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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3/14 05:42:46
Name 이치죠 호타루
Subject [일반] 수비바둑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거 눈이 뜨끈뜨근하고 온몸에서 열이 나며 두통이 심각한 게 오늘 밤은 잠을 다 잤군요. 그래서 펜대를 집어드는 것이기도 하고...

요즘 알파고 이야기로 참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네요. 저도 거기에 한 숟가락 얹어 봅니다. 소싯적에 바둑을 접했고 가끔 책으로 인터넷으로 TV로 소식을 보는 입장이라 기력은 낮아도 한참 낮지만 한 번 멋대로 써 보렵니다(...)



바둑이라는 게, 흑이 먼저 둔다는 점, 이거 하나만 제외한다면, 흑과 백이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싸우는 게임이죠. 덤이라는 요소는 흑이 먼저 두는 유리함을 제하기 위해 있는 것이구요. 그리고 이 흑백을 구성하는 '병사들'도 완전히 똑같습니다. 무슨 소리냐면, 바둑과 실사판 전투를 비교해 보시면 됩니다. 심심하면 전화해서 "공군!!!"을 불러대고 쇼미더머니 기술을 보유하여(...) 밸런스 파괴자로 군림하고 있는 미군이 주축이 되는 현대전과는 달리 - 어디 IS에서 공군을 대규모로 운용이나 한다고 하던가요 - 바둑은 그런 거 없습니다. 돌 하나와 돌 하나는 똑같은 돌 하나일 뿐이죠. 떨어져 있을 때는 활로가 똑같이 상하좌우 네 곳이고, 돌 하나가 갖는 무게감은 (판의 형세라는 외적인 요소를 제외하면) 똑같습니다. 장기말처럼 차포가 졸병보다 훨씬 센 그런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재미있는 건, 서로 상대방의 전력이 똑같기 때문에 오히려 생각해야 할 경우의 수가 많아진다는 겁니다. 내가 저글링을 다수 보유하고 있어도 멀리서 시지 모드를 한 시지 탱크가 버티고 있고 그 앞에 벙커가 깔려 있으며 거기에 더해서 마인밭으로 농사가 되어 있으면 저글링 돌격은 자살행위일 뿐이지만, 나나 저쪽이나 똑같이 시지 탱크를 똑같은 수로 보유하고 있다면 선수의 판단과 전술 및 타이밍 여하에 따라서 베리에이션이 커집니다. 경우의 수가 많아진다는 것은 이걸 의미합니다. 장기를 예로 들어 보자면, 누구든 극초반에 (수를 둔 이후에 바로 잡히건 말건) 차가 졸병을 잡을 수는 있어도 누구도 졸병이 돌격해서 차를 잡아버리는 계산을 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보이지 않는 줄어드는 계산"이라는 요소가 바둑에서는 덜하다는 거죠.

대신, 바둑은 그렇다고 판에 돌이 놓인 것을 상대방에게서 숨길 수는 없기 때문에, 한 판의 전략을 어떤 식으로 짜왔는가는 필히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귀퉁이의 집을 확실하게 먹고 뻗어나갈 것인지, 귀퉁이는 내주고 중앙으로 나갈 것인지, 일단 변을 자기 영토로 선언하고 시작할 것인지 등등... 사람이 바둑을 두어가면서 그 의도를 숨기기는 어렵습니다. 중앙을 중시한다고 외치는 듯하면서 실상 페이크다 이 멍청아 나는 실리바둑으로 간다를 외치는 레벨은, 그건 이미 판을 완벽하게 짜서 상대방을 가지고 노는 레벨 수준이죠. 뭐, 모 소설에는 알면서도 파 놓은 함정으로 기어들어갈수밖에 없도록 하는 심리전의 달인 먼치킨이 한 명 있기는 합니다만... 양 웬리라고...

왜 굳이 상대방을 가지고 노는 레벨 수준이라고 했냐면, 일원화되지 않은 전략은 필히 이도 저도 아닌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숨은 의도는 숨은 의도대로 막히고 그렇다고 처음 겉으로 보인 의도대로 나가자니 페이크를 치는 동안에 생기는 손실을 감내할 길이 없고... 성동격서가 그래서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괜히 묘수가 아니기도 하구요. 보통은 겉으로 내보인 의도대로 밀고 갔을 때의 이득 < (숨긴 의도를 드러냈을 때 얻는 이득) - (겉으로 내보인 의도가 깨지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손실)일 경우에나 성동격서를 쓰죠.

하여간 이런 이유로, 보통 한 판의 바둑을 둘 때는 명백하게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나는 확실하게 집을 확보하고 시작하겠다, 나는 당장은 집이 안 되지만 나중에 큰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어음을 사겠다 등등... 그래서 실리바둑, 세력바둑이라는 말 등이 등장하죠. 이게 소위 말하는 포석이구요. 자신의 의도대로 밀고나가기 위한 기반을 늘어놓는 것이 바로 포석입니다(그래서 초심자일수록 포석과 정석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야 하는 겁니다. 포석단계에서 올바른 정석을 선택해야 어중간해지지 않고 확실하게 자신의 색깔을 내비칠 수 있으며, 상대방도 똑같이 상대방의 색을 내비치지 않는 한 절반 이상 먹고 들어가니까요. 글쎄, 개인적으로는 승패의 8할은 포석에서 결판난다고 하고 싶군요).

그리고 나보다 상대방이 우월해보일 때는 이대로 가면 질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상대의 의도를 깨뜨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백방으로 노력을 하게 됩니다. 이럴 때 가장 쉬운 게 어디 하나 붙어서 싸움을 거는 전투죠. 이게 흔들기입니다. 그리고 보통 이게 바둑에서의 전투발생공식이 됩니다.



그렇다면, 일견 생각하기에는 이렇습니다. 제 논리대로라면, 싸움을 거는 쪽은 초반에 뭔가 모자라거나 말린 게 있기 때문에 싸움을 거는 것입니다. 그러면 애초에 그럴 일이 없도록 초반에 자신의 의도를 최대한 관철시킨 후, 상대방이 걸어오는 전투를 회피하면 장땡 아니냐. 그러면 그냥 이기는 거 아니냐. 다시 말해서 초반에 우위를 잡고 수비바둑으로 가면 필승 아니냐. 그렇죠. 근데 여기는 두 가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공격과 수비의 밸런스 문제이고, 둘째는 그걸 실제로 해내기가 무-진-장 어렵다는 점에 있습니다. 여기에 한국인 종특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한 가지 문제가 더 있는데, 사실 수비만 하는 바둑으로 이기면 재미가 없거든요(...) 테테전에서 미네랄이고 가스고 전맵 다 파먹고 어느 한쪽이 자원 및 병력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기다리는 느낌? 이건 시청자 개개인의 문제이니 패스.

공격과 수비의 밸런스 문제는 이것을 의미합니다. 전술적으로는 수비를 하는 쪽이 유리합니다. 하지만 대전략쪽으로 보면 공격을 하는 쪽이 어드밴티지를 갖게 되어 있어요. 전술과 전략의 차이를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대충 언급하자면, 전술은 소규모 단위에서의 기동을 의미하고, 전략은 궁극적으로는 판 전체를 아우르는 단위에서의 기동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치즈러쉬를 감행해서 SCV와 마린을 신나게 컨트롤하면 그게 소규모 단위에서의 전술이고, 치즈러쉬를 감행하는 것 자체는 초반에 돈을 어디에 투자할지, 그걸로 상대방으로부터 얼마나 이득을 뜯어내고 판을 바꾸는지까지에 영향을 미치니 전략이라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전술적으로는 수비를 하는 게 유리하고, 전략적으로는 공격을 하는 게 유리하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술상으로는, 공격측은 주변에 도움이 될 만한 아군이 보통은 없습니다. 미리 스파이 같은 걸 잔뜩 깔아놓지 않는 한(그리고 부대 단위로 스파이를 깔아놓는 것도 무진장 어려운 일이죠). 그러니 공격을 하는 입장에서는 보통 1대 다를 상대해야 하는 입장이 됩니다. 그러나 전략 단위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공격은 어디 한 군데에 아예 병력을 싸그리 모아서 일점 돌파를 할 수 있지만, 수비는 그게 안 되거든요. 서로 깜깜이 상태라면 수비측은 어디로 적이 올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되죠. 그러면 결국 병력을 분산배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시를 하나 들어서 설명해 보죠. 뭐 물론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무진장 낮은 이야기입니다만 북한이 홰까닥 미쳐서(...) 제2차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칩시다. 북한이 선빵을 때리려는데, 우리가 북한에 대한 정보가 깜깜이 상태라면, 우리는 대체 북한이 어디로 내려올 것인가를 놓고 고민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보통은 휴전선 전체에 걸쳐 분산배치를 하게 됩니다(현 부대 배치처럼 말이죠). 그러나 북한 입장에서는 어쨌든 한 지점을 돌파를 하는 게 목표이므로, 라인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두고 일점 돌파를 시도하게 됩니다. 아주 오~래 전에 제가 게임게시판에 썼던 "전술, 작전술 그리고 전략과 RTS 게임의 상관관계"라는 글(https://cdn.pgr21.com./?b=6&n=44542)에서 쓴 표현을 가져오자면, 절대적 열세가 특정 시점과 공간에서의 상대적인 우세로 전환되는 것이죠.

그래서 보통의 경우는 공격과 수비가 묘하게 밸런스를 유지합니다.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공격할 때 필연적으로 받게 될 선두의 피해가 - 보통 이게 총알받이라는 표현으로 딱이죠 - 걸리게 되고,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죠.



이 이야기는 바둑에서도 묘하게 통용됩니다. 어느 한쪽 구석에 짱박혀 있는 상황이 되면 그 바둑은 갈 데까지 간 게고(...) 보통은 흑과 백이 서로 자신의 영역을 어느 정도는 확보한 상태로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불리한 쪽에서 싸움을 걸 때는 내가 어디를 쳐야 이득을 볼 수 있는가를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고, 유리한 측에서 방어를 할 때는 지원군(다음 착수로 추가되는 돌을 의미하죠)을 어디에다가 두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아무리 서로 의도가 다 빤히 보이는 바둑판이라고 해도 물고늘어질 데가 한 군데밖에 없는 상황은 후반전이 아니고서야 잘 나오지 않으니까요. 초반에 어느 정도 기반돌이 막 깔린 시점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공격측에서는 전투바둑의 수읽기를 중요하게 여기게 됩니다. 반대로 수비측에서는 어디로 공격해 올 것인가, 공격해 온다면 어디까지는 물러서고 어디까지는 대응할 것인가, 별수없이 싸워야 하는 상황이라면 상대방이 어떻게 둘 것인가... 생각할 게 굉장히 많아집니다. 그래서 제 논리대로라면 수비바둑은 정확한 수읽기와 완벽한 형세판단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구사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공격측이야 잡아서 물고늘어질 곳 하나만 계산하면 그걸로 얻는 이득으로 판을 바꿔버릴 수 있으니까요(아 물론, 프로기사들의 공격과 수비는 이거보다 더 고급스러운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거기까지 가면 글이 산으로 가니 이 정도로 합시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공격측이 두 가지(물고늘어질 곳의 수읽기와 그 이득)를 계산할 때, 수비측은 네 가지(상대방이 물고늘어지리라 예측되는 곳, 전투 발생 혹은 타협의 여부, 각각의 케이스에 대한 수읽기)를 계산해야 합니다. 수비바둑이 말이 쉽지 정말로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바둑계에서는 전성기 시절 이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창호죠.



거 언젠가 초등학교 코흘리개 시절에 바둑책을 접하면서 맨 뒤에 이창호-유창혁의 대결을 황금방패와 다이아몬드창의 대결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이창호가 바로 그 황금방패였죠. 어디로 들어올지 정확히 짚어내고, 특히 어느 선까지 타협해야 전략적으로 계속 우위에 설 수 있는지를 계산하며, 그렇게 되도록 유도하는 능력은 그야말로 황금방패란 말로는 설명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괜히 이창호 사범님의 별명이 돌부처 또는 소년도인이었던 게 아니죠.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미치는 겁니다. 분명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고 생각대로 되었는데 어떻게 된 게 저쪽에서 슬슬슬 물러나면서도 판세가 좁혀질지언정 바뀌지는 않으니... 전성기 시절의 이창호의 바둑은, 말하자면 대여섯 집에서 반집까지 차이를 줄이는데 들여야 할 노력이 1이라면, 그 반집을 뒤집는 데 필요한 노력은 한 100쯤 된다,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겠네요. 내줄 것은 깔끔하게 내준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공격은 자제한다, 그런 느낌. 예전에 조진락이 내려오고 한창 양박이 활개칠 때쯤 박태민을 보고 누군가가 "박태민은 상대방이 뭘 하든지간에 다 하도록 허락해 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게임은 박태민이 이겨 있다"라고 말했던 바로 그런 느낌이죠.

그리고 그게 불가능해지는 시점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이창호는 정상에서 내려온 것이죠.

알파고가 위대한 것은, 바로 이 수비바둑을 구사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내가 여기에 두면 여전히 게임은 높은 확률로 나의 우위다. 차이가 반집까지 좁혀진다고 해도 그 반집만 내주지 않으면 바둑은 나의 승리다. 전성기의 이창호가 그랬고, 알파고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알파고는 위대한 겁니다. 겉으로는 실착으로 보여도 그게 계산된 결과인 이유일 겁니다.



이 글을 쓰게 된 건 물론 감기 때문에 전혀 잠이 오지 않는 탓도 있습니다만(...) 얼마 전에 질문게시판에 바둑 관련글로 간단한 답변을 한 게 계기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하고 넘어가야겠네요. 듣기로는 이세돌 九단이 첫 수를 바둑판 한가운데에 둬야 한다, 혹은 평범한 길로는 어림없다... 이런 말들이 좀 오갔던 걸로 들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하고 넘어갈까 합니다.

보통 바둑을 두면 첫 수를 구석에 둡니다. 바둑판의 크기는 무한정이 아니라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구석에 집을 지으면 굳이 바둑판 끄트머리에 경계선을 그을 필요는 없으므로 적은 수, 즉 적은 노력으로 손쉽게 집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중앙에서는 여기저기 사방팔방에 경계선을 그어놓아야 하기 때문에 어렵죠. 그런데 첫 수를 한가운데에다가 둔다는 것은, 1) 내가 먼저 구석에 집을 확보함으로써 앞서나갈 수 있는 여지를 줄이고, 2) 상대방이 먼저 구석을 쉽게 확보하기 때문에 실리상 불리하며, 3) 대놓고 중앙을 중시하겠다는 의도가 상대방에게 뻔히 보이므로 상대방이 수비바둑, 여기서는 구석을 일단 먼저 잘 확보해 놓은 후 중앙 지우기 작전으로 나가면 높은 확률로 첫 수를 천원에 둔 쪽이 패배한다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에 4) 첫 수를 둔 쪽은 첫 수를 두는 이득을 제하기 위해서 덤으로 몇 집을 주어야 하니 판 전체를 실리상으로 줘야 하는 만큼보다 더 앞서나가야 한다는 문제까지 더해지죠(이세돌 九단이 흑으로 승리하는 게 더 가치있다고 이야기한 배경에는 이런 속사정이 깔려 있습니다).

이걸 다섯 번이나 연속으로 구사해서 모두 이긴 괴물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목진석 九단이라고... 올해 나이가 서른다섯인가 여섯인가 그래서 잘 모르실 수도 있는데 전성기의 이창호를 잡고 우승한 적도 있는 강한 중견입니다. 풋내기 시절에는 당시 중국의 1, 2인자였던 섭위평(녜 웨이핑) 九단과 창 하오 당시 八단을 KO시킨 일도 있고... 괜히 괴동이라는 말이 통한 게 아닙니다. 그러나 이세돌 九단이 남은 한 판에서 이걸 시도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이건 일단 상대방에게 어드밴티지를 줘도 한참 주는 상황이거든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보통 평범한 것으로는 어림없다, 외목의 대사백변이라도 써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의견,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근데 이것도 써먹기는 어렵다 봅니다. 대사백변이라 함은 정석의 한 종류인데 둘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아서 그 변화가 백 가지를 넘고(그래서 대사백변이 아니라 대사천변이라고도 합니다) 그 속에는 각종 함정수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엄청나게 복잡한 정석인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판에 돌이 엄청나게 깔린다는 점에 있습니다. 판에 돌이 엄청난 수가 깔리게 되면,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가 너무 뻔해져요. 여기는 흑땅, 여기는 백땅, 여기는 흑이 큰소리치는 곳, 여기는 백이 내 땅이라고 하는 곳 이런 식으로 판에 돌이 엄청나게 깔리게 되는데, 일단 알파고가 이걸 공부를 안 했을 리가 없거니와, 알파고가 정확하게만 대응하면 이미 깔려있게 되는 돌들이 많아서 후반에 변수가 엄청나게 줄어들기 때문에 실수할 확률이 상대적으로 적은 알파고가 질 가능성이 거의 없어집니다. 이게 소위 말하는 판의 단순화죠. 일단 돌이 깔리고 보면 계산이 쉬워지니까요.

그래서 이세돌 九단의 입장에서는 묘한 딜레마가 생깁니다. 처음에 평이하지 않게 가자니 상대방이 다 꿰고 있을 것 같고, 평이하게 가자니 계산에서 밀릴 것 같고... 그리고 이런 게, 바로 전성기의 이창호 九단을 상대했던 선수들이 느끼는 중압감이었죠. 이 과정에서 무리수가 나오고 이창호 九단은 이걸 차근차근 응징하거나 아예 무시하면서 판을 쥐고 흔드니 상대방은 알아서 자멸... 그렇다고 판을 단순화시키자니 안 그래도 계산이 강한 이창호 九단의 계산을 도와 주는 꼴이고... 알파고를 보면서 프로기사들이 느끼는 심정이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 싶군요.



알파고와 관련된 여러 사람들의 인터뷰를 따 오는 것으로, 글의 결론을 내리고 싶군요. 나무위키에서 일부 퍼왔음을 밝힙니다.

인간 기사는 많은 차이로 이기는 게 좋은 바둑이라고 생각해서 '최선'을 추구한다. 반면 알파고의 목적은 승리 그 자체다. 집을 많이 짓지 않아도 최소 반집만 앞서면 이긴다는 개념을 갖고 있다. - 조혜연 九단

놀랍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예상보다 세다. 끈질기고, 계산에 밝고, 불리해도 흔들리지 않고, 이길 수 있다면 약간의 손해는 감수하는 게 이창호 9단과 비슷하다. - 조국수님

알파고는 바둑의 본질을 정확히 꿰고 있습니다. 바둑은 게임이며 이기기 위해선 변화량을 줄여야 한다는 사실이죠... 알파고의 간명함은 소름이 돋을 정도입니다. 저는 차라리 백만 달러를 구해서 알파고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바둑이란 '게임' 이 사실은 초반 삼십 수 안에 끝나는 거라는 신개념 패러다임을 선보이고 싶습니다. - 조혜연 九단



저는 알파고의 등장을, 이렇게 평하고 싶습니다.

수비바둑의 신, 신산이 바둑판에 내려왔다. 단지 예전에 중국과 일본의 기사들이 초대 신산인 이창호 九단을 상대로 느꼈던 감정을, 이번에는 한중일 삼국의 기사들이 2대 신산인 알파고를 상대로 느낄 뿐이다. 그러나, 미세하지만, 신산에게도 빈틈이 없지는 않다. 아직은 신산에게도 빈틈이 있고, 누구도 찾지 못했던 그 빈틈을 이세돌 九단은 마침내 찾아낸 것이다. 신산의 등장은 바둑계의 큰 자극이다. 누군가는 신산의 계산이 더욱 철저하도록 밤새워 연구할 것이고, 누군가는 신산의 조그마한 틀린 계산을 찾기 위해 밤새워 연구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에 다시 느낄 수 없을 로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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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14 07:21
수정 아이콘
천원에 돌을 둬야한다는 글을 저도 봤습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부분이 있는데 알파고에게는 판을 쪼개서 보는 알고리즘도 포함되어있습니다. 마치 사람처럼 말이죠. 부분적인 악수 정도는 잡아낸다는 겁니다. 천원에 두면서 게임 전체를 설계할 수 있다면 모르겠는데 돌을 두다보면 결국 언젠가 한 번쯤 했던 모양이 나올 수 있고.. 그러면 이세돌 9단이 무조건 지거든요. 잘 몰라서 하는 얘기죠.
르웰린견습생
16/03/14 08:58
수정 아이콘
글 잘 읽었습니다. 추천!!
Michel de laf Heaven
16/03/14 09:09
수정 아이콘
1200여대의 CPU가 동시에 하는 계산을 전성기의 이창호 사범께서는 오로지 하나의 머리로 하셨다는 거죠.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을 보면서 신산 이창호 9단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새삼 다시 느낍니다.
이치죠 호타루
16/03/15 01:38
수정 아이콘
그러니 신이라 불리었죠. 신이라는 타이틀을 따내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공교롭게도 이창호 사범님의 스승인 조국수님은 전신(戰神)이라는 별명이 있죠.
16/03/14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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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호는 당연히 치고나가야 하는 수순인데 갑자기 하수처럼 물러난다. 난 어이가 없어 야단을 친다. 그러면 떠듬떠듬 말한다. ‘그렇게 하면 싸움이 붙고, 그러다가 아차하면 역전 당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물러서면 2, 3집밖에 못 이기겠지만, 결코 지는 일은 없다’고.

나무위키에 있는 조훈현9단의 인터뷰글입니다. 바알못이지만 알바고가 딱 이런 방식으로 하는것 같더군요.
16/03/14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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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9단의 승리는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안구에 습기가 차오른적도 오랜만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세돌9단의 승리에는
이창호9단의 숨은 공로가 크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알파고는 수천만판 대국을 스스로 두며 자가학습으로 승리확률이 높은 전략을 찾아나간것이라
설령 이창호9단이 인류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그러한 기풍으로 나타났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창호9단 덕분에 이세돌9단포함하여
한중일3국의 최고바둑기사들은 이창호의 바둑을 파훼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해와고
사실상 알파고의 최대 전략을 10년이상 실습해본 셈이니까요.

만약 이창호9단을 미리 경험하지 않은상태에서
알파고가 갑자기 등장하였다면 인간계 바둑기사들이 느꼈던 그 참담함은 이루말할수 없었을겁니다.

알파고는 전투에 있어 이창호 9단보다 엄청나게 강하다는것이고,
또한 유리할때 굳히기는 바둑의 신과 같을겁니다.

알파고의 드러난 문제점은
불리하거나 비등할때, 급소가 되는 수가 바늘구멍처럼 미세할때 그걸 찾아내는것은 어쩌면 꽤 부족할수도 있는것 같습니다. 어짜피 모든수를 테스트 해보진 못하거든요.
신의와배신
16/03/14 09:56
수정 아이콘
어제 바둑을 보니까 모양상 안되는 수는 계산에서 걸러지는 모양이더군요. 78수를 두자 인간이라면 위험을 느꼈을텐데 도리어 백을 잡았다고 보고 선수 활용을 하더군요.

알파고가 접전상황을 인식할 수 있으면 특수상황에서는 수의 탐색을 보다 확대함으로써 약점을 보완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약점 보강이 상대적으로 쉬워보입니다.

이세돌 9단이 마지막으로 기계를 이긴 프로기사가 되지 않을까요? 마음이 답답하군요.
이치죠 호타루
16/03/15 01:50
수정 아이콘
오히려 그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인공지능의 개발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될 것이니 말이죠. 저는 그리고 인공지능이 궁극적으로 인류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쪽에 서고 있어서...

라듐이었나, 하여간 피에르 퀴리가 노벨상을 수상할 때의 마무리 연설을 첨부합니다. 답답한 마음이 좀 풀리시지 않을까 싶어서요.

It can even be thought that radium could become very dangerous in criminal hands, and here the question can be raised whether mankind benefits from knowing the secrets of Nature, whether it is ready to profit from it or whether this knowledge will not be harmful for it. The example of the discoveries of Nobel is characteristic, as powerful explosives have enabled man to do wonderful work. They are also a terrible means of destruction in the hands of great criminals who lead the peoples towards war. I am one of those who believe with Nobel that mankind will derive more good than harm from the new discoveries.

라듐이 범죄자의 손에 들어가면 매우 위험하다고 우려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인류가 자연의 비밀을 아는 게 도움이 되느냐, 그것으로부터 인류를 풍요롭게 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 또는 그런 지식이 위험하지 않다고 할 수 있느냐... 이런 의문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노벨의 발견들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예죠. 엄청난 폭발물은 사람들로부터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도록 했지만, 전쟁으로 사람을 끌고들어가는 거대한 악에게 있어서는 끔찍한 파괴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저는 노벨과 함께, 인류는 새로운 발견을 통해 위험보다는 인류에게 좋은 것들을 더 많이 끌어내리라고 믿는 사람들의 편에 서겠습니다.
이진아
16/03/14 12:50
수정 아이콘
질게 답이 훌륭하셔서 글을 좀 요청드렸더니 이런 고퀄글이라니요
정말 감사드리고 잘읽었습니다!
16/03/14 13:20
수정 아이콘
문체는 담담한데 묘하게 흥미진진하고 읽는 사람을 끓어오르게 하는 글이군요. 바알못 입장에서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과연 제4국은 이세돌 9단에게 유의미한 실마리가 되었을까요? 아니면 약점이라 할 수 없는 오차 범위에 불과한 것일까요?
시작 전 구글 측은 반반 승률을 예상했다는데 그대로라면 5국도 이세돌 9단이 이겨야 하는데...
이치죠 호타루
16/03/15 01:52
수정 아이콘
실마리가 되었으리라는 쪽에 한 표를 던집니다. 결과는 까봐야 알겠지만 설령 진다고 하더라도 이세돌 九단은 분명히 그 미세한 틈을 집요하게 물고늘어질 테죠. 그리고 이번 감기는 짧고 세더군요. 꼼짝없이 하루를 꼬박 끙끙대며 앓아누워야 했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16/03/14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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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몸조리 잘하시고 감기 속히 떨쳐내시길..
무한낙천
16/03/14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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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국 초반부에 해설자들이 이세돌9단이 어린시절 전성기 이창호 9단을 상대로 두던 스타일이 나왓다고 하더군요. 그만큼 이제 알파고를 인정한거라고..
이치죠 호타루
16/03/15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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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드는 생각인데 어쩌면 이세돌은 그냥 이세돌스럽게 인터뷰하고 이세돌스럽게 상대에 맞춰서 바둑을 두는 것뿐인데, 괜히 주변에서 그걸 보고 붕붕 떠서 자만하고 절망하고 하는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군요. 음, 그러니까 본인은 별 생각이 없는데 주변에서 호들갑을 떠는 느낌?
윤열이는요
16/03/14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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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어려운 얘기도 있어 전부 이해는 못했지만 변과 귀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변과 귀는 멀티라고 생각하면 되겠군요. 변은 미네랄 멀티 귀는 가스멀티. 센터하나만 지으면 자원이 바로 확보되고 수비도 쉬운곳. 중앙은 이후 전략의 요충지이지만 즉시 전력으로 환산되기 힘든곳.
이치죠 호타루
16/03/15 01:57
수정 아이콘
말씀하신 비유가 딱 맞습니다. 중앙은 바둑의 판세를 갈라버리는 최대의 전략 요충지지만, 이렇다할 자원은 없는 곳이죠. 헌데 중앙을 누가 잡느냐에 따라서(이게 소위 말하는 "두터움"이라는 추상적인 개념과 크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판이 돌아가는 양상이 바뀌게 되죠.

바둑격언 중에 "중앙으로 한칸 뜀에 악수 없다"는 말과, "쌈지뜨면 지나니 대해로 나가라"라는 말이 있습니다(구석탱이에서 조그맣게 사는 걸 바둑속어로 쌈지 떴다고 합니다). 둘 다 전략적 요충지를 선점하려고 노력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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