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8년전 쯤, 어떤 워크래프트 AOS 장르 유즈맵을 지독히 열심히 즐겼다. 처음에는 공방을 뛰었지만, 도저히 공방에서는 제어할 수 없던 내 실력을 보고 ( 템 효율을 한자리 수 단위로 계산하고, 얼마 되지도 않는 해외 사이트 공략을 보며 분석할만큼 열심히 했고, 무엇보다 폐인처럼 하루에 9시간씩 게임을 했으니 -_-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 금방 귓말로 한국에서 몇개 존재하지도 않던 클랜들에서 입단 제의가 왔고, 한 곳을 들어가 금방 서브 멤버에서 내전 정규 참여 멤버로 승격, 2달도 되지 않아 클랜전 레귤러 자리 까지 도달해서 해외 팀들과 스크림을 뛰고 대회에 나가고 그랬다.

게임을 그렇게 미친듯이 하니 당연하다는듯 클랜 사람들과도 금방 친해졌다. 처음에는 워크래프트 프라이빗 채널에서 만나 몇번 얘기하다가, 나중에는 더 자주 이야기 하고 싶어 서로 개인 메신저 (이쪽 문화가 다 그렇듯이 네이트온이 아닌 MSN을 사용했다.) 도 등록하고, 게임 외적으로 사적인 얘기도 많이 나눴다.

클랜은 고딩 대딩 겜돌이들 많고, 아재들 간간히 섞여있고, 다들 게임 좋아하고 만화 좋아하고, 별로 특이할 게 없는 게이머 집단이었지만 단 한가지 특별한점이 있었는데, 무려 멤버중에 현역 여고생 멤버, RPG 게임의 한 능력치를 따와 닉네임을 지은 겜순이(?) '어질리티' 가 있었다는 점이다.

처음 어질리티를 봤을때 말투가 묘하게 귀여워서 와! 겁나 귀엽게 얘기한다! 하고 생각 했지만, 실력이 워낙 좋아서 조금도 여자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나처럼 대회 레귤러에 들 정도는 아니었지만, 내전 참여해서 매번 1인분 이상 할 정도는 충분한 실력이었다. 그리고 보통 게임 잘 못해도 게임 좋아하는 여자애들처럼 게임 자체 만큼이나 그림 그리는것도 좋아했다. 카페에 게임 캐릭터 관련 그림을 올리는걸 보면 뭐 감탄이 나오는 대단한 재능까진 아니었지만 퍽 봐줄만한 그림을 그렸었다.

어질리티는 남초 사이트 경험이 많은듯 보통 여고생들이라면 노잼이라 질색할만한 화제나 드립에도 잘 끼어들어 맞춰주고는 했다. 군대라던가, 뭐 그런것 말이다. 그리고 그런 여성 회원이 있는것 치고는 또 신기할 정도로 클랜에서도 그를 여자라고 들이대거나, 특별취급하거나 하지 않았다. 나도 꽤 인터넷 커뮤니티 경험이 많고, 커뮤니티내 소수 여성 회원들이 들이대는 사람 때문에 쫒겨나듯 커뮤니티를 떠나거나 아니면 치정 관계로 커뮤니티가 터지거나 하는 얘기를 많이 듣기도 하고 직접 몇번 겪기도 했는데, 그 곳은 그런 분위기는 아니였다. 철저히 게임 얘기만 카페에 올라왔고, 사적인 얘기는 개인 채널을 이용하라는 지침을 클랜원들도 잘 지켰다.

그와 나이가 비슷한, 게임을 좋아하는 여동생이 있는 나는 금방 많은 공통화제를 이용해 그와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당시 나와 비슷한 또래 대학생이었던 'F', 그와 비슷한 또래 고등학생이었던 'W', 이렇게 둘을 껴서 네명이 성향이 잘 맞고, 실력도 비슷하고, 서울에 살았기 때문에 으쌰으쌰 같이 게임을 많이 하다가, 결국 내 제의로 정모 날짜까지 잡았다.

정모 날 본 어질리티의 모습은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게임 좋아할거 같은 관상이 따로 있는것도 아니고, 당시 내가 과외하던 여자애들과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말투를 쓰고 비슷한 노래를 불렀다. 고기를 참 복스럽게 잘 먹었다. 1차로 PC방에 갔다가, 2차로 고기를 먹고, 3차로 노래방에 들렀더니 벌써 10시, 미성년자도 있고 하니 기분좋게 넷이서 놀고나서 헤어졌다.

그렇게 몇달간 게임을 하다가, 어질리티는 고3이 되어 커뮤니티 접속이 뜸해졌다. 그와 별개로 나는 특유의 반골기질;로 인해 트러블이 잦아져 사실상 클랜에서 쫒겨나듯 탈퇴를 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내 동생이 쓰던 물건을 중고로 그에게 싸게 팔아넘기는 상부상조의 경제 행위등을 하기 위해 따로 몇번 만나기도 하고 밥도 먹고 했지만, 결국 당시 급하게 군문제를 해결하러 잠수를 탄 내 사정 때문에 결국 최종적으로는 어질리티와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그는 내 기억속에 '게임을 좋아하던 여고생 A'로 과거의 인물이 되어 사라지는가 했는데... 세상 참 좁다고, 얼마전 다른 게임 커뮤니티에서 우연히 그를 다시 재회하게 되었다. 그의 닉네임은 더 이상 어질리티가 아니었지만, 조금은 특이한 그의 본명을 닉네임으로 쓰고 있었고 난 이미 이름을 알고 있었기에 알아보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나누고 연락처를 교환하고 날짜를 잡아 그를 만났다. 내가 20대에 너무 많은 풍파를 겪어 많은 기억이 소실되어 그의 여고생때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막상 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금방 익숙한 얼굴이 보여 아, 저렇게 생겼었지, 하고 잊힌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게 커피를 마시며 게임 얘기 사는 얘기 그림 얘기 내가 롱디하다 헤어져서 공황장애가 온 얘기 그가 직장 동료랑 썸타는 얘기 등등을 나눴다. 대충 그 나이 또래 여자애들 만나면 으레 하는 얘기라 딱히 놀라울것은 없었다, 그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오기 전까진 말이다.

"오빠, 근데 그떄 그 xxx 클랜 사람들 혹시 아직도 연락하고 지내요?"

"나? 나 그 때 맨날 개싸워서 톡방에서도 대놓고 욕 처먹고 쫒겨났잖아 연락은 무슨, 넌 어떤데?"

"저요? 제가 걔넬 왜 만나요~ 으~~ 생각만 해도 싫다"

"왜? 넌 수험준비하기전까지 잘 지냈잖아,"

"에이 잘 지내긴요~ 어휴 저 그때 남성혐오 생길뻔했잖아요 진짜로"

어질리티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다음과 같았다.

당시 카페에서 어질리티가 여고생인거 알고 쪽지 한번 안 보낸 사람이 별로 없었단다. 따로 만나자, 뭐 먹으러 가자 이런 얘긴 기본이고 남자친구 있냐, 번호 알려달라, 채 30명도 안되는 클랜에서 열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렇게 집적댔단다.

29살 먹은 아저씨부터 자기 나이 또래까지 스펙트럼도 다양했고. 내게 더 충격적인것은 그날 같이 정모에 나간 F, W도 마찬가지였다는것이다.  정모날 만나서 3차 노래방 갔다가 헤어지고나서, 바로 F와 W한테 자기랑 둘이 따로 한잔 더 하자고 문자가 왔단다. 야1 W는 고딩이었잖아. 에이~ 고딩들이라고 술 못 마셔요? 오빤 고딩때 술 안 마셨어요? 맞는 말이다.

그렇게 계속 시달리고 시달리다가 결국 못 참고 울분을 터트리고 나갔는데, 그 사람들 사이에선 어느새 자기가 나쁜년이 되어 있었단다. 하도 짜증나서 게임도 다 접고 남자들이랑 한동안 어울리지도 않다가, 몇년 지나서야 지금처럼  멘탈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러고보면 당시의 나는 참으로 순진했다. 대체 뭘 믿고 저런 일이 없었을거라고 생각했던가? 카페에 표면적으로 보이는 글들? 사람들 많을때 채팅내용? 원래 모든 역사는 뒤에서 이뤄지기 마련인것을.

얘기를 다 들어주고나서 안타까운 마음 반, 당시의 나의 멍청함에 대한 한심스러움 반을 담아 그에게 말을 건넸다.

"어질리티야, 나 이거 인터넷에 글로 써도 돼?" 

그에게 맛난것을 먹여 집에 보내고 오는 길에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2년전쯤 중학교 동창생을 만나 옛날 얘기를 하다가, 내가 중학교 3년중 가장 아름답고 재밌었다고 생각하는 3학년 때의 추억이 자기에게는 죽고 싶을만큼 괴로운 따돌림의 기억이었다는것을 듣고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아, 나는 참 많은것을 내 위주로 태평하게 기억하는구나. 긍정적인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운 좋은 환경에 있었을뿐이었던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