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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002/03/04 16:35:35 |
Name |
Apatheia |
Subject |
[허접꽁트] In the name of the Freedom |
-랜덤의 신성, 파죽의 7연승.
"......"
마우스와 키보드를 챙겨 연습실을 나서다가 문득 눈에 뜨인 신문 가판대의 기사. 나도 모르게 흐뭇해져 그만 실없는 미소를 흘리고 말았다. 랜덤의 신성이라. 이제 막 프로게이머 인증을 받은 신예로서 이만하면 꽤 좋은 성적이고 평가가 아닌가 하는 약간의 자만에 휩싸여, 나는 괜히 손에 들린 키보드 가방을 고쳐들며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나는 랜덤 유저다. 그것도 100% 올랜덤 유저다. 사실 그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나는 사람들의 가쉽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처음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지금의 매니저 형을 찾아갔을 때, 형은 그렇게 말했다. 그만하면 싹수는 있다고, 스피드도 괜찮고 센스도 있는 편이라고. 너한테는 길이 두 가지가 있다 라고 그는 말했었다. 프로게이머로서 제대로 뜨고 싶다면, 1년 동안 열리는 모든 대회를 그랜드 슬램할 만큼 한가지 종족을 죽어라 파던가, 그럴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올 랜덤을 하라고 말이다. 전자는 지금 당장은 뜨기 힘들지만 위험부담이 적고, 후자는 지금 당장 주목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겠지만 죽도 밥도 안될 수도 있으니 알아서 판단하라는 덧붙임과 함께. 말을 던져 놓고 피워 문 그의 담배가 채 반도 타 들어가기 전에 나는 대답했다. 랜덤이요. 그는 물었다. 왜? 멋있잖아요. 어이없다는 듯 한참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형은 피식 웃었었다. 좋아. 넌 랜덤이다.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당시의 난 처음 스타를 배웠던 테란에서 막 프로토스로 옮아가려는 중이었고 꽤 높은 적응도를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들어가게 된 연습실에는 걸출한 저그 유저가 두 명 정도 있었는데, 나는 그들의 빌드를 보며 나름대로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했다. 두어달 쯤 지나자, 나는 저그에서는 내노라 한다는 그 형들이 스파링 상대로 찾아다닐 정도의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저그전 연습은 형들과의 연습게임으로 충분했고, 밤과 새벽엔 베틀넷을 헤매며 테란과 프로토스를 갈고 닦았다.
물론 힘은 많이 들었다. 내 생각을 어렴풋이 눈치챈 형들은 랜덤은 힘들다고, 다른 종족 하나를 파는 것에 비해 세 배가 아닌 30배의 노력이 든다고 말하며 나를 염려해 주었다. 하지만 그 때도 내 대답은 똑같았다. 멋있잖아요.
"......"
늘 그렇지만, 이벤트성 방송 경기엔 긴장감이란 것이 잘 생기지 않는다. 오늘도 마찬가지... 아무리 내가 방어를 하는 입장이고 저편이 도전해 오는 것이라 상대가 빨리 결정되지 않는다는 특수성이 있기는 해도.
방송국 로비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 마시고, 때마침 걸려온 친구 녀석의 전화에 3분 정도를 할애한 나는 곧장 몸을 돌려 분장실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먼저 온 사람 하나가 이미 의자에 앉아 코디의 손에 얼굴을 맡기고 있다. 응, 왔니? 잠시 코디의 손이 멈춘 틈에, 누구인지 보려는 듯 앉아있던 사람의 고개가 이리로 돌려졌다.
"......"
PS_FreeBird. 이름보다 먼저 아이디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아이디와 마주 앉은 사람의 얼굴이 천천히 겹쳐지며, 그제야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청했다.
"아... 안녕하세요, 형."
"이제 오냐."
낮고 묵직한 목소리. 예...라는 대답을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는 분장실 한 켠에 있는 의자에 키보드 가방을 던지듯 내려다 놓고 털썩 주저앉았다.
"요즘 잘 나가더라...?"
"예? 헤헤... 그냥 좀 게임이 잘 돼요, 요새."
"그냥 잘 되는 정도가 아니던데? 엊그저께 그 천지 스톰은 인간적으로 멋졌다...
그런 스톰을 본 게 한 백만년쯤 전이던가...?"
"......
천지 스톰은... PS_FreeBird제 천지 스톰이 짱먹지 않던가요?"
"훗..."
그는 피식 웃었다. 표나게 비뚤어진 미소였다. 한때 절정의 랜덤으로 이름을 날리던, 그러나 지금은 온리 테란유저인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스톰? 그게 뭐였지?
스타에 그런 공격도 있었냐?"
방송은 이래서 싫다. 가끔 생각지도 못한 돼먹지 않은 이유로 녹화가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딜레이되는 것이다... 오늘은 중계를 맡은 캐스터가 길막힌 중간에 발이 묶여 한시간쯤 늦겠다고 전화가 왔다. 잔뜩 시간에 맞춰 방송국에 도착해 준비를 마친 우리는 그만 공중에 붕 떠버렸다.
"노느니 염불이다. 한 겜 달릴까?"
"좋죠."
우오오... 옆의 스텝들이 환성을 지른다.
"좋아. 방 잡는다. 조인해라."
"나 옵!"
"옵 안 키워요."
"에이.., 옵!"
"비전 다 켜줄려구?"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옆에서 옵을 졸라대는 스텝들을 위해 그는 세팅이 다 끝난 방송용 컴퓨터에서 옵맵을 골라 방을 만들고 있었다.
"야 기대만빵이다... 테란프터면 좋겠다."
"에이, 테란 프터 재미없어요... 테란저그가 재밌지."
"테테만 아니면 돼... 하나가 랜덤이라 테테는 잘 안나올 거야."
"....."
그러나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같이 웃을 수가 없었다. 그가 선택한 종족은 랜덤이었던 것이다.
-네, 가히 랜덤의 신성, 랜덤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선수죠... 아이디가 또 마침 ComeT/bgs/인데요, comet가 혜성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참 어울리는 아이디라고 볼...
"......"
아직 헤드셋을 끼지 않은 덕분에 캐스터의 목소리가 죄다 들렸다. 그러나 표정관리가 전혀 되지 않았다. 방금 전 연습게임에서 당한 천지 스톰의 충격이 너무나 컸던 탓이다.
"......"
asdklgnhdshgwns.
뜻없는 글자들을 난타해 가며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로스트 템플에서의 테란 대 프로토스 전. 상대는 요즘은 주종이라고 볼 수 없는 프로토스, 그나마 암울 그 자체라는 6시. 나는 스타를 시작했던, 그리고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는 종족 테란에 12시. 뭐 할 것이나 있겠나 생각했었다. 늘 하던 대로 원팩 더블, 입구 막고 탱크 벌쳐 뽑아 차근차근 밀어붙이면 그만이지 뭐...라고, 조금은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을까. 하이템플러 러쉬. 센터로 치고 나오는 질럿과 벌처가 툭닥대고 다투는 사이, 6시 앞마당에 내린 넥서스를 탱크가 포격하는 사이, 내 본진으로 날아든 셔틀 세 대와 그에 가득찬 하이템플러들. 순식간에 사이오닉 스톰을 한방씩들 갈기고는 재빨리 아칸을 소환하고... 본진이 공격받고 있다는 메시지에 놀라 화면을 전환했다가 보았던 그 천지 스톰의 잔영이 아직도 눈 속에 박혀있는 듯 하다. 그건 언젠가, 온리 테란을 꿈꾸었던 내가 프로토스를 시작하게끔 만들었던, 그래서 결국 지금의 랜덤 유저가 되게 만들었던 PS_FreeBird식의 천지 스톰이었다. 땅을 가르고 하늘을 뒤덮는, 눈이 시릴 만큼 푸르고 강렬한 폭풍.
-t?
그는 테란을 골랐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방금 그의 전혀 녹슬지 않은 프로토스 실력을 보아버린 터라, 조금쯤 황당해진 기분으로 나는 물었다.
-i'm terran user.
"......"
테란 유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순간 나는 고개를 디밀어 그가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go.
게임은 시작되었다.
게임은 다소 싱겁게 끝났다. 로스트 템플, 12시 프로토스 6시 테란. 위치는 아까와 그대로였고 종족만 바뀌었다. 나는 드라군 옵저버 테크를 선택했고 그는 본진 투팩을 선택했다. 졸전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썩 훌륭한 게임도 아니었다. 그냥 그저 그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게임. 20분 정도 지났을 때 그는 GG를 치고 먼저 게임을 나갔고, 이로서 나는 공식전 랜덤 8연승을 하게 되었다.
"......"
녹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11시가 조금 못된 늦은 시간이었다. 그와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망연히 어둠이 내린 길 위를 바라보았다.
"연습실 가냐?"
"네... 형은요?'
"나야 뭐."
그는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하긴, 지금의 그는 소속이 없다. 몇 달 전, 갑자기 랜덤에서 온리 테란으로 종족을 바꾸더니 곧 소속사와의 재계약도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랜덤을 포기하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예전에, 그가 지금의 나처럼 100% 올랜덤이던 시절엔, 그는 승률과 승패와 상관없는 당대 최고의 스타였다. 어떤 맵에서 누구를 만나도 항상 랜덤이라는... 테란으로 경기할 때는 극악의 탱크 벌쳐 컨트롤을 보여주었고 프로토스일 때는 전 맵을 뒤덮는 환상의 천지 스톰을 선보였으며, 저그를 잡았을 때는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히드라 럴커 웨이브를 구사했었다. 그는 비장하게 패배할 줄 알고 통쾌하게 승리할 줄 아는 랜덤이었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열광했고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랜덤=멋진 것이라는 등식은, 적어도 내겐 그로 인해 성립된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왜 그랬는지, 그는 테란으로 종족을 바꾸어버렸다. 승률은 조금 높아졌지만, 예전에 그에게 쏟아지던 찬사는 이제 대부분 거두어지거나 비난으로 바뀌었다.
한계에 부딪힌 걸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오늘 본 그의 프로토스는 전혀 녹슬지 않았었다. 오히려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어떤 기묘한 집요함까지 덧붙여진, 한번 말려들면 헤어나기 힘든 독특한 리듬마저 지니고 있었다. 저 정도라면 대회에서도 먹힐 텐데, 왜.
"형 우리 택시 잡아요... 반땅하죠."
"돈이 필요했어."
차 안에서, 요즘 왜 랜덤 안 하세요 라고 다짜고짜 물어보았다. 그는 짐짓 불편한 기색을 얼굴에 떠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좀 더 집요하게 매달렸다. 형 팬이었어요. 형 경기하는 걸 보고 랜덤 하겠다고 결심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왜...
"폼이 밥 먹여주는 게 아니더라... 살다보니까 말이야."
"......"
조금은 멍해지는 나를 바라보며 그는 설핏 웃었다.
"내 팬이었다니까 묻겠는데, 내가 예전에 랜덤할 때, 대회 우승 몇 번이나 했는지 알고 있냐?"
"......"
"한 번도 없었어... 준우승 두 번에 4강 몇 번이 고작이었지."
"......"
그랬던가. 나는 짐짓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아, 그랬던 것 같다. 물론 그 결승전 경기들은 모두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명승부이긴 했지만, 어쨌든 결과는 그의 패배였고 그는 준우승에 머물러야 했었다. 다만, 그 대회들 모두 우승자보다 '랜덤'으로 그런 선전을 펼친 그에게 더욱 시선이 집중되었기에 그의 패배가 묻혀버렸을 따름이었지만.
"랜덤이라... 멋있지. 아쉬리고에서 저그를 만나도, 라그나로크에서 테란을 만나도 랜덤이라. 멋있긴 멋있어.
그렇지만 말이지."
"......"
"난 그 때, 멋있는 걸 따질 형편이 아니었어.
동생 녀석이 다 죽어가고 있었거든."
"네?"
"......"
피식. 그는 웃으며 차창에 이마를 기댄 채 말을 이었다.
"동생 녀석이... 훗. 지금은 병명도 잊어버렸지만, 아무튼 하루에만 치료비가 몇십만원씩 깨지는 그런 병에 걸렸었지.
집 사는 건 빤하고 애는 얼굴 하얗게 질려서 죽어가고... 간만에 집에 좀 쉬러 왔다가 그 녀석 치료비 때문에 부모님이 살람살이 때려부셔가면서 싸우는 걸 보고, 새벽 3시 반에 집 뛰쳐나와 연습실로 돌아가면서 그렇게 결심했었지. 돈 벌어야 되겠다고."
"......"
"테란으로 바꿔서, 천만원짜리 대회 하나랑 5백짜리 대회 하나를 먹었어.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냐? 오늘은 게임이 좀 말려서 졌지만 뭐. 인기가 밥먹여 주는 건 아니니까. 프로는 잘 이기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테란이든 랜덤이든, 아무튼 간에."
"......"
그의 마지막 말은 조금쯤 흔들리고 있었다.
"동생은... 어떻게 됐나요?'
"......
죽었어. 한달 전에.
그 녀석은... 끝까지 내가 저 때문에 랜덤 버린 건 몰랐어... 알았으면 엄청나게 화냈을 거야. 내가 랜덤인 걸 되게 좋아했었거든... 멋있다고."
"......"
"김 빼는 소리 같아서 미안하지만, 랜덤이란 거 멋있어 보인다는 것만으로 할 수 있는 거 아냐. 너도 계속 랜덤하고 싶다면, 마음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거다."
연습실로 돌아와 배틀넷에 접속했다. 친구리스트를 억지로 정리해 빈 칸 하나를 만들고 그의 아이디를 등록했다. 지금 접속해 있다.
-하이요 형. 잘 들어가셨어요?
-어, 넌?
-저두 잘 들어왔어요.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귓말. 일단 나중에 얘기하자고 그네들을 잠시 물려두고, 다시 그에게 귓말을 보낸다.
-늦었다고 혼났어요 --;
--_-;
그러고 보니 그의 아이디는 FreeBird... 자유로운 새 라는 뜻일까. 종족도 맵도 어느 것도 구애받지 않았던, 예전의 그의 플레이에 정말로 어울리는 아이디인 것 같다.
새는 새장에 갇혀버렸다. 새장에 갇혀버린 새는, 사람의 손과 모이에 길들여진 채 풀어준다고 해도 날지 못하는 수도 있다고 한다. 그는 어떨까. 오늘 내가 만났던 그 새는 어떨까. 풀어준다면, 지금이라도 날 수 있을까.
-한 겜 해요.
-뭐?
-분해서 안되겠음... 랜덤전. -_-vV
--_-;
-방만들 테니까 조인해여... 복/수
--_-;
-먼저 감돠 --v
따라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그를 남겨둔 채 게임을 만들고 그를 기다렸다. 몇 초쯤 지났을까, 그의 아이디가 따라 들어온다.
-hi yo ^^/
--_-;
-random. k?
-k -_-;
-k
go?
-go.
and... mal gga im ma -_-;
...-_-;
걍 심심해서 써봤음다... 제 4의 종족 랜덤편.
-Apatheia, the Stable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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