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7/11/26 20:40:19
Name 시드마이어
Link #1 https://brunch.co.kr/@skykamja24/93
Subject 신경끄기의 기술 (수정됨)
얼마전 한 행사에서 생수를 나눠주었다. 하루에 4000개 가량의 생수를 무료로 나눠주는 일이다. 무료로 풀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엄청나게 많진 않다. 4~5명이 동시에 주다보니 왠만한 줄은 금방 사라지기 때문이다. 더운 날에 시원한 물을 공짜로 얻을 생각에 다들 줄을 서지만 몇몇 노인은 줄을 서지 않고 물을 요구한다.  '신경끄기의 기술'이라는 책에선 줄을 안서고 물을 받으려는 이 노인을 설명한다.

살다보면 화가 나는 일도 있고, 자신의 통제 밖으로 넘어간 일도 있다. 일찍 출발을 했지만 지각을 한다. 맛있게 끓인 라면을 쏟는다. 일상 속에서도 원하는대로 이뤄지지 않는데 사람 사이의 일들에선 더 심할 수 있다. 저자는 이때 '신경을 끄라'고 말한다. 5분간은 화가 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신경 쓰지 말고 '꺼져'라고 말하라 한다.

신경쓰는 상황은 언제나 생긴다. 그러나 우리에게 큰 신경거리가 있으면 작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부모님이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넷 댓글로 싸웠던건 기억하기 힘들다. 새로 올린 프로필 사진에 '좋아요'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건 신경쓸 여력이 없다. 그러나 신경쓸게 하나 없다면, 1분도 안되는 줄을 서면 받는 생수에 사활을 건다. 그에겐 물을 받는게 가장 신경써야할 일이다. 새치기를 하고서라도 물을 받고, 받지 못하면 노인공경을 운운하며, 분노하며 말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노인을 비난받아야할 사람으로 이야기했지만 사실 나는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 역시 수많은 사소한 일들에 신경을 쓰고 분노하며 살고 있다. 지금 있는 군대라는 환경은 더욱 독특하다.  사회였다면 절대 화내지 않을 상황에서 화를 낸다. 필요치 않은걸 후임들에게 강요한다. 자기 전 침대에 누워 성의없이 대답한 후임과 이상한 지시를 하는 선임을 욕하는 생각을 한다. 마음 속 TV채널에선 그 장면이 몇 시간째 재방송된다. 편성표는 바뀌지도 않는다. 시청자의 뜨거운 호응 속에서 또 다시 재방송된다.

TV채널을 바꿔야 한다. 한 때는 재방송을 전혀 보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조금은 잘나간다던 시절에는 어떻게 하면 나를 발전시킬까하며 며칠 후 있을 멋진 장면을 수없이 반복한다. TV에선 경기장으로 가는 내 모습이 보인다. 3점 슛과 크로스오버를 한다. 조금 후엔 전교 1등이 된 모습이 보인다. 졸업식 시상대에 오른다. 이 TV프로그램은 1년이 지나 현실에서 방영되었다.

TV는 어느날 부턴가 재방송만 편성되었다. 나는 좀생이처럼 신경을 쓴다. 서운한 말 한마디와 서운한 태도와 내 실수들을 녹화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 다시 처음부터 돌려본다. 잊으려고 유튜브를 보거나 일기를 써봐도 하루의 감정은 텅 비었다. 그럴때 난 기억해야한다. '신경을 끄자. 사실 별거 아니다.' 사실 삶에서 생기는 갈등은 너무도 작아서 불과 2주만 지나도 잊혀지고, 1달이면 관계가 도리어 좋아지곤 한다. 그런데 왜 나는 스스로를 소비시키며 살까.

우리 어머니는 막장 드라마를 즐겨보신다. 이혼과 갈등이 끝이 없다. 누구의 애인지는 좀처럼 쉽게 알려주지 않는다. 나 역시 막장 드라마의 팬이 되었다. 나는 괴롭히는 생각들을 보고, 그걸 반복한다. 스스로를 학대하는걸 원하는지도 모른다. 어리석게도 그게 남과 나를 미워하게 하고, 서로를 멀어지게 하는데도.

오늘은 어떤 채널을 보며 잠에 들까.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바꿔본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8-03-02 17:19)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크르르르
17/11/26 20:45
수정 아이콘
잘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17/11/26 20:54
수정 아이콘
공감, 추천~~
잘 읽었습니다.
유스티스
17/11/26 20:55
수정 아이콘
https://youtu.be/_zFFk7AZiL4

얼마전 유튜브에서 본 영상이 생각나네요. 제목이 같아서지만...
모냥빠지는범생이
17/11/26 21:24
수정 아이콘
공감가는 글입니다. 저도 비슷한 상황으로 스트레스 많이 받았는데.... 남에게 '신경 끄는 방법'과 '기대를 안하는 방법'을 쓰니까 거짓말처럼 욱하는게 사라지고 스트레스도 덜 받더라고요...
아점화한틱
17/11/26 21:54
수정 아이콘
공감합니다. 작은일들에 너무 초점을 맞춰서 스스로 불행해지는게... 사실 지나면 까먹을, 별거아닌일들이었을 때가 많았는데...
파이몬
17/11/26 21:56
수정 아이콘
글이 술술 읽히네요 흐흐
17/11/26 22:06
수정 아이콘
추천합니다. 요즘 스스로 좀생이 같다는 생각을 많이하면서도 작은 일에도 서운한 감정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저한테 꼭 필요한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17/11/26 22:17
수정 아이콘
세상사 진리가 여기 담겨있네요. 좋은 말 감사합니다.
껀후이
17/11/26 22:47
수정 아이콘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은 잘 안 되서 힘든 진리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acidmuse
17/11/26 22:57
수정 아이콘
신경끄기의 기술 정말 훌륭한 책입니다. 전국민 필독서로 지정하고 싶음
중광18층
17/11/26 23:23
수정 아이콘
내 마음속의 TV채널이라는 표현이 정말정말 좋네요.
짤막한 글이지만 얻어가는게 정말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보로미어
17/11/26 23:56
수정 아이콘
진짜 좋은 글이네요 자주 생각나면 읽어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7/11/27 01:41
수정 아이콘
공익 근무할때 저런 노인이 있어서 뒤에 기다리시는 분 안보이시냐고 뒤로 가시라고 했다가 뺨을 한대 맞았죠.
제가 안참고 바로 112 신고하는 바람에 난리가 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합의 안해주면 벌금이 300만원 나오는 상황이었는데, 어찌어찌 합의 해주고 다음번에 한번만 더 걸리면 가중처벌이라고 경찰 이야기 듣고 가시더니 그 다음부터는 올때마다 아주 순한 양이 되었습니다. 알고보니 지역내 시청, 구청, 보건소, 센터, 경찰서까지 등등에 유명한 진상노인네인데 가해자로 온 건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아마 그동안 저 같은 미친 짓하는 공무원은 없었겠죠.

전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게 더 옳은 행동인지. 저런거 신경끄고 줘버렸다가 줄 서던 5명한테 욕먹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니까요.
저 책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ㅠ
처음과마지막
17/11/27 07:45
수정 아이콘
뺨만 맞아도 경찰신고하면 가해자가 벌금 300 만원인가봐요? 공무집행 방해라서 그런거겠죠?
그냥 길가다기 시비붙으면 그정도는 아니겠죠?
17/11/27 10:03
수정 아이콘
(수정됨) 아마 공무집행방해가 추가된걸로 압니다.
상해없이 가벼운 뺨한대로 나올수 있는 최대치가 거의 그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처음과마지막
17/11/27 15:30
수정 아이콘
어떤 경우든 정말 폭력쓰는 사람들은 다들 법대로 처벌받아서 폭력이 없어지는 사회가 되면좋겠습니다 삶을 뒤돌아보면 군대도 그런게 다없어지면 좋겠구요 제가 특히 폭력을 싫어해서요
카디르나
18/03/25 10:19
수정 아이콘
잘하셨네요. 속이 다 후련합니다. 아마 본문글 쓰신 분은 그냥 생수 줘버리고 신경 끄고 말았다가 아니라 아마 그렇게 옆에서 욕하는 노인에게 신경 자체를 꺼버렸다 인 것 같지만... 어쨌든 분명한 잘못을 하는 사람은 잘못만큼 처벌 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17/11/27 11:04
수정 아이콘
좋네요 책 한번 사서 읽을려고 합니다 / 좋은책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FreeSeason
18/03/06 16:54
수정 아이콘
좋은 글입니다.
노재욱
18/03/11 07:36
수정 아이콘
좋은 글이네요!
월간베스트
18/03/13 16:46
수정 아이콘
제가 신경 끄는걸 잘하는데 이거 자주 하다가 보니 중2 병이 되더라고요
Ryan_0410
18/03/20 22:0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18/03/24 18:09
수정 아이콘
ff
카디르나
18/03/25 10:19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멍뭉이
18/04/14 21:32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요 근래에 심적으로 신경쓰는 일들이 많아서 많이 힘들어 했었는데 탈출구 혹은 위안이 될 수 있는 책을 찾은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18/04/21 05:50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18/05/03 15:24
수정 아이콘
잘봤습니다~ 좋은 글이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2933 세상의 끝, 남극으로 떠나는 여정.01 [데이터 주의] [41] 로각좁9158 18/01/31 9158
2932 [알아둬도 쓸데없는 언어학 지식] 왜 미스터 '킴'이지? [43] 조이스틱11314 18/01/24 11314
2931 무쇠팬 vs 스테인레스팬 vs 코팅팬 [94] 육식매니아23587 18/01/22 23587
2930 역사를 보게 되는 내 자신의 관점 [38] 신불해15884 18/01/20 15884
2929 CPU 취약점 분석 - 멜트다운 [49] 나일레나일레14217 18/01/10 14217
2928 황금빛 내인생을 보다가 [14] 파란토마토10849 18/01/07 10849
2927 나는 왜 신파에도 불구하고 <1987>을 칭찬하는가? [76] 마스터충달10772 18/01/04 10772
2926 조기 축구회 포메이션 이야기 [93] 목화씨내놔17266 18/01/04 17266
2925 마지막 수업 [385] 쌀이없어요22703 17/12/18 22703
2924 삼국지 잊혀진 전쟁 - 하북 최강자전 [41] 신불해19384 17/12/15 19384
2923 [잡담] 피자 [29] 언뜻 유재석9653 17/12/14 9653
2922 군 장병은 왜 아픈가? [76] 여왕의심복12850 17/12/14 12850
2921 신경끄기의 기술 [27] 시드마이어32260 17/11/26 32260
2920 23박24일 전국일주여행 [38] 모모스201325465 17/11/21 25465
2919 인터넷에서 말도 안되는 역사 관련 헛소리가 퍼지는 흔한 광경 [36] 신불해36522 17/11/16 36522
2918 [공동 번역] 그 무엇도 총기 소유만큼 투표자를 갈라놓지 못했다. [26] OrBef18113 17/11/14 18113
2917 보고 계실거라 생각하는 당신들께. [238] Julia41050 17/11/13 41050
2916 [의학] 장기이식의 첫걸음 - 혈관문합술의 탄생 [32] 토니토니쵸파17605 17/11/08 17605
2915 좋은 질문 하는 방법 [17] 한아24982 17/11/06 24982
2914 32살에 시작해 33살에 킬리만자로 등반을 마친 수기 [데이터 주의] [61] 로각좁19432 17/11/03 19432
2913 '백전 노장' 한고조 유방 [62] 신불해20249 17/10/30 20249
2912 자주 있는 일, 자주 없는 일. [14] 헥스밤17176 17/10/19 17176
2911 천하명장 한신의 일생 최대의 성공, "정형전투" [25] 신불해19047 17/10/17 19047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