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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3/02/24 00:53:53
Name 눈시BBbr
Subject 광해, 그의 마지막 길


왕이 북쪽 후원의 소나무숲 속으로 나아가 사다리를 놓고 궁성을 넘어갔는데 젊은 내시가 업고 가고 궁인 한 사람이 앞에서 인도하여 사복시 개천가에 있는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

왕이 국신의 집 사람인 정담수로 하여금 나가서 변란이 일어난 것에 대해 탐지하게 하였는데, 담수가 돌아와서 들은 것이 없다고 아뢰니, 왕이 말하기를

"혹시 이이첨이 한 짓이 아니던가."

하였다. (광해 15년(1623) 3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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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초, 북인이 중심이긴 했지만 각 당파는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광해군의 친위세력이라 할 건 대북이었지만, 소북 역시 외척 유희분을 중심으로 광해군의 강력한 지지세력이었죠.

그게 깨진 것이 옥사였습니다. 이이첨의 대북은 옥사를 계속 확대했고, 그 화살은 소북, 남인, 서인 등 다른 당파에게로 향했죠. 옥사가 확대되거나 일정 타겟으로 방향을 잡은 건 대부분 이이첨의 배후공작으로 설명하고 있고, 그렇다 싶은 부분이 많습니다. 그게 이이첨의 사주든 그냥 고문에 못 이겨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한 것이든 대북은 이를 부채질하다 못 해 기름을 끼얹었죠.

폐모론에서 그 폭주를 잘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반대하는 신하는 물론 부담감에 불참한 신하들도 끝없이 공격했죠. 이항복, 기자헌 등 노신들부터 어떤 당파든 여기에 포함됐습니다.

때문에 광해군은 이런 대북에 끌려갔다는 식의 설명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걸론 부족합니다. 그 자신이 옥사를 주도하지 않았다면 대북이 그렇게 활약할 수 없었습니다.

광해 10년, 인목왕후가 서궁으로 쫓겨나고 허균이 죽은 이후 분위기는 바뀝니다. 광해군은 유희분, 박승종에 더 힘을 실어주고 이원익부터 해서 남이공, 이귀, 최명길 등 유배 보냈던 남인, 서인들을 석방합니다. 심지어 영건도감도 소북을 주로 기용하면서 대북을 견제했죠. 그 이후 역모에 대한 얘기는 찾아볼 수 없고 옥사 역시 없었습니다. 한창 후금이 커 가면서 명이 파병을 요구하고 심하 전투가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역모가 어디 그런 걸 가리겠습니까?

이후 역모에 대한 고발은 광해 14년(1622)년에 다시 나옵니다. 꽤나 뜨겁게 타올랐죠. 하지만 광해군의 이 말로 확대되지 않습니다.

"서로 의논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으로 죄목을 만들 수 있겠는가. 이러한 시기에 대사헌을 함부로 체차할 수 없다. 그리고 대체적인 것으로 보건대 어떻게 풍문을 가지고 옥사를 일으킬 수 있겠는가.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광해군이 대북에 그냥 끌려가기만 했다면 이 경우에도 대북의 끝없는 요구에 광해군이 관련자들을 붙잡고 친국했을 겁니다. 하지만 소북까지 이를 요구했지만 광해군은 거절, 옥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이전의 옥사들을 되짚어봐도 마찬가집니다. 광해군은 거의 매일같이 나와 친국했고, 원래는 노비로 삼아야 될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 고문했으며, 거기서 나온 말들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거짓 고발이 밝혀져도 문제삼지 않았죠. 임해군부터 인목왕후까지, 겉으로는 아닌 척 했지만 대북에 계속 힘을 실어줍니다. 대비를 폐할 생각이 없었다 하면서도 이를 반대하는 이들은 귀양보냈고, 강경책을 편 이들은 벌하지 않았습니다. 이러니 강경하게 나온 대북에 더 힘이 실릴수밖에 없었죠. 그러는 사이 대북은 끝간데 없이 커져 버렸습니다.

+) 폐모론이 한창 나올 때 광해군은 설문조사를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결과는 대부분이 찬성이었죠. 하지만 전체적인 여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북이 얼마나 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는지 알만하죠.

신경희의 옥사(오히려 소북 쪽이 대북을 노린 옥사였죠), 윤선도의 상소부터 허균의 죽음까지... 광해군도 이쯤해서 그걸 알아차린 듯 합니다. 특히 허균의 옥사가 컸습니다. 왕 말을 무시하고 급히 처형시켜 버린 거니까요. 유희분, 박승종 등 소북은 이걸로 이이첨을 공격했고, 이이첨은 지금까지 역도를 토벌한 공을 내세우고 이번 역시 그런 거라며 맞섭니다. 어찌됐든 광해군은 소북, 남인, 서인을 등용하며 대북을 견제했구요. 그렇게 되면서 폐모론은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할려면 할 수 있었던 것이고 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반대쪽으로 했기에 대북이 그렇게 컸다는 것입니다.

+) 그리고 이이첨은 명나라 편을 철저히 드는 것으로 재기를 노립니다.

하지만 너무 늦은 뒤였습니다. 그 동안의 옥사로 인해 진짜 반역 세력이 생겨버립니다. 광해군은 여기에 신경쓰지 않았지만, 이번엔 진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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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의 죽음에 대한 이이첨의 행동은 참 뜻밖입니다. 허균은 이이첨의 행동대장으로 있었고, 어떻게든 인목왕후를 엮어서 죽이려 하고 있었으니까요.

역시 떠올릴 수 있는 건 토사구팽입니다. 일단 그의 스승 정인홍부터가 폐하긴 하더라도 죽일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고, 광해군도 겉으로는 그런 방침을 세웠습니다. 폐하는 데 성공하고 서궁에 가둬버린 데까지 성공했으니 죽이느냐 마느냐의 상황에서 후자를 선택한 거죠. 그렇다면 더 일을 벌이려는 허균을 팽할 때가 된 것이구요. 안 그래도 급진적인 사상과 미칠듯한 행동력으로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게 허균이었습니다.

어찌됐든 대북도 더 이상의 확대를 원하지 않았다고 봐야 되겠죠. 왕의 어미를 죽인다는 것, 이것은 아무리 그녀를 미워해도 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정인홍의 동의도 없는 상태에서 말이죠. 광해군의 본심이 어땠을지는 참 궁금합니다. 그는 겉으로는 최대한 반대해야 했고, 대북이 행동을 멈추면서 유야무야됩니다. 이렇게 명분상으로는 인목왕후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게 만들어집니다만... 반대 세력도 그렇게 봐주기는 힘든 상황이었죠.

문제는 그 이전에 쌓아놓은 게 너무 컸다는 겁니다.

광해군의 끝없는 옥사, 이건 그의 불안감이 너무 컸다는 걸로 설명됩니다.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긴 했습니다. 유영경, 임해군 같은 경우 모든 당파가 그들의 처벌을 주장해야 했죠. 신하들은 광해군에게 존호를 올리면서 충성경쟁을 했고 이게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가면서 대북만 커졌고, 다른 당파는 많은 피해를 입고 세력이 줄어듭니다. 선조 때도 정여립의 난으로 동인이 많이 당하긴 했지만 곧바로 정철을 숙청하면서 동인을 다시 키워줬습니다. 광해군은 이걸 하지 못 했죠. 피해자들의 분노는 대북은 물론 그 자신에게로 향했구요.

그의 불안감은 다른 쪽, 그것도 아주 부정적인 쪽으로도 나타납니다. 영건도감이 설치된 것이 광해 5월, 폐모론이 한창일 때였습니다. 이 때 지은 경덕궁(경희궁)과 인경궁은 이전에 없었던 거대한 규모였습니다. 임란 전 경복궁의 규모가 700칸이었습니다. 경덕궁은 1500칸, 인경궁은 5500칸이었죠. 이미 전에 창덕궁과 창경궁을 다시 짓고 덕수궁도 수리한 상태였습니다. 창덕궁이야 선조 때부터 복구한 거지만 창경궁을 중건한 때 역시 광해 7년, 옥사가 한창일 때였죠.

왕권 강화를 위한다면 창덕궁, 뭐 창경궁 정도면 괜찮았을 겁니다. 하지만 경덕궁과 인경궁을 동시에 지은 건 지나친 거였습니다. 이를 위해 전국에 조도사가 파견돼 자재를 모았고, 공명첩을 마구 퍼뜨리게 됩니다. 전쟁도 아닌데 말입니다. 거기다 그 이유가 이거였습니다.

"창경궁 공사가 막 끝나자마자 요귀의 재앙이 이 궁에서 먼저 일어나더니 창덕궁에까지 옮겨지고 말았다. 사세상 요귀가 작란하는 곳에 그대로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먼저 인경궁의 공사를 착수했던 것인데 그것도 다만 공사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소궐만 우선 짓도록 한 것이다"

귀신이 산다는 것이죠. 사관은 병사들이 "우리도 거기서 자는데 왜 우리는 못 봄?"이라 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경덕궁의 경우도 원래 정원군(인조의 아버지)의 저택이었지만 왕기가 흐른다 해서 뺏은 것입니다.

이유도 이유고, 이런 끝없는 공사는 민심을 완전히 앗아갔습니다. 이를 그냥 욕심이라 보든 정신병적인 것으로 보든 어긋나도 너무 어긋나버린 것이죠.

거기다 이건 광해군의 공으로 평가되는 중립외교 문제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경덕궁과 인경궁을 지을 때가 누르하치가 한창 커갈 때였거든요. 파병 중에도 계속 했구요. 이 때 병조판서 장만이 사직하면서 궁궐 그만 지으라고 하자 이렇게 답합니다.

"사직하지 말라. 가을철이 이미 닥쳐서 오랑캐 기병의 세력이 더욱 성해지고 있다. 경이 이미 나랏일이 위급한 줄을 알았다면 왜 올라오지 않고 물러가서 큰소리만 치는가. 영건하는 일에 대해서 경의 생각이 이와 같았다면 무오년(1618) 사변이 생긴 초기에 어찌 말하지 않았는가. 지금은 이미 거의 다 완성되어서 전에 들인 공력을 포기하기가 어렵다."

오랑캐들이 더 강해지고 있으니 그 전에 완성해야 된다는 거죠. 왜 전에 말 안 했냐고 하는데 장만은 그 때도 하지 말라고 했었습니다.

외교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없으며 광해군의 중립외교 역시 방비도 탄탄히 하면서 외교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외교만 한 것이라면 얘기는 달라지죠.

유영경과 임해군을 빼더라도 광해 4년때부터 시작된 옥사와 궁궐병을 본다면 그의 심리적인 상태와 그가 어떻게 민심을 잃어갔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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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외교에 대해서는 남한산성을 쓰면서 얘기 많이 했으니 간단히만 적어보죠.

후금에 대한 태도는 거센 반대를 받았습니다. 이것도 상상 이상입니다. 이걸 주도한 이가 이이첨-_-; 소북의 경우 유희분도 반대했구요. 광해군이 이를 계속 밀어붙이자 태업으로 맞섭니다. 광해군 편을 들었던 박승종이 있지만 그는 적극적으로 돕진 않고 집에서 뒷담화나 했죠.

여기서는 확실히 광해군이 고립됐습니다. 광해군은 그럼에도 밀었고, 신하들은 그럼에도 반대했습니다. 안 되자 광해군이 그리도 좋아하던 존호를 올리면서 명의 은혜를 되새기게 했고, 광해군은 그 좋아하던 존호도 포기하고 중립외교를 밀어붙입니다. 그런 끝없는 반대에도 광해군은 마지막 날까지 그걸 밀어붙였구요.

이 과정에서 잃게 된 민심, 특히 사림들의 지지는 컸고 대립 속에 국정이 혼란해지면서 반정 세력은 기회를 잡았을 겁니다. 이 점에서는 참 아쉬워해도 될 겁니다. 광해군이 계속 있으면서 밀어붙였다면 최소한 정묘호란은 막을 수 있었을 걸로 보거든요. 기회주의라 하지만 그렇게 신조를 가지고 밀어붙이는 걸 그렇게 폄하할 수 없고, 결과론이라 하지만 그 결과를 예측했다는 걸 작게 볼 수 없습니다.

+) 다만 호란을 막아도 많은 공물을 바치는 쪽으로 가긴 했을 겁니다. -_-; 그리고 병자호란은 정말 막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구요.

하지만 반정 과정에서 이게 내정보다 우선이라고 할 순 없습니다. 중립외교로 고립됐다는 건 다시 말 하면 어느 세력이든 그걸로 등을 돌릴지언정 왕을 갈아엎을 생각까진 못 했다는 걸로 연결됩니다. 실제 외교 부분에서 가장 크게 맞선 건 이이첨의 대북이었죠. 하지만 인조반정은 광해군은 물론 대북 자체를 타겟으로 삼았습니다. 좋은 명분이 됐을지언정 최우선 요소가 되진 않았다는 겁니다. 그랬다면 마치 연산군 때처럼 모든 당파가 손을 잡는 방식이 됐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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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에 대한 설명은 참 복잡합니다. 폭군 광해군을 잡기 위해 다들 자기가 먼저 생각했고 다른 뜻 있는 이들을 포섭했다고 다루니까요. 그러니 선후관계보다는 그 주역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게 나을 겁니다.

김류, 폐모론에 끝까지 불참했고 이후 허균이 꾸민 투서에 인목왕후를 구하려 한다고 거론된 이였습니다. 이게 허균의 짓인 게 드러나면서 목숨을 구했지만 앞으로 어찌될 지는 또 몰랐죠.

신경진, 그는 신경희의 사촌으로 신경희의 옥 때 사촌형과 조카 능창군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그것에 대한 분노도 컸을 겁니다. 하지만 더 큰 건 반역자의 집안이라는 딱지와 언제 자신에게도 칼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겠죠. 그는 김류와 힘을 합쳤다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둘은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과 김여물의 자식들입니다.

그리고 능양군, 인조는 신경희의 옥으로 동생 능창군을 잃었고, 아버지 정원군 역시 얼마 안 가 죽습니다. 집도 뺏겼죠. 그에 대한 분노 및 언제 자신도 목표가 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추측할 수 있죠. 정작 신경희의 옥은 신경희의 빠른 죽음으로 크게 번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남긴 건 너무나도 컸죠.

+) 흥미로운 건 그는 폐모론을 찬성했었다는 점입니다. 뭐 납작 엎드려 있었다고 칩시다.

그의 외삼촌이 되는 구굉, 그 역시 반정의 주모자입니다. 그가 이서와 신경진, 최명길 등을 포섭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귀, 그는 광해 8년(1616)에 있었던 최기의 옥사에 연루돼 5년간 유배됩니다. 그 때 그는 반정을 꿈꾸며 아들들(이시백, 이시방)과 그들의 친구(김자점, 최명길, 심기원 등)을 포섭하다가 신경진과 연결됐다고 전하고 있죠. 참 강경했던 인물인데다 선조 말부터 정인홍과 강력히 대립한, 북인과는 원수지간이었죠.

이렇게 반정의 주역들은 그 동안의 옥사에 연루돼서 겨우 벗어나거나 유배된 상태였습니다. 계속되는 옥사에 그들 자신의 목숨부터 걱정해야 했고, 이는 당하느니 먼저 치자는 것으로 바뀌었겠죠. 거기다 이들에게는 권력욕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여러 기록들에는 그들이 광해군의 폭정에 광해 초부터 은둔했다는 식으로 적고 있지만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벼슬을 했습니다. 거기다 광해군이 대북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이들을 풀어주면서 다시 벼슬살이를 할 수 있었죠. 하지만 대북 정권 하에서 이들은 한직으로 떠돌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되는 옥사로 서인이 몰락한 것 역시 컸죠. 서인이 커야 서인인 이들이 더 클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길은 멀었습니다. 아예 모든 걸 뒤짚지 않는 상황에서는 말이죠. 특히 서인이라 봐야 될 이항복의 몰락이 크게 다가옵니다. 반정의 주역들은 주로 이이, 이항복의 제자들이었거든요.

특히 이귀는 이항복이라는 명분을 밀어붙입니다. 이항복은 유배돼 광해 10년(1618)에 죽었고, 죽기 전에 반정을 꿈꿨다는 식으로 다루죠. 꿈에서 선조가 나왔다는 식으로요. -_-; 이귀 자신의 기록이고 그의 기록은 너무 그 중심으로 적혀 있기에 신뢰하기 어렵습니다만, 최소한 그들이 이걸 명분으로 내세웠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광해군은 민심을 계속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이건 반정세력을 키우기에 충분했죠.

그들이 반정을 계획하기 시작한 건 광해 12년(1620)으로 잡습니다. 심하 전투 다음 해에 경덕궁이 완공된 해입니다. 궁궐 공사를 하든 북방에 대한 방비를 하든 끝없는 비용이 들어갈 때였죠. 후금에 대한 광해군과 신하들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불 붙기 시작할 무렵이기도 할 겁니다. 백성은 물론 사대부들의 마음을 떠나가게 하기 충분한 상황이었던 거죠.

단적으로 최명길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광해군 중립외교의 후계자나 다름없습니다. 덕분에 많은 욕을 먹었지만 자신의 신조를 꺾지 않았죠. 그랬던 그가 반정의 주역이 됐습니다. 그가 보기에도 광해군은 확실히 물러나야 될 왕이었던 것이죠.

남인들 역시 반정을 방조합니다. 그들의 방침 역시 폐모론 반대였고, 이에 반대하면 왕의 눈 밖에 났습니다. 역시 이원익이 대표적이죠. 서인은 반정 후 남인과 연립정권을 폈고, 남인 역시 여기 협조합니다. 이후 양측의 치열한 대결이 시작되지만요.

그들 자신의 생존과 그들이 펼치고자 한 조선, 그리고 그들의 권력욕... 폐모론을 끝까지 반대했기에 다져진 명분과 아직 살아있고 광해군에 극도의 증오를 품고 있는 명분덩어리 인목왕후의 존재, 광해군에게 가족을 잃은 분노를 품고 있으며 광해군을 대체할 수 있는 종친 능양군의 존재, 광해군과 대북에 밀린 서인들의 동의와 광해군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사대부들의 방조... 이 모든 것들이 광해군의 옥사가 만든 것이었습니다.

+) 사실 그들이 폐모론에만 목숨을 걸었는지는 정말정말 의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주 중요한 명분이자 수많은 사림들의 공감대를 이끌었던 건 부정할 수 없죠.
+) 인목왕후가 광해군을 얼마나 증오했는지는 소설 계축일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대업"을 성사한 것 역시 광해군의 힘이었습니다.

"대체로 나의 증세는 화병이므로 눈을 감고 조용히 조섭한 뒤에야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로 한없이 번독스럽게 하고 있으니 10년을 조리하더라도 나아질 리가 없을 듯하다." (광해 15년 2월 19일)

"국가에 일이 많아서 한시도 조섭할 수 없고 화병의 증세가 날로 심해져 회복될 기한이 없으니, 우선 문안하는 일을 정지하여 나로 하여금 조용히 조섭할 수 있게 하라." (2월 29일)

인조반정이 일어난 건 광해 15년 3월 14일, 그 직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광해군은 두통, 심장병, 불면증 등에 시달린 것으로 평가되고 그 자신은 그걸 화병이라고 주장했죠.

이 때 그에게 가장 큰 문제는 후금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이 전에 그는 누르하치에 보낸 편지에 "칸"이라는 용어를 넣었고, 이는 누르하치의 여진족을 동등하게 대우, 혹은 더 크게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신하들은 여기에 계속 딴지를 걸었고 광해군은 계속 맞섰죠.

그리고 여기서 신하들의 주체는 바로 이이첨의 대북이었습니다.

광해 14년에 이미 반정 세력이 이괄과 훈련대장 이흥립까지 포섭한 상황이었습니다. 이흥립이 포섭됐다는 건 궁으로 가는 길 자체가 뚫렸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이건 충분히 퍼진 상황이었죠. 이건 이귀, 김자점이라는 반정의 주모자까지 확실하게 고발됐다는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더 이상의 옥사를 원하지 않았고, 계속된 요구에도 묵살합니다. 이렇게 인조반정은 그 실체가 드러났음에도 4개월이나 시간을 끌었고, 그럼에도 성공했죠.

광해군이 이이첨을 얼마나 견제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광해군은 그 동안의 옥사에 깊게 관여해 이이첨의 대북을 키워줬습니다. 하지만 이이첨을 견제하면서 역모 그 자체를 불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건 진짜 역모에도 신경을 안 쓰게 만들어 버렸죠. 명과 후금과의 외교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된 것은 비변사를 장악한 이이첨의 대북, 역모를 인정할수록 역모로 인해 성장한 대북을 더 키우게 돼 버리거든요.

광해군 말에 그가 끝없이 토로했던 불만들, 그가 화병이라 주장했던 것들, 그 원인은 후금과의 외교를 강력히 반대했던 대북과 연결된 것이고 (그리고 유희분이 이끄는 소북 역시 여기에 강력히 맞섰습니다. 유일하게 광해군의 편을 든 소북의 박승종은 그냥 불참합니다) 이를 더 경계하게 됐죠. 그에 맞서기 위해 서인, 남인들을 다시 등용했지만 북인에 비해 한직이었고, 오히려 불만을 더 키우게 됩니다. 광해군이야 옥사를 더 만들지 않으려 했을지 몰라도 그들은 옥사로 자기들의 생존을 걱정해야 했고, 반정에 더 기울게 됐구요.

인조반정까지도 광해군은 그런 현실을 몰랐습니다. 마지막까지 이이첨의 짓인 줄 알았지만 상대는 전혀 달랐죠. 그리고 그 반정세력은 광해군이 키운 것이고, 오히려 광해군이 그들을 유하게 대하면서 그들의 세력을 더 키워줘 버렸구요. 여기에는 이귀의 정면돌파(자기는 역모를 꾸미지 않았으니 이를 모함한 이들과 대질해 달라 했죠)와 김자점의 뇌물공세도 컸지만 광해군 그 자신이 이를 신경쓰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역모를 너무나도 경계했던 그, 이번에는 역모를 너무 무시했기에 쫓겨나게 된 것이죠.

+) 이 때 김자점이 뇌물을 준 것이 상궁 김개시, 다시 말해 김개똥-_-;이었습니다. 얼굴은 못생겼지만 머리가 좋아 광해군의 총애를 입었고 그럼에도 후궁의 자리를 거절했죠. 상궁이어야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는 거였습니다. 이이첨과 친해 추문이 생길 정도였고 궐 내에서 광해군에게 큰 영향을 미쳤죠. 하지만 그녀의 능력은 그 정도였는지 김자점의 뇌물에 넘어가 역모를 부정합니다. 광해군은 이 말을 믿었죠. 하지만 반정 후에는 가장 먼저 처형당합니다. 반대로 역모를 확실히 알아챘다면 조선시대의 여걸 중 하나로 평가받았을지도요.

그렇게 인조반정은 일어납니다. 광해군의 친위세력이자 마지막에는 가장 크게 맞섰던 대북은 이이첨과 함께 완전히 몰락합니다. 소북 역시 이 반정을 알고 강력하게 처벌을 요구했지만 광해군의 미적거림 끝에 참변을 당했죠. 이이첨, 박승종, 유희분 모두 죽음을 맞이했으며 이후 이괄의 난을 통해 폐모론을 반대했던 기자헌 등의 북인들 역시 전멸합니다. 겨우 살아남은 이들은 남인과 서인에 흡수됐구요.

그렇게 광해군은 연산군에 이어 신하들에 의해 왕에서 군으로 강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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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광해군은 강화도에서 제주도로 옮기면서 유배 생활을 계속합니다. 인조와 반정세력은 광해군을 죽이진 못 합니다. 광해군을 몰아낸 가장 큰 이유가 그가 패륜아였다는 거니까요. 어쨌든 왕이었던데다 종친이니 죽이면 안 된다는 거였죠. 그래서 인조는 반역에 연루된 종친들을 최대한 살리려 했습니다. 그의 말년, 그의 첫째아들과 그 가족들을 빼면 말이죠.

인조와 반정세력은 위에서 다룬 좀 특수한 상황이기에 별 피해 없이 반정이 가능했고, 그래서 자기들끼리도 권력다툼을 많이 합니다. 광해군에 대한 충성으로 그를 다시 앉히려는 사건도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이괄의 난 같은 거대한 사건도 있었죠. 광해군이 여기에 개입한 것으로 보이는 사건도 있습니다. 광해군의 친필서신이 발견됐고, 그게 실패한 후 광해군은 통곡했다는 일화가 있죠.

그렇게 인조 정권의 정통성 역시 취약했기에 광해군이 더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가장 큰 건 병자호란이라는 어마어마한 굴욕 때문이겠지만요.

이후 광해군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모든 걸 초탈했다는 것, 창작물에서는 이게 가장 어울리긴 합니다. 그는 자식과 아내가 죽은 후에도 참 끈질기게 명을 이어갑니다. 특히 폐세자와 폐세자빈의 죽음이 참 안타깝죠. 그들은 따로 유배된 후 15일을 굶어도 죽지 않았고, 목을 맸지만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살려고 땅굴을 파 밖으로 나왔지만 발각돼 버렸고 자살합니다. 중전이었던 유씨는 그 소식을 듣고 죽었죠. 그럼에도 광해군은 꿋꿋이 살아갔습니다. 제주도에서 종들에게 영감이라는 비웃음을 들으면서도 말이죠.

이것을 그가 모든 걸 초탈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권력욕을, 자기가 다시 돌아갈 가능성을 꿈꾸고 살았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의 복위를 꿈꾸는 역모도 있었고 명도 인조반정을 무시한 편이었으며 후금은 광해군을 좋게 보고 정묘호란의 명분으로 삼기도 했거든요.

바람 불고 비 날림에 성머리를 지나네 / 독한 기운 응달에 오르니 백 척 누각이라
푸른 바다에 파도 사나운데 땅거미가 내리고 / 푸른 산의 슬픈 기색은 싸늘한 가을 띠었네
가고픈 마음에 질리도록 왕손초를 보았지만 / 나그네 꿈은 어지러이 제자주에 깨이누나
고국의 존망은 소식마저 끊기고 / 안개 낀 강 위의 외딴 배에 누웠노라

그가 제주도로 가면서 지은 시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석할지는 보는 이의 마음이겠죠.

그렇게 귀양 생활 16년... 그의 재위기간보다 더 긴 기간을 섬에서 보냈고 병자호란까지 본 후 1641년에 그리도 길었던 명이 끝납니다. 나이로 보자면 조선 역대 왕 중 네번째였습니다. 대체 그 동안 무슨 생각을 하면서 보냈고,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었던 걸까요? 반정 직후 죽었던 연산군과도 대비되는 모습이죠.

참... 이러니 역시 창작의 욕구를 끌어낼 수 밖에요.

광해군의 재평가에 대해서는 참으로 말이 많습니다. 재평가는 물론 재재평가, 재재재평가까지 이뤄지는 왕이죠. 앞의 선조, 뒤의 인조 때문에 더 그러기도 할 겁니다. 특히 그가 펼친 중립외교는 시사하는 바가 크니까요.

전 여전히 그의 중립외교를 크게 평가합니다. 그 재평가의 시작이 일제시기인 건 맞지만, 애초에 조선시대에는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기 어려웠습니다. 단지 식민사관으로 몰아붙일 수 없다는 것이죠. 정치적으로 그를 미화하는 것도 있지만 그를 재평가하는 시각에서도 그의 과를 아예 무시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걸 연결해 그의 시대 자체를 미화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아무리 인조와 반정 세력의 명분이 부족했더라도, 그들의 과가 크더라도 그게 아무런 흠이 없는 광해군을 몰아냈다는 것으로 연결될 순 없거든요.

임란이 끝나고 복구가 필요했던 그 때, 그의 내정은 너무도 실망스러운 부분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건 반정세력에게는 커다란 명분이 됐고, 중립(?) 세력에게는 반정세력을 편들게 되는 큰 이유가 됐습니다. 계속되는 옥사는 그의 왕권을 일시적으로 강화시켰을지언정 거대한 반대세력을 만들어 버렸고 그를 몰락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끝없는 궁궐 건축은 민심을 그에게서 떠나가게 만들었죠.

그가 쫓겨날 명분 역시 충분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앞에 있었던 아버지 선조가 그의 정통성을 약하게 만들었고 너무나도 큰 숙제를 남기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든 상황이었던 왕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왕이 된 이상 그렇게 큰 옥사를 만들 정도로 약하진 않았구요. 오히려 계속되는 옥사가 그의 왕권을 더 위협해 버렸죠. 결국 그 자신이 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겁니다. 그는 시대의 숙제를 해결하지 못 했고, 다음 정권에 더 큰 숙제를 남깁니다. 이건 다음 정권이 그 숙제를 해결했는지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를 몰아냈던 인조 정권은 분명 참 많은 욕을 먹을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반정을 할 명분 역시 광해군이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단지 명분 놀음이 아닌, 광해군은 안 된다는 공감대를 만든 것 역시 그였고, 후에 어떻게 진행됐든간에 인조 정권에 기대해 반정을 지지한 이들 역시 많았습니다. 여기에 그들이 민생에 대해 노력한 것이 (선조와 광해군이 남긴 숙제죠. 뭐 믿기진 않겠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를 봐도 그렇구요. 이 역시 광해군이 만든 것이었죠.

다른 시대라고 아니겠습니까만, 이 시대를 얘기하는데도 참 많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광해군 그 자신에 대한 문제 역시 큽니다. 다른 누구를 탓할 수 없는 문제이며, 설령 탓한다 하더라도 광해군이 그 한계를 넘지 못 했다는 비판 역시 필요한 문제죠. 참 기대할만한 왕이었고, 아쉬운 점이 많지만... 그런 배경보다 중요한 건 그가 한 게 어떤 것이었느냐가 아니겠습니까. 일개 개인이 아닌 군주, 나라의 지도자였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참 제가 좋아하는 박시백 화백의 광해군에 대한 마지막 평가를 옮기며 마무리 짓겠습니다.

"세자 시절의 아픈 경험으로부터 조금만 자유로웠다면 빛나는 외교에서 보이듯 도그마에 사로잡히지 않은 열린 이성과 현실감각, 그리고 유려한 솜씨로 내치도 성공을 거두었으리라. 그런 상황을 만든 부왕 선조의 책임이 크겠지만"

"누굴 탓하랴. 극복하지 못한 자신의 몫인 것을."

* 信主님에 의해서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3-04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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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동소뿡이
13/02/24 02:27
수정 아이콘
마지막 글 잘 봤습니다!
다음번 주제 궁금하네요 흐흐
아키아빠윌셔
13/02/24 02:52
수정 아이콘
양치기 소년 이야기가 떠오르는 부분이군요. 광해군의 제주도 유배생활과 관련해서 아부지께서 해주신 이야기가 있었는데 까먹었...;;;
Je ne sais quoi
13/02/24 12:42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결국 영웅이건 성군이건 선을 지키는 수준에서 시대를 뛰어넘을 수 있어야겠죠. 광해군은 둘의 밸런스가 너무 어긋나버렸네요.
13/02/24 13:54
수정 아이콘
저도 박시백 화백 좋아합니다.
13/02/24 17:23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눈시님 글은 풀어나가는 것도 좋지만 마무리 짓고 정리하는 게 정말 백미인 거 같네요. 집에가서 오유 역게에 좀 퍼가야겠습니다.
사티레브
13/03/04 14:25
수정 아이콘
와우 추천게시판!
기시감
13/03/04 19:50
수정 아이콘
광해가 추게를 점령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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