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이 한창이다.
4년 전의 열기만큼이나 온나라가 떠들썩하다. 티비만 틀면 온통 월드컵 이야기뿐이다. 사실 티비를 안본다. 훗~

며칠전 토고전이 있었다.
그 날만큼 학교 열람실이 한가한 적도 근래엔 드물었다. 아니 전혀 없었다.
나까지 대략 대여섯명 정도가 있었으니,,
공부하는 척 좀 하다가 토고전이 시작할 무렵 응원전이 있을 노천강당으로 갔다.

우리 학교 학생들과 근처 주민들로해서 가득 찼고 안전상의 이유로 출입을 통제할 정도였으니 4년 전의 열기와 사뭇 비슷했다.


경기초반부터 주도권은 확실히 우리에게 있었다. 하지만 잦은 패스미스, 엉성한 협력수비가 내게 더 볼 필요없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전반 15분까지보고 스쿨버스에 올랐다. 어차피 10시 20분이면 버스가 출발하기 때문에 애초에 오랫동안 볼 생각이 아니었다.

스쿨버스 기사 아저씨께서 라디오를 틀어놓았다. 어느 방송인지는 모르겠으나 해설이 영 시원찮았다. 라디오 중계의 한계이겠으나, 그것을 떠나서....... 개인적으로 그냥 맘에 안들었다.


선실점.


여기저기서 아쉬움의, 혹은 당황스러움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평소라면 가득했을 스쿨버스의 좌석이 반 이상 비어있었다.

난.......단지 눈이 피곤해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곤 그대로 잠이 들었다.


문득 깨어보니 내릴 곳이 바로 앞이었다. 여느때처럼 기사아저씨께 '고맙습니다' 한마디 드리고 바로 앞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붉은색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월드컵을 맞이한 우리 편의점의 유니폼이다. 나보다 한 살 어린 내 앞 타임 알바생에게 인사를 했다.

잠시 후 그녀는 좀 전에 내가 옷을 갈아 입었던 곳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는
내게 인사를 하며 나갔다.

'수고하세요~' '네, 들어가세요'

우린 아직 서로에게 존댓말을 한다.




라디오 주파수를 맞췄다. 이용수 해설의 목소리가 들린다. 티비중계 그대로 라디오에서 방송되나보다. 버스에서의 그 해설자보다 한결 좋았다.
역시 라디오중계의 한계 따위가 아니라 해설의 질의 차이야....


경기중이어서인지 손님이 없었다.

좋아..




경기가 끝났다. 2대 1 승리
왠지 4년 전처럼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직접보지 못해서 일까? 그냥...그랬다.

하나 둘씩, 손님이 밀려들어왔다.

젠장..




'당신 한국사람 맞아?'


밖에서부터 꾕과리 소리가 내 귀를 짜증스럽게 울리더니, 이내 술이 잔뜩 취한 사람이 한 손에는 꾕과리를, 한 손에는 채를 들고 가게로 들어왔다.

"내가 이 가게 돈 많이 벌게 해줄게"하며 가게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꾕과리를 쳐댔다.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며칠 전부터 손님을 때리면 어떻게 될까라는 궁금증이 있었는데, 그 궁금증을 해소할 좋은 기회였다.

"경기 봤나?"
술 취한 대부분의 '손님'이라는 작자들이 그렇듯 그 사람도 반말을 날려댄다. 주먹이 쥐어졌다.

"아뇨 일 하느라 못봤어요"
"으이그~ 그걸 안보면 어떠카노 왜 안보노 어이?"
주먹에 슬슬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니 한국사람 맞나? 혹시 쪽바리 아이가? 우예 그걸 안볼수 있노...."
그러면서 들을 욕, 안들을 욕 다 들었다.
온 몸에서 힘이 빠졌다. 이런 놈들을 상대하는 것도 이제는 이골이 났다.

내가 자신을 전혀 상대 해주질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노발대발하며 쌍욕을 섞어가면서 내게 삿대질을 해댔다. 가게 안에 있던 손님들은 이미 꾕과리를 쳐대며 돌아다닐때부터 모두 나간 상태였고, 들어오는 손님조차 그 사람이 못 들어오게 막고 있었다.
그러면서 쉴새없이 입은 욕을 퍼붓고 있었다. 대단하군.....


수화기를 들었다.
비상시에 5초 이상 수화기를 내려놓으면 근처 파출소와 자동으로 연결이 된다.

"수고많으시네요. 여기 ○ 편의점인데요. 잠시만 와주세요. 이상한 사람이 있어서요.."



10초정도 흘렀을까...두명의 경찰이 들어왔다. 내가 경찰을 불렀는지 어쨌는지 모르던 이 사람께서는 갑작스런 경찰의 방문에 놀라기는 커녕 되려
'이 놈 좀 잡아 가소. 암만 봐도 우리나라 사람 아이고, 쪽바리 같다 아인겨'

졸지에 나는 쪽바리라는 죄를 뒤집어 쓰고
또 졸지에 축구 안 본 죄로 경찰에 잡혀갈 뻔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는 쪽바리라고, 또 경기를 안봤다고 구속시키는 법은 없더라...


'학생이 신고했어?' -누구나 반말이군..-
'네'
'이사람?'
'네' -상태 보면 모르나..-

"아저씨, 술 먹었으면 집에 가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교?"



한국 경기를 안보면 쪽바리라는 공식은 대체 어디서 나온건지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와서 티비를 켜니 방송 3사에서 동시에 녹화중계를 해주고 있었다. 뭐가 이래~
결과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았다.
4년 전의 그 경기들을 몇번이고 보고 또 봐도 느껴지던 그런 감흥이....전혀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