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은 뻔뻔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능글맞았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별로 좋지 않은 표정을
한 모두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아하하, 미안합니다. 얼른 들어가시죠. 아하하하.”
은실은 절로 입이 벌어졌다. 남동생이 가끔 빌려오는 만화책 대사에서는 봤어도 현실의, 그
것도 애들도 아니고 나이 많아 보이는 남자가 저딴 웃음소릴 내는 꼴은 평생 처음 봤다.
능글거림이 통했는지 아님 들어가서 피자를 사겠다는 설득이 먹혔는지 다른 사람들은 이미
웃고 떠들었다. 인상을 쓰는 것은 오로지 은실뿐이었다.
양익이 다가와 눈짓으로 미안하다고 사람 좋게 굽실거렸다.
‘왜 아저씨가 대신 사과하냐고!’
그녀는 소리 내어 외치기 직전에 간신히 참고 양익을 선두로 GATE 5에 들어서는 일행의 뒤
를 따랐다. 벽처럼 양옆에 선 철망 안에 두 명이 나란히 서면 좀 좁은 통로가 그들을 맞이했
다.
마침 반대편에서 체격이 엄청 좋은 흑인 남성이 친구로 보이는 동양인과 백인 남성과 잡담
을 주고받으며 밖으로 나오는 참이었다.
그가 묵직한 저음에 억양이 어색한 한국어로 말했다.
“미안yo~.”
흑인은 위로는 근처를 전부 그림자로 물들이고, 옆으로는 통로를 0.3인분만 남겨놓고 빠져
나오면서 기다리는 은실 일행을 지나쳤다.
은실은 올려다보던 시선 그대로 따라가면서 이 근처 파출소에 혹여 배치된 여경이 있다면
주취자(*취객의 법률용어) 관리하느라 고생깨나 하겠다고 생각했다.
‘SOFA 때문에 미군 헌병이 올 때까지 잡아놔야 할 텐데 저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면.
아, 끔찍해.’
감정이입을 시작한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통로로 들어가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는데도 경찰
학교에서 배운 제압술과 관절기를 나침반 삼아 그의 거대한 몸뚱이를 훑었다. 눈빛을 오해
한 흑인이 윙크를 하자 그제야 은실은 도망치듯 꼬리에 따라붙었다.
모퉁이를 돈 은실은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와아.”
감탄의 대상은 그녀를 맞이한 초소였다. 세 평 남짓한 경비 초소는 완벽한 상자형에 창문과
문짝, 벽이 모두 철판으로 덧댄 강화 콘크리트 재질을 갖춘 건물이었다. 건물만 엄격한 게
아니었다. 초소 안으로 들어서기 전 교도소나 연방 건물 같은 주요 시설을 방호하는 보안
회전문을 거쳐야 할 정도로 입장부터 신경을 쓰고 있었다.
겉과 달리 안에는 느슨한 분위기였다. 기다리던 오십대의 백인 남성이 양익과 인사하고 자
신의 ID카드와 함께 다른 이의 ID카드를 두 장 더 건넸다. 책상에 앉아 있던 미군 병사는 백
인의 카드와 일행의 주민등록증을 모두 건네받고 방수, 방진, 내구성으로 유명한 파나소닉
의 터프북으로 입장 절차를 완료해 주었다.
은실은 자신을 톰이라고 밝힌 백인과 인사를 나누면서 초소를 나섰다.
오래 기다린 후에 보게 된 기지는 매우 넓었다. 건물 양식, 인도 스타일, 간판, 안내판 곳곳
이 국내와는 달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일행은 ARMY라고 적힌 회색 티셔츠를 입은 여
군을 포함해 많은 군인이나 군무원들이 조깅하려고 올라가는 구름다리 앞을 지나쳐서, 셰
보레 픽업트럭과 군용 험비가 주차된 주차장을 통해 강당처럼 보이는 긴 건물 쪽으로 걸어
갔다.
은실은 양익에게 궁금하던 점을 물었다.
“그런데 왜 여기에서 미니어처 게임을 해요? 들어오기 복잡하잖아요. 일반 보드 게임방에
가서 하면 기다릴 일도 없을 텐데요.”
양익이 자상한 표정으로 입을 열려는데 수성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건 말이에요. 우리가 하는 게임이 흔한 게임이 아니어서 그래요. 그래서 밖에서 살 수가
없어요. 디앤디 미니어처는 정식 수입 경로를 거치지 않았거든요. 굳이 밖에서 따로 하고
싶다면 이베이에서 업자에게 대량으로 사오는 방법도 있겠지만 정말 대량으로 사지 않으
면 여기에서 사는 것보다 비쌀 수밖에 없어요. 왠지 알아요?
용산 기지는 우편물 분류상 괌인가 하와이로 친대요. 군용 우편물은 미 국내일 경우 무게가
얼마가 나가든 공짜로 배달이 되는데 하와이 취급받는 용산 기지는 그래서 이베이 구입보
다 비용이 빠지는 거죠. 뭐 비용도 비용이고 밖에서 사면 본사에서 오는 상품을 받을 수 있
는 정식 토너먼트 주최 가능업자 톰이랑 사이가 껄끄러워지니까 겸사겸사 여기까지 오는
거예요. 디앤디 말고 다른 게임할 때는 여기 안 올 때도 많아요.”
“아, 네.”
‘제발. 제발. 네놈이 범인이면 좋겠어.’
은실은 아까 흑인의 관절을 노리던 냉정한 야수의 심정으로 수다쟁이, 지각쟁이 수성의 사
지를 훑어보았다. 만약 그렇다면 그땐 꼭 자신의 손으로 스테인리스 수갑을 채우고, 눈물
이 찔끔 날 정도로 세게 조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디앤디 미니어처 끝나고서 워해머 40k라는 게임을 할 생각이에요. 아니면
메크 워리어나 히어로 클릭스도 괜찮고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짐을 많이 들고 있는 거예
요.”
“아, 네.”
‘누가 물어봤어? 누가 물어봤냐고. 설마 이젠 그 게임들이 뭔지 설명을 하는 건 아니겠지.’
“워해머는……”
은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비장의 한 수를 선보였다.
“어머, 끈 풀리셨네요.”
“진짜요? 어디?”
수성이 멈춰서 신발을 내려다보는 틈을 타 은실은 그 옆을 벗어날 수 있었다. 고개를 갸웃
거리며 그가 다시 합류했을 땐 이미 건물 앞이었다.
톰은 그들을 일반적인 교실보다 좀 더 큰 방으로 이끌었다. 열 명도 더 앉을 만큼 긴 탁자가
십수 개 있는 이 방에는 이미 많은 외국인들이 여기저기 모여 갖가지 게임을 즐기는 중이었
다.
말로 들었을 때는 시큰둥했는데 직접 보니 엄청 신기하면서 각각 어떤 게임들인지 궁금해
졌다. 아무래도 잘 꾸며진 배경 미니어처 속에 인형과 기계가 서 있어서 실제 전투의 한 장
면을 정지해 놓은 듯한 느낌이 들어서 더욱 그런 것 같았다.
‘설명을 들을 걸 그랬네.’
다른 일행들이 자리 잡고 짐을 푸는 동안 은실은 탁자 사이를 한 바퀴 돌았다. 게임 종류는
배경과 인형이 모두 미니어처인 게임, 컬러로 인쇄된 종이 지도 위에 미니어처 인형을 올린
게임, 모두 종이 카드로만 된 게임 등 크게 세 가지였다.
은실이 한 바퀴 돌면서 처음 시작한 곳으로 왔을 때 수성이 접시 하나와 콜라를 내밀었다.
“먹어요.”
큰 조각 피자였다. 슈퍼 스프림 같았다. 따끈하고, 기름지고, 짭짤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지각 미안해요. 다시 안 그럴게요.”
수성이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하는 사과에 그녀가 픽 웃었다.
잠시 망설이던 은실이 말했다.
“게임 설명해 주지 않을래요?”
수성이 반색하며 앉은 자리에서 가능한 한 최대로 손짓발짓을 해 가며 열변을 토했다.
워해머는 80년대 영국에서 만든 게임이었다. 워해머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40k가 4만 년
후 인류가 전 우주로 퍼져나간 이후 각종 외계인들과 싸우는 SF 테마 게임, 워해머 판타지
는 판타지 테마를 가졌다. 지금 옆에서 플레이하는 카드 게임은 매직 더 게더링이라는 게
임이고 수학자가 만들었으며 인기가 많아 한국에서 정식 발매된 적도 있었다. 안 쓰는 카
드를 자원으로 바꾸고, 그렇게 만든 자원으로 카드의 능력을 발동하는 데 쓰는 구조를 가
지고 있단다.
메크 워리어는 우주 진출 이후 2개 세력으로 나뉜 인류가 대형 로봇을 중심으로 짠 부대로
서로 다툰다는 내용인데 설정상 움직일 때마다 발열 체크를 해서 실패하면 성능이 떨어지
고 최악의 경우 멈춰 선다는 특징이 있는 게임이었다. 특히 공격을 받아 피해를 입으면 입
을수록 기체가 약화된다는 점에 은실은 감탄했다.
‘뭔가 실제 같네!’
히어로 클릭스는 DC와 마블 코믹스, 인디 코믹스 출판사 등 모든 슈퍼 히어로를 가지고
부대를 짜고 적과 싸울 수 있는 게임이었다.
“스파이더맨처럼 괜찮은 히어로 물 영화가 계속 나온다면 장기적으로 가장 활발하게 플
레이될 가능성이 있어요.”
이 게임은 전봇대나 차량, 우체통을 집어던질 수 있다고 했다. 어쩐지 종이 지도 위에 인
형 말고 우체통이나 쓰레기통이 놓여 있어서 뭔가 하고 궁금하던 참이었다.
설명도 끝나고, 피자와 콜라도 바닥을 드러냈다. 수성이 입가와 턱수염에 묻은 기름기를
휴지로 정리하는 동안 은실은 그가 의외로 어휘력이 풍부하다고 생각했다. 요점만 딱딱
정리해 주는 설명도 약간, 아주 약간 마음에 들었다.
‘수갑을 채울 때 아프게는 채우지 말아야겠다.’
양익과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져온 가방 속에서 플라스틱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
는 꽤 잘 만들어진 인형과 카드 들이 들어 있었다. 일행은 심각한 표정으로 카드를 들여
다보면서 카드 위의 숫자를 더했다 뺐다 했다.
“자, 이제 우리도 디앤디 플레이 준비하죠. 사는 거, 부대 구성하는 거 도와줄게요. 얼마
가져왔다고요?”
“6만 원이요.”
“그럼 스타터 하나 사고 나머지 돈으로 부스터 사시면 되겠네.”
수성은 DCI라고 본사에서 직접 프로필 관리를 하는 시스템에 가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지역별 우승자, 그러니까 여기에선 아태 1등이 되면 1년에 한 번씩 본사가
있는 미국의 젠콘(* Gencon. 만화, 게임, 애니메이션, 보드게임 등의 취미인들이 모여 즐
기는 대규모 행사의 약어.)에서 챔피언 전을 연대요. 상금도 주고.”
“정말요?”
“정말요.”
미국.
1등
챔피언.
상금.
은실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매사 익숙한, 그러니까 자신을 경찰 그리고 강력계로 이끌었
던 뜨거운 경쟁심이 서서히 키를 높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다. 자신은 수사를 하러 온 것이지 놀러온 것이 아니었다. 흥분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은실은 심호흡을 하면서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고, 수성이 이끄는 대로 톰의 탁자 앞에
섰다. 산더미만큼 쌓인 미니어처와 카드 게임 상자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성이 디앤디 미니어처라고 적힌 상자 앞에서 말했다.
“골라 보세요.”
“골라요?”
“안에 레어가 들어 있다는 얘긴 양익 님에게 들었죠?”
“네.”
“레어가 모두 가치가 같은 건 아니에요. 스펙에 따라 어떤 건 좋고, 어떤 건 안 좋죠.”
“사기 전 상자를 뜯어볼 수는 없잖아요.”
“당연하죠.”
수성은 그렇게 멍청한 말은 난생처음 들어본다는 것처럼 눈을 똥그랗게 떴다. 은실은
속으로 꼭 그렇게까지 놀랄 필요는 없다고 투덜거리며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럼 고르나 마나잖아요.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