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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04/13 12:46:59
Name 글곰
Subject [일반] SF의 미래를 알고 싶다면 앤 레키를 보라
  생각건대 SF라는 장르는 과거의 명작들에 의지하는 바 큽니다. 설득력 있는 미래를 그려내는 SF의 본질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역설적인 일이죠. 로버트 하인라인은 1907년에 태어났습니다. 아서 C. 클라크는 1917년생이고요. 이른바 뉴웨이브SF의 선두주자이자 신세대 SF의 기수로 꼽히는 로저 젤라즈니조차 무려 80년 전인 1937년에 출생했군요. 이럴 수가. SF는 쇠락한 지 오래인가요? 더 이상 SF에게는 미래가 없나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대에는 앤 레키(Ann Leckie)가 있으니까요.

  2013년에 데뷔한 앤 레키는 첫 작품인 [사소한 정의 Ancillary Justice]를 통해 네뷸러 상과 휴고 상을 비롯한 SF상의 트로피를 죄다 휩쓸어서 자신의 장식장에다 모조리 집어넣었습니다.  이후 [사소한 칼 Ancillary Sword][사소한 자비 Ancillary Mercy]를 연달아 써냄으로써 소위 '라드츠 3부작'을 완성했지요. 이 세 편의 소설을 통해 앤 레키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점차 확장해 갑니다. 자세한 내용을 읊어대다 보면 아직 이 책을 읽지 못한 이들에게 실례가 될 수 있으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세 권의 작품을 통해 작가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가 하는 오래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진정 올바른 행동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집요한 고찰을 드러낸다는 점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가죠.

  여하튼 이 작품들은 미래의 사회상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훌륭한 사변소설이고, 인공지능에 대한 인간의 상상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는 점에서 뛰어난 과학소설이며, 주인공의 모험담을 재미있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가치 높은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게다가 장르문학으로서의 SF가 지닌 한계에 갇히지 않고 우리 시대의 사회가 가진 문제점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사회소설이기도 합니다.

  그와 동시에, 무엇보다도 이 작품들은 매우 재미있습니다. 인간이 문학을 읽는 이유가 교훈을 얻기 위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작자는 머리부터 거꾸로 변기 속에다 처박아야 할 겁니다. 교훈이 필요하다면 잠언집이라도 읽으면 될 일이 아닙니까? 아니면 인터넷에서 명언이라도 검색하든지. 거 뭐더라, 링컨의 사진이 옆에 붙어 있는 그런 명언들 말이죠. 단언컨대 인간이 문학을 읽는 이유는 재미있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앤 레키의 작품은 그 본령을 너무나 철저하게 지키고 있어요. 주인공인 브렉의 모험담은 그 자체로 눈을 뗄 수 없으리만큼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를 하나 짚고 넘어가 보죠. 이 작품의 가장 압도적인 특색은 등장인물의 성별을 거세해 버렸다는 점에 있습니다. 한국어도 그렇지만, 특히 영어를 비롯한 서구권 언어들은 성별 구분에 과도할 정도의 집착을 보입니다. 영어를 배우자마자 익히는 He와 She의 구분부터 시작하여 심지어는 무생물의 성별을 파악해야 하는 문법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수천 년간 언어를 통해 집요하게 양쪽 성별을 구분해 왔지요. 그리고 앤 레키는 인칭대명사를 하나로 통일하는 아주 간단한 기교를 통해 인간의 상상력을 구축하는 기본적인 틀을 완벽하게 박살내 버립니다. 이는 실로 압도적이리만큼 성공적인 문학적/사회적 실험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주인공이 남성인지 여성인지가 무어 그리 중요합니까? 주인공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가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요? 그러나 의외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단지 등장인물의 성별을 알 수 없다는 아주 사소한 점에서 불편을 느끼고, 심지어 그 불편은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커지게 됩니다. 그리고 급기야 어째서 자신이 불편을 느껴야 하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지요. 그렇기에 이 책은 단순한 일방향적 의사전달을 넘어서 작가와 독자간의 쌍방향적인 의사소통의 창구가 됩니다. 그간 자칭타칭 무수한 페미니즘 소설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페미니즘의 본질이 성별의 구분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데 있다면, 페미니즘의 F 자도 꺼내지 않는 이 소설이야말로 진정한 페미니즘 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여하튼 앤 레키의 작품들은 강력하게 추천드릴 수 있습니다. 앤 레키는 이 세 편으로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라섰어요.만에 하나 앞으로 단 한 작품조차 더 쓰지 못한다 해도, 앤 레키는 라드츠 3부작만으로 이미 불멸의 이름을 얻을 겁니다. 저는 지금까지 집필된 무수한 스페이스 오페라 중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의 보르코시건 시리즈가 가장 뛰어나다고 여겨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네요. 앤 레키는 그만큼 위대합니다.

  마지막으로 인상깊었던 구절을 하나 소개하고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
  ["나빴나?"
  "예. 아주."
  "네 잘못인가?"
  "제 관리 하에 있는 것은 모두 제 책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소한 정의, 앤 레키, 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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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13 12:55
수정 아이콘
리디에 다 있군요
추천 고맙습니다
TheLasid
18/04/13 12:59
수정 아이콘
나름 SF덕후라고 자신했는데, 어째 전 처음 들어보는 작가네요.
반성하고 당장 사러 갑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유스티스
18/04/13 13:28
수정 아이콘
마지막 구절 두 인물?의 배경만 간단하게라도... A,B면 B는 왠지 인공지능같긴한데요.
18/04/13 15:24
수정 아이콘
둘 다 사람입니다. A는 상관. B는 중간관리자. A는 군주로부터 '이 일에 대해 절대 묻지 말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하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에둘러 물어보죠. B는 그에 대해 이렇게 답변합니다.

이 장면은 같은 작품의 후반부에서 인물과 상황을 바꿔서 다시 한 번 변주됩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제게는 상당히 인상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콜드플레이
18/04/13 13:32
수정 아이콘
요즘은 '아작' 덕분에 행복합니다.
18/04/13 13:45
수정 아이콘
아작의 출판 리스트를 보면 정말 불가사의하죠. 제2의 시공사 ..사장이 재벌인데 자기 취미생활하는건지.
꼬깔콘
18/04/13 13:53
수정 아이콘
아작은 책 되게 잘 파는 편입니다. 이유를 짐작해보자면 다른 출판사에 비해 트위터 마케팅 덕을 많이 본 것 같고요. 출판사 시작하기 전부터 사장이 트위터 커뮤니티에 완전히 녹아들어있던 사람이라..
18/04/13 14:06
수정 아이콘
생각보다 SF가 잘 팔리나 보네요.. 잘팔릴만한 리스트는 아닌것같았는데 말이죠.
꼬깔콘
18/04/13 14:07
수정 아이콘
전 SF가 잘 팔린다기 보다는 마케팅의 승리라고 보는 편이에요. 기존 SF출판사들이 장르 코어팬들을 상대로 장사했다면 아작은 트위터 유저들을 중심으로 한 충성층을 확보해놨다고나 할까...
18/04/13 14:11
수정 아이콘
역시나 그쪽 부류 고객 들이 돈을 잘 쓰고 충성심이 높기는 하네요..
수정비
18/04/13 17:09
수정 아이콘
기존SF 번역책들은 전자책으로 나오는게 정말 적었는데,
아작은 모든 책을 전자책으로도 내주고 있다는 점도 판매량에 일조를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8/04/13 15:25
수정 아이콘
저간의 사정은 모르겠고 그저 압도적인 감사를 표할 따름이죠.
단 하나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엄청난 물량공세 덕분에 전권을 다 구비할 수는 없다는 점일까요. 예전에 행복한책읽기 SF선집은 죄다 구입했지만 아작은 기껏해야 절반 정도입니다.
18/04/13 16:44
수정 아이콘
사장님이 디자인콤마라고 팬시용품 같은 디자인 제품 만드는 회사 사장님이신걸로 압니다. 다이어리나 노트 제작을 위해 지류 구매를 대량으로 하는데다 책 편집이나 디자인도 기존 회사에서 같이 하니 제작비가 다른 출판사보다 낮아 SF같은 소수취향 책만 내는데도 유지가 되는거라는 얘기가 돌더군요.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르카
18/04/13 14:01
수정 아이콘
헛 SF 좋아하는데 저도 처음 들어보네요. 지금 사러갑니다.
Betelgeuse
18/04/13 14:03
수정 아이콘
지금 사러 갑니다(2)
SF 추천 감사드립니다!
스칼렛
18/04/13 15:03
수정 아이콘
보르코시건 시리즈 다른 작품은 왜 번역이 안되는지 아쉽군요...잘 안팔리나...
18/04/13 15:26
수정 아이콘
안팔려서 그렇겠죠..... 미러 댄스 이후로 증발이라니, 한국에서 마일즈는 영원히 햄보캐질 수 없겠군요.
아케이드
18/04/13 15:53
수정 아이콘
소개 감사합니다. 꼭 읽어봐야겠네요.
18/04/13 17:05
수정 아이콘
후속편은 아니지만 라드츠 우주 배경으로 책 나왔습니다. 번역은 아직이지만요.
차근차근
18/04/14 01:21
수정 아이콘
한글 번역이 가독성이 너무 안좋아서 영문판으로 보고 있습니다.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잊혀진꿈
18/04/14 01:24
수정 아이콘
추천 감사합니다 지나가다가 본적은 있는데 아직 본격적으로 작품을 본적은 없네요
그러나 3대 클래식 작가의 위광이 워낙 대단한거야 그렇다쳐도 신세대 기수가 로저 젤라즈니라니요 굳이 윌리암 깁슨이나 그렉 이건까지 안가도 당장 우리시대에는 테드 창도 있고....너무 사멸한 장르로 여기지 말아주세요
18/04/14 01:53
수정 아이콘
흐흐. 조금 오버하긴 했습니다. 윌리엄 깁슨은 취향에 안 맞지만, 그렉 이건과 테드 창 둘 다 좋아합니다. 특히 테드 창은 SF독자로서 '좋아하지 않는 게 불가능한' 수준의 작가이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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