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게임을 시작했을 때 제게는 아이템이 단 하나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요즘이야 신규 회원 확보가 엄청나게 어려워지다 보니 게임 시작할 때 여러 가지 아이템을 퍼 주는 게 정형화되었지만, 그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거든요. 오히려 운영하는 쪽에서 서버가 감당이 안 된다고 투덜거리며 가입자를 막아놓기까지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뉴비들이야 모르겠지만 고인물들은 익히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래도 쩔해주는 길드원들이 있었던 덕분에 제 성장은 순조로웠습니다. 꾸준히 경험치를 쌓아 제때 렙업했고, 필요한 장비도 얻었죠. 퀘스트도 꾸준히 수행했습니다. 다만 필수 퀘스트야 어쩔 수 없더라도, 선택퀘스트는 대부분 그냥 넘어갔습니다. 천성이 게을렀던 탓이겠지요. 그 때 여러 가지 퀘스트를 진행했으면 지금 렙이 좀 더 높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네요. 구 리니지나 디아블로2 초창기쯤은 찜 쪄 먹을 정도로 워낙 렙업이 힘든 게임인지라 말입니다.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데 아주 많은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습니다. 캐릭터 조작에 자신이 있기도 했고, 장비도 그럭저럭 갖추고 있었으니까요. 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는 이야깁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없는 자만심이죠. 어차피 퀘스트는 길드원들이 대부분 클리어해 주었고 저는 뒤따라가며 드랍 아이템이나 주워 먹었거든요. 그런데도 꼴에 아이템 욕심이 있어서 레어템 뜨면 길드원들에게 그거 나 달라고 마구잡이로 우기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또 그걸 내주는 길드원들도 참.

  아무튼 그렇게 플레이하다 핵심 업데이트가 이루어졌습니다. 주된 내용은 길드 시스템이 파티 시스템으로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가입되 있던 길드가 자동 해산되었어요. 채팅 기능은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만 길드는 이제 끝이었죠. 제 캐릭터가 필드에 덩그러니 놓인 모습을 보니 처음에는 황당했고, 다음에는 겁이 나더군요. 길드원이랑 플레이할 때는 몰랐는데 알고 보니 제 렙이 필드 요구렙보다 낮았던 겁니다. 버프 걸어주는 길드원도 없고 힐 해주는 길드원도 없으니, 몹 하나 잡는 것도 엄청 벅차더라고요.

  다행히도 새로 도입된 파티 시스템을 이용해서 렙 비슷한 사람이랑 파티를 맺었습니다. 옛 길드원들이 소매넣기를 해준 덕분에 필드 드랍된 골드랑 템 판 돈 합쳐서 거주지(이것도 업데이트)도 살 수 있었죠. 그러자 퀘스트가 새로 떴습니다. 클리어하는 데 엄청 오래 걸리는 장기 퀘스트더라고요. 원래 매뉴얼 같은 거 잘 안 읽지만 그 때는 어째서인지 퀘스트 내용을 꼼꼼히 뜯어보았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깨달았죠.

  그렇구나. 그 때 우리 길드원들도 이 퀘스트를 수행하는 중이었구나.

  팝업창이 떴습니다. 의뢰를 승낙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예 버튼을 눌렀죠. 그리고 퀘스트가 실행되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고, 난이도는 극악이며, 경험치는 엄청나게 퍼부어주지만, 골드는 하나도 안 주고, 오히려 클리어하는 데 골드를 미친 듯이 들이부어야 하는, 최저 20년 이상 걸리는 퀘스트가요.

  퀘스트의 내용은 뉴비를 쩔해주는 것입니다. 퀘스트 이름은 ‘양육’이라더군요.

  그 퀘스트를 시작한 게 벌써 5년이 넘었네요. 내년이면 제가 쩔해주는 뉴비 파티원이 초등학교 필드 돌입 퀘스트를 맞이합니다. 지금까지 쩔해 준다고 시간도 많이 들였고 골드도 투입하고 했는데, 레벨과 경험치 수치를 게임 내에서 확인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시스템 덕분에 대체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이제는 필드에 나가야 합니다. 제가 사 준 장비를 장착하고, 제가 사 준 아이템을 가방에 넣고요. 마치 30년 전 제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이제야 새삼스레 깨닫네요. 고마워요, 길드원님들. 그때 정성껏 쩔해 주셔서.
  이제 저도 저희 파티원을 쩔해 주러 갑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귓말도 잘 안 넣고 챗도 잘 안 했지만 이제 조금은 더 자주 할게요.

  앞으로도 즐겜하세요, 모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