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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0/07/11 00:14:21 |
Name |
zeros |
Subject |
Mr.Waiting - 8 |
술 안주거리로 쓸 무용담들을 꽤나 만들어 놓고 난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짧은 머리에 펌을 한 모습이 마치 졸업사진을 찍으러 가는 여대생을 떠올리게 했다. 새삼 시간의 힘을 느끼는 듯했다. 그녀는 이제 일본에 갈 준비를 한다고 말했다. 이미 들은 바 있는 얘기였다. 여름 방학동안 인도 배낭여행과 일본 단기 연수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고 그녀에게서 왔던 노란 편지지 속에 적혀있었다.
“근데 계획이 좀 바뀌었어. 인도엔 안 가려고.”
원체 여행을 좋아하여 역마살이 끼었다는 말까지 듣는 그녀에게서 들려온 말이라기엔 꽤나 어색했다. 난 이유를 물었다.
“일본 연수를 좀 길게 갔다 올거야. 아마 6개월 정도 걸릴 것 같아. 아빠가 기왕 갔다 오는 것 제대로 갔다오라고 하셔서. 내 생각에도 그게 나을 것 같아.”
꽤 오랜 기간동안 그녀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내가 군인이란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난 그녀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잘 다녀오라는 말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날 그녀와 마주앉아 술을 마시는데 갑자기 정적이 찾아온 때가 있었다. 나는 말없이 빈 술잔을 채웠다. 정적을 쫓은 건 그녀 쪽이었다.
“넌 나를 오랫동안 보아 왔잖아 예전이랑 지금이랑 어떤 것 같아? 내가 변한 것 같아?”
대답을 찾기 보단 질문의 의도를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까만눈은 오랜 고민을 허락하지 않았다. 난 그냥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아니.”
동시에 내 대답이 틀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의 마음이었다. 그녀가 내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를 일이었다. 혹시 그녀도 나처럼 잠깐이나마 대답의 의도를 생각했을까. 그녀는 자신의 잔 끝을 따라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더라. 다들 내가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대. 근데 난 내가 변한 것 같아.”
그녀의 질문과 뒤따라 나온 말들이 도대체 무얼 의미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변화가 도대체 무슨 변화인지 떠올려보려 했지만, 그녀는 나에게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내어 짧은 고민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 날 그녀와 함께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그녀가 없을 6개월을 가늠해 보았다. 이미 입대 전에 했던 전화로, 그리고 편지로 그녀는 내 마음을 알고 있을 터였다. 이대로 그녀를 6개월 동안이나 보내긴 싫었다. 나란히 앉은 그녀와 나. 우린 말이 없었다. 승객들은 하나 둘씩 내렸다. 난 그녀의 손을 힐끗 바라보았다. 앞으로 내릴 정거장까진 겨우 두, 세 개 남았을 뿐이었다. 가슴이 몹시도 뛰었다. 이 소리를 그녀가 들을까봐 더 긴장이 되었다. 버스는 가슴을 진정 시키기도 전에 도착해 버렸고, 난 먼저내리는 그녀 뒤에서 따라 내리며 짧은 탄식을 뱉을 뿐이었다. 그녀는 2주 후에 일본으로 떠날 계획이었고, 난 그녀의 출국 4일전에 촛불시위로 인한 위로 특박계획이 있는 상태였다.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보자는 약속을 해놓고 복귀를 했다. 그러나 다시 거세지는 시위 때문에 특박은 예정일 보다 밀려버렸고, 난 후회를 했다. 그녀가 없는 그 6개월 동안 간간히 휴가를 나갈 때마다 많은 허전함을 느꼈다. 연락이 끊긴 것은 아니었지만 목소리만으론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허전함을 채워보려 이곳 저곳을 홀로 돌아다녀 보았다. 그 날도 버스를 타고 가본 적 없는 어떤 곳에 홀로 다녀온 날이었다. 날이 저물고 바람은 점점 서늘해지는 듯 했다. 친구와 강가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전화가 왔다. 처음 보는 형식의 번호였다.
“여보세요?”
“준오야. 나야.”
지은이었다. 발신번호가 어색했던 것은 국제전화인 탓이었다.
“어, 무슨 일이야?”
“생일 축하해.”
잠시 전화기를 귀에서 떼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날짜는 나의 시간이었고, 0시를 나타내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이야기를 나누느라 잠시 잊은 생일이었다. 잠시 얼떨떨 해져버렸다.
“어…. 고마워.”
“응. 뭐하고 있어?”
“응. 친구랑 양재천 앞에서 맥주마셔.”
“아. 나도 가고 싶어!”
“하하. 그럼 얼른 공부 끝내고 와.”
너무나 기뻤지만 고맙단 말 외에 달리 표현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내 자신이 한스러웠다. 대신 항상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야.”
“응?”
“보고싶다.”
그녀에게는 친구들끼리 쉽게 하는 그런 말조차 떨렸다. 정말이지 그녀에게는 그 어떤것도 쉽지가 않았다.
“나두.”
그녀는 최고의 생일 선물을 선사해주었다. 그것이 그냥 무의식적이고 의례적인 대답이었을지라도 그 짧은 대답은 나에게 커다란 의미로 다가왔다. 허전함과 그리움으로 조금씩 지쳐가던 마음이 다시 힘을 얻은것만 같았다. 시간은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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