분노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지 모르고 그것이 빌미가 되지 않을까 해서 지도부 없는 가두진출에 대해 우려했지만(물론 같이 있던 젊은 피지알러는 주저없이 참여했죠^^) 그것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게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90년대 초반 학번으로 그런 경험이 없는 세대다 보니(사실 아무도 없죠) 너무 성급하게 현상을 재단해버리고 말았다는 자책감이 들기도 합니다.

어쨌건 이 아름다운 무질서의 힘이 가져올 결과가 어디까지일지 아직도 가늠이 되지는 않지만 이미 그 에너지가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은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무질서를 보고 아름답다고 하는 lunaboy님이나 저나 타고난 반골 또는 아나키스트?? ...응??!!
★★승리의 시민들★★
쪽빛하늘
08/06/04 13:26
수정 아이콘
잘읽었습니다. 다음글도 기대중입니다~~~
08/06/04 13:27
수정 아이콘
어제 정말 멋졌습니다.

경찰청 주변이 봉쇄되어 더 이상 갈 길이 없는데..
어딘가부터 "뒤로 뒤로"를 외치니 그 많은 사람들이 함께 "뒤로 뒤로"를 외치며
꽁지가 머리가 되고, 머리가 꽁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앞뒤를 바꿔 행진을 하다가 다시 "깃발 앞으로"를 외치니
그 많은 사람 사이로 길이 열리면서 뒤에 있던 깃발이 선두로 나서 행진하더군요.
Brave질럿
08/06/04 13:31
수정 아이콘
추게로
08/06/04 13:34
수정 아이콘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탓일까요...
요즘 글들 중 가장 가슴깊이 와 닿는 글이었습니다.

추게로 (2)
SummerSnow
08/06/04 13:43
수정 아이콘
와.. 다음 글이 기대됩니다..+_+

추게로(3)
08/06/04 13:51
수정 아이콘
lunaboy님// 감사합니다. 혹시 글 쓰실때 배너 달고 싶으신 분들은 제게 쪽지로 연락 주시면 다는 방법을 알려드립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__)
검마독고구팩
08/06/04 13:53
수정 아이콘
하하하하.
정말 공감공감합니다. 하하하하.
08/06/04 14:02
수정 아이콘
최근에 본 글중에서 가장 공감하네요. 잘 읽고 갑니다.
ㅇㅓ흥
08/06/04 14:12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다음글 기대하겠습니다.
삐꾸돼지
08/06/04 14:12
수정 아이콘
헉.... 도....독고구검을 우리 국민들이 연마한셈이군요....
미남자군
08/06/04 14:16
수정 아이콘
저도 다음 글이 기대되네요. "폭력에 대한 반응의 상이함"이 주제라면, 돌고 도는 댓글만을 부르는 글들이 난무(저도 일조한 탓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하는 탓에 위의 글 처럼 잘 쓰여진 의견을 보고 싶네요.

추게로(4)
08/06/04 14:32
수정 아이콘
수뇌부가있다면 그사람만 잡아서 X치면 되는데

지금은뭐.. 단체에서 온사람은 극소수에

일반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거라

너무나도 무질서하기때문에 조직화된 경찰이 막기에는 역부족같습니다

조만간 시위가 또다시 청와대를 U자형으로 둘러쌓일거 같습니다
08/06/04 14:33
수정 아이콘
삐꾸돼지님// 그렇네요, 독고구검의 그것과 똑같군요;; 무적이네요;;
sunrise님// 그러게요. 나름대로 이번 시위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해보고자 했던 '다함께' 같은 경우도,
결국은 폭력시위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퇴출당해버렸죠... 시위대 스스로가 주동세력을 없애고, 그냥 흡수시켜버리고 있습니다.
여자예비역
08/06/04 14:3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어제 못나가 죄송해요 형님..ㅠㅠ 비도오고.. 일찍 자버렸,....ㅠㅠㅠㅠ)
Lunatic Heaven
08/06/04 14:54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_+ 저도 나가봐야 할 터인데... 휴우~
honnysun
08/06/04 15:04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좋은 글.
삐꾸돼지
08/06/04 15:24
수정 아이콘
AhnGoon// 무적이란 의미도 있고, 독고구검은 초식이 없고 너무나도 유연하고 무궁무진해서 상대가 예측을 하지 못하게 하죠 ^^ 이제 흡성대법만 익히면 2mb가 아니라 2tb라도 안질꺼 같네요.
Darwin4078
08/06/04 15:55
수정 아이콘
시리즈 다 모아서 추게로 가는게 어떨까요?
08/06/04 16:36
수정 아이콘
삐꾸돼지님// 이미 흡성대법도 익힌 상태지요. 이번 일을 통해 '한몫' 챙겨보기를 원했던 많은 단체들이,
닥치고 버로우한 뒤에 개인 자격으로 촛불을 들고 집회 대열에 녹아들고 있으니까요.
노동단체나 운동권 총학, 시민단체, 진보단체들이 얼마나 이번 기회에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고 싶겠습니까만은...
전부다 닥버로우 한 상태에서 지원사격이나 찔끔찔끔 하고 있는 상황이죠.
마녀메딕
08/06/04 17:00
수정 아이콘
무질서의 절대적 강력함! 동감동감 합니다. 멋진 해석이네여~
정테란
08/06/04 17:10
수정 아이콘
멋진 글 감사합니다. 근데 아직 자녀가 없으신 겁니까? 어익후~~
08/06/04 17:38
수정 아이콘
정말 죄송합니다만 살짝 태클 걸겠습니다. 저때 시위대가 양분 되어서 한쪽은 서대문쪽으로 해서 경찰청 앞으로 갔었는데 다른 한쪽은 그 반대방향에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경찰청 앞에서 합류를 한 것이지요. 저때 그쪽 방향으로 전경버스가 길을 막은 것처럼 보였는데 사실은 살짝 틈이 있어서 넘어왔었습니다. 서대문쪽에서 온 시위대는 '빠꾸'를 한게 맞는데 다른쪽에서 온 시위대는 그냥 전진한 셈이지요. 물론 이런 사실과는 완전 별개로 지금 시위는 앞도 뒤도 없는 무정형인 것은 맞습니다. 경찰도 하도 막다막다 안되니까 무대책이 대책이다 라고 깨달았는지 그냥 냅두더군요. 흠..
Minkypapa
08/06/04 17:48
수정 아이콘
선봉대가 없는 이번 시위대는 결코 약하지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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