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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04/07 17:37:49
Name OrBef
Subject [일반] [7]나, 나도 참가할 거야!
사실 인문사회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쥐뿔도 없는 지라 참가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근데 새벽 3 시 (미국) 까지 잔업을 하고 나니 7시에 출근을 해야하네요. 어차피 망한 거 술이나 먹자고 고등어 안주로 3천원짜리 와인 마시다가 (그렇습니다 저는 입맛이 저렴합니다), 이 이벤트 생각이 났습니다. 아는 건 별로 없으니, 모르면서 아는 척 하진 않겠습니다. 대신 인문사회에 대해서 아는 거 별로 없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좀 써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글의 부제는

* 인문사회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다가 각지에서 패망한 이야기들 *

입니다.

1. 북한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래전 일입니다. 대충 10년 ~ 15년 전일 겁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북한이 진지하게 남침 준비를 하고 있다고 믿던 1인이었죠. 그러다가 어느날 굉장히 긴 신문 사설을 (아마 뉴욕 타임즈였을 겁니다) 읽었고, '아니 북한은 미국과 협상해서 국교 정상화하고 미국 주도의 질서에 편입할 생각을 할 수도 있다고?' 라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본인 정도의 지성인(?)이 모를 정도라면 당연히 남들은 상상조차 못해봤을 거라고 확신한 저는, 마침 관련 키배가 벌어지던 피지알에서 댓글로 에헴에헴하면서 저 내용의 썰을 풀었습니다. 근데 거기에 달린 대댓글은

"예 그렇군요...... 근데 북한이 그런 신호를 보낸 지는 꽤 오래되었죠. 이 링크 저 링크 보시면 관련 논문 & 사설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였습니다. 그 분 지금은 피지알 안 하시는데, 당시에 굉장히 점잖은 글/댓글 쓰시는 분이었던 지라, 굉장히 부끄럽더라고요.

2. 환경

4대강 관련해서 온 국민이 민감하던 어느날, 녹조가 심해질 거네 아니네 키배가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때는 그런 키배가 없는 날이 오히려 드물었죠. 저야 워낙 4대강 싫어하던 사람인데다 피지알의 대세도 그러하였으니, 당연히 그 날도 4대강 공사하면 녹조로 나라 망한다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저를 상대하시던 분은 열기가 심하지도 않고 말투도 점잖고 아시는 것도 많다는 느낌이 점점 들더군요. 뭔가 느낌이 쎄했지만, 그래도 일단 시작한 키배를 질 수야 없으니 강으로 들어가는 오염 물질의 종류가 어쩌고 저쩌고 유속이 어쩌고 저쩌고 열심히 (내 지식이 아닌, 어제 다른 키배에서 줏어들은 내용들로) 타이핑을 했습니다. 근데 계속 점잖게 받아주던 그 양반이 문득,

"님.... 솔직히 님 우리나라 강의 주 오염원이 뭔지 잘 모르시죠?"

라고 한 마디 던지시더군요. 사실 전 강의 주 오염원이 뭔지 그 때도 잘 몰랐고 지금도 잘 모릅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 4대강 사업은 망한 사업이 맞긴 한데, 그건 결과론일 뿐이죠. 결과적으로 맞았으니 그 때의 내 말은 맞았지! 라고 합리화는 못 하겠네요.

3. 자유 의지

어렸을 때 생각하던 자유 의지는 "주변의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내면의 소리에 따라서 나만의 길을 가는" 그런 멋진 것이었습니다. 근데 알고보니 인간의 뇌도 인과율의 법칙에서 자유롭지가 않다더군요. 원래 생각하던 자유 의지의 개념이 킹왕짱 멋진 것이었던 만큼, 인과율에서 자유롭지 않으면 자유 의지는 없는 거지! 우리는 인과율의 노예일 뿐이었군!!! 이라고 우디르급 태세전환을 하고 한동안 염세적인 자세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나만 염세적이면 억울하죠. 그래서 적극적으로 주변에 자유 의지란 허상이라는 복음(?)을 전파하고 다녔습니다. 몇 번은 포교에 성공해서 상대방을 제 수준으로 불행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 적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피지알, 여기서 자유 의지 관련해서 이야기가 오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쓴 글이었는지, 다른 분이 쓴 글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거기서 어떤 분이 '인과율과 자유 의지가 서로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철학 분파도 있습니다. 대니얼 데닛같은 사람이 그런 쪽인데,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지요.' 라고 이야기를 주시더군요. 근데 당시의 저도 데닛의 책을 수박 겉핥기로나마 접한 뒤였던지라, '내가 이미 안다고 믿고 있는 것' 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기는 힘들더군요. 정확히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데닛의 입장은 알고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라고 대답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 몇 년이 흘러, 저는 데닛 빠돌이가 되었습니다! 아마 그 때의 그 양반은 저보다 몇 년 정도 앞서나가고 있던 분이었겠죠. 근데 전혀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즉, 대학생과 중학생이 키배를 벌이면, 중학생은 자기 상대방이 대학생인 것을 인지하지 못할 수 있는 거죠. 근데? 대학생은 상대방이 중학생이라는 것을 2분이면 다 압니다. 모르긴 해도 '아 이 양반 내가 구원해주려고 했더니 저항이 심하네?' 하고 씨익 웃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부끄러워졌던 일화네요.

4. 경제

서브 프라임 이후로 경제에 대해서 관심이 좀 많아졌지요. 해서 책도 좀 보고 유튜브(?)도 좀 보고 잡지식을 쌓아올렸습니다. 잡지식을 쌓아올리니 세상이 너무나도 명료하게 이해가 되더군요. 오늘 물가가 오르면 어제 유튜브에서 본 그 정책 때문인 거고, 오늘 물가가 오르지 않으면 그건 그저께 인터넷에서 읽은 저 정책 때문입니다. 결과가 어느쪽으로 나오던 제가 줏어들은 이야기 중 적어도 하나는 들어맞기 때문에, 언제나 '그럼 그렇지 내 예상대로군 훗~' 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근데 제 형은 경제학 전공하고 월가에서 일합니다. 그동안 유튜브와 구글링으로 무장한 제 지식을 시험해보고자, 형과의 술자리에서 경제에 대한 제 생각을 막 풀었습니다. 형이 '음 그런가?' '음 그럴 수도 있지' '음 그렇게 보는 사람들도 있지' '음음' 등의 현란한 기술로 접수를 해주더군요 (형은 저와 다르게 굉장히 접수에 특화된, 잘 받아주는 성격입니다). 그렇게 술자리가 무르익어간 뒤, '그래서 형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라고 물어봤습니다.

'나? 난 잘 모르겠는데? 그거 되게 어려운 거거든'

이라고 딱 한 문장으로 그간 접수해준 댓가를 받아갔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경제 이야기 잘 안 합니다.

5. 어차피 안 될 거야...

사실 제가 인문사회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똑같은 글을 읽어도 이해의 수준이 얕은 것 자체는 비난받을 것 까지는 없지 싶습니다. 이 쪽으로 제대로 훈련받은 적이 없으니 당연한 거죠. 예전에 푸코의 추 소설을 보면서, '세상에 무슨 소설을 이렇게 읽기 어렵게 쓰냐! 이걸 도대체 누구보고 읽으라는 거야!' 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근데 아는 형 중에 문학 전공한 형이 있어요. 이 형네 집에 놀러갔는데, 푸코의 추가 화장실에 있더군요. 네, 사람에 따라서는 이 책을 화장실에서 읽을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차피 해도 안 되요. 제가 인문사회 공부를 해봤자, 인문대 나온 사람이 미적분 공부하는 것밖에 안 되요. 인문대 나온 40대 아재가 이제부터 미적분 10년 해도 지금의 저보다도 못할 텐데, 반대도 마찬가지인 거죠.

그러니까 그런 부분은 포기하기로 하고, 최소한 아는 척은 안 하려고요. 저보다 쎄보이는 사람 있으면 괜히 뻗대지 말고 겸손하게 듣기나 하는게 제 인생에 더 도움될 것 같다는 거죠. 나이 먹고 깨달은 것 중 제일 유용한 지혜 다섯 가지 중 하나 입니다.

와인 마시면서 글 쓰려고 한 건데, 글을 열심히 쓰다보니 와인이 반 넘게 남았네요. 그럼 저는 남은 와인을 고등어와 같이 즐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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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이드
18/04/07 17:56
수정 아이콘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논란이 있습니다만, 조던 피터슨 같은 분은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포커게임' 같은 것이다라고...
포커게임을 즐기려면 포커의 룰을 따라야 합니다.
자유롭게 한다고 화투장을 섞어 넣을 수도 없고, 나만 조커를 몇장 더가지고 할수도 없지만,
그래도 그 제한된 룰 안에 일정한 선택의 가능성은 있는 거죠.
그런 제한된 틀 안에서의 선택을 '자유의지'라고 볼수 있느냐 없느냐는 논쟁의 대상이겠지만요.
18/04/07 18:22
수정 아이콘
저는 조던 피터슨 교수 관련해서는 그 이상한 앵커와 이야기 나누던 것밖에 보질 못해서 잘 모릅니다. 근데 말씀하시는 포커 게임이 랍스터의 신경회로 관한 이야기라면, 우리는 앞으로 유전자도 조작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할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에, 그 제한은 곧 풀리지 않을까하고 개인적으로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18/04/07 22:33
수정 아이콘
자유의지에 대해 고민해본적이 없어서..인과율이 뭔가요? 누구나 주어진 자기 조건 속에서 자기마음대로 선택하고 사는거아닌가요?
바나나맛슈터
18/04/07 22:41
수정 아이콘
저는 완전히 그런 지식에 무지해서 관련지식을 가진 친구와 대화할 때 적극적으로 배우겠다는 자세로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잊어버리죠. 근데, 형이 어렵다고 한 말이 무슨 뜻이길래 더 이상 경제 이야기를 안한다고 하시는건가요?
치열하게
18/04/07 23:00
수정 아이콘
전 뭔가 가볍게 술자리 안주거리 할 만큼만 알고 있어도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전도, 고찰, 설파, 설득이 아니라 그냥 술 안주요
TheLasid
18/04/07 23:03
수정 아이콘
저도 인과율과 자유의지에 관해서 열심히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철학을 봐도 과학을 봐도, 자유의지의 실존을 찾긴 어렵더라고요.
그 부재를 증명하기는 상대적으로 매우 쉬워 보였고요.
지금은 그냥 '내겐 선택권이 있다고 믿을 자유의지가 있다.' 정도의 개똥철학으로 만족하고 삽니다.
실제로 어떻든,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고 사는 편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리한 것 같아요 :)
저도 orbef님의 형님처럼 자유 의지 '그거 되게 어려운 거거든'하고 쿨하게 갔어야 하는데,
개똥철학 얘기나 하다가 가네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D
18/04/08 00:27
수정 아이콘
"내기하자, 인지과학이라는 것이 인문학만 박살낼까, 인간을 박살낼까?" 친구와 자주하는 농담입니다. 아무래도 한 시대의 끄트머리에 있는 사람이라 막차가 가능할지에 신경이 모두 쏠리는 군요 크크크.

최인훈의 광장에서는 밀실이나 광장이냐 고민하다가 중립국도 아닌 바다에 들어가던 사람들이, 이제는 광장인지 밀실인지 모를 공간에서 길을 잃고 어쩌다보니 바다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서로를 영향주고 싶고, 생각을 조종하고 싶고... 선의와 악의가 모호한 이런 공간... 저도 어서 자유의지에 대한 의견(Opinion)을 준비하여야 할까요... 쿨하게 와인을 마실 수 있는 그런 여유를 가지신게 부럽습니다.
Musicfairy
18/04/08 07:14
수정 아이콘
저도 인문사회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쥐뿔도 없는 지라 이 글에 대해서 평론하긴 어렵고, 그냥 리빙포인트(?) 하나 얻어갑니다.
'번데기 앞에서는 주름잡지 않는 것이 좋다.'
벨리어스
18/04/08 13:21
수정 아이콘
고수들 많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기도 하구요. 다만, 물론 제가 아직 어리지만 여태까지 경험을 하면서 느끼는 거는... 자신이 좀 안다고, 남을 구해주겠다는 식으로 상대를 아래로 보는 오만함을 보이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점잖아보이고 아는것 많고 힘 있는 센 사람이 그런 오만함을 베이스로 정말 추악한 작태를 보이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아는 것도 아는 것이지만, 최고의 미덕은 '겸손함' 의 자세인거 같습니다. 그게 인간으로서의 기본이고, 만약 상대방이 부족해보여도 진심으로 그사람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며, 그 분이 내가 부족한 분야에 대해 더 잘 알고 잘 하는 사람일 수 있으며...내가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닥쳤을 때 어떤 도움을 받게 될 지도 모르는...그런게 세상사이기도 하구요. 잘 나가던 사람이 한순간에 뒤집히는게 인생이고, 내가 봤을 때 저 사람은 아니다 싶었지만 어느순간 보니 그 사람은 정말 잘나가고 있고 정말 행복하게 잘 살다가 잘 가더라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저도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다만 겸손의 미덕을 잃지 않기 위해 정신차리려 노력할 뿐입니다.
품의서작성중
18/04/09 12:47
수정 아이콘
와인에 고등어라니 진정 드실줄 아는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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