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04/24 20:49:38
Name 누구겠소
Subject [일반] [8] 만약 그 친구 말이 거짓말이었다면
  심심한 사람들을 위해 저녁식사 전에 짧은 이야기를 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 다 된 밥도 뜸이 들어야 한다. 그 밥이 전기밥솥에서 만들어진 밥이라도 마찬가지다. 뜸이 드는 그 길지 않은 시간동안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요즘엔 음식이든 이야기든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그렇다면 이야기를 지어내야 하나. 하지만 역시 이야기 중의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일 것이다. 인간의 실제 삶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는 말은 이제는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로, 참말인 것이다.



  짧은 시간 안에 가짜 이야기를 지어낼 정도의 깜냥은 아니므로, 친구한테 들은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 친구는 29세의 남자로 아주 특이한 녀석인데, 평소 말수가 적고 꼭 필요한 이야기만 하는 편인 녀석이 술자리에서 갑자기 서너 명의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선보이며 해 준 말이다. 내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녀석은, 화젯거리가 떨어지고 서로 묵묵히 자신의 잔만 쳐다보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말을 시작했다. “나도 들은 얘긴데……”로 시작한 그의 말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졌다.



  “나도 들은 얘긴데, 사람은 자기가 거짓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거짓말을 할 때가 있대. 그래서 거짓말을 하면 죽는 약 같은걸 먹이면 자기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게 된다는 거야. 그게 왜 그런가 하니, 아주 오래 전에, 사람들이 말에 깃든 주술적인 힘을 믿던 시절에, 그리고 실제로 그런 힘이 있었을 때는, 거짓말을 할 줄 아는 인간들이 생존에 유리했다더라. 왜냐하면 거짓이라는 것은 실제로 있지 않은 어떤 것을 말하는 건데, 당시에 존재했던 말(言)의 어떤 특별한 힘 때문에, 거짓말이 실제로 이루어지곤 했다고 하더군. 거짓말은 곧 소망의 실현을 만들었던 거야.



  애초에 인간의 언어가 처음 생겨나던 당시에는, 거짓말을 할 줄 아는 인간과, 할 줄 모르는 인간 두 종류의 인간이 있었는데,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들, 이를테면 “내일은 비가 온대” 라던지, “저쪽으로 가면 사냥감이 많더라” 라던지, 그런 실제로 있지도 않은 일을 말하는 사람들의 말이 자꾸만 실현되니까, 점점 더 생존에 유리했던가봐. 그래서 결국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자연히 도태되어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지 뭐야. 한편 거짓말을 ‘생각 해 낼 수’ 있는 인간들은 그렇지 못한 인간들보다 지능이 더 높았다고 볼 여지도 있겠지. 거짓말은 어떻게 보면 상상력과 논리, 두 가지 측면이 모두 필요한 것이니까 말야?



  하지만 인구가 늘고, 따라서 인간의 말도 늘고, 말이 흔해지고 그에 따라 사람들이 말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게 됨에 따라, 말이 가진 힘이 사라져 버리자, 거짓말을 잘 하는 습성은 이제 사회의 대표적인 부덕(不德)으로 자리 잡게 되었어. 실현되지 않는 거짓말은 결국 아무 쓸모없는 거짓말일 뿐이니까.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실현되지 않는 거짓말을 함으로써 더 큰 이익을 얻는 인간들, 흔히 사기꾼이라고 하지? 그런 놈들도 여전히 있었고, 그래서 그런지 이 거짓말 유전자는 인간에게 절대 사라지지 않을 만큼 뿌리 깊은 생명력을 얻게 됐다고 해.



  정말 신기한 것은, 말이 아무런 주술적 힘을 갖고 있지 않은 현재에도 아직 소수의 인간은 아직도 말의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말의 결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면 즉시 알아챌 수 있다는 거야. 그 능력을 자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아무튼 주변에 거짓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 한 명 씩 있지 않아? 본능적으로 거짓말을 들으면 어떤 불쾌감을 느끼는 거지.”



  여기까지 말을 마친 친구는 건배를 제의하더니 언제 떠들었냐는 듯 다시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아마 다들 술에 취해 있어서였기도 하겠지만, 모두 그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른다. 술자리에 내려앉은 순간적인 침묵의 장막이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이 아닌가 했지만, 그는 대체로 침묵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인데, 그럴리야 있으랴. 아마 그저 갑자기 이야기가, 이것 참 다른 표현을 찾기가 어려운데, 흔히 쓰는 말로 이야기가 ‘꼴렸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처럼 과묵한 사람도 가끔씩 이렇게 떠들어대고 싶은 욕구가 숨어있다는 것은 참 인류의 미스테리다.

  ...그런데, 만약 그 친구 말이 거짓말이었다면? 다음날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런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이처럼 훌륭한 구라를 생각해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약간의 질투심과 함께, 정교한 거짓말을 하기 위해 그가 침묵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불온한 상상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군침을 흘리며, 가짜 말을 지어내고 술자리의 적절한 침묵의 시기를 노려 호시탐탐 내뱉을 기회를 노리는 그의 내면을 생각하게 되는 것인데, 어 이거 내가 왜 이렇게 삐딱하게 생각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그의 말에서 한 가지 진실 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나에게 거짓말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 그렇다면 그의 말은 참인가? 혹은 참이 섞인 거짓인가? 아니면 부분은 참이고 부분은 거짓인가? 하는 생각들로 쓸데없이 머리가 아파오는 것이다.


  알게 뭐람.


  이제 밥에 뜸이 다 들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나와 같다면
19/04/24 20:54
수정 아이콘
5월 글쓰기는 센 분들이 너무 많으셔서 엄두를 못내겠군요. 잘 읽었습니다.
누구겠소
19/04/24 21:00
수정 아이콘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19/04/24 20:58
수정 아이콘
올려주시는 글마다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누구겠소
19/04/24 21:00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글쓰기에 힘이 됩니다.
Thanatos.OIOF7I
19/04/24 21:44
수정 아이콘
이런 스타일의 글 참 좋습니다.
작품에 영감을 얻어가네요. 추천드리고 갑니다.
누구겠소
19/04/24 21:55
수정 아이콘
추천 감사합니다~~
F.Nietzsche
19/04/24 22:02
수정 아이콘
유발하라리가 말했죠. 인간만이 상상할 수 있다고
누구겠소
19/04/24 22:10
수정 아이콘
덕분에 몰랐던 사람 한명 더 알고갑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0905 [일반] 다문화를 가장한 후진국 매매혼이 가져올 불편한 미래 [201] TTPP16854 19/04/24 16854 11
80904 [일반]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그리고 나 자신 [1] chldkrdmlwodkd4464 19/04/24 4464 3
80903 [일반] [8] 만약 그 친구 말이 거짓말이었다면 [8] 누구겠소6492 19/04/24 6492 11
80902 [일반] 중국기업 주식과 SNK. [11] 고통은없나8231 19/04/24 8231 1
80901 [일반] [8]이제는 태교할 시간 [21] 북고양이6900 19/04/24 6900 22
80900 [일반] [8] 멘체스타 [14] 제랄드7096 19/04/24 7096 33
80897 [일반] '벼랑끝' LG폰, 국내 생산 중단…"공장 해외이전·희망퇴직 실시" [76] 홍승식15929 19/04/24 15929 3
80896 [일반] (스포)시대를 종언하는 마무리선언.엔드게임 보고왔습니다(개인적 감상평) [6] Brandon Ingram6874 19/04/24 6874 2
80895 [일반] 의장실 점거 자한당 "국회의장, 여성의원에 신체접촉···고발할 것" [131] 우연15224 19/04/24 15224 14
80892 [일반] (스포무) 누적된 유니버스가 주는 재미와 감동 [23] 달포르스7728 19/04/24 7728 4
80891 [일반] (어벤저스/스포) 한 시리즈의 완벽한 마무리를 보고서 [73] 길갈9745 19/04/24 9745 4
80890 [일반] 사퇴요정 이은재 의원, 문희상 국회의장에게도 "사퇴하세요!" [37] 쿠즈마노프10570 19/04/24 10570 2
80889 [일반] (스포일러) 팬들에게 큰 선물이 될 엔드게임 [77] Rorschach12096 19/04/24 12096 4
80888 [일반]  [8]부모가 되어가는것 [22] 스컬리7116 19/04/24 7116 25
80887 [일반] (노스포) 어벤저스 엔드게임 소감문 [33] 내일은해가뜬다10082 19/04/24 10082 5
80885 [일반] 비오는 날. [12] ohfree5536 19/04/24 5536 14
80883 [일반] [8]남편'을' 덕질한 기록을 공유합니다. [115] 메모네이드19588 19/04/24 19588 60
80882 [일반] 어제 공개된 테슬라 자율주행 정말 놀랍네요 [37] AUAIAUAI12570 19/04/23 12570 0
80881 [일반] 열 번째 이사를 앞두고 [5] 보편적인노래6170 19/04/23 6170 23
80880 [일반] 내가 사랑했던 연예인들은 모두... [11] Secundo9537 19/04/23 9537 0
80879 [일반] 무더운 여름 7월, 난방요금이 오를 수 있습니다. [20] 치열하게10393 19/04/23 10393 2
80878 [일반] 여야4당이 선거제 개혁과 공수처 법안의 패스트트랙을 추인했습니다. [72] 아유10119 19/04/23 10119 12
80877 [일반] 어벤져스4 : 엔드게임이 내일 개봉합니다! 어떻게 될까요? [41] 빵pro점쟁이11884 19/04/23 11884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