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둑에 목숨을 걸다.
86년 1월, 팩스로 송신된 10기 일본 기성전 최고기사결정전의 1국 현장 사진을 손에 쥔 바둑관계자들은 누구도 그 사진을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를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것은 분명 전율이었으리라. 그들이 사진속에서 본 것은 온몸에 성한 곳이 없이 왼팔에는 깁스를 하고 휠체어에 힘겹게 기대어 앉아있는 중환자와 머리를 박박 깎고 안경을 낀, 왜소하지만 단단해 바늘로 찔러도 들어갈 구석을 찾기 힘들 것 같은 한 사내가 마주 앉아 바둑을 두는 광경이었다. 불과 열흘전, 야밤의 교통사고로 전치 25주의 중상을 입은 조치훈이 휠체어에 비스듬히 앉아 고바야시와 바둑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목숨걸고'라는 수사를 흔히 쓴다. 자기 분야에 뼈를 묻겠다는 심정으로, 혹은 이성에 목매달고 쫓아다니는 사람들도 이런 말을 종종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순간, 조치훈에게 '목숨을 걸고'라는 말은 수사가 아니었다. 조치훈 9단은 86년의 10기 기성전의 7번 승부에서 진짜로 바둑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
- 130년만의 천재 탄생
조치훈 9단은 한국 바둑계의 대부인 조남철 9단의 조카다. 그리고 조상연 5단이 친형이며, 중견기사 최규병 9단이 외조카이니, 이 정도면 바둑명문이라고 해도 부족할 것은 없겠다. 조치훈은 80년대 자신이 일본 바둑계를 제패할 무렵 한국 바둑계를 평정했던 조훈현 9단의 3살 연하였는데, 조훈현이 9살의 나이로 프로가 되었을 때 조치훈은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결심하고 비행기에 오른다.
조치훈의 일본행은 마침 타이밍도 기가 막혔다. 때마침 일본 최고의 바둑문파인 기타니 미노루 9단의 도장 문하생의 도합 단수가 100단을 돌파하면서 기념식을 갖게 되었는데, 어린 조치훈은 그 자리에서 당시 한창 일본 바둑계의 떠오르는 신성으로 주목을 받고 있던 임해봉에게 5점 치수로 불계승을 거두었다. 5점 놓고 이긴 것이 무엇이 그리 대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조치훈은 56년생, 그때 나이는 불과 6살이었다. 프로에게 5점을 놓고 이기는 실력이라면 기원에서 흔히 말하는 급수로 2급이 충분하며, 한국기원의 아마단 인증제도를 생각하면 아마 3단 정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 한판의 바둑으로 조치훈은 쉽게 말하면 '떴다'. 일본 열도는 19세기 초반 34세의 나이로 요절했으며, 도사쿠, 죠와, 오청원과 함께 일본바둑사의 '기성(棋聖)'으로 추앙받는 혼인보 슈사쿠 이후 130년만에 최고의 천재가 나타났다고 열광했으며, 조치훈은 즉시 기타니 9단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조치훈은 주위의 기대보다는 많이 늦은 11세에 입단대회를 통과했다. 조치훈은 6살의 한창 응석부리고 장난칠 나이에 딱딱한 분위기의 바둑 도장에서 바둑을 공부하고 승부만을 생각할만큼 진득한 아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주위에서 온통 천재라고 떠받들어주는데다가 고집은 셌고, 장난을 좋아하는 이 어린 아이에 대해서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질만한 동문들도 없었는지, 조치훈은 기타니 도장의 문하생들과 그리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한다. 김인, 윤기현, 하찬석 등 기타니 도장에서 수학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한국의 1인자 자리를 놓고 결투를 벌였던 선배들과는 달리, 조치훈은 일본에 남았다. 아마 조치훈은 일찌감치 '일본에서 명인이 되기 전에는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 명인이 되어 한국에 돌아오다.
조치훈은 험난한 입단의 과정을 거친 이후로는 쾌속 순항을 거듭했다. 74년의 일본기원선수권전에서 60년대 천하를 한손에 쥐락펴락했던 노호 사카다 에이오 9단에게 2연승 이후 3연패라는 아쉬운 스코어로 타이틀의 목전에서 물러나기도 했지만 75년의 프로10걸전에서 우승하면서 타이틀 홀더의 자리에 다른 거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시작했다.
70년대 중반 일본의 바둑계는 한국과 같은 춘추전국시대를 경유하고 있었다. 50년대까지 약 20년간 그 전설과도 같은 '칫수고치기 10번기'로 일본의 쟁쟁한 기사들을 전부 무릎꿇린 오청원 선생의 뒤를 이어 50년대 말부터 60년대 중반까지 천하를 제패했던 '면도날' 사카다를 임해봉이 특유의 두텁고 끈덕진 바둑으로 물리친 후, '컴퓨터' 이시다 요시오 9단이 다시금 명인과 본인방을 이양받았으나, 그리 오래 수성하지는 못하고 오다케, 가토, 이시다, 다케미야, 조치훈 등 기타니 도장 출신의 젊은 신성들과 중국 출신 임해봉, 그리고 60년대를 호령했던 사카다와 후지사와 등이 각 타이틀전에서 계속해서 충돌했지만 어느 한 기사도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가토 9단이 한 때 7대 타이틀 가운데 5개를 석권하며 절대자의 자리를 넘봤지만, 1위 기전인 기성전과 2위 기전인 명인전을 각각 후지사와 9단과 오다케 9단이 손에 쥐고 전국의 균형을 유지했다. 또한, 일본의 기사 랭킹 산출 방식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는데, 랭킹 1위 기전인 기성전의 타이틀 보유자가 무조건 그 해의 기사 랭킹 1위 자리에 오르는 것으로, 기성전의 명칭은 '최고기사결정전'이라는 타이틀까지 같이 가지고 있었다. 이 기성전에 2위 기전인 명인전과 3위 기전인 본인방전을 더해 '대삼관'이라고 부르며 이 세 기전의 도전기를 7번기의 이틀바둑, 즉 제한 시간 8시간짜리의 바둑으로 치르고 있었다. 가토 9단이 3위부터 7위까지의 기전을 소유했지만 1인자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는 이런 일본 바둑계의 랭킹 산정 방식 때문이었다.
75년의 첫 7대 타이틀 획득 이후, 조치훈은 한동안 방어에 힘을 전혀 쓰지 못했다. 타이틀을 공략하면 항상 성공하여 새로운 성주가 되었지만, 그 성을 채 1년도 지켜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쫓겨가곤 했다. 이런 사이클이 반복되다가 조치훈은 80년, 드디어 대삼관 가운데 하나인 명인을 오다케 9단으로부터 뺏어옴으로써 일본바둑계 평정에 본격적으로 착수한다. 명인은 조치훈이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부터 계속해서 머릿속에 그리던 꿈의 타이틀이었다. 막부시대부터 일본의 당대 최고수에게만 주어지던 칭호이자, 부와 명예의 상징이었던 명인. 한국에서 건너온 24세의 청년이 현대 바둑의 메카인 일본에서 명인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명인이 될 때까지 한국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했던 조치훈은 이 해에 한국으로 금의환향하여 바둑인으로서는 최초로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자신이 했던 약속을 지킨 것이다.
- 3연패, 그리고 4연승.
80년 명인, 81년 본인방, 82년 십단 등 2, 3, 4위 기전을 차례로 수중에 넣은 조치훈은 83년, 7기 기성전에서 당시까지 기성을 6연패하고 있던 후지사와 9단과 조우한다. 후지사와는 60년대 무적의 사카다에게 거의 유일하게 맞서던 인물. '50수까지는 내가 세계최강'이라고 자부할만큼 번득이는 감각과 호방하면서도 두터운 세력바둑과 탁월한 전투로 일세를 풍미한 인물이었다. 1기 우승 이후 '나는 1년에 네판만 이기겠다.'면서 1년 스케줄의 초점을 오로지 기성전 방어에만 맞춰오면서 매년 '이번엔 안 되겠지'라고 생각했던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후지사와와 일본 바둑계 최초의 '대삼관'을 달성하려는 명인, 본인방, 십단의 3관왕 조치훈의 격돌은 현대 일본 바둑사에서 커다란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결승 전야제에서 '치훈군에게 딱 네판만 가르쳐주겠다' - 4:0으로 이겨버리겠다는 말이다. - 고 선제를 넣은 후지사와와 '후지사와 선생에게 세판만 배우겠다.' - 3판 이상은 절대로 안 지겠다는 말이다. - 고 뒤질세라 맞불을 놓은 조치훈. 처음에는 후지사와의 호언장담이 현실화되는 듯 했다. 1국부터 3국까지 조치훈을 스트레이트로 몰아붙이는 괴력을 발휘하며 3:0, 기성 방어를 눈앞에 둔 것이다. 조치훈은 후일 이 시점을 회고하면서 '기성에 오르는 것은 이미 관심이 아니었다. 딱 한판만이라도 건질 수 있다면 명인과 본인방을 모두 잃어도 좋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절박한 심정이 조치훈을 다시 불타오르게 한 것일까. 조치훈은 4국부터 자신의 본령인 철저한 실리 이후 타개의 전법을 구사하면서 3국을 내리 승리하며 3:3 타이스코어를 만들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상황에서 벌어진 도전기 7국은 중반까지 후지사와의 우세였지만, 예전부터 중요한 순간마다 후지사와 9단의 발목을 잡아왔던 예의 그 '덜컥수'는 결국 기성전 최고기사결정전의 승자를 조치훈으로 만들어주었다. 기성·명인·본인방·십단의 4관왕. 일본 바둑계 천하는 조치훈의 발아래 모두 정리되었으며, 60년대 사카다의 천하제패 이후 20년만에 일본의 바둑계가 조치훈에 의해 평정되는 순간이었다.
3연패 이후 4연승, 2연패 이후 3연승은 조치훈의 전매특허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데, 조치훈은 4연승만 하기에는 좀 뭔가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한 탓인지 어쨌는지는 본인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기성전 승리 이후 벌어진 본인방전에서는 임해봉 9단에게 3연승 이후 4연패해서 드라마의 조연으로서도 훌륭한 자질(?)을 보여줬다. '번기(番棋) 드라마 제조기'라고 하면 될까. 조치훈의 '5번기, 7번기 드라마'는 이후에도 몇 번 더 있었지만 이후에 다시 얘기하기로 한다.
- 필생의 라이벌, 고바야시 고이치
한국에 조훈현과 서봉수가 있었다면, 일본에는 조치훈과 고바야시가 있었다. 조치훈과 고바야시의 대국 횟수는 조훈현과 서봉수가 기록한 그것에 비교해서 양적으로는 떨어질지 모르지만, 조훈현과 서봉수의 대결이 조훈현에게 많이 기울었던 데에 반하여 조치훈과 고바야시는 그야말로 팽팽한 라이벌이자 결정적인 순간에 맞닥뜨리는 경우가 많았다. 조치훈이 도전하는 상대를 엄청난 열기를 발산해서 흔적도 없이 녹여버리는 폭발적인 활화산이라면, 고바야시는 상상할 수 없는 한기로 주위를 자신의 영역으로 넓혀나가며 상대로 하여금 한기에 질려 선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게 하는 거대한 빙산이었다. 조치훈은 감성파, 고바야시는 이성파였다. 응창기배 8강에서 섭위평 9단에게 패배한 후 뒷풀이에서 조훈현을 붙잡고 '나의 바둑은 끝났다. 나는 바보다'라고 말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었던 조치훈. 그는 바둑에 지는 날에 울면서 집에 가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고바야시가 그런 조치훈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리라.
어린 시절 조치훈이 기타니 도장에서 수학할 때 네 살 연상의 고바야시는 조치훈을 그리 달갑게 보지 않았으며, 어린 시절이니 그랬겠지만 동료 문하생들과 어울려 조치훈을 괴롭히는 축이었다고 한다. 입단은 고바야시가 한발 앞섰지만, 이후 신인상 수상은 조치훈이 고바야시를 한 발 앞섰으며, 타이틀 획득에서도 조치훈이 고바야시를 한발씩 앞서갔다. 조치훈이 80년 명인에 오르고 이후 대삼관을 달성하는 등 연일 장외홈런을 때려낼 때까지도 고바야시 77년 5위 기전인 천원(天元)전에서 우승한 것을 제외하고는 7대 타이틀과는 인연이 없었다. 조치훈과 7대타이틀전에서 처음 만난 82년의 37기 본인방에서도 고바야시는 조치훈에게 2:4로 패배해서 물러났다. 정상권에서 계속 맴돌았지만 정상에는 오르지 못하고 계속 그 언저리를 서성이던 고바야시는 뒤늦게 발동이 걸리기 시작해서 84년에 가토 9단에게 십단 타이틀을 가져오더니 드디어 85년, 10기 명인전 도전기에서 풀세트 접전 끝에 조치훈에게 4:3의 짜릿한 승리를 거두면서 랭킹 2위, 라이벌 조치훈의 한 발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86년 1월, 드디어 조치훈은 주변의 영토를 모두 잃고 외롭게 남은 자신의 타이틀이자 가장 큰 성이었던 기성 하나를 남겨두고 고바야시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
바로 이 기성전 결승 1국을 불과 열흘 앞두고 조치훈은 치명적인 교통사고를 당한다. 온몸이 성한 곳이 없는 전치 25주의 중상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조치훈의 기권을 예상했지만,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조치훈은 만류하는 주위 사람들을 뿌리치고 도전기에 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머리와 오른팔은 멀쩡하다.'는 것이었다. 바둑을 두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은 갖추고 있는데 기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1인자의 자리에 오른지 불과 이제 3년. 아마 그 뒤를 고바야시에게 넘겨주기는 죽기보다 싫었음이 아닐까. 조치훈은 '휠체어 대국'이라고 불리운 86년의 기성전 도전기에서 휠체어를 왼편으로 하고 비스듬히 앉아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바둑돌을 하나하나 힘겹게 바둑판에 갖다놓으면서도 1국과 3국을 승리로 이끄는 괴력을 보여준다. 결국 그 놀라운 정신력이 끝까지 고바야시의 실력과 체력을 압도하지는 못해 2:4로 기성을 넘겨주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고바야시가 거둔 4승이 아니라 조치훈이 거둔 2승이었다. 당시 고바야시는 일중 슈퍼대항전에 출전해 중국의 '철의 수문장' 섭위평에게 가토, 후지사와와 함께 패해서 우승을 넘겨준 이후 두 선배 기사와 함께 머리를 박박 깎은지 얼마 되지 않아 가뜩이나 크지 않은 체구에 더욱 왜소해보였는데, 10기 기성전 수상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명실공히 1인자의 자리에 오른 고바야시의 모습이 그렇게 왜소해보일 수가 없었다고 전한다. 따지고 보면 고바야시에게도 조치훈의 교통사고는 불운이었다. 승자는 고바야시였으며, 드디어 항상 자신의 앞자리를 차지하던 조치훈을 꺾고 염원하던 1인자의 자리에 올랐으나, 바둑팬들은 고바야시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듯 했다. 85년의 명인전에서도 조치훈을 물리쳤으며, 이번에야말로 입단 이후 계속해서 조치훈에게 뒤져왔던 자신의 경력을 일순간에 만회하고 오히려 조치훈보다 앞서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조치훈이 만신창이가 되어서 절정의 컨디션과 실력의 자신과 바둑을 두겠다고 나타난 것만으로도 환장할 일인데, 두판씩이나 자신을 이겨버린 것이다. 과연 조치훈의 교통사고가 없이 두 기사가 7번기를 벌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진정으로 아무도 알 수 없는 역사의 가정이며 아무리 생각해도 설득력 있는 답을 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어쨌든 10기 기성전 도전 7번승부에서 고바야시가 조치훈을 물리침으로써 일본 바둑계의 대권은 고바야시에게로 넘어갔지만, 조치훈과 고바야시의 진검승부는 뒤로 미루어진 셈이었다. 무관으로 떨어진 조치훈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에 대해서 확신을 가진 이는 없었지만, 80년대 초반의 무적 조치훈이 컴백하기를 기다리는 이는 아마 셀수 없이 많았으리라.
- 조치훈과 고바야시의 본인방 3년 전쟁
조치훈은 기성 타이틀을 상실하고 무관으로 내려왔지만, 무관의 세월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바로 그해에 조치훈은 한국에서는 '작은 기성'이라고 불리웠던 7위 기전인 기성전(작은 기성전은 한자로 '碁聖'을 쓰며, '고세이'라고 읽는다. 최대타이틀인 기성전 최고기사결정전은 '棋聖'을 쓰며, '기세이'라고 읽는다.)에서 우승하고, 87년의 13기 천원전에서는 라이벌 고바야시를 상대로 '2연패 후 3연승'의 쇼를 다시 한번 연출하여 고바야시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 그리고 89년 44기 본인방전에서 '우주류' 다케미야 마사키 9단을 4:0으로 셧아웃시키면서 3년만에 다시 대삼관의 일각에 그 이름을 올리면서 고바야시의 턱밑까지 쫓아올라갔다.
최고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본인방. 막부시대부터 바둑 4대 가문 가운데 가장 전통이 깊고 실력이 뛰어났던 본인방가의 마지막 주인인 21세 본인방 슈사이 명인이 본인방이라는 이름을 타이틀로 전환하면서 시작된 기전이었으며, 일본의 소위 '대삼관' 가운데 끝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 역사와 전통 때문에 한국에서의 국수전과 비슷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고바야시는 이 본인방 타이틀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조치훈은 87년 고바야시로부터 천원을 빼앗음으로써 일본의 7대 기전을 모두 한차례씩 우승한 '사이클링 히트'라는 기록을 수립한 반면, 고바야시는 조치훈이 당시 소유하고 있던 본인방과 6위 기전인 '왕좌' 타이틀을 소유한 경험이 없었다. 고바야시에게 본인방 타이틀전에서의 조치훈과의 대결은 대삼관과 사이클링 히트, 그리고 조치훈과의 진검승부라는 세 가지 과제를 한꺼번에 모두 해소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그리고 조치훈이 본인방 타이틀을 쟁취한 바로 다음해에 고바야시는 본인방전 도전자로 결정되어 조치훈과 맞붙게 된다. 90년, 45기 본인방전이었다.
조치훈과 고바야시는 90년부터 이후 3년동안, 45기부터 47기까지의 본인방 도전기 출전자 명단을 자신들의 이름으로 장식하며 도합 21번기의 쟁기를 펼친다. 대삼관 가운데 마지막 남은 하나의 영토인 본인방을 자신의 영지로 복속시키려는 고바야시와 라이벌의 대삼관 달성의 제물이 되지 않으려는 조치훈. 90년의 45기 본인방 도전기의 서전은 조치훈이 승리로 장식했지만, 2국부터 4국까지 고바야시가 연달아 3승을 거두면서 조치훈은 막판에 몰렸다. 하지만 막판에 몰리면 힘을 내는 조치훈, 5국부터 7국을 스트레이트로 따내면서 4:3이라는 극적인 스코어로 본인방을 방어해낸다. 그러나 이것이 드라마의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마 당시까지 한명도 없었으리라.
46기 본인방전의 도전자 역시 고바야시였다. 고바야시는 분명 본인방전에 자신의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초반에 잘나간 이는 역시 고바야시였다. 1,2국을 완승하며 다시 2:0으로 앞서나갔지만, 또 거짓말처럼 4연속으로 패배를 허용하며 조치훈에게 2:4로 패퇴하여 본인방으로의 꿈을 접어야했다.
'이번에는' '이번만은'. 두번의 도전에 실패한 고바야시는 47기 본인방전 본선리그에서도 1위를 기록하면서 '이번에야말로'를 외치며 조치훈에게 세번째 도전장을 내민다. 1,2,3국을 승리로 이끌며 3:0. 드디어 고바야시의 대삼관이 이루어지는구나. 아마 상대가 조치훈이 아니었다면 누구나 이렇게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상대가 조치훈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4연승의 드라마가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쪽의 승률이 50%라고 가정할 때 한 사람이 4번의 대국에서 연승할 수학적 확률은 6.25%. 그러나 한번 발동이 걸리기 시작한 조치훈에게 이런 수학적 확률은 별 의미가 없는듯 했다. 조치훈은 다시한번 '3연패 후 4연승'의 기적을 연출하며 본인방 타이틀을 방어해냈다. 아마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아닐까. 아니, 드라마나 소설도 이렇게 쓰면 독자들로부터 재미없다고 항의가 들어올 것 같기도 하다. 한해에 한번 당하기도 쉽지 않은 믿기 힘든 패배를 3년 연속으로 당한 고바야시는 대삼관을 달성하려던 꿈은 고사하고 세인들로 하여금 '1인자 고바야시는 조치훈의 한수 아래인가보다.'라는 생각만 더 굳혀준 채 본인방전 도전기 무대를 완전히 물러났다.
- 두번째 대삼관, 다시 1인자의 자리로.
계속해서 본인방 획득에 실패한 고바야시는 자신의 타이틀을 방어하는 도전기에서도 슬슬 이상징후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최고타이틀인 기성전에서 86년부터 90년까지 한번도 막판까지 승부를 끌고간 적이 없었던 고바야시는 91년부터 가토, 야마시로, 다시 가토와의 도전기에서 계속해서 막판까지 가는 고전끝에 간신히 기성을 방어해내고 있었다. 명인전에서도 크게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92년 오다케 9단과의 도전기에서도 고바야시는 3:3의 타이스코어로 막판까지 간 끝에 겨우 명인위를 지켰다. 이러한 와중에, 드디어 고바야시는 94년 18기 기성전에서 조치훈을 도전자로 맞게 된다. 계속해서 공성전을 벌이던 위치에서 이제 수성을 해야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앞서 기성전 도전 1국 이전에 전야제를 치른다는 얘기를 했던 바 있다. 18기 기성전 도전기 전야제에서 조치훈은 '드디어 때가 왔다. 1인자에게 배운다는 마음 따위 없다. 무조건 이긴다.'라고 임전소감을 밝히면서 기염을 토했다. 기합이 단단히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기합이 들어가 있는 조치훈에 비해서 고바야시는 어깨에 힘이 지나치게 들어가 있었다. 고바야시는 '꼭 이겨보이리라.'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길 것이다' '이긴다' '이기겠다'와 '이겨보이리라'는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스스로의 열세에 대한 컴플렉스, 그리고 주위의 시선에 대한 부담이 복합적으로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결과는 4:2, 조치훈의 승리였다. 86년의 휠체어 대국에서 라이벌 고바야시에게 내주었던 기성 타이틀과 1인자의 자리를 고바야시에게서 다시 찾아온 것이다. 조치훈은 이어 96년, 다케미야 9단으로부터 명인을 쟁취하며 기존의 본인방과 함께 기성, 명인, 본인방의 대삼관을 두번째 달성하며 일본 바둑계의 20세기 마지막 패자로 등극했다.
조치훈은 자신의 강함에 대해서 묻는 사람들에게 자신과 다른 일본 기사들과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다른 일본 기사들은 자신의 손으로 바둑이라는 레일을 깔면서 그 길을 가야 하는 입장이라면, 나는 일본으로 건너온 순간 바둑이라는 레일 이외의 다른 길은 없었다. 스스로의 손으로 레일을 깔면서 그 길을 가야하는 자와 그 길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자의 차이라고나 할까. 바둑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인용의 형식을 취했지만 정확한 인용인지는 본인도 장담할 수 없다;)
- 조치훈 9단 : 베르트랑, 주진철
조치훈 9단의 기풍은 철저한 '선실리, 후타개' 스타일로 압축된다. 조치훈의 바둑은 조훈현의 바둑에서 느껴지는 발빠름이나 감각보다는 실리를 챙기더라도 '지독함'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렇게 곳곳에서 실리를 빨아들인 이후에 형성되는 상대의 대모양의 한가운데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휘저어버리면서 모양을 지워버리는데, 전성기 시절의 조치훈이 보여주는 이러한 수습과 타개 솜씨는 당시 최고의 핵펀치를 자랑하던 가토와 같은 기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상대의 크로스카운터를 절묘하게 피해거나 혹여 펀치를 한두방 허용하더라도 로프를 등지고 처절하게 버티면서 결국 링의 한가운데로 나와 몰아부친 상대를 무색케하는, 한판한판이 처절하고 지독한 수로 점철된 바둑,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과 전율을 느끼게 하는 바둑이 조치훈의 바둑이라고 하면 될까 모르겠다.
이런 '지독한 실리바둑'은 주진철 선수와 과거 '본진이 털리고 있는데 커맨드만 짓고 있다'던 베르트랑 선수를 연상하게 한다. 지금이야 베르트랑 선수의 스타일이 많이 바뀌었으니, 자원전의 적자계보는 주진철 선수로 굳어진게 아닌가 싶다. 단, 주진철 선수는 이곳저곳 멀티로 인해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약한 타이밍을 넘기는 기술적인 측면에 있어서 아직까지 조치훈 9단의 타개 솜씨에 비교하기는 좀 힘들지 않은가 싶다.(주진철 선수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리하여 다시 한번 베르트랑 선수를 등장시키고 싶다. 자원전의 적자계보에서는 밀렸을지언정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처절하게 버티면서 벼랑끝에서 벗어난 이후 슬금슬금 살아나며 게임을 승리로 이끄는 그의 능력. '처절모드 베르트랑'이라는 말이 그냥 생긴 것은 아니지 않은가. 기풍 외적인 측면이지만 감정표현에 솔직한 타향살이 승부사라는 측면도 웬지 조치훈 9단과 베르트랑 선수를 동류로 생각하게끔 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조치훈 9단은 2002년, 왕좌 타이틀을 왕명완 9단에게 타이틀을 넘겨주면서 7대 타이틀 홀더의 명단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일본에 건너간 이후 평생동안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밟았던 고바야시 역시 올해 기성(碁聖) 타이틀을 요다에게 내주며 조치훈과 같은 야인으로 돌아갔다. 조치훈과 고바야시. 한국의 조훈현과 서봉수가 그랬던 것처럼 많은 바둑팬들을 울리고 웃겼던 그들을 앞으로 계속 타이틀 무대에서 볼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겠다. 하지만 앞으로 바둑의 신이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강한 기사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보여줬던 거짓말 같은 드라마를 다시 연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조치훈은 얼마 전에 열렸던 삼성화재배 16강전에서 승리하면서 3년 선배이자 한국이 낳은 또다른 불세출의 천재 조훈현과 8강에서 맞붙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조훈현 9단을 응원하겠지만; 후회없는 기보로 80년대의 향수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올드팬들에게 좋은 선물을 안겨주길 염치없이 기대해본다.
p.s. 1. 그냥 쓰고싶은 때 쓰려고 마음먹고 키보드를 두드리다보니; 업데이트가 늦었네요. 혹시(!)라도 기다리신 분이 계셨다면 죄송합니다..(_ _)
p.s. 2. 흠; 이거 글을 쓸수록 스타 얘기는 줄어들고 바둑얘기만 늘어가네요. 다음부터는 스타 얘기도 많이 쓰도록 노력하겠지만, 잘 안 되더라도 능력의 한계로 이해해주시길..;
p.s. 3. 9월 5일, 그러니까 지난주 금요일이네요. 조훈현 국수님이 14년전 응창기배 세계바둑선수권을 제패하신 날이랍니다.^^ 그냥.. 개인적으로 팬이라서 한번 꼭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쿨럭;
* canoppy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3-09-09 15: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